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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현대에 있어서 베네딕도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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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288

현대에 있어서 베네딕도 영성 (1)

 

 

이미 코이노니아1)에서 몇몇 분이 지적하였듯이, 나 또한 수도규칙을 현대에 적용시키고 해석한다는 것은 다분히 선택적이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 주제는 이미 코이노니아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고, 안셀름 그륀 신부가 쓴 『베네딕도 이야기』에 ‘현대와 베네딕도회의 영성’에 관련된 글들이 제법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이 필요할까 싶도록 깊고 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글을 쓰신 분들이 참 존경스럽고, 동시에 나의 강의가 사족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의 특성과 베네딕도회적 삶

 

내가 읽은 글들에는 우리시대의 특징을 들면서 현대를 참으로 다각도로 진단하고 있다. 이미 익히 들어 아는 것들도 있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도 많았는데, 주로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글을 쓴 저자들은 한결같이 베네딕도 영성 안에 그 대처방안이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성 베네딕도의 영성을 살려고 힘쓰며, 크건 작건 알게든 모르게든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사회에 기여할 때 기쁨을 금치 못한다. 실상 경축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빗나가고, 때로는 베네딕도회원답지 못한 자신과 공동체에 실망하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기도 한다. 이 기회에 현대를 사는 베네딕도회원인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봄직하다.

 

우리는 ‘현대’라는 틀 안에 살고 있고, 우리 후배들이 그 문화에서 살다가 입회하였으며, 우리가 일하는 사도직 현장도 바로 그곳이다. 빠른 변화 속도, 정보와 경제의 힘, 전문화와 경쟁이 판치는 사회 구조를 피할 수 없고, 우리 서로들 안에서조차 직업의 고유성에서 오는 차별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구촌 시대,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 통신망의 발달과 인터넷 문화 시대에 마음 하나 먹기만 하면 수도원 안에서도 세상을 금방 만날 수 있다. 개인주의와 강한 성취욕, 힘들고 편치 않은 모든 일에서 나만은 빠지려는 유아적인 엄살,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윤리 도덕을 따지기보다는 바로 눈에 보이는 즐거움만 원하는 재미문화(fun-culture), 행복을 생활수준과 동일시하는 물질 위주의 성향 등 그륀 신부나 그 밖의 분들이 지적한 현대인의 심리 현상을 우리는 바로 수도원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발견한다. 무엇이 영성적인지 속물적인지 때로는 그 기준조차 가려내기 혼란스럽다. 누군가 속물적이라고 여기는 행동이 그것을 행하는 이에게는 분명히 영성적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세속의 유혹에 빠질세라 혹은 행여 물이라도 들세라 베네딕도 성인께서 애써 둘러쌓았던 수도원의 담, 여행에 대한 제한, 여행 후의 단속은 이제 빛바랜 경고가 된 듯하다. 성인께서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강조하셨던 성독과 기도 시간을 제대로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옛날에는 수도원 담밖과 수도원 담 안이 대립되었다면 지금은 내 안에서 세속과 수도적 이상 사이의 싸움을 벌여야만 한다. 베네딕도 성인 시대도 세상이 혼란스럽기가 마치 우리 시대 같았다는데, 수도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수도생활 하기는 우리 시대가 훨씬 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먹을 때 먹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잘 때 자려고 지난 일 년을 투쟁했다는 어느 수도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휘말려 힘겨워하는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찡했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세상에 베네딕도적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 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 자신은 얼마만큼 베네딕도의 영성에 깨어 힘을 얻으며 사는가? 시대적 특성 때문인지 이상과 실재 사이의 간격이 옛날보다 훨씬 크다. 코이노니아에 실린 글에서 소위 현대를 치유할 베네딕도 영성, 즉 공동체 생활, 전례, 하느님을 모셔 영육이 균형 잡힌 삶, 인간가치의 중시, 삶의 진정한 즐거움, 창조 영성, 낙천주의 등은 혹시 우리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보여주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어쩌면 긍지는 심어주되 쓸 수는 없는 전시관 속의 멋진 물건 같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가 베네딕도 영성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할지라도 여러 모습을 현대의 매 현상에 맞추어 하나씩 적용하며 살기는 힘들 듯하다. 그래서 달을 가리키던 베네딕도의 손가락이 하나이듯, 베네딕도 영성의 다양함을 다 묶는 하나의 원천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1500년 이상을 지켜온 베네딕도의 손가락의 힘이 어떻게 하면 우리 세대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베네딕도 영성의 원천적 힘

 

코이노니아에 실린 글들을 읽으려고 손을 뻗치다가, 문득 물들지 않은 눈으로 베네딕도 성인을 느끼고 싶어, 지식 얻기는 뒤로 미루고 무작정 규칙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정신을 차려 읽어서인지 모르지만, 이번에 정말 감동하였다. 베네딕도가 성서적 인간관을 갖고 있고 수도규칙이 온통 성경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은 너무 많이 알려져서 내게 평범한 선지식에 불과했는데, 이번에 그것이 비범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을 새로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오늘은, 비록 듣는 이에게는 평범하겠지만, 내 나름대로 베네딕도 영성 이야기를 할까한다.

 

수도규칙에서 우선 가장 먼저 내 눈을 끈 것은 인간에 대한 베네딕도의 태도였다. 비록 다른 수도회의 규칙이나 회헌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규칙서가 수도생활의 요소요소마다 인간에 대한 현실적이고 영적인 배려는 물론 심리적 배려까지 이토록 섬세하게 담아내었을까? 베네딕도는 인간에 대한 감각, 인간에 대한 존중이 뛰어나다. 그는 각 개인이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헤아려 알고, 자신의 수도가족에게 흐트러지지 않은 수도생활의 넉넉함을 맛보게 할 줄 알았다.

 

인간존중의 장으로서 빼어나게 꼽히는 손님환대에 관한 제53장, 노인과 어린이에 관한 제36-37장, 파문받은 형제들과 책벌받고 고치지 않는 이들에 관한 제27-28장 말고도 수도규칙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곳저곳에서 그런 배려들이 제법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제40장 6절은 참 재미있다. “술이 수도승들에게는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는 책에서 읽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수도승들에게는 그것을 설득시킬 수 없으므로, 적어도 과음하지 않고 약간씩 마시는 정도로 합의하도록 하자.”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자들을 다독거리며 설득한다. 이런 말을 실제로 할 때 그분의 표정은 어땠으며 이를 듣는 수도승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양쪽이 다 빙긋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원칙을 상기시키면서도 베네딕도는 늦잠 자는 날을 허락하고(RB 11,12), 모두가 동의할 만한 충분한 양의 포도주를 허락하며, 필요에 따라 그보다 더한 양까지도 허락한다.(RB 40,3.5) 기도에 약간 늦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첫 시편을 약간 느리게 읊으라는 말씀도 있다.(RB 13,2) 후하고 인간적인 정이 배어난다.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가 ‘교정에 관해’ 쓴 논문에서 “책벌 받는 이는 자기를 찾아온 이들을 보며 속았다는 마음보다는 아빠스의 숨은 염려와 배려에 감사”할 것이라고 나온다(코이노니아 제10권 67쪽). 아빠스가 방황하는 양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베네딕도상을 엄격한 스승의 모습으로 이해해 왔지만, 수도규칙 안에서는 베네딕도 성인의 따뜻하고 자상한, 부드러운 심장이 느껴진다.

 

‘인간존중’에 관한 구절로 가장 먼저 내 눈을 끈 것은 ‘착한 일의 도구들’(RB 4) 앞부분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이중계명(RB 4,1-2)과 뒤따르는 5-10계명(RB4,3-7) 후 8절에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RB 4,8)라는 말이 나와 마치 글의 흐름이 갑자기 바뀌는 느낌을 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스승의 규칙서』2)가 ‘부모를 존경하라’ 한 것을 베네딕도가 자의로 변경한 것이다. 규칙서 전반에 걸쳐서, 베네딕도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부모처럼이나 존중받아야 할 존재인 듯하다. ‘존경하다’라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RB 9,7; 11,9; 36,4; 63,13.14)을 빼면, 제63장 10절(후배들은 자기 선배들을 존경할 것이며)과 제63장 17절(서로 다투어 존경하라)에서 나타나며, 특히 제72장 4절에서 좋은 열정의 첫 번째 항목(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에 등장한다.

 

우리 규칙서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제72장은 전체적으로 대칭구조를 이루는데, 그 중심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RB 72,7)라는 말이 놓여 있다. 이는 머리말 9절의 “자기에게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이웃의 입장을 고려하는 베네딕도의 인간존중 사상은 규칙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베네딕도가 손님환대에 대해 써 놓은 곳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뚜렷해진다. 아빠스와 손님들을 위한 주방은 따로 마련하여, 수도원에서는 ‘늘 있게 마련인 일정치 않은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들’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하며(RB 53,16), 객실에는 침대를 ‘충분히’ 마련해 두고(RB 53,22), 문지기는 정문 옆에 방을 가져, 방문자들이 ‘언제나’ 응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RB 66,3), 그에게 보조원들을 주어 그들이 ‘아무 불평 없이 봉사할 수 있게’(RB 66,2) 하라고 한다. 문지기는 손님의 사정에 대해 온전한 수용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모두 열어 두고 있다. 문지기는 온갖 양순함과 사랑의 열정으로 손님에게 재빠르게 응대해야 할 뿐 아니라(RB66,4)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게 더욱 잘해 주어야 한다. 아빠스와 수도형제들은 손님의 발을 씻기고, 아빠스는 수도공동체를 대신하여, 수도공동체 안에서가 아니라, 손님과 함께 식사하며 중대한 금식날이 아닌 경우에는 손님을 위해 금식조차도 깨야 한다. 손님이 가난한 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일지언정 그들에게 쏟는 정성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다. 그래서 마침내 훗날 병원과 호텔이 여기서 생겨나지 않았던가!

 

수도규칙 제4장 8절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를 다시 상기하고 싶은데, 베네딕도에게는 참으로 모든 인간이 소중하였다. 그래서 아빠스에게도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라, 편애하지 말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모든 이들에게… 같은 규율을 적용할 것이다.(RB 2,16-22)”라는 권고를 긴 설명을 붙여가며 심도 있게 하고 있다. 책벌과 파문 그리고 마침내 고집스런 사람을 내보내는 일까지도 인간에 대한 배려가 그 배경이 된다. 사실 성경을 보면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까지도 감당할 수 없어서 심판으로밖에 해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베네딕도의 가르침은 그의 삶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수련소 시절, 성 베네딕도의 전기를 처음 읽었을 때 참 좋아 했던 이야기 가운데 둘이 있다. 12냥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 도움을 청하러 온 가난한 이에게 베네딕도 성인은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동안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한 베네딕도는 일주일 후 그 사람이 왔을 때 12냥이 아닌, 13냥을 건네주었다. 한 냥은 생활에 보태 쓰라고. 그분의 속 깊고 넉넉한 마음이 느껴져 한참 동안이나 거기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기름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방에 기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부님은 그것을 기름을 얻으러 온 바깥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 당가수사는 수도가족을 아끼고 싶어 그 기름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부님께 엄청나게 혼났지만 동시에 계속 흘러내리는 기름의 기적을 맛본다. 베네딕도는 수도원 식구보다 밖의 필요한 이를 더 염려하였다. 그에게서는 집단이기주의나 ‘우리 먼저 살고보자’는 태도는 아예 찾을 수 없다. 연민과 후덕함이 담긴 열린 마음 아닌가? 다른 많은 전승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베네딕도는 집안 살림을 하면서도 이웃에게 문을 활짝 열고, 사회적 책임감을 의식하며 산 사람이다. 아퀴나타 뵉크만Aquinata Bockmann3) 수녀는 베네딕도 성인이 에너지를 쏟아 염려하는 사람의 우선순위가 먼저는 ‘밖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그 다음에는 ‘수도원 안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한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수도승들’이었다고 한다.(코이노니아 제13권, 76쪽) 하지만 그분께서 모든 수도가족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셨는지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베네딕도는 자기 공동체의 가족과 공동체를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다 ‘하느님을 느끼고 알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온갖 배려와 정성을 기울인다. 이것이 베네딕도가 인간을 존중하는 모습이고 목적이다. [분도, 2009년 가을호, 배은주 이사악 수녀(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현대에 있어서 베네딕도 영성 (2)

 

 

작년 말, 부산 가톨릭대학 교수신부님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왜관 수도원의 화재가 화제였다. 덕원 혹은 옛날 왜관 수도원과 실낱 같은 인연이라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가난한 중에도, 빚지고 사는 가운데서도 꼭 무언가를 내놓는다고 한다. 그러지 않고는 베길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들은 수도원의 큰 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왜관 수도원이 한국 교회사에 참으로 큰 몫을 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덕원과 왜관 수사님들 가운데 ‘인간을 존중하는 분들’이 많았다는 뜻으로 알아듣게 된다. 사실 그런 예화들은 나조차도 적지 아니 알고 있다. 타산적이고 각박한 시대에 한국의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가 이런 훈훈한 가풍을 이어 나가면 좋겠다.

 

 

장아찌 수도자, 장아찌 그리스도교인

 

베네딕도 성인의 인간존중과 인간에 대한 책임감, 그것을 위해 오른손과 왼손을 다 쓸 줄 아는 분별력은 타고난 천품天稟일까? 아니면 그를 이렇게 만든 무엇이 있는가? 여기서 내가 이번에 베네딕도 성인에게 반한 또 한 면이 드러난다. 인간과 우주 만물을 존중하는(RB 31,10 참조) 베네딕도 성인의 모습이 성경갈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무척 닮았다는 점이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하느님의 여러 다양한 모습들이 점점 하나로 모아진다. 사랑과 자상한 배려, 무서운 분노와 책벌의 하느님이 가진 ‘한마음’이 점점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한 신학생이 노아홍수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후회’에 대해 논문을 쓰고 싶다고 했다.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창조계를 다 파괴시킬 정도로 잔인한 하느님은 서로 모순이 아닌지. 성경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한 장면의 하나인 이 부분에서조차 과연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냐고. 성경 본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당신 손수 만드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하느님의 후회는 창조계에 대한, 더 깊게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와 사랑이 마주치는 곳이 되고 만다. 후회로써 분노가 터뜨려지고 동시에 그 후회 안에서 사랑이 제 본색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회초리로 자녀를 때리고 돌아서서 우는 부모의 눈물 같다고나 할까?”

 

성경 본문을 보면, 간접적으로 그러나 너무나도 과학적이고 정교한 문체로, 하느님께서 당신이 인간창조를 후회하여 홍수를 보내셨던 것을 대단히 후회하심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시기에 어떻게든 모든 이를 당신께 데려와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어 왼손 오른손을 다 동원해가며 온갖 방법으로 염려하신다. 그분은 특히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너무나 뛰어나시다. 나는 베네딕도 성인이 바로 이런 하느님을 깊이깊이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모습이야말로 베네딕도 규칙서 안에서 엄격과 자상, 원칙과 원칙에서의 이탈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원천적 모델이 되었다고 본다. 베네딕도 성인은 아마도 수비아꼬의 동굴에 성경 한 권만 들고 들어가지 않았을까하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생긴다.

 

베네딕도 성인은 자신을 죄인으로서, 또한 한계 속의 인간으로서 자각하면서, 용서하고 너그러이 참아주며,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하느님을 찾고 그 얼굴을 뵙고 싶어 했으며, 마침내 그 하느님의 마음과 행동을 닮아가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하느님 찾는 일에서 사랑의 감미를 느끼고 넓은 마음의 해방감을 얻었기에(RB 머리말 49 참조) 베네딕도 성인은 다른 영혼들도 그러한 행복에로 초대하고자 그만큼이나 열성을 부린 것 같다. 그의 하느님 경외가 이웃존중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기도와 성독을 그리 강조하고 시간경 사이사이에 노동을 배치한 것은 우리 삶 모든 곳에 하느님이 녹아드시게 하기 위함이요, 『스승의 규칙』을 벗어나 수도원 문을 활짝 연 것도 그리스도 바로 그분 때문이었으며, 물건을 세속 사람들이 파는 값보다 싸게 파는 이유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RB 57, 7 참조)

 

이런 견지에서 보면, 베네딕도 성인은 ‘성서적 인간관’과 하느님관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합쳐 살아낸 ‘성서적 인간’이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사람’이요, ‘참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찾은 베네딕도 영성의 핵심이다. 나는 ‘성서적 인간’ 혹은 ‘참그리스도교인’이란 말을, 마치 장아찌가 어느 부분이든 아주 조금만 씹어도 입 안 가득 장맛을 내듯, 성경과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푹 절은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고 싶다. 과연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에 푹 절인 ‘장아찌 수도자!, 장아찌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선의 위력

 

사실 베네딕도 성인은 전례를 발전시키라는, 큰 공동체를 이루라는, 혹은 특정한 사도직이나 그럴싸한 사업체를 세우라는 권고를 한 적이 없다. 대신 하느님의 마음과 행동을 비추는 모든 것을 자신의 삶 안에 그리고 수도규칙 안에 실었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하나가 된 것, 그것이 바로 달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이고 그 손가락의 힘이며, 그 영성의 여러 측면은 바로 이 하나에서 흘러나온다고 본다. 바로 이 힘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베네딕도 성인을 찾게 하고, 그레고리오 대교황을 감동시켰으며, 세기를 넘어서도 그의 영향력이 지속되게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현대인은 교리나 지식의 설명을 원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베네딕도 성인은 바로 그 일을 해내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는 하느님 안에서 사람들을 맞아들였고 사람들은 그런 성인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 하였다는 말이다. 큰일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작은 감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큰일을 낳는다. 큰일을 이루려 뛰어다니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반경 안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며 조촐하게 살았던 베네딕도 성인. 그러나 그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선의 파장과 저력이 어떠한지를 역사 안에서 증명해 내었다.

 

누구든 맞아들여질 때 기쁘고 순해지고 마음이 선해진다. 하느님 안에서 맞아들여진 느낌이 들면 크게 감동한다. 때로는 마음속에 핑그르르 눈물이 감돌기도 한다. 감동을 낳는 체험은 고통을 감수할 의지를 선사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성취 욕구에만 몰두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뿌리 없이 떠도는 인생, 주위에 감성적 오염을 주는 우울한 엄살, 탐욕을 부리는 폭력적인 마음들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선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 또한 주변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손님에게, 직원에게, 선후배끼리, 동료 간에 자기 욕심을 뺀 ‘맞아들임의 삶’을 산다면, 곧 ‘인간존중의 삶’을 산다면, 아마도 크든 작든,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암만 일을 잘해도 직원이나 신자들이 홀대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신뢰는 불신으로 변하고 거기에는 더 이상 복음이 들어설 자리, 하느님을 느낄 자리, 찬미할 자리가 없게 된다.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믿음의 적자를 낳을 시기

 

한국의 베네딕도회가 올해로 100살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낳을 때 나이가 백 살이었다. 백년 만에 다음 세대를 시작할 채비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스마엘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태도를 반기지 않으셨다. 토라의 참 정신, 하느님의 축복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서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살아갈 적자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때부터 아브라함에게 본격적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애지중지 집착하던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내고, 하나 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했으니 말이다. 성경은 여러 방식으로 아브라함이 힘겨워한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은총의 체험에 힘입어 자신의 틀을 과감히 깨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류 구원사에 굵은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우리도 이제 다시, 아무리 힘들망정, 유사 베네딕도회원으로 살기를 놓고 참 베네딕도회원으로 새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베네딕도회가 현대의 많은 문제들을 풀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카리스마는 비록 기질이 다르더라도 영성실현에 있어서만큼은 ‘베네딕도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선하심을 체험한데서 나오는 인간존중, 그리고 존중받음을 체험한 데서 귀결되는 하느님 체험’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과 거리가 먼 하나의 이상이 아닌가? 뜬구름 같은 꿈에 불과한 것 아닌가? 사실은 그 점이 나를 힘들게 했고 이 시간에서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자기를 아는 일, 자기를 바꾸는 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아는 것이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기적에 속한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휘돌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과연 불가능이 있겠는가. 우리 대장 예수님을 보고 사부 베네딕도를 보면서 용기를 낸다면 ‘혁신’은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한국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관해 아는 그대로, 우리 선배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도 훨씬 전에 이미 교육개혁과 전례개혁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참으로 과감하게 잘도 해냈다. 우리라고 어찌 그런 힘이 없겠는가.

 

사실 베네딕도 성인이 세웠던 공동체도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이었다. 규칙서를 보면 제 멋대로 해 문제를 일으키던 수도승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규칙서라는 안내판이 상당히 뚜렷하게 있었다(지원자에게 네 번 읽어준다. 그 외에도 전 공동체가 규칙서를 계속 읽으라고 말씀하신다. RB 66,8 참조).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이 거칠고 힘든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그들이 최종 갈망, 곧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하느님을 뵙는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좁은 길을 견뎌내라는 부탁을 하신다. 우리가 입회할 때 가졌던 첫 목적이며 여전히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갈망을 이루고 현대에 참 베네딕도의 영성을 선물하기 위해서는, 좁은 길을 선택할 과단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실상 지금의 우리 삶이 불만스럽거나 힘겹다고 해서 누구 탓을 하겠는가? 이것이 세상 탓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장상 혹은 공동체 회원들이나 공동체 조직의 탓인가?

 

 

꼭 필요한 여유

 

베네딕도회 한국진출 백주년을 경축하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면, 이 기회에 합심하여 우리 삶의 현장을 재점검하고 필요하다면 수술을 감행할 과단성까지도 지녀야 한다고 본다. 마치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다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말이다. 이제껏 쌓아온 업적이나 우리가 실천하고 있지 않는 영성에 긍지만을 갖고 매달려 있어서는 안되겠다. 작은 것에 매여 전전긍긍해서도 안 되겠고(어떤 분은, 우리가 혹시 베네딕도 규칙서가 아닌 스승의 규칙서대로 살고 있지나 않은지 묻기도 한다.), 큰일을 한답시고 영성이야 어찌 되었건 억지로 버티기만 하거나, 좋은 일을 한답시고 허겁지겁 정신없이 분주한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세속에 섞여서도 안 되겠다. 큰일과 좋은 일을 하되 베네딕도 성인이 존중하던 ‘내외적인 인간생체의 리듬’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켜 ‘필수적인 여유’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만 일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을 읽으며, 허덕거림을 벗어나 마음이 담긴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 다시금 더 시간을 내고, 안정된 눈으로 이웃을 쳐다보며 맞아들일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양성도 능력이나 지식 위주의 교육을 피하고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인품교육에 우선적으로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업적이나 활동보다는 우리가 가진 신앙과 인품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공동체 회원이 스스로 돕지 않으면 장상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말씨나 행동의 무례함이 인간존중에서 나오는 품위로, 인색함이 후덕함으로, 탐욕이 나눔으로(RB 57,8-9 참조), 여유 없음이 여유로 변할 때 수도원은 제대로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러면 구시대의 가치와 신시대의 가치는 서로 개방성을 지니고 무리 없이 연결되어, 세상에 베네딕도의 영성이 맑은 샘 줄기의 역할을 해주리라 본다. 진리는 결국 영원불변이니 말이다. 성 베네딕도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세기의 출발을 위해 도전하라고 격려한다. 우리 또한, 좋은 열정을 지니고 우리 시대의 모든 이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도록!

 

실상 천이백 명이 넘는 한국의 베네딕도 회원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 신선하게 자극하고 형제애로 도우면서, 과거의 대단한 역사의 발자취 못지 않게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백주년의 문턱을 넘어서 어제보다도 더 희망차게, 하느님의 도우심 아래 더 베네딕도다운 내적 충실성으로, 곧 하느님 섬김과 이웃 섬김의 마음가짐으로 그 희망의 발걸음을 내딛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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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베네딕도 협의회에서 베네딕도회원들의 영적 독서 자료를 위하여 매년 1회씩 발간하는 잡지.

 

2) 이 규칙서 모든 장은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답을 하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주께서 스승을 통해 대답하신다.”라는 말과 함께 스승의 대답이 시작되므로 스승의 규칙서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승의 규칙서는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3배에 달하며 규정이 매우 까다롭고 세부적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보다 먼저 저술되었으며, 베네딕도 수도규칙이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3)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성 안셀모 대학 교수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 해석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분도, 2009년 겨울호, 배은주 이사악 수녀(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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