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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大)와 다(多)의 실과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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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29 ㅣ No.283

[전하라! 땅끝까지] 중국의 대(大)와 다(多)의 실과 허



중국에서 자주 듣는 말이요 중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또는 대대익선(大大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크면 클수록 좋다는 말이다. 한국동란 중에 중공군들의 인해전술에 놀란 후로 우리는 중국인을 ‘떼(국)놈’들이라고 불렀다. 대국놈이라고 하려니 욕 같지 않고 오히려 칭찬 같아 자존심이 상해서 말을 비틀다 보니 떼국놈이 된 것이다. 십여 년을 중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은 우선 땅이 징그럽게 크고 넓으며 인구 또한 너무 많아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와 같이 느껴진다. 동서로 시차가 무려 4시간이나 되는 국토의 면적이니 그 크기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지난해 기준으로 지구 전체 인구인 70억 명에 비교하면 20%가 중국인이다. 지구상 인구 5명 중 1명꼴이 중국인인 셈이다. 중국인들 스스로도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런타이뚜어(人太多)”, 곧 “사람이 너무 많다!”라는 말이다. 이 말의 속뜻은 ‘내가 좀 편히 살려면 몇 억 정도는 좀 없어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표현이다. 항상 사람에 치이고 기다리고 밟히는 이곳에서 사람대접을 받기란 쉽지 않다. 중국인들이 움직이면 펄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대륙의 메뚜기 떼 같다. 열차역의 장사진, 항주 서호 뚝방길(蘇堤)의 인간띠, 상해 난징루의 길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을 보면 머리가 현란하다.

중국에는 사람이나 물건들이 많기도 하지만 또 큰 것도 많다. 클로버 잎은 무슨 상추 잎 같고 속이 귤 같은 데 수박만한 과일은 유자라고 부른다. 은행도 밤톨만하고, 생강은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오른 발가락보다 더 크다. 나라가 크니 문물이 참 다양하고 큰 것도 많은가 보다. 실제로 중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은 땅이 무척 넓다는 것이고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체 면적은 남한의 백배에 맞먹는다. 상해에서 다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우루무치로 날아가는 동안 다양한 중국의 지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국경을 접하며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만도 무려 15개나 된다. 때로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새파란 곡물로 덮여 있고 커다란 뱀인지 용인지 착각이 들 정도의 요염한 양자강과 황하강의 물줄기는 안개 속으로 사라져 아스라하다. 시속 300킬로의 고속철도를 타고 보는 풍경은 더 세밀하다. 콩과 옥수수 밭이 한 시간을 달려가도 멈추지 않고 눈이 온 줄 착각한 목화밭의 탐스런 모습에 숨을 죽이고 보는데 기차는 그 눈밭 같은 목화 평원을 30분이나 달려갔다. 계란만한 대추가 주렁주렁 달린 밭도 몇 십 분을 달려 뻗어 있다. 이러니 농작물 가격이 우리와 경쟁이 될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크고 넓은 중국 대륙의 문화 속에 십여 년을 살다보니 그 속에 실과 허가 보이고 대(大)와 다(多)라는 관념이 만들어내는 폭력성을 보았다. 중국인들의 사고방식 중에 공통적인 특징은 모든 선과 진리, 가치에 대한 평가를 우선 크고 넓고 높고 많은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많은 인구, 가장 넓은 땅덩어리, 가장 유구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아의식의 결과일 것이다. 그 자기중심주의적인 중화사상에서 발원된 중국인들은 최고, 최다의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 최대, 최다, 최고가 아니면 중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든다. 거식증에 걸린 미련한 거인인 양, 혹은 블랙홀처럼 세상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빨아 흡입한다. 사재기를 통해 세상의 자원(석유, 비철, 가스)과 식량(옥수수, 밀)을 전쟁처럼 전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는 중국의 세계화를 향한 행보에서 나온 전략이다. 경제가 받쳐 주고 달러 보유액은 미국보다 많으니 횡포를 부린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자기들의 목소리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성하려 들고 중국적 가치관을 세우려 들고 있다.

문화는 우열이 아니라 특성이다. 대소나 다소의 개념으로 판단해도 안 되고 미추(美醜)나 선악의 잣대로 분리해서도 안 된다. 문화는 현상이요 있음(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는 황제와 영웅의 역사이다. 거시사적 역사관에 묻혀버린 민초의 미시사적 역사, 통치자와 영웅만 있고 민이 없는 나라, 이것이 중국의 역사적 맹점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손해야 한다”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자신을 낮추면 작은 나라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자신을 낮추면 큰 나라가 그를 받아들인다”(노자 제61장)라고 말한다. 노자는 이러한 정신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말한 것이다. 노자는 소국과민, 곧 ‘작은 나라에서 각자의 노동력에 맞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는 사회 시스템’을 이상국가로 여겼는데, 지금 중국은 정반대의 길, 대량소비, 대량공급의 사회로 가고 있으니 공산당이 노자를 홀대하는 이유일 것이다. ‘작은 것을 섬기는 것은 어진 자의 행동이다’라는 맹자의 사소주의(事小主義)는 일본의 축소 지향적 사고와 다르며 큰 것만을 추구하는 중국적 사대주의와도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리적이고 인문적인 환경이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문제에까지 미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폭력성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개념은 사고를 형성하고 문화로 표현된다. 중국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대와 다의 개념에서 유출된 문화의 폭력성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많고 크면 그만큼 보편성을 확보하고 밀어붙일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과 우월주의는 타민족을 대하고 타문화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주관적으로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잣대와 척도가 진리 그 자체라는 의식 속에서 상대가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의 강권을 행사하고 있다.

가끔 한국을 다녀온 중국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대와 다의 잣대가 지니는 폭력성을 경험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상해에서 황산까지 다녀오는 거리이고, 한국 인구가 5천만 명이면 장쑤 성 인구는 9천만이라고, 경복궁은 중국 자금성의 백분의 일 정도도 안 된다고 떠들어 댄다. 한 나라의 문화적 가치와 의미는 모두 이 대와 다의 폭력성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만다. 중국인들의 대화방에 들어가 보면 문화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지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오천 년, 곧 반만년 역사라고 말하는데 자신들의 문자를 가진 지가 천 년도 안 되는데 무슨 오천 년의 역사를 말하는가?’라고 하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말한다. 감히 중국의 오천 년 역사에 맞먹으려는 소리냐는 것이다. 그들은 크고 넓고 많고 길다는 개념에 모든 판단의 잣대를 적용한다. 어느 중국 네티즌의 발언이다: “한국을 높이 사지 마라. 중국인의 마음은 넓고 지혜와 품성은 크다. 한국인들은 영원히 배울 수 없으니 과거의 역사에서나 미래에 한국은 영원히 중국의 뒤를 따라올 초등학생에 불과하다. 한국인의 협소한 특성은 영원히 소국과민에 머무르는 삼류백성일 뿐이다.”

중국인들에게는 그 크고 넓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가치 개념이 완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의 폭력이다. 각 민족마다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진행되어 온 역사는 각기 고유성을 지니는 것이고 존엄성을 갖는 것이다.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교하기 위해서 척도를 사용하는데 그 척도가 크다는 이유로, 많다는 이유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과 나눔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대와 다의 개념이 정말 진선미와 일치하는 것인가? 그 허상을 살펴보자. 중국을 상징하는 만리장성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큰 토목공사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지금은 일 년에 수백만 명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1500여 년을 쌓아 완성했다는 그 만리장성의 우매성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외세 침략을 저지할 목적이라지만 한 번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본 적이 없다. 이자성이 쳐들어올 때는 만리장성의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들인 공과 노력에 비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 발상인가? 공사 중에 죽어간 수많은 민초들을 빗대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말한다. 역대 왕조들은 장성의 보수와 확장공사로 고심했고 장성은 그야말로 애물단지가 된 멍청한 ‘큰 덩어리’였다.

또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1,764킬로를 흘러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수(隋)대의 징항대운하의 수로는 다 썩었다. 중국 하천의 80%가 5급수이다. 창장 강(長江)의 물을 황허 강(黃河)으로 끌어들여 남부의 홍수를 막고 북부의 가뭄을 해소하려는 ‘남수북조(南水北調)’사업은 완공에 앞서 이미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그리고 창장 강의 흐름을 막아 만든 싼샤댐(三峽댐)은 세계 최대의 규모라지만 역시 미래에 중국이 안고 갈 환경문제의 화약고이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빼고 말할 수 없는 ‘3대’가 있다. 대장정, 대약진, 대혁명이 그것인데 되돌아보면 모두 얼마나 어리석은 행정이었는지 역사 속에서 평가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의 대와 다의 개념이 만들어 낸 졸작들이다. 크다고 많다고 진과 선과 미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중국은 지금 ‘위대한 중국’, ‘대당(大唐)’을 꿈꾸고 있다. 과거 당대의 번영 경험을 되살려 중국의 세계화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다. 문화의 포용력이 없고 공존의 가치를 모르는 중국은 자신들의 대와 다의 무기로 세계를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만의 발상일 뿐이다. 중화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에 푹 젖은 중국인들은 ‘세계 최고, 최대의 중국’이라는 구호에 매료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허상일 뿐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중국’은 없다.

중국 친구들과 대화하는 중에 유럽을 다 합쳐도 중국보다 작고 인구도 자신들보다 더 적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중국이 앞으로 유럽을 능가할 수 있고 그것이 마치 코앞에 다가온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지만, 패권주의는 언제나 실패했음을 역사는 묵묵히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인은 스스로를 ‘용의 자손(龍的傳人)’이라고 칭하지만 인류의 미래에 난폭하고 무식한 한 거인이 삽자루를 휘두르고 달려 나오고 있는 듯하니 불안한 마음뿐이다.

[땅끝까지 제82호, 2014년 7+8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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