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1945-1953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6 ㅣ No.818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 1945~1953

 

 

1. 들어가는 말

 

한국 현대사에서 ‘명동 성당’으로 대변되는 한국 천주교는 민주화운동의 산실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뿐 아니라 천주교회가 권위주의 정치에 대해 ‘비판자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가 민주화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해방 이후부터 견지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방 직후 천주교회는 정치와 밀착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것은 노기남 주교의 해방 이후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노기남 주교는 해방 이후부터 제1 공화국 시기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천주교의 정책, 방향 등을 결정하는 데 주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세인식, 시국인식, 그리고 이것에 기반한 활동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계층적인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천주교의 종교적 특성으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는 6·25 전쟁기에 신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1) 이와 같은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인 대표적인 인물 또한 노기남 주교였다.

 

노기남 주교는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적극적으로 개입, 참여하였다. 그의 정치 참여 논리는 ‘현실참여론’과 ‘반공주의’가 결합한 것이었다. 노기남 주교의 현실참여론은 ‘종교라고 하여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고 현실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서야 한다’는 논리였다.2) 그리고 그의 반공주의는 철저한 공산주의의 배격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거나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해야 하며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박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의 대표적인 반공활동은 해방 직후 미군정과 이승만, 김구와의 친밀한 관계, 신탁 통치 반대, 반공단체 결성, 《경향신문》 발간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공활동은 6ㆍ25 전쟁기 동안 신자들에게 전쟁 전보다 많은 통제를 가하게 되면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천주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권위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의 결속력이 공고했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3) 그리고 이러한 특성 등으로 인해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강력한 반공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4)

 

현재까지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기까지 노기남 주교의 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노기남 주교의 활동을 한국 천주교의 대부로서 한국 천주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이다.5) 두 번째는 해방 이후 적극적인 ‘정치 참여’로 인해 교회가 정치와 분리되지 못하고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이다.6)

 

본 연구는 기존 연구들을 토대로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기 동안 노기남 주교가 전개시킨 반공활동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의 반공주의의 성격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해방 이후부터 전쟁기, 즉 1945년부터 1953년까지로 한정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가 대한민국에 있어서 반공주의가 강하게 형성되어 자리를 잡게 되는 때이며 동시에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 내용과 성격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2. 해방 직후 노기남 주교와 미군정의 우호관계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당일 노기남 주교는 일제 항복의 원인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가공할 신형 고성능 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가로 일제의 저항이 불가능하게 된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7) 그러므로 8월 16일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온다는 소식에 신자들과 학생, 신부, 수녀들까지도 소련군 환영을 준비하자 그는 소련군을 연합군으로 그리고 개선장군이 입성하는 것으로 교회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허락하였다.8) 이와 같이 해방 직후 그는 사태를 관망하며 상황에 ‘맞추어 가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아마도 일제시기 친일 활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군 환영식이 해프닝으로 끝나자 그는 교구 내 신자들에게 고유서를 통해 해방 후 첫 공식 입장을 발표하였다.

 

… 세계의 참담한 전쟁을 긋치고 이제 우리 조선에도 새로운 질서가 성립됨에 이르른 현금 시국은 우리 앞길에 중대한 관계를 좌우하는 열쇠를 잡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야 극력 자중하는 동시 새로운 우리의 정당한 정부가 조선 내에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하여… 매일 기구(祈求) 드리기를 명하노라.9)

 

고유서 내용의 핵심은 자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경솔한 행동을 삼가고 신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기남 주교는 적극적으로 특별기구 설치를 시도하였으며, 8월 19일 시내 각 유지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운동’ 준비위원을 결성하였다. 이후 그는 수시로 신부들과 교우들을 소집하여 시국의 동태를 세밀히 살피는 한편 정국을 관망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10) 초기의 정국 관망 자세는 미군의 진주와 함께 적극적인 참여의 자세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사회질서 회복을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11)

 

노기남 주교가 미군들과 친밀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15명이 명동 성당에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한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미군과 함께 진주한 스펠만 주교가 노기남 주교와 명동 성당을 방문하면서 미군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강화되었다.12) 노기남 주교가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미군이 한국에서 양심적이며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노기남 주교를 지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미군은 한국 사정에 밝지 않은 상태에서 신뢰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가톨릭, 개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을 지목하였다. 이에 9월 9일 미군정의 하지 중장의 고문 나이스터 준장은 노기남 주교에게 일을 맡아 할 지도자로 한국 정치인 60인을 추천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우리 미군 장성들은 한국인 지도자는 잘 모릅니다, 누구에게 의논해야 할까 생각한 끝에 제 일착으로 노 주교를 오시라고 한 것입니다.…13)

 

이것은 미군들이 서양 종교인 가톨릭 종교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는 것으로 우호적 관계 형성의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기남 주교는 장면과 상의하여 60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이 60명의 명단에는 대체로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김병로 등의 한민당계 인물이 다수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단을 전하면서 “혼란한 시국을 속히 진정시켜 줄 것과 좌익계열의 민심 선동 및 모략 선전에 특별 조치를 취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14) 이와 같이 그는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정계에 진출할 인물을 추천해 주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군 진주와 함께 반공을 내용으로 하는 노기남 주교의 발언은 점차 증가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유물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적화운동을 공공연히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심을 교란키고, 민족을 분열을 일삼는 것을 막고, 한국의 완전한 민주국가 건설과 적색마수의 공세를 분쇄해야 한다”며 좌익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15) 그리고 신자들에게 순교정신을 가지고 반공투쟁에 나서기를 호소하는 한편, 뜻있는 신자 유지들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인 한민당에 가입하여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서기를 격려하였다. 이와 같이 노기남 주교는 반공활동과 정치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미군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기본적으로 종교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1945년 9월 26일 미군을 자유해방의 사도로 규정하는 한편 미국군의 세계평화 완성을 진심으로 경축한다는 환영사16)와 11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모든 미군의 영령을 위한 대미사 거행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미사에는 하지 중장, 아놀드 군정장관 및 미군장병들이 참석하여 대성당이 초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후 명동 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는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30분에 미군 미사를 집전하였다.17) 그러므로 이들 행사를 통해 노기남 주교는 미군 장성, 장병들과 친교를 맺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노기남 주교는 천주교 신자들을 미군정청이나 정계로 진출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18) 그는 미군에게 해방정국을 이끌 60명의 우익 인사를 추천해 준 것을 필두로 장면, 장발(장면의 친동생)을 미군에게 추천하여 등용하게 하였다. 1945년 11월 28일 학무국 과장으로 장발을 임용하는데 이는 노기남 주교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19) 그리고 장면의 정계 진출을 강권하며 1946년 2월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에 천주교 대표로 참여시킨 것도 노기남 주교였다.

 

한편 노기남 주교는 이승만과 김구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1945년 11월 15일 이승만을 예방하고 환담을 나누었고, 이 자리에서 이승만 또한 윤을수 신부와는 독립협회에서 같이 활약했었다며 천주교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20) 이와 같이 해방정국 초기 노기남 주교의 행보는 미군정, 우익 정치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반대로 좌익의 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노기남 주교의 반공활동이 단체활동으로 드러난 것은 반탁정국에서였다. 1945년 12월 28일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남한은 반탁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노기남 주교는 당시 모스크바3상회의안을 ‘위임통치’로 이해했다.21)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긴급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찬동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12월 30일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신탁통치 반대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방침을 논의하였다.22) 그리고 그의 반탁 활동은 김구 임시정부의 활동지침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한 내 정치 세력은 좌우로 극명하게 나뉘어 대립하였고 해방 직후 제기되었던 친일 청산의 문제는 찬탁과 반탁의 문제에 묻히게 되며,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으로 세력이 재편되는 양상을 보였다.23) 그리고 그런 작업에 일조를 한 것이 언론매체였다.

 

노기남 주교는 1946년 8월 1일 《경향잡지》를 주간으로 복간하였을 뿐 아니라 8월 하순에는 좌익의 기관지인 《인민보》를 발간하던 정판사의 인쇄 시설을 《경향잡지》에서 인수할 수 있도록 미군정과 교섭을 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미군정으로부터 《경향신문》 창간호의 발행을 인준받았다. 《경향신문》은 사시로 시시비비를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반공지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창간되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대부분이 사상적으로 좌익 또는 우익에 편향되어 있어 각자 일방적인 자기 측 주장을 고집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무조건 공격하기가 일쑤여서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경향신문의 논조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신문 발행을 처음 인준할 때 시시비비를 사시로 정하는 동시에 유물, 무신, 공산주의 사상을 결사 배격할 것도 사시로 택했던 것이다.24)

 

《경향신문》은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었을 때 적극적으로 반탁노선을 취하여 좌익의 찬탁 운동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고, 1947년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됐을 때에도 이를 적극 지지하였던 언론이었다.

 

공산통치하에 있던 연길교구와 북한 지역 교구의 소식 또한 노기남 주교와 천주교회의 반공주의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연길의 소련군과 중국 공산군의 종교탄압은 연길교구에서 피난 온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국내에 유포되었다. 박해의 내용은 ‘교회 재산은 적산으로 취급하고 몰수한다는 내용’과 ‘일반 신자의 신앙을 억압한 사실’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반소, 반공 정서를 강하게 만들었다. 점차 연길의 교회와 많은 공소들이 중공군의 강압에 못 이겨 이미 배교했다는 종교탄압의 소식과 북한 교구에서도 비슷한 억압의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25)

 

이미 1947년 7월 서울 시내 유지 교우들과 북한에서 온 교우들은 서로 규합하여 노기남을 총재로 하는 ‘전재교우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전재지 가톨릭교회와 이재 교우의 상호연락, 친목, 협조 원호 운동을 실천함을 목적으로 하였다.26) 그러나 월남한 가톨릭 신자들의 활동은 이북가톨릭신도대회를 개최하는 등 종교를 억압하는 소련의 정책을 반대하며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등 반공 강화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27) 뿐만 아니라 월남 신자들의 조직 결성과 단체 행동은 천주교 내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반공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노기남 주교는 이러한 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는 지원자였다.

 

노기남 주교의 반공활동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UN에서 총선거 실시가 결정되고 UN한국임시위원단(이하 UN한위)이 서울에 들어오자 그들을 맞이하는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총선거를 위한 ‘교회대표 추천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장면을 추천, 활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시 제기동, 영등포, 약현 성당 등의 신부들을 방문하여 총선거에 대한 협력을 협의하였다.

 

1948년 1월 11일에는 시내 교우 ‘선거대책위원회’를 개최하여 선거 실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UN한위 대표와의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었다. 노기남 주교는 종교 대표자로 UN한위 제2 분과위원회와 면담을 가졌으며 이 위원회에서 남한의 정치상황과 공산주의와 타협할 수 없음, 그리고 그와 같은 이유로 빠른 시일 내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 주장하였다.28) 즉 1948년 2월 UN한위 제2 분과위원회에 참석한 노기남 주교는 “소련이 단일정부 수립을 원치 않기 때문에 미소공위가 실패한 것처럼 소련과의 협력 하에 추진되는 일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소련은 UN의 한국에 대한 결의안의 이행이나 위원회의 업무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최선의 방법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가능한 빨리 제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키는 것”이라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대한 강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정부의 형태는 ‘민주원칙’에 입각한 민주정부이며, 공산체제와 민주체제 사이의 타협은 없을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독’뿐이다. 이는 사람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대단한 해를 가하며 나라를 러시아인의 ‘코드화’를 초래할 뿐이며 이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29)

 

나아가 노기남 주교는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야 하는 상황에서는 타협이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아는 사안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반대를 할 것이다. 그것이 소비에트의 원칙이다. 평화를 이룩하기보다는 파괴하는 것이요. …공산주의자들과 공조하는 것은 열매 없는 꿈에 불과하다”며 본인은 천주교 주교로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만일 공산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게 된다면 사실상 종교의 자유는 없을 것이며 박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만주와 북경, 북한에서 공산주의 탄압과 배교를 강요받고 있는 상황을 예로 들어 만약 남한에 공산주의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허용된다면 이는 종교적인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으며, 공산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30)

 

그리고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강력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는 총선거 실시일이 가까워지자 “공산주의자의 회개와 강제 노동하는 이들의 자유를 위해 기구할 것과 총선거를 순조롭게 성공하게 각 정당에 특별 기도를 요청”하는 공문을 서울교구에 보냈다.31) 선거가 임박하자 그는 자신의 ‘현실참여론’에 입각하여 신자들의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천주교 신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당시 노기남 주교가 “이러한 정세로 보아 불원간 장래에 저 악마적 유물론 공산주의는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야 말 것이라 봅니다. 따라서 세계평화도 머지않아 있을 것이요, 한국의 완전 통일과 평화도 머지않았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공산주의에 대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고 불원간 세계 평화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데서 그가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공산주의 요소를 척결하는 것이라며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강력한 반공 태도를 보이고 있다.

 

 

3.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가 건설에의 참여

 

1948년 노기남 주교와 천주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것은 이승만과의 친밀한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천주교회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반공산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이라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치적 선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었으며,32) 이것은 교회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 결성 노력으로 이어졌다. 5·10 총선 실시가 결정된 때부터 노기남 주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시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총선 지지와 천주교 신자의 국회 진출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노기남 주교 자신도 다시 UN한위와 면담을 갖고 남한만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포교의 자유 등을 피력하며 반공 태도를 확고히 견지하였다.

 

5·10 총선 이후 노기남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미사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집전하며 신생 국가 건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8년 6월 20일 이승만을 비롯한 제헌의원들을 명동 성당에 초대하여 독립 기원 미사를 거행하고 국회의원 환영다과회를 준비하여 ‘국가 건설’을 지지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날, 노기남 주교는 민족적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15일부터 20일까지 독립 선포 감사미사를 봉헌하는 동시에 조국애를 강조하는 강론을 하였다.33) 나아가 1948년 12월 유엔에서 한국정부를 승인하자 그는 명동 성당에서 한국 유엔승인 감사 강복제를 거행하며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의 발생과 성모의 ‘은혜’와 천주의 ‘보살핌’을 연결시키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 열강국의 일원인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여 대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금년 12월 8일 UN총회에서 한국 문제가 결정을 보게 됨을 생각할 적에 성모마리아와 한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잊지 말고 우리는 성모의 은혜를 감사하여야 된다. …한국이 승인을 받았다 함은 유물론인 무신론과의 싸움에 있어 유신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을 타파하는 최후 단계에 이르렀다.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며 남북통일을 급속히 실현하도록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34)

 

그는 유엔에서의 한국의 승인은 천주의 각별함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것은 무신론과 유신론의 싸움에서 유신론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며, 한국 승인을 사상전, 종교전의 승리로 보고 있다. 그리고 1949년 5월 15일 남북통일 기원 대미사를 집전하는 한편, 12월에는 이북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유물 공산주의자들이 유엔총회에서 참패에 참패를 거듭하고 있으며, 멀지 않아 저 ‘악마적’ 유물론 공산주의는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말라는 방송을 하였다.35) 점차로 노기남 주교의 공산주의에 대한 발언은 악마적이라는 용어에서도 보이듯이 종교적 관념으로 선과 악을 대비시켜 ‘악’의 요소로 설정, 비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노기남 주교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UN한위 제2 분과위원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하여 강경한 반공 태도를 보였다. 이미 그는 1948년 3월 남북통일과 대한민국 정부 육성에 대해 UN한위와 협의하며 “한국의 통일 문제는 미 · 소의 협조로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수 년간의 경험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고,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이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강화에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종교인으로 원하지 않지만 전쟁도 필요하다”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나 북한과 협의 하에 통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닌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36) 그리고 이북 정권을 소수의 독재자에 의한 괴뢰정권이라고 보고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는 짧은 시간이지만 발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정부는 국민들의 사상 통일 및 민생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정부 옹호 발언과 종교, 사상적 강화를 강조하며 북과 대치되어 있는 긴장 상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37)

 

1949년 4월 노기남 주교는 명동 주교관에서 서울, 대전, 대구, 전주, 광주, 춘천 등 6교구장들을 소집하여 교구장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당시 헝가리 공산당의 민첸티 추기경 사형 판결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 열렸는데 여기에서 주교들은 인권과 자유와 종교 옹호를 위한 반공 투쟁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항상 인권을 유린하고 언론과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는 비인도적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바이다. 철의 장막 내에서 상투적으로 계속되는 종교 탄압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여 왔지만 헝가리 공산당에서 민첸티 추기경에 대해 취한 독선적 공판에 관해서는 정의의 의분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동 공판은 가톨릭 교회를 전복시키려는 조작으로서 문명 사회에 있어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폭행으로 규정하는 바이다. …방금 UN총회에서는 인권을 옹호하는 유엔헌장에 비추어 민첸티 추기경 문제를 토의하기로 된 것을 지당하다고 인정하며 그 국제 심판대 앞에서 머지않아 공산주의의 비행이 규탄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천주교회 교구장 회의에서는 민첸티 추기경의 처형을 절대 반대하며 인권과 자유와 종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음모와 과감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세계의 자유 인민에 선언한다.38)

 

헝가리의 민첸티 추기경의 사형 공판 사건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당시 국제 정세가 이념적 대립이 극심했음을 보여 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 정세는 이념적 대립의 최전선에 있었던 한반도에 그대로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강화에 일조를 했다. 게다가 월남하는 이북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그들이 느꼈던 종교적 탄압에 대한 직접 체험은 반공활동을 빈번하게 만들었다.

 

1949년 6월 로마 교황청은 북한에서 “가톨릭 주교 1명과 40명의 교도를 체포하였으며 이 체포된 교인들이 현재 원산에 구금되어 있다”고 전하며 북한 공산 집단이 가톨릭을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39) 그리고 바티칸은 1949년 7월 공산주의자들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파문을 선고한 상태였다.40) 당시 주한 교황 사절 대표인 번(P. Byrne, 方溢恩) 주교는 소련 지원 하에 북한에서의 교회 활동의 억압은 구미의 각 공산주의 단체가 취하고 있는 공공연한 종교지도자 탄압 운동이라고 통렬히 비난하며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노기남 주교의 행동과 일치된 소리를 냈다.41) 그리고 1950년 6월 17일에도 번 주교는 북한 억류 천주교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현재 한국인 신부 및 교도들은 보통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광산 기타 중한 강제노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다. 수감 후 1년이 지난 오늘 뽀니페이스 사우어 주교와 다른 2명의 독일인 신부는 옥사한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는 소련 및 기타 공산당국에 대하여 이들 무고한 사람들은 관후히 대우할 것과 이들은 석방하여 본국 독일로 환국시킬 것을 가능한 온갖 방법으로 제정해왔다.42)

 

한국 천주교회는 1949년 8월 비상시국에 대처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의 행동 통일과 반공의 선봉으로서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며 대한천주교총연맹을 결성하였다.43) 이 단체는 노기남 주교를 총재로 하고 “사회 전 부문에 걸쳐 가톨릭 정신을 보급하자”는 기치 아래 전국의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남녀노소를 포괄하는 평신도 ‘가톨릭 운동’ 대표 단체로 출범하였다. 그리고 서울교구 연맹 결성을 계기로 다른 교구들도 9월 하순 결성을 시작으로 조직을 확대, 체계화하였다.44)

 

《경향잡지》 또한 1949년 11월 사설에서 공산당원들은 “거짓말만 퍼뜨려 민심만 소란케 하는 공산당의 기관지”를 “민중 속에 한 장이라도 더 침투시키려 갖은 위험과 곤란을 무릅쓰고 분투 노력까지 하지 않는가?”라며 경각심을 촉구하면서 “만일 가톨릭 운동의 하부 기관은 아무 위험이나 난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기관(주교회의)의 지령쯤이야 묵살하여 나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가톨릭 운동이란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라며 신자들이 《경향잡지》를 제대로 구독하지 않는 현상을 비난하였다. 당시 가톨릭 운동의 핵심은 바로 공산주의 세력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언론 매체들을 통해 정신 강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월남한 평양교구 신도들도 11월 6일 명동 성당에 모여 북한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북한 교회의 지원 방안 등을 모색하는 태도를 보였다.45)

 

이 시기 반공주의 강화의 분위기와 맞물려 노기남 주교는 북한에서도 남한과 같은 자유 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남겨두고 있는 100석 의석을 채우는 방식의 UN 감시하의 선거 실시를 강조하고 있어 평화 통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UN한위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의 만장일치의 의견이라며 아래와 같은 편지를 레이크 석세스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총회에 직접 발송하기도 하였다.

 

…선거에서의 대단한 성공은 전 세계에 우리의 민주 정부로의 선택이 틀림없는 선택이었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우리의 북쪽의 동포들이 공산주의의 억압적인 규칙으로 인해 선거에서 실제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자유가 허락할 때 국제연합에 그들의 대표단을 기꺼이 보낼 것이라고 따라서 국회의 약 1/3의 의석을 그들의 것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국은 마침내 국제사회 속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너무나 오랫동안 누리는 것을 금지해왔던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대의명분을 위해 계속 일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 교황의 회칙과 신성한 신념의 교의로부터 진실되고 지속적인 평화와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은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서만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형제애를 알게 하는 진정한 민주적인 특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46)

 

노기남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만이 옳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올바른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천주교인들이 각 분야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시키기를 기대한다며 현실참여적 입장을 보였다. 1950년 3월 국가와 사회 재건을 위해 사회 질서를 강조하는 내용을 신자들과 국민들에게 ‘대한 천주교 주교 일동’으로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47)

 

 

4. 6 · 25 전쟁과 반공사상 강화 활동

 

전 세계적으로 천주교회는 1950년대 전후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으로 정의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공공연히 자임하고 있었다.48) 이러한 세계 천주교회의 인식은 대한민국의 천주교 수장인 노기남 주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전쟁기간 동안 노기남 주교의 반공활동의 기본인식은 신을 부인하는 공산주의와의 사상전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전승 기원미사 거행을 비롯하여 전쟁 중 군인들의 사상 강화를 목적으로 군종신부제를 설립한 것 등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진행한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전쟁 발발 당시 노기남 주교는 로마에서 열린 聖年 행사로 교황 비오 12세 알현을 위해 로마에 있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옹진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프랑스 한국 대사관에서 서방 세계에 전쟁의 원인이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이 먼저 침략을 도발했다는 내용의 프랑스 언론을 접하고 노기남 주교는 프랑스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였다.

 

나는 대한민국 가톨릭 서울 교구장으로 있는 노기남 주교입니다. 금년 성년을 맞아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잠시 파리로 들렸다가 국내의 전쟁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주불공사는 공석 중입니다. …어느 바보 같은 사람들이 사흘 만에 자기 나라 수도를 빼앗기는 전쟁을 시도하겠습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국을 먼저 침략하는 전쟁을 보았습니까? 역사상에 그런 전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국군에게는 한 대의 탱크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군은 수백 대 탱크를 앞세우고 지금 남한 땅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49)

 

그는 전쟁이 북의 남침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세계 언론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한편 국내로 돌아올 방법을 강구, 9월 14일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정부 요인 장관들과 대통령에게 귀국 인사를 하고 전쟁 동안 입은 성당의 피해 상황을 점검하였다.그리고 이후 적극적으로 반공 담화를 발표하며 공산주의의 잔혹성, 기만성 등을 강조하였다. 1950년 11월에는 “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며 천주교 신자들에게 궐기문을 발표하였다.

 

…친애하는 가톨릭 신자 여러분! 삼천리 강토 안에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고 전 세계에 평화와 질서가 서기 위해서는 저 공산주의 사상을 분쇄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황의 뜻을 따라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기구와 보속하는 동시 이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맹세합시다.50)

 

이 궐기문은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세계 평화를 공산주의와는 무조건 싸워 이겨, 없애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전쟁은 중공군의 참여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이며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1950년 12월 8일 중공의 침략과 관련 난국을 타개하고자 ‘성모무염시인 모태 대첨례날’인 8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기도를 드리게 하는 한편 명동 성당에서는 노기남 주교 집전 하에 장엄한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는 믿음의 힘으로 국난을 타개하려는 종교적 염원이었으며 신자들의 정신 무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오는 8일은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종교적 또는 민족적으로 잊지 못할 날임에 이날을 맞이하여 애국 동포 여러분은 조국의 역사를 지키는 역군이 되기를 맹세하며 특히 종교인을 순교의 정신으로 조국의 국난을 타개하여야 할 것입니다.51)

 

전쟁기간 동안 노기남 주교가 강조한 것 중 하나 역시 순교정신이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다시 순교정신을 강조하여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순교하여 지킬 것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이를 위해서는 반공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주교회는 6·25 전쟁을 반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전쟁,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종교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신자들에게는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멸공구국의 십자군’이 되자고 역설하는 한편 평화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여,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2)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포용이나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철저한 반공주의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25 전쟁을 반공사상전으로 인식한 천주교회는 개신교 측과 함께 국군장병에게도 사상강화와 정신무장이 필요하고, 유엔군처럼 신앙의 무장을 위한 군종 활동이 절실함을 정부에 역설하며 군종제도 실시를 추진하였으나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방문하여 군종제도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50년 1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종제도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국방부에 하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1년 2월 7일 육군본부 인사국에 이후 군목과로 명칭이 바뀌는 군승과가 설치되었다.53) 이후로도 노기남 주교는 1951년 4월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회를 시작으로 군종신부 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군종신부의 입대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군종신부 증원에 적극적이었다. 1951년 43세의 나이였던 조인원 신부는 “주교님의 부름을 받고 찾아뵈었더니 주교님의 말씀이 이번에 국군에 채플린제도가 창설되어 젊은 신부들이 입대하게 되었으니 군 신부로 입대하여 그들을 잘 돌봐달라고 하시기에 이의 없이 승낙했다”고 전하고 있다.54) 한편 노기남 주교는 ‘종군신부 전교사업 대구후원회’를 결성하여 군종신부를 지원해 주고 군에서 군종신부 훈련 수료식이 거행될 때마다 주교들이 참석하여 신부들을 격려하도록 하였다.55)

 

군종신부는 1951년 2월 28일 제1기로 11명의 신부가 입대하였으며 이들은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무보수 촉탁문관으로 임관되어 4월 초 전후방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배속된 사령부의 군종부에서 활동하면서 매일 각 부대들을 순회 방문하여 반공정신 강화를 내용으로 훈화를 하는 것 등이었다.

 

…나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대대, 소대, 포사령부, 의무대 등을 순회하며 반공 정신 훈화를 실시했고, 미 군종신부의 요청으로 인근 제111부대에도 매주 1회 출장, 카츄사들에게 정신 훈화를 하였다.…56)

 

이와 같이 노기남 주교는 전쟁이 발발하자 일반 신자들뿐 아니라 최전선에서 전쟁을 담당하고 있는 군인들의 사상 강화를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이것은 군종제도의 실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1951년 1월 하순 이승만 대통령은 노기남 주교에게 장면의 국무총리 수락 요청 건으로 방문을 청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장면을 설득하여 국무총리직을 수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부, 이승만과의 밀착 관계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꾀하여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려 했던 부산정치파동 이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이 국민투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민국당과 장면 총리와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57) 이것은 1952년 4월 21일 장면 총리 사임으로 연결되었다.

 

1952년 정치 파동을 기점으로 장면과 이승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자 교회와 노기남 주교 또한 이승만과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58) 즉 부산정치파동 시기의 발췌개헌안을 반대하며 장면 총리와 이승만 대통령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노기남 주교도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긴 것이었다.

 

초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52년은 피난지 부산에서 대통령 선거 제도의 개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 때문에 큰 정치적 파동을 겪어야 했던 해이다, 이 와중에서 이 대통령과 장 박사의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그것은 나에게까지 파급되어 나에게는 ‘야당주교’ 또는 ‘정치주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59)

 

이와 같이 1952년 이후 노기남 주교의 친정부적, 친이승만적 태도는 변하였다.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장면을 지지해 왔었고, 노기남 주교는 장면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면의 반정부, 반이승만적 태도는 천주교회와 노기남 주교도 자연히 같은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 1952년 이승만은 노기남 주교가 평양 출신이며 천주교는 안창호의 흥사단과 같은 조직이라며 노기남 주교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60) 이 시기 노기남 주교가 야당주교라 불려진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노기남 주교의 ‘현실참여론’이 야당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변했지만 그의 반공주의는 강조되었다. 전쟁기 그는 반공활동으로서 대체로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상 강화 강론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군부대를 방문하여 군종신부와 군인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하면서 반공활동을 전개시켰다.

 

한편 전쟁기 노기남 주교는 미국에서 보내온 원조 물자 분배에 주력하였다.61) 즉 1950년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스펠만 주교는 당시의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힘을 합하여 미국의 천주교회 연합기관인 N.C.W.C.(미국천주교회전쟁부흥위원회) 구호부를 통해 미국의 모든 천주교인에게 추수감사절을 전후하여 한국인을 구제하기 위한 금품, 의류, 식량 등을 희사하는 운동을 선창하여 구호물자를 모집하였다. 이것은 미국 내에 있는 각 종파의 종교단체로부터 한국에 보내온 구호물자와 L.A.R.A.(미국종교단체구제사업협회)를 통해 들어오는 구호물자 원조 총액 중 천주교로부터 제공된 것이 그 전액의 7할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이었다.62)

 

이와 같은 원조 활동은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 천주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였고, 천주교회 교세 확장과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조 활동은 친미적 태도와 반공주의 강화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5. 나가는 말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에게 한국인의 당면 과제였던 ‘국가건설’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서구식 민주주의, 건전한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는 건전하지 못한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신국가 건설의 시기에 있는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는 한국적 상황에만 의거한 것은 아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천주교회가 강한 반공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와 한국의 주교인 노기남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한국에 수립될 국가는 철저히 반공주의에 입각한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그의 반공주의는 더욱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노기남 주교의 해방 이후 반공활동은 대체로 가톨릭 신자 중심의 순교정신과 사상 강화 활동, 천주교회 내 반공단체의 결성, 해방정국에서 반공활동을 전개시킨 단체에의 참여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종교단체이자 강력한 반공단체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해방 이후 전쟁기 동안 친미적, 친이승만적, 친정부적, 친유엔적 태도를 취하며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반공활동과 친정부적 태도는 천주교회를 종교단체의 특성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중립적, 초월적 태도를 약화시키고, 정치 이슈에 민감한 단체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노기남 주교는 당시 종교 지도자로서 무신론을 주장하며,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해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 반공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는 세계사적인 측면에서의 천주교회의 반공주의와 노기남 주교, 한국 천주교 교회, 천주교인들의 반공주의에 대한 영향의 상호 과정, 상호작용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이라는 과제가 있다. 이와 같은 전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와의 상호 작용의 관계 등이 제대로 고찰되어야 이후 1970, 1980년대 천주교회의 민주화 운동의 지지세력으로서의 자리매김에 대해 연속성 있는 설명이 가능하리라 보이기 때문이다.

 

-----------------------------------

1) 해방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는 서울, 대구, 평양, 함흥, 연길, 전주, 광주, 춘천의 8교구와 7명의 주교와 2명의 교구장을 비롯하여 신부로는 프랑스인 38명, 독일인 54명, 애란인(아일랜드인) 10명 등 외국인 도합 102명, 조선인 132명, 수사로는 독일인 43명, 조선인 13명, 수녀로는 프랑스인 13명, 독일인 37명, 조선인 332명, 교우 총수로는 예비자까지 합하여 18만 3천여 명이었다. 그 신자는 남한에 13만 명, 북한에 5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신자 수는 22만 명으로 증가하였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 연감》, 1956, 34~35쪽).

 

2) 노기남 주교는 그 스스로 “나는 종교도 현실과 유리되어서는 안 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서야 하는 이상 종교인도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국가 민족과 사회를 외면하고 현실을 떠나 있는 종교인은 민족과 사회를 위해 진실한 기구(祈求)를 드릴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라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현실참여 인식과 활동은 노기남 주교를 ‘정치주교’로 불리게 하였다(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158쪽).

 

3) National Intelligence Survey, 41B, Section 43, Reoprt Title : Religion, Education, and Public Information, 1958. 3. 1, pp. 11~12.

 

4) 조광, <8·15 광복과 천주교회>, 《교회와 역사》 170, 1989 ; 강인철, <천주교는 반공이데올로기 강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나 - 한국전쟁기를 중심으로>, 《사회평론》, 1992. 9ㆍ10 ;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5) 김수태,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 한국인에 의한 천주교회의 발전을 바라며 ->, 《노기남》,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노 주교는 언제나 교구행정을 현실적인 바탕 위에서 이끌어갔다. ; 박도원,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6) 나정원, <한일합방이후 한국가톨릭 지도자들의 국가관 연구 - 노기남 주교 이전, 재임시기와 사회교리 : 1910년부터 1968년까지>, 《가톨릭 사회과학연구》 16, 2004 ; 강인철, <한국전쟁기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발전에 대한 종교인의 기여 -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 최종고, <제 1공화국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사 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7)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1, 1941~1947, 1945. 8. 15

8)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1, 1941~1947, 1945. 8. 15 ; 노기남, 《당신 뜻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178쪽.

9) 《경향잡지》 1946년 8월호, 7쪽.

10) 《경향잡지》 1946년 8월호, 7쪽.

11) 박도원,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64쪽.

 

12) 교황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개인 특사인 스펠만 주교는 미24군단과 같이 상륙하여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스펠만 주교는 한국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전쟁 기간에는 원조 지원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매일신문》 1945년 9월 9일자).

 

13) 노기남, 《당신 뜻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182~183쪽.

14) 노기남, 위의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183쪽.

15) 노기남, 위의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187~188쪽.

16) <조선천주교회, 독립감사미사와 미군환영식 거행>, 《매일신문》 1945년 9월 26일자.

17) 《경향잡지》 1946년 8월호, 49쪽.

 

18) 노기남 주교는 해방 정국과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천주교 신자 중 정계에 나가 활약할 인재가 없음을 자주 안타까워했다(노기남, 앞의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182~183쪽).

 

19)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1, 1941~1947, 1945. 11. 28.

 

20) 노기남 주교의 이승만과의 관계에 대한 회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한 후 나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사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이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관계로 가톨릭에 관하여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사실상 상당한 호감까지 보였다, 그래서 이 박사는 복잡한 일이나 중대한 일이 있으면 나와 의논하기를 좋아했다”(운석선생기념출판 위원회,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장면 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325쪽).

 

21) 노기남, 앞의 책, 1945. 12. 28.

22)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5년 12월 30일자.

23) 김수자, <해방이후 우익민족담론의 공고화 과정(1945~1953) - 일간지를 중심으로 ->, 《역사학보》 198, 2008, 97쪽.

24)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150쪽.

25) <천주교서울교구, 간도천주교도들의 박해진상 발표>, 《경향신문》 1948년 1월 27일자 ; 1월 29일자 ; 1월 30일자.

26) <전재교우회결성>, 《경향잡지》 1947년 8월호, 125쪽.

27) <월남한 가톨릭신자들, 이북가톨릭신도대회 개최>, 《경향신문》 1947년 11월 25일자.

28) UNTCOK Sub-Committee 2, VFRBATIM Report of the Twenty-First Meeting, 노기남 주교와 제분과위원회의 면담, 1948. 2. 19.

 

29)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sub-committee 2 final report of the twenty-first meeting》, Thursday, February 19, 1948.

 

30)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final report of sub-committee 2 adapted at the thirtieth meeting》, March 31, 1948.

 

31)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2, 1948~1954, 1948년 4월 하순.

32) 문규현, 《한국천주교회사》 II, 빛두레, 1994. 157쪽.

33) <천주교, 독립선포감사미사 봉헌>, 《서울신문》 1948년 8월 15일자.

34) <15일 기원제석상 노 주교 훈화내용>, 《가톨릭청년》 1948년 12월호. 49쪽.

35) <이북성직자와 교도에 고함 - 서울교구장 노 주교 방송요지>, 《가톨릭 청년》 1949년 12월호, 85쪽.

 

36)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final report of sub-committee 2 adapted at the thirtieth meeting》, March 31, 1948.

 

37) <노기남 천주교 주교, UN 한국위원단과의 협의에서 전쟁을 포함한 남북통일 방안 피력>, 《동아일보》 1949년 3월 24일자.

38) <한국천주교 교구장 회의, 반공투쟁성명서를 발표>, 《경향신문》 1949년 4월 10일자.

39) <로마교황청, 북한이 주교와 신자 40여명을 구금하는 등 가톨릭을 박해하고 있다고 발표>, 《동아일보》 1949년 6월 23일자.

40) 《가톨릭청년》 1949년 8 · 9월호 합병호, 60쪽

41) 《평화일보》 1949년 6월 26일자 ; 《연합신문》 1949년 6월 26일자.

42) <주한교황청 특사 방주교, 북한 억류 천주교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공한 발표>, 《경향신문》 1950년 6월 17일자.

43) <대한천주교 총연맹 결성>, 《경향신문》 1949년 8월 27일자.

 

44) <대한천주교총연맹 결성>, 《경향신문》 1949년 9월 24일자. 1949년 9월에는 전주 가톨릭연맹, 1950년 2월에는 대구교구 연맹이 각각 결성되었다.

 

45) 조광, <6·25전쟁과 한국교회>, 《교회와 역사》 17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46)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final report of sub-committee 2 adapted at the sixtieth meeting》, March 19, 1950.

 

47)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2, 1948~1954, 1950년 3월 중순.

48)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49) 박도원,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310쪽.

50) 《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 문규현, 《한국천주교회사》 II, 빛두레, 1994, 223쪽 재인용.

5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전승기원 미사거행>, 《경향신문》 1950년 12월 8일자.

52) 《천주교회보》 1951년 3월 20일자 ; 조광, <6·25 전쟁과 한국교회>, 《교회와 역사》 171, 1989.

53) <국방부 육군본부 인사국 내에 군승과 설치>, 《대구매일신문》 1951년 3월 1일자.

54) 군종교구사편찬위원회, 《군종교구사 - 군사목 50년사》, 2002. 22쪽.

55) 군종교구사편찬위원회, 《군종교구사 - 군사목 50년사》, 2002. 20쪽.

56) 군종교구사편찬위원회, <육군 군종 제7기 보조군목 김용훈 전교회장의 회고>, 《군종교구사 군사목 50년사》, 2002. 26쪽.

57) 운석선생기념출판 위원회,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장면 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325쪽.

 

58) 강인철, 〈한국전쟁기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발전에 대한 종교인의 기여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59)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178쪽.

60) 이승만 서한철, Office of the President ROK,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에게, 1952. 7. 11.

61) National Intelligence Survey, 41B, Section 43, Reoprt Title : Religion, Education, and Public Information, 1958. 3. 1, pp. 34~36.

 

6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 연감》, 1956, 37쪽 ; 강인철, <한국전쟁기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발전에 대한 종교인의 기여 -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200쪽.

 

 

참고문헌

 

강인철, <한국전쟁기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발전에 대한 종교인의 기여 -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김수태,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노기남》,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김수자, <해방이후 우익 민족 담론의 공고화 과정(1945~1953) - 일간지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98, 2008.

군종교구사편찬위원회, 《군종교구사 - 군사목 50년사》, 2002.

나정원, <한일합방이후 한국가톨릭 지도자들의 국가관 연구 - 노기남 주교 이전, 재임시기와 사회교리 : 1910년부터 1968년까지>, 《가톨릭 사회과학연구》 16, 2004.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1, 1941~1947.

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일기》 2, 1948~1954.

노기남, 《당신 뜻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1967.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문규현, 《한국천주교회사》 II, 빛두레, 1994.

박도원,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운석선생기념출판 위원회,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장면 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조광, <6·25 전쟁과 한국교회〉, 《교회와 역사》 17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최기영, <제1 공화국과 한국 천주교회>, 《교회와 역사》 30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한국교회사연구소, 《명동본당사》, 200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 연감》, 1956.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자(이화여자대학교)]



파일첨부

1,83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