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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특별 권한 연구: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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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8 ㅣ No.1251

특별 권한(Facultates) 연구 :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를 중심으로*

 

 

1. 문제 설정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보편 교회가 제정한 법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성직자, 수도자, 일반 신자의 신분, 권리와 의무, 각종 교회 조직에 관한 규정, 성사 생활의 지침 등이 모두 법조문 속에 규정되어 있고, 이런 법규를 근거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특히 지상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라틴 예법대로 전례를 행하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198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포한 교회법전(CIC/83)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제정된 이 교회법전의 전신은 1917년에 베네딕도 15세 교황이 반포한 교회법전(CIC/17)이었다.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베네딕도 15세 교황이 완료한 교회법전이어서 흔히 비오-베네딕도 법전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두 가지 교회법전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교회 조직에 관한 각종 규범을 통일된 법조문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20세기 가톨릭교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잣대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개별 지역 교회마다 고유한 문화 전통과 사회 여건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규범들을 정하는 경우가 있다. 해당하는 지역 교회의 주교나 주교회의가 제정하고 사도좌의 승인을 받아서 선포하는 법률을 지역 교회법 또는 개별 교회법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2005년에 한국 지역 교회법전을 간행한 바 있다. 여기에는 1932년에 제정되었던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를 개정한 1995년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와 그 후에 사도좌나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아 적용하고 있던 지역 교회의 각종 지침과 규정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 신자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제정한 역사는 베르뇌 주교가 재임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57년에 열린 제1차 조선 대목구 시노드가 그것이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노드가 열렸고 그때마다 한국 교회 지도서들이 반포되어 지역 교회법으로 기능하였다.

 

그렇다면 제1차 조선 대목구 시노드가 열리기 이전에 조선 교회는 어떠한 법규범에 따라서 운영되었을까? 일반적으로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포교성성이 설치되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출범하던 당시에 포교성성에서 직할 선교단체의 선교사들에게 내린 1659년 훈령(Instructiones)이 있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 설립자들인 프랑수아 팔뤼 주교와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 등이 1665년 아유티아에 모여서 선교사들에게 권고하는 활동 지침서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흔히 모니타(Monita ad missionarios)라고 부른다. 또한 조금 더 뒤에 파리 외방전교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1700년에 회칙(Règlement)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훈령, 모니타, 회칙 등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활동 규범으로 사용되었다. 아마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치된 이후에,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1833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대목구를 선교 관할 지역으로 받아들인 이후에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러한 규범들에 근거하여 조선 교회를 운영하였을 것이다. 그 밖에도 1803년 사천성 중경에서 열린 사천 시노드의 결과로 채택된 지역 교회 법규집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조선 교회에서는 제1차 조선 대목구 시노드에서 사천 시노드를 준용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1)

 

그런데 17세기에 제정되어 주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적용된 각종 법규범과 1858년 제1차 조선 대목구 시노드에서 채택한 사목지침 사이에는 시기적으로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뇌 주교의 입국 이전에 활동하였던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들이 실질적으로 교회 운영을 위해서 사용한 지침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직 불분명하다. 본고는 이 지점에 착목하여 브뤼기에르 주교, 앵베르 주교, 페레올 주교의 서한에서 간혹 등장하는 ‘특별 권한’(Facultates)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하에서 전개할 내용은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먼저 교회법과 선교법의 역사를 큰 줄기만 간추려서 일별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특별권한이 차지하는 위상과 형식을 소개할 것이다. 2) 그다음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무언지를 살펴볼 것이다. 상당히 복잡한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개별 조항들의 연대기 분석이나 본문 분석은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대신에 외형적 특징과 수여 과정, 그리고 대략적인 범주들을 소개할 것이다. 3) 이 과정을 끝내고 나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은 특별 권한이 조선 대목구의 법규로서 과연 실현되었는지 여부, 이후 지역 교회법 형성에 끼친 영향, 그 밖에도 앞으로 특별 권한과 관련하여 다루어야 할 연구 과제들을 제시하면서 본고를 마무리할 것이다.

 

 

2. 교회법과 선교지 특별법


1) 보편 교회법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무렵부터 신앙의 내용과 교회의 조직 및 규율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입법 행위들이 이루어졌다. 사도들이 사망한 이후로는 다양한 법령집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313년 밀라노 칙령(Religio licita)과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Cunctos populos)이 나온 뒤로 보편 공의회와 지역 공의회가 자주 열리게 되자, 교회의 여러 법규들이 법령집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전 교회법 시대라고 흔히 부르는 12세기부터 14세기 초엽에 들어와서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과 같이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교회법령집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시아노 수사가 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법률과 법령집을 하나로 재편찬한 것이었다.2) 그래서 비오 4세(Pius IV, 1559~1569) 때에 《그라시아노 법령집》뿐만 아니라 기존에 나왔던 방대한 법령집들 안에 포함되어 있던 오류들을 수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20년 동안 교정 작업이 이루어진 끝에 1580년 7월 1일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1572~1585)는 칙서 〈Cum pro munere〉를 통해서 이 새로운 법령집을 인준하였고, 1582년에 칙서 〈Emendationem Decretorum〉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반포하였다. 이 법령집이 바로 《교회법 대전》(Corpus Iuris Canonici)이고, 최후의 체계적인 법령 모음집으로 불린다.3) 《교회법 대전》을 편찬하는 도중에 트렌토 공의회(1545~1563)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공의회의 법규들과 교령들이 《교회법 대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3세가 《교회법 대전》을 승인하고 공식적으로 공개하였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법령집 자체가 공식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각 법조문의 법원(法源) 자체를 인정한 것일 뿐, 입법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4) 그러므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체계적인 교회법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1917년 법전》(Codex Iuris Canonici 1917), 또는 비오 10세에 의해 시작되어 베네딕도 15세 때에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비오-베네딕도 법전》이다. 이 법전은 《그라시아노 법령집》과 《교회법 대전》, 《트렌토 공의회 교령집》과 그 이후의 법령집들을 총정리한 것으로, 숱한 법조문 중에 효력이 남아 있는 것들만을 추려 내고, 중복된 조항들을 정리하며, 체계적인 순서를 구축하고, 형식을 명료화하여 법조문 내용을 간결하게 만들었다. 법전의 체계는 로마법전인 《유스티니아누스 법령집》(Codex Iustinianus)을 따르고 있다.5)

 

1917년 법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오 10세(Pius X, 1903~1914)는 종전의 교령들과 훈령들의 과도한 복잡성으로 인해 교회가 법에 짓눌리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교황으로 선출된 첫날 밤부터 새로운 법전 편찬을 구상하였고, 일주일 후인 1904년 3월 19일에 자의 교서 〈Arduum Sane Munus〉를 통해 법전 편찬에 관한 결정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3월 25일 가스파리(Pietro Gasparri) 추기경의 주도로 교회법전 편찬 위원회가 만들어져 편찬 작업을 수행하였다. 1912년 3월 20일에 제1차 시안이 완성되었고, 위원회는 이를 각 주교에게 열람한 후 의견을 수렴하였다. 1914년에 제2차 시안이, 그리고 1915년에는 제2차 시안 개정판이 나왔다. 그리고 1916년 7월에 최종 시안이 완성되어 같은 해 8월 출판되었다.

 

1917년 6월 28일 로마 거주 추기경 전체 회의에서 여러 고위 성직자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교회법전이 정식으로 반포되었다. 이 반포 칙서는 〈Providentissima Mater Ecclesia〉인데 서명 일자는 5월 27일(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다. 총 5권 2,414개조로 되어 있는 이 법전은 1년 동안의 공포 기간을 두고 1918년 5월 19일(성령 강림 대축일)부터 발효되었다. 아울러 1917년 9월 15일에 교회법전 유권 해석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18년 5월 29일부터 《사도좌 관보》에 이 답서가 처음으로 기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권 해석 위원회의 답변은 법전의 법조문과 같은 법적 효력을 보유하게 되었다.6) 비오 10세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법전 편찬사업이 베네딕도 15세에 의해서 완료되었기 때문에 흔히 이 법전을 비오-베네딕도 법전이라고 부른다.

 

현행 교회법전이 나오게 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1959년 1월 25일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와 더불어 교회법 개정의 의도를 밝혔던 것이다. 그 이유는 대체로 비오-베네딕도 법전에 이미 반포 시점부터 효력을 상실한 법 조항들이 들어 있었고, 특별권한과 관면 부여에 관한 내용에 모순이 있었으며, 법전 내 절차가 명시되지 않은 채 폐지되거나 부분 수정된 법률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더 시급하게는 현존하는 새 기구들에 대한 법전의 명시적 언급이 없어 그 구성원들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3년 11월의 첫 총회 기간 중에 교회법전 개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공의회는 이전에 결성된 교회법 개정 위원회는 공의회가 끝나고 나서 본격적인 개정판을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새 법전은 1983년 1월 25일에 반포되었고,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발효되었다.7)

 

2) 선교지 특별법

 

16세기 이후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진출하면서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 단체들이 파견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전교 지역이 나타나면서 새 일꾼과 새 방법이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교황 칙령은 전혀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 파견 선교사들은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하여 특별 권한 시대(Periodus Facultatum)가 시작되었고, 선교지 특별법(Ius Extraordinarium Missionum)이 생겨났다.8) 특별 권한과 군주들의 보호권 때문에 야기된 여러 가지 특권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제한되다가, 결국 포교성성의 설립에 따라 여기에 모두 통합되었다. 하지만 포교성성 역시 세계 각처의 선교사 및 주교들에게 다양한 특별 권한들을 사례별로 수여하다 보니 나중에는 특별 권한들의 수효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이에 따라서 그 양식을 통일하고 중복되거나 서로 충돌하는 규정들을 정비할 필요성이 점차 제기되었다.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선교법의 단일화가 강력히 대두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공의회 의안들을 작성할 다섯 개 전문 분야(교의, 교회 규율, 수도회, 선교와 동방교회, 교회정치)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준비 작업 전체가 엄격한 비밀 유지 속에 진행되었고, 공의회 개막 1주일 전까지 주교들조차 그동안 준비된 공의회 의안들 가운데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9) 게다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가 교회 안팎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수도회, 동방 예식, 선교 위원회에 쌓여 있던 귀중한 자료 더미들이 토의에 부쳐지지도 못했다. 그것들은 공의회 수십 년 후, 새 교회법이 준비되면서 교회 규율에 관한 자료와 함께 사용되었다.10)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대두한 지역 교회의 법규범, 즉 선교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할 필요는 비오-베네딕도 교회법전이 공포되면서 자연히 해소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때에 현행 교회법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천주교회의 유권적인 공식 법전이었던 1917년 교회법전이 편찬되면서 선교 관련 특수 규범들이 교회법전의 조문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11) 이 사실은 1917년 교회법전 제293조부터 제311조에 대목구장과 지목구장의 역할과 권한들을 명시한 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법전 속에 선교지에 관한 각종 법규가 정식 법조문으로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지역 교회의 특수 현실에 근거한 교회법적 규정들이 모두 사문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교회법으로 정비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제정되었던 각종 지도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교황청에서 부여한 규정들 가운데 교회법전과 충돌하지 않는 것들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효력을 보존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0년 기한부 특별 권한(Facultates Decennales)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서 1986년까지 10년 기한부로 교구장 주교에 의해서 일반 교구 사제들에게 위임되었으며, 1995년에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가 공포되면서 자연히 소멸하였다.

 

3) 특별 권한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34년 프란치스코회 수도 사제들에게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미신자들의 지역에서 구원 사업을 수행하기에 편리하도록 대폭적인 특별 권한과 면속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때부터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각 수도회는 다양한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심지어 성직자 수도회의 장상들은 관할권의 범위마저 거의 자의로 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특권을 누렸고 선교 지역 설정권도 부여받았다고 한다. 선교 활동에 종사하는 수도자들은 성사와 준성사의 집전에 관하여 많은 특전과 특별 권한을 받았다. 미신자들의 입교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는 한도 안에서 내적 법정에서나 외적 법정에서나 교황의 권한을 위임받았고 마치 교황 사절처럼 전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 수도회가 받은 특별 권한은 선교 지역마다 여러 가지 부칙 조항이 첨부되어 있어서 대단히 복잡하였다. 이 때문에 우르바노 8세 교황은 1637년에 수도회들의 특별 권한에 관하여 7개 규칙과 5개 양식으로 이루어진 원칙을 제정하였다.12)

 

우르바노 8세 교황이 1633년 포교성성 내에 특별 위원회를 위촉하여 다양한 특별 권한들을 재검토하게 한 결과 이 위원회는 1637년 2월 10일에 특별 권한 부여에 대한 일곱 가지 규칙(Septem Regulae Generales)과 다섯 가지 양식(Quinque Typicae Facultatum Formulae)을 새로 만들어 최종 보고서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우르바노 교황의 헌장〈Operosum〉에 의해서 승인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 권한의 양식들이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숫자로 번호가 매겨진 이 양식들은 수여되는 대상에 따라서 구별된다. 즉 제1양식(Formula I), 제2양식(Formula II), 제3양식(Formula III)은 주교에게 수여되는 것이며, 제4양식(Formula IV)은 주교직을 가지지 않은 선교지 책임자 또는 여타의 선교지 장상들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제5양식(Formula V)은 현재의 특수한 상황과 조건 때문에 앞의 네 가지 양식들이 교부될 수 없는 주교나 기타 선교지 장상들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교에게 주어지는 양식들 가운데 제1양식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주교들을 대상으로 하며, 제2양식은 비가톨릭적 지배자가 다스리고 있으며 교황청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 지역의 주교들을 대상으로 하고, 제3양식은 유럽 내의 가까운 지역에서 활동하는 교황 대사들을 대상으로 한다. 제5양식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 양식들은 극히 일부만 변경되었을 뿐 1919년 12월 31일까지 원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13) 그리고 제6양식부터 제10양식까지 부속 양식들이 추가되었다.14)

 

19세기 중엽에 가서는 특별 권한의 새로운 양식들이 출현하였다. 이것들은 특수 양식(Formula Extraordinaria)이라 불렸는데, 특수 양식 A, B …, a, b …, aa, bb … 등으로 나열되었다. 이 양식들은 앞서 정규 양식이 수여되는 것과는 방법도 달랐으며, 특별 권한의 사용 횟수 자체도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1873년까지 수여되던 다양한 특별 권한의 양식들을 수여 대상에 따라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15)

 

특별 권한의 정규 양식들

① 제1양식 : 중국, 서인도 및 동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남북미 지역의 주교

② 제2양식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스, 알바니아, 보스니아, 덴마크 지역의 주교

③ 제3양식 : 프로이센, 헝가리,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러시아 지역의 주교

④ 제4양식 : 전 세계 선교지 책임자

⑤ 제6양식 : 아일랜드 주교

⑥ 제10양식 : 프랑스와 스위스 주교

 

특별 권한의 특수 양식들

① 특수 양식 a, aa : 남미의 주교

② 특수 양식 b : 중국 제국과 인접 국가의 주교

③ 특수 양식 C, D, E : 미합중국 주교

④ 특수 양식 F : 노바스코샤(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지역) 주교

⑤ 특수 양식 P : 잉글랜드 주교

⑥ 특수 양식 Q : 네덜란드 주교

⑦ 특수 양식 R : 동인도 주교

⑧ 특수 양식 S : 알제리 주교

⑨ 특수 양식 T : 캐나다 주교

⑩ 특수 양식 U : 오스트레일리아 주교

 

정규 양식의 특별 권한의 경우에 이를 부여받은 주교나 선교지 장상은 소속 선교사들에게 위임할 수 있다. 그리고 주교좌 공석 시에는 동일한 특별 권한이 선교지의 일시적인 장상에게 이양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규 양식에 들어 있는 특별 권한을 상시적 특별 권한(Facultates habituales)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반해서 특수 양식에 들어 있는 특별 권한은 일반적으로 소속 사제나 선교사들에게 재위임될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주교좌가 공석일 때에는 특별 권한도 정지된다. 그리고 특수 양식에 기재된 기한이 끝났거나 사용 횟수가 채워지면 특별 권한은 종료된다. 하지만 긴급한 경우에는 혼인 장애 관면 권한과 같이 특수 양식에 기재된 일부의 특별 권한을 소속 사제들에게 재위임할 수도 있고, 상시적 위임도 가능하다는 판례가 1888년 이후에는 나오기도 하였다.16)

 

 

3. 브뤼기에르 주교의 특별 권한

 

1831년 7월 4일 월요일 포교성성에서는 카펠라리 추기경의 후임으로 포교성성 장관이 된 페디치니 추기경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북경교구와 관련하여 조선 선교지 문제도 안건으로 다루었다. 회의 결과 조선으로 가겠다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을 허락하고, 조선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치하여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는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을 때에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7월 17일 주일에 있었던 성하 알현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네(Castruccio Castracane degli Antelminelli, 1779~1852) 포교성성 차관의 보고를 받고, 갑사 명의의 주교이자 조선 왕국의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특별 권한을 수여하였다.

 

13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원래 7월 4일까지만 해도 조선 대목구의 설정은 유보적인 상태였다. 일단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허락하고, 그 경과를 지켜보면서 결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13일 뒤인 7월 17일에 성하 알현에서 갑작스럽게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특별 권한을 수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9월 9일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교황에 의해서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 칙서가 장엄하게 반포되었다. 그러면 이미 7월 초순에 조선 대목구를 설치하는 문제와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는 문제는 기정사실화되었던 것일까?

 

좌우간 기록을 살펴보면 이 성하 알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특별 권한이 수여된 것은 사실이었다.17) 총 16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특별 권한은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 한국 관계 문서철 제579권에도 들어 있다.18) 그리고 교황청 문서와 파리 문서를 대조한 결과 동일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파리에 소장된 문서의 외형을 검토하면, 먼저 손으로 쓴 수고본이며, 서두에 1831년 7월 17일 성하 알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수여된 특별 권한임을 밝히고 있고 또 마지막에 카스트라카네 포교성성의 차관 서명이 들어 있어서 로마에서 보낸 정식 문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파리 문서에는 두 가지 특이 사항이 있다. 하나는 문서 끝에 “1832년 10월 21일 수령”(reçu le 21 8bre 1832)이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0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에서 르그레주아 신부에게서 칙서와 특별 권한이 담긴 문서를 받았다.19) 그러므로 파리 문서에 들어 있는 부기 사항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 특별 권한을 그 날짜에 수령하였음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수중에 있어야 할 이 문서가 왜 파리에 있었던 것일까? 가설을 세우자면 먼저 교황청에서 보낸 특별 권한이 파리에 도착하였고, 그 원본을 보관한 다음에 사본을 만들어서 마카오로 보냈다. 나중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본을 수령하였음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파리에 보관된 원본의 하단에 적어 넣었다고 보면 어떨까 싶다.

 

또 특별 권한 제10항에 “해당 대목구 소속 안남인 사제들에게(Sacerdotibus Annamitis) 매일 신심 미사를 거행하고, 또 주일과 의무 축일에 신심 미사를 거행할 때 대영광송과 사도신경을 바칠 수 있도록 관면하는 특별 권한”이 들어 있다. 조선 대목구장에게 보내는 특별 권한에 안남인 사제들을 지칭하는 구절이 들어간 것이 이상하다. 아닌 게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도 특별 권한이 담긴 문서를 받고서 이 점이 이상했는지, 앞서 인용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2년 11월 9일 서한 말미에서 조선에는 안남 사람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서기(amanuensis)의 실수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적었다. 그러면 왜 이런 실수가 벌어졌을까?

 

특별 권한 제10항에 안남인 사제라는 구절이 들어간 이유는 1831년 7월 17일 성하 알현에서 다룬 안건 가운데 첫째 안건이 코친차이나 대목구장 장 루이 타베르(Jean Louis Taberd, 1794~1840) 주교에게 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를 세워서 주교로 성성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추정 가능하다. 코친차이나 안건 다음의 둘째 안건이 조선 왕국에 북경교구에서 독립한 새로운 대목구를 설치하고, 그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샴 부주교를 임명하고, 그에게 중국 및 인접 왕국의 여타 대목구장들과 마찬가지로 특별 권한을 부여하는 일이었다.20) 아마 서기가 실수로 조선 대목구장의 특별 권한을 기록하면서 두 가지 안건을 혼동하여 안남인 사제라는 단어를 조선 대목구장의 특별 권한에 적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니면 당시 기록자가 조선(Gorea)이 코친차이나 부근에 있고, 인종적으로는 두 지역 모두 안남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16개 항으로 된 특별 권한의 내용을 살펴보자. 특별 권한에 들어 있는 개별 조항들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교회법학의 차원에서 해당 조항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거나,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법조문의 통사론적, 의미론적 구조를 밝히는 일은 차후의 과제로 미루고자 한다. 여기서는 특별 권한의 개별 조항들을 핵심만 추려서 요약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에 만족할 것이다.

 

1. 라틴어 문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품 후보자를 서품할 수 있는 7년 기한부 권한

2. 미신자와의 혼인 장애를 관면하는 15년 기한부 권한

3. 직계 인척 1촌과 혼인을 맺는 신자들의 장애를 관면하는 권한

4. 1촌과 섞인 2촌의 혈족 또는 방계 인척의 혼인 장애를 20건에 한하여 관면하는 15년 기한부 권한

5. 2촌의 혈족 또는 인척의 혼인 장애를 30건에 한하여 관면하는 15년 기한부 권한

6. 미신자 혼인 장애에서 사사로이 혼인하는 경우를 10건에 한하여 관면하는 15년 기한부 권한

7. 일부다처 상황에서 미신자 배우자에게 행해야 할 법정 질문을 6건에 한하여 관면하는 권한

8. 십자가의 길 14처를 집에 설치할 수 있도록 소속 선교사들에게 위임할 수 있는 권한

9. 신자들을 성의회에 가입시키고 스카풀라를 축복할 수 있는 권한

10. 소속 사제들에게 신심 미사 거행을 허용할 수 있는 15년 기한부 권한

11. 라틴어를 잘 못하는 방인 사제들이 어른 세례 집전 시 어린이 예식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관면하는 10년 기한부 권한

12. 단 한 명의 선교 사제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하도록 위임할 수 있는 권한

13. 신자들에게 개인 경당을 세울 수 있도록 10건에 한하여 허용하는 1년 기한부 권한

14. 주일과 대축일을 제외한 파공축일에 파공 의무를 관면하는 15년 기한부 권한

15. 대목구장 유고 시 대목구장직의 임시적 위임에 관한 권한

16. 이상의 권한들은 무상으로 실행되어야 함.

 

이상의 내용을 보면 혼인 장애에 관한 관면 권한이 6개로 가장 많다. 그리고 각종 성사 및 준성사 예절에 관한 관면 권한들을 합치면 이 역시 7개가 된다. 그 밖에는 성직자 양성 및 대목구장 유고 상황에 관한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특별 권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신자들의 성사 생활에 관한 것이다. 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혼인 관습이 우세하거나 다양한 사정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제한당하는 상황에 처한 대목구에서 신자들의 성사 생활을 돌보는 데 요긴할 것으로 교황청에서 판단한 권한들이다.

 

그런데 위에서 나열한 권한들은 대부분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본다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은 16개 항의 특별 권한은 앞서 장병보 신부의 연구에서 보았듯이 특수 양식(Formula Extraordinaria)의 특별 권한인 것으로 보인다. 즉 정규적인 양식의 특별 권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부여되는 특별 권한이 아니라, 조선 대목구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여 특수하게 부여하는 특별 권한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들과 비교해 보아도 조항의 숫자나 구성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가령 1865년 9월 7일 성하 알현에서 몽골 대목구장 직무대행 테오필 페르비스트 신부에게 수여된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은 도합 25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내용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21) 1877년 중국과 인접 왕국의 대목구장들에게 수여한 15년 기한부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Facultates extraordinariae)은 3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훨씬 더 상세한 내용들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77년 인도의 대목구장들에게 수여한 15년 기한부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와 비슷하게 15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내용과 표현이 사뭇 다르다.22) 아마 이런 것을 본다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은 16개 항의 특별 권한은 특수 양식 b가 정립되기 이전에 나온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만을 수여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된 한국 관계 문서철 제579권에는 또 다른 특별 권한이 들어 있다.23) 이 문서는 인쇄본이며, 수여한 교황과 수여받은 주교의 명칭, 그리고 특별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기한, 그리고 특별 권한이 수여된 성하 알현의 날짜(1831년 7월 17일)와 기타 사항들만 수기로 쓰여 있고, 끝에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네 포교 성성 차관의 서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문서의 첫 장 상단에는 ‘F. I’라는 표기가 붙어 있다. 이것을 보면 두 번째 특별 권한이 장병보 신부가 말한 제1양식(Formula I)의 정규적인 특별 권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서에 들어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187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든 대목구장들에게 수여된 특별 권한과도 비교해 보아도 제1양식임이 분명하다.24) 다만 금서 목록을 지정한 제21항의 구체적인 서적 목록만 차이가 있다. 아마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서 대목구에서 금지해야 할 서적들의 목록이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은 제1양식의 특별 권한은 모두 29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항에서 제11항까지, 그리고 제27항 등 11개 항은 특정한 교회 법률에 대한 관면 권한을 다루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혼인 장애 관면이다. 제15항과 제16항은 이단, 배교, 분열 등 견책에 대한 사면 권한이다. 제14항 및 제17항부터 제19항까지 모두 4개 조항은 전대사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다. 그리고 성품 수여 권한을 지정한 제1항과 성유 축성 권한을 지정한 제12항, 그리고 제20항부터 제26항까지는 모두 교황 특전(privilegium)에 관한 것이다. 제13항과 제28항은 제1양식 내에 기재된 특별 권한을 대목구 소속 사제들에게 위임하는 규칙을 제정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29항은 특별 권한 사용의 한계를 지정한 것인데, 15년 기한부이며, 대목구의 경계 밖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25)

 

브뤼기에르 주교는 복건성 복안현(福安縣)에 있던 카르페나 디아즈 복건 대목구장 주교의 거처에 머물면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냈다.26) 1833년 4월 18일에 작성한 이 서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수령하였던 특별 권한들을 검토한 결과를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두 종류의 특별 권한에 명시된 것 이외에도 대목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개별적인 특별 권한들을 요청하였다. 즉 ‘여러 사제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위임할 수 있는 권한’, ‘대목구장에게 수여된 특별 권한을 사제들에게 재위임할 수 있는 권한’, ‘조선 국경 밖에 신학교를 세우고, 대목구장이나 동료 사제들이 그곳에서 교회 직무와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조선 밖의 지역에도 사제들이나 교리교사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 등을 교황청에 청한 것이다. 아울러 특별 권한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의심스러운 점들 몇 가지도 문의하였다.

 

이에 대해서 포교성성 카스트라카네 차관의 후임이었던 안젤로 마이우스(Angelo Maius, 1782~1854) 차관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접수한 뒤에 1834년 8월 31일 성하 알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청원하거나 문의한 사항들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개별적인 특별 권한 다섯 건을 새롭게 수여하였다. ‘조선 밖의 지역으로 사제나 교리 교사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 ‘조선 국경 밖에 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권한’, ‘대목구장과 소속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대사를 베풀 수 있는 권한’, ‘미사 때 밀랍 대신 목랍 초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 ‘대목구 경계 밖에서도 주교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10년 기한부 권한’ 등이 그것이었다.27)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브뤼기에르 주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요청한 권한, 즉 여러 사제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위임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사실 주교 한 명이 전체 대목구를 운영해야 하는 대부분의 대목구 상황에서는 가장 시급한 권한이 견진성사 집전 위임 권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대목구장들은 이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1835년 1월 31일 포교성성 장관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1775~1856) 추기경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요청한 권한들에 대한 교황 답서를 첨부한다고 하였다.28) 필적을 대조해 본 결과 위의 다섯 가지 개별적인 특별 권한들이 담긴 문서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문서들은 1835년 1월 31일 포교성성 장관 서한 뒤에 첨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9)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 본인은 이 개별적인 특별 권한이 담긴 교황 답서를 직접 받지 못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5년 8월 7일 서한을 보면 1833년 4월 18일 복건에서 요청하였던 권한들, 특히 견진성사 집전을 여러 사제에게 위임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답서를 받지 못했다는 진술이 나온다.30) 브뤼기에르 주교는 약 2달 뒤인 1835년 10월 20일 조선으로 가는 길에 선종하였다. 그러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실질적으로 수령한 특별 권한은 1831년 7월 17일 성하 알현에서 수여된 제1양식의 정규적인 특별 권한(다른 말로 상시적 특별 권한)과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이었다.

 

 

4. 향후 연구 과제

 

브뤼기에르 주교가 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로 사천 대목구의 앵베르 신부를 지명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앵베르 주교가 아직 정식으로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수여되었던 각종 특별 권한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방 신부는 어떤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던 것일까?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서 펼쳤던 성사 활동들은 어떤 교회법적 근거 위에서 행해진 것일까? 본고에서는 교회법의 역사 속에서 특별 권한의 위상, 그리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특별 권한을 부여받는 경위와 특별 권한에 담긴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문들은 앞으로의 후속 작업을 통해서 해명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앵베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는 조선 대목구를 운영하면서 어떤 교회법적 자격을 가지고 활동하였는지도 밝혀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수여되었던 특별 권한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다시 수여되었는지, 아니면 별도의 특별 권한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수여되었는지도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탐구를 시작할 단초들은 많이 남아 있다. 앵베르 주교의 서한 속에서 특별 권한에 대하여 진술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31) 그리고 페레올 주교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32) 그렇다면 페레올 주교 시대까지 지속된 특별 권한 중심의 사목과 베르뇌 주교에 와서 공식적으로 준용된 사천 시노드 교령집이 병존했던 시기는 지역 교회 법규의 역사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명이 분명하게 이루어져야만 조선 대목구 지도서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본고에서는 특별 권한의 개별 조항들에 대한 연대기적 분석과 본문 분석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루어져 할 것으로 본다. 돌아가신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은 1995년에 나온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를 평가하면서 제대로 된 지역 교회의 법전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혹독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한국 교회의 고유법을 수록하여 공포하였던 과거의 여러 지도서를 제대로 참고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른바 토착화에 대한 조항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나아가서 요제프 메츨러(Josef Metzler)가 한국과 중국, 일본의 시노드나 공의회에서 고유한 지방적, 민족적, 문화적 지역 교회의 설립과 구성을 위한 확고한 노력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특히 한국이 이런 문제를 가장 소홀히 다루고 있다고 평가한 대목을 인용하였다.33)

 

몬시뇰의 비판을 전적으로 수긍하면서 한 가지 더 첨가하자면, 현재 한국 교회의 지역 교회법은 그 법적 원천(fontes)을 보편 교회법에서만 찾을 뿐이지 지역 교회사 속에서 연원을 탐구하는 작업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34) 그러므로 구체적인 법조문들을 분석하면서 그 선례를 찾아내어 전후 영향 관계와 실질적인 적용 과정을 탐구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마로토(Maroto) 신부의 지적은 무척 시사적이다. “교회법전 속에 모아져 재편성된 모든 법적 기본 요소들과 사도좌 관보(Acta Sanctae Sedis(ASS) : 1865~1908, Acta Apostolicae Sedis(AAS) : 1909~ )와 포교성성의 모음집(Collectanea) 속에 산재해 있는 다른 내용들 그리고 선교 지역의 직권자들에게 허락한 사도좌의 특별 권한들의 내용들을 망라하여 다룬다면 선교법의 충일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매우 흥미 있는 교회법적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35)

 

앞으로 본고에서 다룬 특별 권한과 사천 시노드, 그리고 이를 준용하였던 제1차(1857), 제2차(1868), 제3차(1884) 조선 성직자 시노드의 결과물, 이와 더불어 대구 선교지 지도서(1912), 서울 선교지 지도서(1923), 조선 선교지 공동 지도서(1931) 등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연구들이 꾸준히 나온다면 지역 교회로서 한국 교회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한다.36)

 

……………………………………………………………………………………

 

1) 지금까지 나열한 지역 교회의 규범들에 관해서는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21~165쪽 참조. 그런데 사천 시노드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사천 시노드 책자에 나와 있는 개최 장소 ‘Tcong King Tcheou’가 사천성 중경부(重慶府, Tchoung King Fou)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조현범, 〈1803년 사천성 시노드 연구〉, 《교회사연구》 2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20쪽). 그런데 최근에 사천 시노드 개최 당시의 정황과 사천성의 여러 지명을 재검토하면서 중경이 아니라 성도(成都)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숭경주(崇慶州, Tsong Kin Tcheou)가 실제 사천 시노드의 개최지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개최지를 고증하는 문제 외에 사천 시노드가 조선 교회에 적용되는 경위 역시 상세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1884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소집한 조선 성직자 시노드의 결정 사항이 1887년에 《조선 선교지 관례집》(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ée)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부록에 베르뇌 주교의 사목 서한이 실려 있다. 베르뇌 주교는 사목서한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반포한 1841년 11월 30일 칙서(Breve)를 거론하였다. “이 지방들의 선교사들에 의해서”(a missionariis harum regionum) 사천 시노드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조선 대목구 선교사들에게 내린 칙서인지, 아니면 사천 시노드를 공인하면서 중국과 인접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내린 칙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가 인용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칙서를 발굴하고, 또 그 이전에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사천 시노드 관련 교령이나 훈령을 내린 적이 없는지 등을 검토해야만 조선 대목구에서 사천 시노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교회법적 근거가 확인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2) 〈서문〉(Praefatio), 《교회법전, 라틴어−한국어 대역〈수정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29쪽.

 

3) 이경상, 《가톨릭 교회법 입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0, 95~114쪽.

 

4) 위의 책, 116쪽.

 

5) 위의 책, 117~118쪽.

 

6) 위의 책, 117쪽.

 

7) 위의 책, 118~120쪽.

 

8) 정진석, 《교회법원사》, 가톨릭출판사, 2007, 205쪽.

 

9) 클라우스 샤츠 지음, 이종한 옮김,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279쪽.

 

10) 후베르트 예딘 지음, 최석우 옮김, 《세계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136쪽.

 

11) 위의 책, 206쪽.

 

12) 정진석, 《간추린 교회법 해설》, 가톨릭출판사, 2007, 328~329쪽.

 

13) Peter B. Chyang(장병보), Decennial Faculties for Ordinaries in Quasi-Dioceses, Washington D.C.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61, pp. 18~21. 이 자료는 장병보 신부의 석사 학위 논문인데, 한국인에 의한 가톨릭 교회법 연구에서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장병보 신부는 자신의 학위 논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 번역하여 《사목》에 〈10년 기한부 권한 해설〉이라는 제목으로 1972년 9월(제23호)부터 1974년 7월(제34호)까지 11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다. 하지만 특별 권한의 교회사적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원래 논문을 찾아서 읽는 것이 좋다. 많은 교회사 자료들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아서 연구에 참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장병보 신부의 논문 역시 국내에는 서강대학교 로욜라 도서관에만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를 빌려내어 본고를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신 서강대학교의 최선혜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14) Ibid., p. 22.

 

15) Ibid., pp. 23~24.

 

16) Ibid., pp. 25~27.

 

17)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uli, Archivio Storico : Regestum Facultatum, Facultates Extraordinariae, anno 1831.

 

18) AMEP : Vol. 579, ff. 81~83.

 

19)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2년 11월 9일 서한(SOCP, Vol. 76, f. 23).

 

20) Congregazione per l’Evangelizzazione dei Populi, Archivio Storico : Fondo Udienze, Vol. 77, f. 76.

 

21) Théophile Verbist, Daniël Verhelst, La Correspondance de Théophile Verbist et Ses Compagnons, 1865~1866, Leuven(Belgium) : Universitaire Pers Leuven, 2003, pp.22~26.

 

22) Collectanea Constitutionum, Decretorum, Indultorum ac Instructionum Sanctae Sedis ad usum Operariorum Apostolicorum Societatis Missionum ad Exteros, Parisiis : Typis Georges Chamerot, 1880, pp. 20~24.

 

23) AMEP : Vol. 579, ff. 84~87.

 

24) Collectanea, pp. 18~20.

 

25) Peter B. Chyang(장병보), op. cit., p. 21. 제1양식의 특별 권한에 들어 있는 29개 조항을 모두 나열하면 내용이 길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장병보 신부의 분석적 해설을 따왔음을 밝힌다.

 

26)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건성 복안현에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33년 4월 18일 서한(SOCP, Vol. 76, ff. 197~198).

 

27) AMEP : Vol. 579, ff. 104~108.

 

28) AMEP : Vol. 579, f. 121.

 

29) 브뤼기에르 주교가 받은 특수 양식의 특별 권한과 제1양식의 특별 권한, 그리고 1834년 8월 31일 성하 알현에서 수여된 개별적인 특별 권한의 전문은 정양모, 윤종국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제1양식의 특별 권한 제21항의 금서 목록이 생략되어 있는 등 불완전한 부분이 더러 있다.

 

30) SOCP, Vol. 76, f. 501.

 

31) AMEP : Vol. 1254, ff. 27, 133, 199.

 

32) AMEP : Vol. 577, ff. 977~979, 1053.

 

33) 최석우, 〈한국 교회 지도서〉,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9442~9443쪽.

 

34)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법학 전문가의 연구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음의 글들이 있다. 홍기선, 〈한국 교회의 혼종 혼인법 적용의 역사〉, 《사목연구》 12,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4 ; 최인각, 〈교회의 대리 제도 개관〉, 《사목연구》 16,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6.

 

35) F. Maroto, “Il Diritto canonico e le Missioni” in Il pensiero missionario, Vol. 1, Roma, 1929, p. 25(홍기선, 앞의 글, 73쪽에서 재인용).

 

36) 향후 연구를 위하여 유용한 자료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Facultates Nankinensis, Zi-Ka-Wei : Typis Orphanotrophii Tou-Se-We, 1932 ; Facultates Sacerdotibus Vicariatus Apostolici de Seoul, 1951 ; Kowalsky, N. & Metzler, J., Inventory of the Historical Archives of the 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 or 《De Propaganda Fide》, Rome : Pontificia Universitas Urbaniana, 1983 ; Lee, Ignatius Ting Pong, De Iuridico Commissionis Systemate in Missionibus, [n.p. n.d.] ; Lee, Ignatius Ting Pong, Facultates Apostolicae : S.C. de Prop. Fide et S.C. Consistorialis, Roma : Commentarium Pro Religiosis, 1962 ; Lee, Ignatius Ting Pong, Facultates Missionariae : Disciplinae Vigenti Accommodatae, Roma : Commentarium Pro Religiosis, 1976 ; Metzler, Josef, Die Synoden in China, Japan und Korea 1570~1931, Paderborn : Ferdinand Schöningh, 1980 ; Monita Nankinensia Vol I-II, Zi-Ka-Wei : Typis Orphanotrophii Tou-Se-We, 1933 ; Peters, Edward N., ed., The 1917 Pio-Benedictine Code of Canon Law, San Francisco.

 

* 이 연구는 2010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교회사 연구 제38집, 2012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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