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사제 양성의 못자리 용산 신학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21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사제 양성의 못자리 용산 신학교

 

 

2013년 9월 2일 서울대교구는 ‘성지 순례길’을 선포하였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알리고, 천주교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서울대교구 내의 성지를 잇는 순례길을 조성한 것이다. 성지 순례길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를 주제 성구로, 1코스 ‘말씀의 길’, 2코스 ‘생명의 길’, 3코스 ‘일치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성지 순례길이 조성된 만큼 성지의 역사와 가치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일치의 길’ 순례 장소 가운데 하나인 용산 신학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원래는 ‘말씀의 길’의 첫 번째 순례 장소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을 소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톨릭대학교의 뿌리가 용산 신학교에 있기 때문에 그에 앞서 용산 신학교부터 다루는 것이 순서인 듯싶었다.


예수성심신학교의 설립과 용산 이전(移轉)

흔히 ‘용산 신학교’라 하지만, 교명을 정확히 말하면 ‘예수성심신학교’였다.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된 것은 1885년의 일이었다. 조선대목구장 블랑(G.-M.-J. Blanc, 1844-1890) 주교는 그 이전부터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불안한 상태와 부족한 인원’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신학생을 양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그런데 몇몇 신학생들은 언어와 기후, 적응 등의 문제로 인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는 사례가 생겼다. 이에 블랑 주교는 더 이상 신학교 설립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 1리)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이하 ‘부엉골 신학교’)였다. 초창기 신학생은 7명으로, 페낭에서 귀국한 4명과 개교 후에 선발한 신입생 3명이었다.1)

그런데 부엉골 신학교는 기대와는 달리 더딘 발전을 보였다. 원래 부엉골은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궁벽한 산골이었다. 이처럼 외진 곳에 신학교를 세운 이유는 박해의 위험 때문이었다. 산골인 데다가 시설도 그리 좋지 못해서 인지 신학생들이 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교의 이전을 모색했는데, 그가 선택한 곳은 서울 한양도성 밖 10리 거리에 있는 용산 함벽정(涵碧亭) 일대의 땅이었다.2)

함벽정은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변에 서 있던 누정(樓亭)이었다. 예부터 용산은 산수가 아름답고 풍경이 뛰어나 수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이곳에 정자와 별장을 지었다.3) 함벽정에서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순교 터인 새남터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1890년 블랑 주교는 새남터를 매입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밖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자를 탄생시킨 당고개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4)

신학교 이전을 결정한 블랑 주교는 명도회장 김 가밀로에게 신학교 부지를 물색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연벽정 일대의 땅을 발견하고는 최 시몬의 명의를 빌려 6,470평의 대지와 그 안에 있던 조선 가옥을 매입하였다. 블랑 주교는 기본적인 정지(整地)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고, 훗날 신학교 교사(校舍)의 아래 마당 좌측이 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기와집을 용산을 첫 교사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1887년 3월까지 신학교 이전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예수성심신학교의 부엉골 시기는 끝을 맺었고, 용산 신학교 시기가 시작되었다.5)


교사(校舍)와 성당 건축

신학교의 용산 이전 이후, 기대한 바와 같이 신학생 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그런 만큼 고민도 커져갔는데, 교사의 확충이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리우빌 신부와 마라발 신부가 지도하는 우리 신학교는 만족스럽게 운영됩니다.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 20명은 모두 건강이 좋고 정신이 훌륭하며 눈에 띄게 진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심한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은 건물의 부족입니다. 불편하고 또 끊임없이 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드는 조선 가옥에 자리 잡은 이 신학교는, 서양식 건축물을 마련해 주지 않는 한 항상 미결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1889년도 보고서’, “조선교구 연보” (I), 84쪽).

블랑 주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 주임 코스트(E.J.G. Coste, 1842-1896) 신부에게 신학교 건물의 설계를 맡겼다. 잘 알려졌듯이, 코스트 신부는 교회 건축물에 조예가 깊어 중림동 성당, 명동 성당 등의 설계와 감독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6) 그러나 블랑 주교는 1890년 2월 21일에 선종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신학교 건물의 신축 계획은 후임 교구장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7)

블랑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대목구장이 된 뮈텔(G.-C.-M. Mutel, 1854-1933) 주교는 신학교 건물 신축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는 1891년 4월 7일 회의에서 신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신학교 건물의 신축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5월 6일 서울의 모든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정초식을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 후 1년여의 공사 끝에 ‘ㄷ’자 형태의 2층 서양식 건물을 완공하고 1892년 6월 25일에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새 건물이 신축되면서 이전의 한옥 기와집은 창고, 세면장 등으로, 일부는 약방으로 이용되었다.8)

신학교 건물이 완공된 후, 2층의 가장 넓은 교실을 부속 성당으로 하여 매일 미사와 신학생들의 기도 및 묵상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학생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공간이 비좁아져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하였고, 신학교의 필수 시설인 부속 성당을 독립된 건물로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용산 신학교 당국은 성당 건축에 착수하였다. 1899년 6월 9일에 정초식을 가졌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성당이 완공되자 1902년 4월 14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9)

성당의 건축에는 은인들의 도움이 컸다. 뮈텔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낸 1901년 보고서에서 “이 성당은 우리 선교사들에게 최대의 공경을 그리고자 하는 신심 두터운 너그러운 사람이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10) 은인 중에는 ‘드 라 샬’(de la Salle)이라고만 알려진 프랑스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1898년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신학교 성당으로 안치하는 조건으로 기부금을 내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11) 그녀의 소원에 따라 성당 완공 전인 1901년 10월 17일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성당 지하에 안치하였다.12)

우리는 흔히 이 성당을 ‘용산 신학교 성당’, 또는 ‘원효로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예수성심 성당’이다. 성당은 기존의 신학교 건물 뒤편 위쪽으로, 새남터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출입구 안쪽 상부에는 성당의 건축 기간(1899-1902)과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이름 머리글자(AK) 및 생몰 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교사와 성당이 신축됨에 따라 제대로 된 신학교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하지만 신학생의 수가 증가하면서 교사를 추가적으로 신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1년에 신입생들이 들어와 총 학생 수가 41명에서 96명으로 많이 늘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신학교 당국은 서양식 벽돌 건물을 세우고 1911년 12월 5일에 새 건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부터 기존의 건물은 라틴어과 학생들의 교사(소신학교)로, 새 건물은 철학 · 신학과 학생들의 교사(대신학교)로 이용되었다.13)

그리고 1914년에도 신학교 교사의 신축이 추진되었다. 그해 여름부터 소신학교 건물의 왼쪽 공터에 3층 건물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물이 완공되자, 1914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506-1552, 가톨릭 선교 활동의 수호성인)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14)

후에 용산 신학교 건물과 예수성심 성당은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11월 22일에 ‘용산 신학교와 원효로 성당’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문화재청은 문화재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고려하여 2012년 6월 20일에 이를 지정 해제하고, 같은 날짜로 용산 신학교는 사적 제520호, 원효로 예수성심 성당은 사적 제521호로 재지정하였다.


대 · 소신학교의 분리

1920년대 들어 용산 신학교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대 · 소신학교의 분리였다. 분리가 있기 전, 용산 신학교는 대 · 소신학교가 같은 교정에서, 같은 교장 신부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소신학교에서는 라틴어, 초 · 중등 수준의 교육이, 대신학교에서는 신학, 철학 교육이 각각 실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신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던 중등 수준의 교육이 일반 학교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소신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공인된 졸업 증서를 줄 수도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교 당국은 교구와 협의하였고, 그 결과 대 · 소신학교를 분리하고, 소신학생들을 일반 학교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15)

1928년 말, 신학교 당국은 대 · 소신학교를 분리하고, 대신학교를 그대로 용산에 두고, 소신학교를 남대문상업학교16)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즉 상업학교를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나누어,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로, 을조는 소신학교로 운영하기로 하면서 을조 학생들에게는 대신학교로의 진학을 위한 신학 교육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929년에는 대 · 소신학교가 완전히 분리되었고, 용산 신학교에는 대신학교만 남게 되었다.17)


일제 말기 용산 신학교의 수난

일제 말기 용산 신학교는 수난을 겪었다. 1942년 2월 16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한국의 모든 무허가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면서 용산 신학교도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이므로 즉각 폐교시킨다는 내용의 통고문을 서울대목구장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주교에게 보냈다. 신학교 당국은 일제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신학교의 특성에 맞게 자유롭게 교육을 하기 위해 그동안 정식 인가를 받지 않고 있었다. 학무국은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해 주다가 1942년 2월에 전격적으로 폐쇄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이러한 총독부의 조치는 한국인 노기남 신부가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된 것에 대해 강한 견제와 압박을 가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18)

이에 노기남 주교는 신부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일단 이미 인간을 받은 혜화동의 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 을조)와 대신학교를 통합하는 방안을 세우고 이를 학무국에 보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논의한 끝에 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에 전학시키고 용산 신학교 건물에 성모병원의 분원(分院)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신학생들은 덕원 신학교19)로 떠났고, 용산 신학교 건물은 1943년 봄부터 성모병원장 박병래(요셉, 1903-1974)의 지휘 아래 개조 작업이 진행되었다. 1944년 4월 29일에는 성모병원의 분원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기존의 1층 강의실은 병실로 개조되었고, 2층은 신부들의 숙소로 만들어져 전(前)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 전 용산 신학교 교장 시잘레(P. Chizallet, 1882-1970) 신부 등 선교사들이 사용하였다.20)

이처럼 서울대목구는 일제의 신학교 폐쇄에 대응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동성상업학교 을조, 즉 소신학교 졸업생들이 계속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덕원 신학교도 이미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신학교 졸업생들을 덕원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목구는 서둘러 대신학교의 인가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45년 2월 23일, 전문학교령에 따라 대신학교의 인가를 받았고, 5월 1일에 개교식을 개최하였다. 혜화동에 문을 연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경성 천주공교신학교’였고, 중등 및 고등 교육 과정을 갖춘 학교였다.21)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1945년 6월, 총독부는 노기남 주교에게 용산 신학교 건물과 혜화동의 신학교 건물을 징발하겠다고 통보했다.22) 당시 총독부는 교회 건물과 각종 시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수 시설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컨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용산 보육원이 일본군의 기지로 징발되었고,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도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되었다.23) 이처럼 총독부의 압력이 있었지만, 얼마 뒤 일제가 패망하였기 때문에 다행히 신학교 건물은 징발되지 않았다.


여성 교육의 요람으로

1945년경, 노기남 주교는 옛 용산 신학교 건물에 거처하고 있던 라리보 주교와 협의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소유의 혜화동 부지와 서울대목구 소유의 옛 용산 신학교 부지를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 1947년에 성신대학 출범 당시에 소신학교가 성신대학 부속 중학교(성신중학교)로 개편 · 분리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양해를 얻어 옛 용산 신학교를 성신중학교의 교정으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소신학생들은 옛 용산 신학교에서 사제의 꿈을 키워나갔다.24)

그 후, 옛 용산 신학교는 성심수녀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성심수녀회는 청소년 교육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전파할 목적으로 설립된 수녀회로,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56년이었다. 노기남 주교는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여러 교육 수도회와 접촉하여 한국에 교육 기관을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주한 교황 사절인 퀸란(T. Quinlan, 1896-1970) 주교도 여러 수도회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호응한 곳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심수녀회였다. 1956년 봄, 성심수녀회의 일본관구장 기요(Keogh) 수녀 등은 한국을 방문하여 노기남 주교와 만났다. 기요 수녀 일행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인 무세(G. Mousset, 1876-1957) 주교도 만났는데, 주교로부터 옛 용산 신학교 건물과 부지를 팔게 될 때 성심수녀회에 우선권을 준다는 약속을 받고 건물을 빌렸다.25)

한국 정착을 결정한 성심수녀회는 1956년 10월에 수녀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수녀들은 옛 용산 신학교 건물에 본원을 마련하는 한편,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57년 4월 8일에는 성심여자중학교 개교식 및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수녀회는 1957년 6월, 임시로 빌려 쓰고 있던 옛 용산 신학교 건물과 부지를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매입하였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옛 용산 신학교 건물과 ‘예수성심 성당’은 성심수녀회와 성심여중 ·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다.26)

 

---------------------------------

1)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이하 “150년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117-128쪽.
2) “150년사”, 124-128쪽.
3)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239-241쪽, 306-312쪽. 함벽정 뒤편 언덕에는 삼호정(三湖亭)이 있었다. 삼호정은 조선 후기 여류 시인들이 모여 시를 읊곤 했던 장소로 유명했다. 훗날 삼호정 일대 부지는 천주교회에 의해 매입되어 성직자 묘지(용산 성직자 묘지)로 조성되었다.
4) “150년사”, 128-130쪽.
5) “150년사”, 128-130쪽.
6) 김정신, ‘코스트’, “한국가톨릭대사전” 1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8475-8476쪽.
7) “150년사”, 143-144쪽.
8) “150년사”, 143-145쪽.
9) “150년사”, 160-161쪽.
1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1901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 천주교 명동교회, 1984, 296쪽.
11) ‘1898년 6월 17일’,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288-289쪽.
12) ‘1901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 296쪽; ‘1901년 10월 17일’, “뮈텔 주교 일기” 3, 2008, 86쪽.
13) “150년사”, 165쪽.
14) ‘룡산 신품학교 내에 새 교실 강복식’, “경향잡지” 315호(1914년. 12. 15); “150년사”, 166쪽.
15) “150년사”, 171-173쪽.
16) 1922년에 서울대목구는 봉래동(현재의 만리동)에 있는 소의상업학교를 인수하고, 학교 명칭을 ‘남대문상업학교’라 바꾸었다. 1929년에는 학교를 혜화동으로 이전하였고, 1931년에는 교명을 ‘동성상업학교’로 바꾸었다(편찬실, ‘동성중고등학교’, “한국가톨릭대사전” 3, 1896-1898쪽).
17) “150년사”, 173-176쪽.
18) “150년사”, 182-184쪽.
19) 원산대목구 신학교였던 덕원 신학교는 1935년 2월 10일에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으므로, 용산 신학교와는 달리 폐쇄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1938년 9월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신학교 건물을 재건축하면서 공간을 늘렸기 때문에 서울대목구의 요청에 따라 신학생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요한네스 마르 지음, 왜관수도원 옮겨 엮음, “분도통사”, 2009, 508-517쪽, 1796쪽.
20) “150년사”, 185-193쪽.
21) “150년사”, 185-191쪽.
22) “150년사”, 192쪽.
23) 김진소,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936쪽.
24) “150년사”, 192-203쪽.
25) “성심 50년”, 성심여자고등학교, 2008, 220-221쪽.
26) “성심 50년”, 221-223쪽.

[교회와 역사, 2013년 12월호, 양인성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파일첨부

2,0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