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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사제의 해에 찾은 사제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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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539

[경향 돋보기 -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사제의 해에 찾은 사제의 자리

 

 

가톨릭 성가 300번 “사제의 맘은 예수 맘….”은 내가 아주 좋아 하는 노래이지만 때로는 기를 꺾는 노래가 되기도 한다. 영명축일 때나 사제수품 기념일에 혼자 주인공이 되어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다. ‘목자적 돌봄, 고통과 번민의 주인공,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사제직을 찬미하는 노래 가사와 나의 사제생활이 일치하지 못하는 반성 때문일 것이다.

 

 

사제의 해를 돌아보니

 

“사제 직무의 효력이 달려있는 영적 완덕을 향한 사제들의 이러한 노력을 북돋우고자”(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연설문 중) 전 세계 본당사제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천상 탄일’ 150주년을 기념하며 시작된 ‘사제의 해’가 어느덧 마감의 시간이 되었다. ‘사제의 해’가 끝난다고 해서 사제의 해에 두었던 목표나 관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해 동안 사제직에 대한 성찰과 쇄신을 위한 노력이 아주 돋보인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모든 교회 구성원이 사제를 위해 기도했고 각 지역교회는 사제들의 영적 완숙을 위해 여러 시도를 했던 은총의 기간이었다. 그래서 우리 사제들에게는 더없이 귀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제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사제의 해에 맞은 안식년

 

‘사제의 해’가 시작된 지 몇 달 뒤 나는 기다려온 안식년을 받았다. 그렇지만 본당을 겸하여 두 개의 복지시설의 책임을 맡아왔던 내게 ‘시설장’ 직은 유지하면서 시간을 가지라는 조건부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반식년’이라는 신생 용어를 사용하며 이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본당신부의 직함과 의무를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모처럼 홀가분한 느낌이다. 일정 구역을 맡아 신자들을 돌보아야 할 사목자의 임무가 이처럼 긴장 덩어리였는지 새삼스럽다. 성무집행 이외에 어려움에 있는 교우들, 쉬는 교우들, 소외된 이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감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인데 지금은 잠시 여유를 부린다. 한편 내게 맡겨진 지적 장애우들과 어르신들을 더욱 가까이 모시며 생활할 수 있는 행운을 찾았다.

 

 

새로운 사제상을 찾아

 

나는 그래도 안식년의 명분을 살려 몇 군데 해외여행을 하며 다른 나라 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 3주 동안 혼자 이스라엘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안식년과 맞물린 ‘사제의 해’를 맞는 시간이기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쫓아 나름대로의 ‘사제상’을 찾고 싶었다.

 

30년 가까이 사제로 살아오면서 사제직의 위대함과 나의 빈약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자주 만났다. 그동안 사제생활에 대한 반성과 재충전이 필요했고, 앞으로의 사제생활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준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혼자서 침묵과 고독 그리고 다소 불편한 차림으로 성지를 밟은 것이다. 영원한 목자이시며 사제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뒤를 따르려는 의지를 주시기를 청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예루살렘은 화려한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니려니와 예수님의 발자취마저 잘 보존된 곳은 아니다. 단체 순례객으로 잠시 스쳐간 사람이라면 거룩하고 존귀한 이미지만을 간직할 수 있겠지만, 시간적 여유를 갖고 구석구석을 살펴본 순례자라면 성지에 대한 감탄보다는 혼란스런 심경을 맞을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실망과 한탄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종교적 상황은 물론 인종적 문제 등 모순과 갈등을 체험하는 곳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거룩함과 거룩한 땅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보러 무엇을 찾으러 왔던가. 주님은 이곳에서 업적이나 명성을 빛내신 분이 결코 아니다. 이곳에 주님이 머무셨던 아름답거나 아늑한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시고 피 흘리며 기도하시고 매 맞고 죽으시고 묻히신 장소들로 즐비할 뿐이다. 지금도 예루살렘 구석구석에서는 찢겨진 예수님의 슬픔과 아픔이 배어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 사제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선택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아직도 우시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으로, 무덤에 묻힌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무덤성당에서 새벽 미사를 봉헌하며, 십자가의 길을 연거푸 걸으며, 겟세마니 성당에 주저앉아 기도하면서 주님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제직에 대한 잘못된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따라갈 의지를 달라고…. 어느 날 새벽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주님의 음성과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내 양들을 돌보라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곧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당신의 모습과 같은 목자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사제직에 대한 존경의 표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직의 위대함에 세뇌(?)된 사람이다. 중학교인 소신학교에 합격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순교자의 직계손이기도 하신 할머니가 아랫목을 내어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신부 될 사람이라고 자리를 비켜주신 것이다. 사제직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나는 사제가 되고 싶었고 되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사제상은 신자들 앞에 우뚝 선 거인 같은 모습이었다.

 

사제품을 받고 성무를 집행하며, 사제직에 오른 것만은 틀림없으되 사제가 되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주님을 꼭 닮은 사제, 예수님 맘을 지닌 사제를 생각하는데 살면 살수록 그런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고백하고 만다. 여름철 크고 잘 생긴 수박을 쪼개고 보니 속이 설익은 모습이라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

 

안식년의 순례를 통해 나의 사제상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 주어진 현재 안에서 주님의 소명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13년의 감옥살이 중에도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사제로서의 일을 찾아 희망을 간직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았던 베트남의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책 안에서 닮고 싶은 사제상을 찾은 것이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사제의 삶도 ‘현재에 머물기’였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기’와 ‘교우들 안에 머물기’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최선을 다한 것이리라.

 

나 역시 ‘이곳’이 내가 사제로 머물러야 할 곳이며, 사제로서 향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지금’ 시간이라 믿는다. 장애인과 노인들과 함께 장구와 각종 악기를 치며 드리는 신나는 미사, 되지도 않는 동작을 잘한다 하며 함께하는 배드민턴 게임, 말은 못해도 표정으로 알아듣는 이들과의 산책, 그리고 몸을 쉽게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 - 이런 작은 것들이 결코 작지 않은 나의 사제직이라 생각한다. 작은 것 안에서 큰 것을 알아내고 그 의미를 선포하는 것이 사제생활이라고 정리해 본다.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남는 아쉬움

 

‘사제의 해’가 끝나간다. 사제의 해가 선포된다고 할 때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사제의 해를 정해야 할 배경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사제의 해가 꼭 필요했고, 또한 사제직의 고귀함과 은총을 새롭게 조명해야 할 중요한 시기였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사제의 해’ 기간 동안 사제들의 연약성을 폭로하고 인정하는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은총이 넘친다더니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은총이 크기에 죄악의 형태도 더 볼썽사납게 드러나는지 모른다.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아쉬움도 꽤나 많다. 지금 시대에 사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아주 크고 많다. 또 많은 이들은 교회의 문제가 곧 사제들의 문제라고 말한다. 거부할 수 없는 책임론에 사제들은 당황한다. 어느 사제라도 사제답게 살고 싶을 것이다. 사제는 교회 안에서 보호받고 성장한다. 사제들을 잘 가꾸어줄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바로 사제 사목, 사목자를 사목해 줄 틀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제의 성숙은 영성의 성장

 

사제의 성숙은 영성의 성장이라 본다. 사제의 영성은 시대의 표징을 판독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사는 지혜이다. 구체적으로 본당사제의 영성은 양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착한 목자의 영성일 듯 싶다.

 

신자들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할 능력을 키우는 데 사제 양성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성사적인 것 외에 사목행정에서도 시대의 변화를 보며 교우들과 공감대가 형성된 합리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본당사제들의 인사이동 뒤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본당사목 편람이라도 마련되었으면 한다.

 

사제의 해에 이처럼 더욱 구체적인 노력이 함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다. 사제도 인간적 한계 속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인간의 조건에 부합하도록 개발된 방법들을 최대한 활용하여야 한다. 이런 것들이 연구되고 실천된다면 이 시대 안에서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사제 영성이 훨씬 돋보이리라 생각된다.

 

 

사제의 맘이 예수님 맘처럼 변화되는 것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믿는다. 비겁하고 무기력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뒤 두려움 없이 증거자로 돌변했듯, 지금도 성령께서는 사제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사제의 맘이 예수님 맘처럼 변화되는 것은 성령의 은혜이지만 사제생활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 목표를 잊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맘으로 채색되는 과정은 분명할 것이다. 이 순간에도 사제의 해를 주신 하느님과 기도해 주신 교우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신현만 시몬 - 원주교구 신부. 1982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지금은 정선 프란치스코의 집(지적장애인시설)과 정선 노인요양원 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신현만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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