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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기행: 베네딕도회의 요람 수비아코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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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292

[유럽 수도원 기행] 베네딕도회의 요람 수비아코 수도원

 

 

로마 유학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오죽하면 베네딕도 성인께서도 로마 유학생 신분을 집어던지고 로마 동쪽의 산골 마을 수비아코로 들어가 은수자가 되었겠는가? 나도 로마에 유학 온 지 5년을 넘기고 6년차에 접어들던 작년 봄, 그 옛날 베네딕도 성인 비슷한 심정을 느꼈다. 로마든 공부든 좀 떠나서 며칠간이라도 홀로 조용히 있고 싶었다. 꼭 베네딕도 성인을 모방하려 한 건 아니었지만, 문득 수비아코 수도원에서 성주간을 지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유명한 성지라 이 기간에 머물 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신청 메일을 보냈는데, 이틀 뒤에 ‘베네Bene!’ 하고 아주 짤막한 답장 메일이 왔다. ‘좋다!’라는 뜻이다. ‘베네’라? 그러면 나는 ‘딕도!’하고 응답해야 하는가? 베네딕도 성인을 독살하려했던 비코바로Vicovaro 수도원으로 피정 가는 것도 아닌데, 왠지 살짝 긴장이 되었다.

 

2009년 4월 6일 월요일 새벽 3시 32분, 수비아코로 떠나기 하루 전날,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119킬로미터 떨어진 라퀼라L'Aquila라는 도시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깔려 죽는 큰 지진이 발생했다. 그날 밤 로마에서도 진동이 느껴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블라시오 신부가 나보고 “잘 때 지진 못 느꼈어요?” 하고 묻기에, 난 그때서야 밤새 지진이 있은 줄 알았다. 침대가 흔들리고 책꽂이에서 책도 떨어지고 해서 블라시오 신부는 무서워서 잠이 안 왔다고 하기에, “정말 큰 지진 나면 나는 지진 난 줄도 모르고 그냥 자다가 죽을 수도 있겠어요, 나도 지진이 어떤 건지 조금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하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되었다. 지진이 발생한 다음날 저녁, 수비아코 수도원에 도착해서 저녁기도 시간이 되어 성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정말 지진이란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기도석에 앉아 수사님들과 같이 시편을 노래하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 위로 바람이 ‘슈우우웅’ 하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지붕 창문이 열려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순간 앉아 있던 의자가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성당 천장을 당당하게 바치고 내 옆에 서 있던 대리석 기둥이 그 순간 거대한 흉기로 보였다. 삼손이 신전에서 기둥을 밀어뜨려 사람들이 모두 깔려 죽었다는 성경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다. ‘수비아코에 괜히 왔어, 어떡하지?’ 기도고 뭐고 당장 뛰쳐나가야 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면서 건너편 기도석을 쳐다보니, 수사 한 명도 기도책을 접었다 폈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반복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성당이 울렁거리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태세였다. 기도하다가 죽으면 혹시 천국으로 직행할지도 모르니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며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어 기도석에 계신 수사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빠스석 양 옆으로 줄지어 앉아 계신 노인 수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베네딕도 성인께서 지켜주시니 이 성당은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듯, 지진이 나거나 말거나 그냥 계속 저녁기도 시편을 노래하고 계셨다. 나도 저렇게 신심 깊고 의연한 모습으로 공동기도석에서 늙어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순간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수비아코 수도원은 이름 그대로 수비아코 연합회에 속한 아빠스좌 수도원이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동굴에서 3년간 은수 생활을 하신 다음 비코바로 수도원에 가셨다가 다시 수비아코로 돌아오셔서 그 주변에 12개의 공동체를 세우셨는데, 세월 속에 다 사라지고 딱 하나 남은 것이 지금의 ‘성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성인께서 지내셨던 동굴 아래로 십여 분 쯤 걸어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굴은 성인께서 떠나신 뒤로도 오백 년 넘도록 버려져 있었는데, 1090년에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의 팔롬보Palombo라는 수사가 아빠스로부터 이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얻은 뒤로 수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1193년부터는 12명이 사는 정식 공동체가 되었다. 그 무렵 교회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재임 1198-1216)의 지원을 받으며 이 ‘거룩한 동굴’(Sacro Speco 사크로 스페코) 공동체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점차 발전해간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로마 라테란 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을 만나신 날 밤 꿈에 무너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운 이가 낮에 본 프란치스코 성인임을 아시고는 ‘작은 형제회’의 회칙을 인준해주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교황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을까?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 거룩한 동굴을 방문하셨다. 지금 수비아코 동굴 성당에 가보면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수비아코 경당 축복식에 참석하여 복사를 서는 그림도 있고 아예 따로 전신상이 그려진 벽화도 있다. 자세히 보면 후광도 없고 오상도 없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인께서 오상을 받기 전의 생전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기서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의 수사들이 늘 몇 명씩 머물며 공동체 생활을 해오는 동안, 거룩한 동굴은 수많은 성인, 교황, 신자들이 찾아오는 성지 중의 성지가 되었다. 한편 현재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의 전체 수도자 수가 스무 명인데, 그중 다섯 명이 거룩한 동굴 성지에서 생활하며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 가운데 한 명이 한국 사람이다.

 

수비아코의 김명석 마티아 수사. 그를 만난 건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가 들려준 많은 이야기 덕분에, 베네딕도 성인이 동굴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상상 정도에 머물러 있던 내 사전지식이 수비아코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두루 통찰할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마티아 수사의 안내로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경내 구석구석은 물론이요 지하에 있는 옛 성당터도 구경하고, 시대별로 층층이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진 종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았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니, 베네딕도 성인이 로마노 수도승으로부터 수도복을 받아 입었다고 전해지는 장소하며 수비아코 계곡 전경도 한 눈에 다 보였다. 본원에서 나와 거룩한 동굴로 함께 걸어 올라가며, 이 길에 얽힌 수도원 뒷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지금은 거룩한 동굴 입구까지 관광버스가 올라갈 수 있게 도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지팡이 짚고 올라가는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길이 험해서인지 그때는 지금처럼 순례객들이 많지 않았고 성지도 고요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수사님들이 많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서 포장도로를 만들었을까? 몇 십 년 전, 그곳의 목소리 큰 원장 수사가 공동체 다수의 뜻을 꺾고 순례객들과 공동체의 편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오솔길을 밀어버리고 아스팔트를 깔았다는 말을 마티아 수사로부터 들었다. 나야 솔직히 길이 넓고 시원시원해서 좋았지만, 천년을 넘게 내려왔고 앞으로도 천년을 넘게 보존될 성지의 운명이 백 년도 못사는 한 개인의 밀어붙이기식 독재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 좀 찝찝하게 느껴졌다. 졸속으로 억지로 처리한 일은 결국 공동체 안에 화근이 되어 두고두고 형제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된 거룩한 동굴 성당을 모두 둘러보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마티아 수사와 함께 걸어내려 왔다. 길 중턱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의 지붕과 종탑이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로 시선을 드니 수비아코 시가지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수도원 본원에 도착해서 다시 더 아래 계곡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는 정말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인지 우거진 숲 사이로 좔좔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들렸다. 시냇가로 곧바로 내려가는 산길 입구에 ‘베네딕도의 연못’이라는 작은 푯말이 눈에 띄었다. 마티아 수사에게 물어보니, 이 계곡 좀 아래쪽에 로마시대 때부터 인공호수가 있었는데 여기서부터 물을 수도관에 실어 로마로 보냈다고 한다. 마을은 그 호수보다 더 아래쪽에 있었다. 호수 아래 마을이라고 해서 아래라는 뜻의 ‘숩sub’과 물이라는 뜻의 ‘아쿠아aqua’라는 말이 결합되어 ‘수비아코Subiaco’라고 부르게 되었다. 베네딕도의 연못은 아담했고 물은 푸른 빛이 돌았다. 조그마한 연못이라 베네딕도의 전기에 나오는 플라치도처럼 물에 빠져죽을 뻔할 일은 없겠지만 물에 빠진 낫을 건지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마오로와 플라치도가 매일 물 길으러 왔을 이 시냇가에 서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좔좔좔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점차 졸졸졸 하고 잦아들더니 옅은 산들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으며 지나갔다. 그때 불현듯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너, 무엇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느냐?”

 

수비아코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느꼈다. 한때 바위 같은 줄 착각했던 의지도 유혹과 싸우는 동안 쪼개지고 부서져 박살이 나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지냈다는 것을. 사랑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 없어 그토록 열을 내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다고 생각했는데, 입 다물고 몇 년을 산 지금 돌아보니 그 바탕에 교만과 허영과 분노가 교묘히 복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부활절 다음날 수도원을 떠나왔다. 지난번에 ‘베네!’하고 메일 보내주었던 수사가 수도원 차로 수비아코 시내 직행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수비아코 시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들어섰다. 표지판에 큼직하게 로마는 직진, 라퀼라는 우회전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진 지역 근처까지 왔다가 직접 지진까지 체험하고 살아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태리 남부 노치Noci 수도원에서 성주간을 지낸 블라시오 신부가 로마로 돌아오면 들려줄 얘기가 많아졌다. 맥주 한 캔으로 꼼짝 못하게 해놓고 나의 수비아코 무용담을 두 시간 연강으로 들려줄 생각을 하니 엔돌핀이 솟았다. 내 모습 내가 못 보고 또 무엇하러 수도원에 들어왔는지도 자주 희미해지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공동체에는 그런 나를 참고 웃으며 받아줄 수 있는 형제들이 많으므로, 오래 살다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될 날도 올 수 있겠지. 수비아코에서 안 죽고 살아 나온 것만 해도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축복받은 사람’, 곧 ‘베네딕도Benedictus’가 되라고 수비아코를 다녀오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알 수가 없지만 오묘하기만 하다.

 

[분도, 2010년 여름호, 글 · 사진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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