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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후기 천주교의 확산과 가부장 사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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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8 ㅣ No.1250

조선후기 천주교의 확산과 가부장 사회의 분열

 

 

1. 머리말

 

건국 이래 성리학에 기초한 체제를 세워나가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조선 사회가 유교화된 시기는 대개 17세기 후반으로 잡고 있다.1) 그런데 천주교가 전래되어 확산된 것도 바로 이러한 시기였다. 그렇다면 조선후기 사회는 한편으로는 매우 철저하게 성리학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구축해간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천주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이 공존한 사회였다. 국가적으로 추구한 공적인 정치 이념과 민간의 사적인 신앙이 목숨을 놓고 벌어질 만큼 균열 ‧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2) 학문적 호기심과 달리 邪學으로까지 규정되어 박해의 대상인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리학에 기초한 공적인 주류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난 비주류문화가 형성된 것이었다.3)

 

주류문화와 극단적인 대척 관계를 맺는 천주교와 같은 비주류문화가 확산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전래와 수용의 상호 소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4) 천주교와 조선 사회와의 교류는 西學이라는 학문에서 출발하여 信仰으로 발전했다고 설명된다. 그런데 학문과 신앙은 사실 별개의 세계이다. 학문적인 호기심이 신앙으로 연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일이다. 이와 달리 학문적으로는 아주 미흡한 지식을 갖고 있어도 신앙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다. 천주교를 신앙으로 고백한 사람들은 대개 정권에서 벗어나 있던 학자나 아예 접근한 적조차 없는 일반 백성이었다. 이미 교회 창립 직후부터 입교한 사람 가운데에는 일반 백성이 상당수 있었다. 천주교는 양반을 넘어 중인이나 일반 양인으로 전파되면서 성장해 나갔다. 즉 천주교는 지식층 중심으로 종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신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5) 이들의 개종 동기도 치병 ‧ 구복 ‧ 得子 등과 같은 현세구복적 동기, 樂界 ‧ 천당 등에 가기를 원하는 내세지향적 동기 등 다양하였다. 또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성리학보다는 불교 ‧ 도교 ‧ 신선술, 그리고 무속신앙 등에 보다 가까운 사람들이었다.6) 말하자면 그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가부장적인 지배체제에서 한걸음 비켜선 사람들이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위와 같은 부류였다는 사실은 천주교는 애당초 가부장적인 질서와 분리된 다양한 종교 내지 문화와 소통하면서 확산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에 천주교라는 비주류문화가 조선 사회에 던진 변화와 충격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어머니의 부활 : 聖母


1) 퇴색된 어머니의 부활과 聖母

 

조선에 가부장 문화가 구축되면서 이전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여성에 관한 신화나 설화는 사라지거나 퇴색되었다.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어머니는 단지 수동적으로 자식을 낳는 존재일 뿐, 어머니=여신으로서의 주요 정체성은 퇴색되고 망각되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과 같은 문헌에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가 시조모로서 건국에 개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르면 유화의 역할은 약화되고 건국에 적극 관여하는 모습도 사라졌다.7) 이는 오래도록 이어져온 단군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군의 탄생에서 웅녀의 존재는 13세기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부터 퇴색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곰이 禁忌를 지켜내어 여성으로 변하였고, 이어 아이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여 그 정성에 감동한 환웅과의 사이에 단군이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제왕운기》에서는 단웅천왕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단수신과 혼인시켜 낳은 아들이 단군이었다. 단군이 태어나기까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웅녀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처럼 전승되어오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영웅이나 건국 시조의 어머니는 인간으로서 또는 여자로서 성취하거나 이룬 것은 별로 없게 그려졌다. 아버지의 지위는 아들로 대물림되었으며 어머니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채 아예 신화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재혼한 여성을 비난하는 ‘악한 계모’ 설화는 오히려 발달되었다.8) 악인형 계모 설화에서는 가족공동체가 파탄에 이르게 되어도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일방적인 면죄부를 받는 등 극단적 가부장제의 편파적 가치관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에는 사상 ‧ 종교 ‧ 문화 등에서 주류문화와 분리된 비주류문화가 성행해갔다. 민간의 비주류문화에서는 오히려 공적인 문화에서 퇴색된 여성신이 확산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한국의 오래된 여성신인 山神 聖母의 성행을 들 수 있다. 사실 산신을 숭배하는 제례는 신라 시대 이래 목격되는 주요한 의례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유교적 예제에 따라 산천제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그와 분리된 기복적인 산천제가 행해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山神 聖母를 섬기는 것은 조선후기에 확산된 아주 대표적인 민간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산신 성모에 대한 숭배에서 보이는 특징은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산신 성모는 대개 聖母, 天王, 聖母天王 등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성모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옥 내지 신사를 세웠는데, 이는 성모사, 백무당, 고모당, 노구당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신사 안에는 석상 등의 像을 세웠는데, 흰옷을 입은 여인상이었다.9) 이러한 점은 유학자들이 남긴 많은 遊山記에 기록되어 있다. 김종직은 민간에서 지은 祠屋에 색칠이 된 성모라는 석상이 있었다고 하였다. 유몽인은 산봉우리에 ‘聖母祠’가 있었고, 거기 聖母라고 불리는 여인 석상이 있었다고 하였다.10)

 

보다 주목이 되는 사실은 성모가 보다 근본적인 신앙이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성모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그 공통점은 특정 인물의 ‘어머니’로서 존숭받는 여인이었다. 통일신라 시대는 경주 선도산의 산신 성모에 대한 이야기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전해져온다. 성모는 “어진 이를 잉태한 여인”(女有娠賢)으로 海東의 시조가 된 아들의 어머니였다.11) 그러한 권능에 대한 존숭으로 ‘神母’, ‘聖母’로 불리고 여신상을 세워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12) 고려 시대에도 성모는 불교와의 관련 속에 석가의 어머니라는 속설이 전해져왔다.13)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유학자에 의해 성모가 위숙왕후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김종직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들어 성모를 태조의 어머니라고 해석하였고,14) 남효온, 유몽인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대개 그의 설을 따랐다.15) 단순히 고려 태조의 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모는 아들의 위업을 도운 권능을 가진 어머니였기에 존숭한다는 것이었다. 삼한을 통일하여 국가의 기틀을 세운 태조의 어머니이므로 조선의 백성들이 제사를 올리기에 마땅한 존재라는 설명이었다.16)

 

성모의 정체성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 것은 민간신앙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신이 지역이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그 가운데 어느 한 특성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성모의 정체성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일반 백성에게 큰 고민이나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성모가 가진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자신들의 소망을 따라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하는 일 없이 성모에 대한 신앙 행위가 이어졌다는 인상이다.

 

그런데 산신 성모에 대한 숭배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주류문화에 없는 종교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성모는 인간의 수명에 대한 권능을 가진 신이었다.17) 날씨를 주관하는 권능자이기도 하였다.18) 유교 문화에서 날씨는 천제의 소관이었고, 천은 날씨를 통해 인간을 질책[天譴]하기도 하고, 축복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모 역시 날씨를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다. 성모는 또한 산신령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며, 언젠가 이 땅에 올 일종의 메시아적 존재였다.19)

 

유학자들이 음사라고 비난한 것과 달리 산신 성모에 대한 종교 행위는 巫覡들이 신당, 성황당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민간에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 성모는 始祖의 어머니, 왕이나 종교적 지도자의 어머니로서 일정한 권능을 지닌 산신으로 그 자체가 존숭과 의례의 대상이었다. 부-자를 중심축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문화와 달리 성모는 가부장적 질서에서 비켜나 모-자를 중심으로 어머니로서의 적극적인 위치를 갖는 여성신이었다.

 

결국 성모 존숭은 가부장제의 강화와 더불어 어머니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종래의 신화와 설화가 밀려난 주류문화와는 분리된 것이었다. 가부장제 강화의 흐름에서 비켜난 일탈과도 같은 움직임은 산신 성모에 대한 존숭같은 종교 내지 문화 현상으로 분출되어 나왔고, 그렇게 분출된 비주류문화는 더욱 조선의 공적인 주류문화와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성스러운 여성이며 어머니의 이미지인 성모 마리아가 소개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의 산신 성모와 천주교의 성모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산신 성모와의 관련 내지는 그 영향 안에서 성모 공경이 전개되어 나갔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용어의 동일성을 거기에 담겨있는 본질 자체와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곤란하다. 성모 공경은 천주교 교리 안에서 전개되어 나간 천주교 신앙이었다.

 

그런데 성모는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닌 존재였다. 조선후기 민간에서 의뢰하는 대상 내지 신은 여성적 이미지가 보다 강했다. 제의를 주관하는 사람이 대부분 무당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무당이 의뢰하는 여러 신도 산신 성모를 비롯하여 삼신할머니 등 여성신이었다. 민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여성신에 관한 신앙은 민간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민간의 비주류문화는 어머니로서 일정한 권능을 지닌 천주교의 성모와의 첫 대면을 보다 용이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 점을 염두에 놓고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자.

 

성모님은 예수님의 거룩한 어머니로서 큰 능력을 지니시어 사람들의 영육 간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으시며, 또한 기꺼이 사람들을 구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자애로운 어머니보다 만 배나 더 뛰어나시니, 사람들이 성모님을 경애하고 효도를 다함이 마땅하다(《聖經廣益》, 〈聖母聖誕〉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30, 2011. 3, 19쪽).

 

성스러운 여성이며 거룩한 어머니인 성모는 단순히 그 성스러움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인류를 한없이 사랑하는 뛰어난 분이었다. 성모는 모든 인간을 한없이 사랑할 뿐만이 아니라 그 자녀가 처한 영육간의 어려움을 구해주는 능력을 지닌 어머니였다. ‘큰 힘’을 지닌 분으로 이야기되거나, 바라지 못할 은혜가 없다고 하는 등의 고백은 그러한 능력을 지닌 어머니로서 성모를 이해했다는 뜻이다.

 

2) 새로운 모-자 : 성모-예수의 의미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출산으로부터 마지막 위업에 이르기까지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능력의 어머니였다. 이에 성모는 예수와 더불어 모-자로 이어지는 공경과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축을 형성하였다.

 

마리아는 겸손과 정결함으로 강생하신 천주님의 모친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아들이 되신 것이다. 지금 주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로운 형제가 되니, 성모 마리아는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다. 즉 구세주의 모친이시며 또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러므로 지극히 인자하시고 우리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이 또한 전능하신 분과 같다. …천주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어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이에 우리를 가르치시고 기르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가 승천하도록 구원하셨으니 이처럼 은혜가 많고도 크다. 이토록 막중한 은혜가 모두 성모님으로부터 오니 우리들이 어떻게 공경하며 효도를 해야 마땅하겠는가?(《聖經廣益》, 〈聖母領報〉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29, 2011. 2, 19쪽)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 당위성은 겸손과 정결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속량하고 승천하기까지의 막중한 은혜가 성모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아들 예수에게 인간이 입은 모든 막중한 은혜가 성모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성모님의 존귀한 지위를 분명히 알 것이며, 사악한 마귀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예수님의 크신 공로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을 때에 정결해질 수 있으니, 이때 영혼이 마침내 성령과 결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결의 은총은 모두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임을 알지어다. 만약 세상에 성모님이 계시지 않았으면 예수님께서도 강생하실 수가 없었으니, 누가 이러한 죄를 사하는 예절을 세울 수 있겠는가?(《聖經廣益》, 〈聖母始孕母胎〉: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30, 2011. 3, 20~21쪽)

 

성모를 공경해야 하는 까닭은 성모의 정결과 겸손, 순명에 대한 존숭만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구세주 예수의 탄생[강생]에서부터 구원사업에 이르기까지 성모가 어머니로서의 수행한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공경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성모님은 어머니시며 예수님은 형님이신데, 일을 할 때 서로 비슷하게 하는가? 성모님은 지극히 정결하시고 겸손하시며 천주님의 거룩한 뜻에 극진히 순명하셨는데, 우리들은 이러한 덕이 있는가? 예수님은 성부님의 전능하신 영복(榮福)을 갖추시고도 우리들을 아우로 인정하시며 성부님의 사랑을 구하시는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아우로서 닮았는가? 성모님께 효경하고 예수님을 닮는지 여부는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이다(《聖經廣益》, 〈聖母領報〉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29, 2011. 2, 19~20쪽).

 

성모-예수의 모자관계를 성모에게 중점을 두어 인간에게로 확대 적용하다 보니 예수가 인간의 ‘형님’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성모가 어머니이므로 ‘예수-인간’은 ‘형님-아우’로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천주님! 당신께서는 천사의 알림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들을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게 하시어 육신을 취하게 하셨나이다. 저희들이 엎디어 구하오니, 성모께서 천주님의 참된 모친이심을 믿는 저희로 하여금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힘입어 그 돌보심을 얻게 하소서(《聖經廣益》, 〈當務之求 爲聖母會〉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29, 2011. 2, 20쪽).

 

성모는 예수님의 참된 모친으로서 공경의 대상이었고, 인간을 돌보는 전구자로서도 존숭의 대상이라는 고백이다. 성모 공경은 한편으로는 ‘큰 힘’을 지닌 분에 대한 공경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그의 자녀가 되는 모자관계를 맺게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성모와 인간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로 연결되어, 자녀가 된 자들은 그 어머니 성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였다.

 

조선에서 가정 안에 孝의 중심 대상이 아버지였던 것과 달리, 성모 공경은 어머니를 향한 효를 적극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 어머니에게 효를 다해야 하는 까닭도 어머니 자체에 대한 자녀의 의무를 넘어 어머니가 가진 권능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지닌 효였다. 천주교의 성모에 대한 공경은 유교에서 강조되는 효 자체와 어우러지는 측면이 있었다. 성 마리아를 ‘聖母’라고 호칭하고, 성모에 대한 공경이 효로 연결됨으로써20) 성모 공경은 조선 사람들에게 익숙한 윤리였다.

 

하지만 성모에 대한 효는 유교에서 분리된 측면이 보다 강하다.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서 효는 위로부터의 윤리이며, 가부장적인 권위를 지키기 위해 지켜야 하는 부모에 대한 도리였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에게 묻어가는 소극적인 위치였다. 유교의 효는 보다 부-자가 중심에 선 윤리였다. 이와 달리 성모 공경은 아들에게서 나와 모든 사람에게까지 적용되는 가르침이며, 모-자가 중심에 자리한 것이었다. 즉 성모에 대한 효는 위로부터의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명령이라기보다는 아들 예수에게서 나온 권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아들이 어머니를 대한 것처럼, 그 아들의 당부를 따라 그 어머니를 공경하면서 그녀의 전구를 바라는 기원이 성모에 대한 공경[孝]이었다.21)

 

종래 산신 성모 등 민간의 여성신이 개인적인 기복의 대상이었던 것에 비하여 신자들에게 성모는 공경 받아 마땅한 모든 이의 거룩한 어머니였다. 성모 공경은 일방적으로 복을 기원하고 내리는 구복을 매개로 한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로 맺어지는 일이었다. 민간에서 공경하는 여성신(어머니신)과 인간과의 관계와 달리 천주교의 성모와 인간은 새로운 모−자로 맺어진 관계였다. 또한 한국의 여타 신화에서 어머니는 ‘낳는 자’로서의 수동적인 기능은 있었지만, 가부장적인 사고 아래서 어머니로서의 권능과 역할은 망각되거나 퇴색되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 천주교의 성모는 퇴색된 어머니에 대한 적극적인 공경을 대변하는 새로운 종교문화였던 것이다.

 

성모를 공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증가한다는 것은 가부장 문화에서 밀려난 어머니가 천주교 안에서 조선 사회에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천주교는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비주류문화로 기능하였기에 조선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성모가 비주류문화의 여신과 충돌하고 소통하면서 마침내 천주교만의 종교적 에토스는 자리 잡아갔다. 전래 초기의 충돌 속에 성모를 자칫 종래 비주류문화에 보이는 여신과 착종하여 신적인 능력을 지닌 권능자로 숭앙하던 것은 극복되어 나갔다.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앙과 지방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으라…[천주교 신자들은] 또 말하기를, ‘천당을 만든 것은 천주를 잘 섬긴 자들의 영혼에게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지옥을 만든 것은 천주를 잘 섬기지 않는 자들의 영혼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사람 중에 죄를 지어서 응당 지옥에 들어간 자는 耶蘇의 앞에서 자기 잘못을 슬프게 뉘우치며, 모두 야소의 어머니에게 기도를 드려 천주에게 전달되도록 하면, 곧 그 사람의 죄는 용서받게 되고 영혼도 천당으로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고종실록》 3, 고종 3년 8월 기축).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박해자의 눈에조차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성모가 인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로 공경 되던 것에서 벗어나 轉求者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가진 존재로 존숭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박해자들은 천주교 교리에서 주요한 대목인 연옥을 지옥과 혼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모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자리를 잡고 있다. 수용 초기 다른 비주류문화와의 소통과 충돌을 지나 천주교 신앙이 성숙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기반을 둔 성모 공경, 전구자로서의 성모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주교의 성모 공경은 “예수의 어머니”로에 대한 존숭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가부장적인 성리학적 문화와 분리된 비주류문화였다.

 

천주교의 전래와 더불어 성모가 어머니로서 적극적인 위치를 가지면서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는 관점도 달라지게 되었다. 성모가 예수의 어머니일 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어머니가 되면서 모든 인간은 예수와 형제가 되었다.

 

우리에게 성모님은 어머니시며 예수님은 형님이신데, 일을 할 때 서로 비슷하게 하는가? 성모님은 지극히 정결하시고 겸손하시며 천주님의 거룩한 뜻에 극진히 순명하셨는데, 우리들은 이러한 덕이 있는가? 예수님은 성부님의 전능하신 영복(榮福)을 갖추시고도 우리들을 아우로 인정하시며 성부님의 사랑을 구하시는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아우로서 닮았는가?(《聖經廣益》, 〈聖母領報〉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29, 2011. 2, 19~20쪽)

 

성모가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모든 인간의 어머니였고, 이를 믿음과 더불어 사람들은 예수의 형제가 되었다. 이는 동시에 인간이 성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천주교 이전에도 사람들은 부처나 성현을 따랐지만 부처나 성현을 자신의 아버지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민속 신앙의 다양한 신들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복을 기원하는 행위가 부모−자식으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천주교의 수용은 혈연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와 그 문화를 지탱하던 윤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척사론에서도 성모를 특히 지목하여 세상을 현혹한다고 지적한 것도 성모가 갖는 이러한 이질적인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斥邪綸音을 경외에 내리기를, …“심지어 聖母 · 神父 · 領洗 · 堅振 등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명색이 나올수록 더욱 종잡을 수 없는 미혹됨이 심하니, 요컨대 마귀에 홀린 巫覡이 부적이나 정화수로 신에게 빌면서 저주하여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식견을 갖춘 자라면 어찌 혹시라도 의심하거나 현혹되겠는가?”(《헌종실록》 6권, 5년(1839) 10월 경진)

 

‘식견을 갖춘’ 유학자의 시각에서 천주교에서의 성모는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였다. 신부라는 성직자, 영세와 견진이라는 종교적 의례만큼이나 성모는 조선후기 문화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평소 신앙생활 속에서는 물론 순교를 앞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예수-마리아”를 함께 외쳤다. 순교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 마리아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는 등 ‘예수-마리아’를 아울러 찾았다. 모-자인 성모-예수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공경과 신앙의 대상이 되면 될수록 조선후기 사회는 다양화되고 주류문화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3. 부자의 一體 : 耶蘇


1) 일체된 아버지와 아들 : 성자 예수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조선에 전래되기 전에 이미 일본에 있는 천주교 신자를 지칭할 때 조선에서는 통상 ‘耶蘇敎徒’, ‘耶蘇宗門’ 등으로 호칭하였고, 서학을 ‘耶蘇學’이고 칭하기도 하였다. 아직 천주교가 생소했던 조선인의 시각에도 천주교의 중심에 예수가 있었다는 뜻이다.22) 그런데 예수의 정체성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개념이었는지 모른다. 먼저 가부장 문화에서 접근할 때 예수는 그 탄생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낳는 것은 외적 현상에 불과할 뿐이며, 실제로는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했다.23) 이 때문에 척사윤음에서도 예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斥邪綸音을 중앙과 지방에 내렸다. “나는 듣건대, 耶蘇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니, 그 학문이 복이 되는지 화가 되는지를 이에서도 증험할 수 있다. …무슨 어렴풋하게 의혹할 만한 단서가 있어서 이와 같이 거짓 속이고 있는 것인가? …아! 아비 없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미 없이 어떻게 양육될 수 있겠는가?”(《헌종실록》 6, 헌종 5년 10월 경진)

 

여기에 보이는 것처럼 조선의 가부장 문화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양육하는 것이 본질이었다. 예수의 출생에서 성모가 적극적인 위치를 갖는 것은 성리학에 기초한 부계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와는 전혀 분리된 문화였다. 예수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아들’, ‘聖子’라는 것도 조선 사회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조선에서 天子는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매우 강하게 자리 잡아 왔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오래된 권위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여진족에 의해 명이 멸망하고 청이 건국되면서 조선의 국가적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조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소중화’로 세워나 가면서 경우에 따라서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까지 인식하였다. 문화주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유교 문화의 계승자이며 수호자였다. 당연히 지배층 위주의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는 더욱 강고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천자가 갖는 상징성이 컸다 하여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건국된 뒤에 천자의 권위는 그 이전에 비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그 천자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아들로 전래된 예수(천주님의 아들, 聖子, Son of God)는 이와 같은 질서에서의 분리를 가속화하여 나갔다. 사람들은 천주교라는 비주류문화에서 하늘(天, 上帝, 하느님)과 연결된 새로운 아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 되는 것은 예수가 육적인 아비 없이 성모의 적극적인 역할에 의해 탄생한 아들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혼재된 존재이기도 한 사실이었다.

 

서학 유포 상황에 관해 논의하다…[채]제공이 아뢰기를, “그 책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堯 · 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정조실록》 26, 정조 12년 8월 임진).

 

채제공은 천주교를 배격하였지만 정조의 정책에 부응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 사람이었다.24) 그런데 채제공이 예수를 허무맹랑한 속임수라며 가장 먼저 지적한 내용이 하느님이 내려와 예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을 굽어살피는 존재로서 숭앙받는 하느님[上帝]이 내려와 예수가 되었다고 하여 예수가 하느님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속임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척사윤음을 경외에 내리다. “…또 저 耶蘇라고 이르는 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저 무리가 말하기를, ‘처음에 天主로 내려오셨다가, 죽어서 다시 올라가 천주가 되어 만물과 民生의 큰 부모[大父母]가 되셨다’ 한다. 그러나 하늘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사람은 몸도 있고 껍질도 있으니, 결단코 서로 섞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늘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사람이 올라가서 하늘이 되었다고 하니, 무슨 어렴풋하게 의혹할 만한 단서가 있어서 이와 같이 거짓 속이고 있는 것인가?”(《헌종실록》 6, 헌종 5년 10월 경진)

 

척사를 외치며 우선하여 문제 삼은 예수에 대한 지적은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성모의 아들이었는데, 다시 사람들의 대부모가 된 존재라는 설명이었다. 즉 예수는 아들이면서 어버이기도 한 존재라는 사실이 절대 거짓이라는 것이다. 국초부터 三綱을 절대적인 윤리로 강조하여 부자간의 분별을 강조해 온 조선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혼재된 예수는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비물질인 하늘과 물질인 인간이 섞이는 예수의 肉化 내지 강생도 유교적 인간관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가 승천하여 하늘이 되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순교를 앞둔 마지막 순간에 예수가 그러하였듯이 자신도 죽으면 곧 승천한다고 단호히 대답하였다.25) 이와 같은 문화적 충격을 수용한다는 것은 조선의 주류문화에서 분열 그 자체를 뜻한다.

 

2) 미혹자와 희생양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민간의 불교 신앙의 한 부류로 취급하였다. 그렇게 분류한 가장 큰 까닭은 천당지옥설 때문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경명의 소에서 서학의 폐단을 극력 말하였는데, 폐단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 하니,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른바 西學의 학설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신이 《天主實義》라는 책을 구해 보았더니, 바로 이마두[利瑪竇 : 마테오 리치]가 애초에 문답한 것으로, 인륜을 손상하고 파괴하는 설이 아님이 없어 양(楊) · 묵(墨)이 도리를 어지럽히는 것보다 사뭇 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천당 지옥에 관한 설이 있기 때문에 지각없는 촌백성들이 쉽게 현혹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지하는 방도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다(《정조실록》 26, 정조 12년(1788) 8월 임진).

 

여기에서 척사론자들은 천주교가 백성을 현혹하는 핵심적인 요인으로 천당지옥설을 지적하였다. 척사론자들은 천당-지옥에 대한 교리를 근거로 천주교를 불교의 일파로 간주하였다. 위의 기록에 이어 채제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말에 있어서는 비록 불교를 배척한다고 하지만, 대개 불교의 일면의 소견을 훔쳐다가 자기들의 교리로 삼았으니 이는 불교 중의 別派입니다(《정조실록》 26, 정조 12년 8월 임진).

 

천주교는 불교의 천당-지옥에 대한 교리를 도용한 불교의 별파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정이 신유박해(1801)라는 서슬을 몰아칠 때도 천주교가 사람을 미혹에 빠지게 한다며 지적한 내용은 천당지옥설이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西洋國에서는 이른바 耶蘇의 天主學이 있었는데, 대개 천당과 지옥의 이야기로 현혹하여,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윤리를 업신여기며 강상을 어지럽혔으니, 異敎 가운데 가장 윤리와 기강이 없는 것이었다”(《순조실록》 2, 순조 1년(1801) 1월 정해).

 

천당지옥설에 미혹되어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유교의 윤리를 지키지 않으며, 명분을 어긴다는 것이다. 헌종 5년에 기해박해(1839)가 일었을 때도 “[천주교의]천당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속일만한 일이다. 이는 釋氏의 진부한 이야기이다”26)라고 공격하였다. 즉 천당지옥설은 척사론이 천주교를 공격하는 주요 출발점이었고, 이는 천주교를 불교의 別派로 오해하게 한 주요 요소였다. 민간의 비주류문화에 대한 깊은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척사론자들은 천주교의 천당지옥을 불교의 천당지옥과 혼돈하였던 것이다.

 

척사론의 시각에 따르면 예수는 석가와 마찬가지로 천당-지옥을 주관하며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자였다. 이 점에서 척사론자들이 볼 때 예수는 당시 문제 되던 불교를 끌어들여 ‘生佛’을 자칭하던 사람과 같은 부류였다. 영조 대에도 황해도에서 생불을 자칭하여 백성을 미혹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무당을 효시한 일이 있다.27) 조선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의 처리를 놓고도 생불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先朝 무인년 연간에 이른바 生佛이란 자가 海西에서 나왔을 때 어사를 보내 단지 그 괴수를 죽이도록 명하였을 뿐, 일찍이 윤음을 내려 제시한 것은 없었다. …이 일[폐제분주 사건]이야말로 衛正闢邪에 관계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한 대신을 위해서 치죄를 소홀히 하겠느냐. 조사하는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닌데 邪學을 하는 자가 어찌 권 · 윤뿐이겠는가(《정조실록》 33, 정조 15년(1791) 11월 무인).

 

조정의 시각으로 보면 생불이나 예수나 모두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廢祭焚主’의 충격이 컸기에 기왕의 생불 사건과 달리 윤음까지 내린다는 것이다. 조정의 척사론자가 보기에 예수는 불교를 빙자하여 ‘생불’을 자칭한 사람들과 비슷한 존재였다.

 

생불이나 예수나 문제는 요술로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하는 자였다. 영조 대의 생불 사건을 보았듯이, 이미 생불이라 자칭한 자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 백성이 따르는 일은 종종 문제시되어왔다. 특히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미륵이나 ‘생불’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더욱 사회문제화 되고 있었다. 숙종 대 僧 處瓊은 음식을 끊었다는 궤변을 하며 무엇이든 구하면 이룰 수 있다면서 간교한 행각을 일삼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 부르며 따랐는데 사회문제화 되어 그를 비롯해 연루된 여러 사람이 처벌되었다.28) 순조 대에는 경상도에서 장시경 등이 노론이 득세하여 남인이 모두 쫓겨나고 민생이 날로 고달프게 되었다면서 역모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연관된 사람들의 공술에 따르면 향리에서 사람들은 장시경을 ‘생불’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평소 장시경은 밤에 혼자 뜰에서 天象을 우러러보며 가끔 私語를 하기도 하고, 괴이한 행동을 하며 스스로 천상을 관찰할 줄 안다고 하며 어리석은 俗民들을 현혹했다고 한다.29)

 

예수에 대해서도 조정은 생불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면서 ‘요술’을 부리고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하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대개 耶蘇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현종개수실록》 16, 현종 8년(1667) 2월 신미).30)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조정의 시각은 세 가지이다. 요술자, 미혹자, 그리고 별종이다. 생불을 사칭하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요술로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자였다. 한편 ‘별종’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말 그대로 별종은 본래의 종족과는 구분되는, 본래 종족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주로 ‘흉악, 간사, 간흉’ 등을 수식어로 사용하여 매우 부정적인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31) 말하자면 별종은 성리학으로 교화된 사람도, 교화의 대상이 될 사람도 아닌 이단자였다. 조정에서 볼 때 백성들은 生佛 ‧ 別種인 예수에게 성리학 문화와는 거리가 먼 일상의 복을 구하는 행위를 하였으며, 금지한 ‘像’까지 만들어 존숭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는 조선에서 숭상의 대상이 되어 온 상서로운 존재인 신 내지 신성시 여겼던 대상들이나 성현과 달리 가장 참혹하게 처형된 사람이었다.

 

나는 듣건대, 耶蘇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니, 그 학문이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을 이에서도 증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를 보고 懲戒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형되어 죽는 것을 즐거운 장소로 여기며 도거(刀鋸) · 항양(桁楊)을 견디어 내며 혼몽하게 두려움조차 알지 못한 채취한 듯이 미친 듯이 하여 꺼내어 깨우칠 수가 없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망령된 자이다. 아! 불쌍하도다(《헌종실록》 6, 헌종 5년(1839) 10월 경진).

 

성리학자의 시각에서 예수는 유교의 권위의 출처가 되는 聖王, 완벽한 인간으로 존경받는 聖賢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성리학자들에게 참혹하게 처형된 사형수를 숭앙하는 문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죽음을 맞는 사람을 나를 대신한 희생양, 구세주[救贖主]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역시 조선 사회에 일어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32)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의 주장은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으니, 그 은혜를 입은 나도 예수를 위해 믿음을 지키고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3) 조선후기 사회 저변에 예수의 희생과 죽음을 자신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편으로 사형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희생양 ․ 구속주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사람들의 증가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 주류문화에 균열이 크게 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 賊 ‧ 徒의 공동체 : ‘교회’, ‘교우촌’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던진 또 다른 충격은 賊徒들이 ‘敎友’의 이름으로 조직적으로 모인 공동체였다. 조선의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에 살며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마을 공동체는 지역공동체, 생활공동체이며 대개는 친족공동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또한 조세와 군역을 비롯한 국가에 대한 각종 부담이나 유교적 이념에 따른 여러 포상이나 징벌 등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이념은 당연히 성리학이었다.

 

사람들의 삶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공동체 안에서 성리학에 기초한 일정한 규율과 관습을 지키며 이어졌다. 그 공동체를 흔드는 사람에게는 법이나 관습에 따른 강력한 제재가 가해졌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지역 친족공동체보다 신앙을 우선한 공동체로 모였다. 더욱이 그것은 그 이전에 생불이나 무당과 같은 미혹자를 구복하고자 산발적으로 추종한 무리가 아니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은 성리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교황 ‧ 주교 ‧ 신부 등의 일정한 조직을 갖춘 공동체였으며, 박해에 대한 대응으로 때로는 살던 지역을 떠나 자기들끼리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동체이기도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 사회에 신앙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더욱이 거기에 일정한 조직을 갖추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자공동체가 폭도나 반란을 일으킨 집단은 아니었지만 성리학적인 지배체제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는 중앙정부에 반하는 집단이었다. 국초 이래 정부는 성리학에서 벗어난 종교 문화적 행위를 음사로 규정하고 비난하였지만,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쳐 왔었다. 그와 달리 정부가 천주교를 그토록 집요하고 철저하게 박해한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이 문제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음의 자료를 보도록 하자. 경기 감사 李益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른바 邪學은 곧 夷狄의 妖法이니, 생령에게 해독을 끼치고 인륜을 멸절시키는 바는 천하 만국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흉사한 무리가 모이고 맺어져 무리를 불러 모으면 국가의 근심이 어찌 白蓮敎와 黃巾賊에 그치겠습니까? …” 하였다(《순조실록》 2, 순조 1년(1801) 2월 정묘).

 

신유박해 당시 경기 감사 이익운은 이가환 · 이승훈 · 정약용 등을 탄핵하면서 상소 첫머리에 천주교 신자들이 집단화되어 백련교와 황건적보다도 더 근심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조정의 논리도 마찬가지였다.

 

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 · 이승훈 · 정약용의 죄를 이루 다 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국가를 凶禍의 지경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형세의 위급함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京鄕에 가득하니, 黃巾賊과 綠林黨의 근심이 순간에 박두해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이 무리가 소굴이 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순조실록》 2, 순조 1년(1801) 2월 을묘).

 

조선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황건적이나 녹림당과 같은 움직임으로 이어져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할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결국 대대적인 박해를 감행한 조선의 정부는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의미의 討逆敎文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 천주교도를 백련교와 황건적으로 빗대어 비난하였다.

 

토역 교문을 반포하였다.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洪樂任은]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左道를 부추겨 선동하였으니, 백련교와 황건적의 변이 없을 줄 어떻게 알겠느냐…양호[洋胡 : 주문모 신부를 말함]가 設敎한 것이라 거짓 핑계하고는 소굴을 그의 家人에게 직접 연결하였다(《순조실록》 3, 순조 1년(1801) 6월 을묘).

 

홍낙임 등 천주교 신자들의 집단적인 종교 행동은 백련교와 황건적과도 같은 변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유박해를 감행한 조정은 주문모 신부의 처리 문제 등과 관련해 이 문제에 대한 奏文을 의논하였다. 이만수가 작성한 이 주문에서도 천주교도에 대한 우려는 마찬가지였다.

 

討邪奏文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혹시키고 領洗라는 법으로 흉악한 당을 불러 모아, 私書를 몰래 감추기를 符讖의 술법과 같이하고 女流를 널리 결탁하여 禽犢의 행동이 있었으며, 혹은 神父라 말하고 혹은 敎友라 일컬으면서 성명을 변경하여 바꾸어 각기 標號를 세운 것이 황건적 · 백련교의 난과 같았습니다. 몰래 서로 물색하고 공 · 사로 선동하여 안으로 국도로부터 밖으로 충청 · 전라의 여러 道에 이르기까지 그 말이 점점 치성하고 그 徒黨이 이에 번창하였습니다. …邪黨 등이 이때를 틈탈만하다 생각하고는 서울과 지방에서 같은 행동을 마주 취하고 더욱 서로 체결하여서 끝없이 넓고 불꽃처럼 성하여 날로 점점 불어나고 널리 퍼지므로, 비로소 국문하여 覈實을 행하게 되었습니다”(《순조실록》 3, 순조 1년(1801) 10월 경오).

 

영세, 신부, 교우, 그리고 세례명 등은 조선 사회에 생소한 의식이며 용어였다. 더욱이 조정에서 볼 때 이러한 비밀 종교결사가 서울과 지방의 각 도로 퍼져 나가 도당을 체결하여 일정한 조직을 갖춘 것은 황건적이나 백련교만큼이나 위험한 백성들의 반란이었다. 위의 주문에는 정약종이 “도당을 체결해서 이 학술로 온 나라의 풍속을 변역시키려고 생각하다가 나라의 禁法이 거듭 엄중하기에 미쳐 원한을 품고 비방하였으니,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공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조정에서 볼 때 천주교 신자들은 일정한 조직을 갖추고 ‘도당’을 체결하여 연대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조정만이 아니라 천주교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유학자 역시 천주교 신자들로 인해 중국 황건적의 난과 같이 종교를 매개로 한 백성들의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다. 신유박해 당시 사헌 지평 黃基天는, “이인 · 홍낙임 두 역적은 속마음이 여러 凶徒와 닿았고 음밀한 꾀는 邪學에 결속되어서 황건과 녹림의 변이 아침에 아니면 저녁에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34) 중국의 황건적, 백련교, 그리고 녹림당 등도 백성들의 자발적인 신앙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반란이었다. 황건적이나 백련교의 움직임은 백성들이 종교적 이념으로 결합되어 조정에 대항한 반란의 대명사와도 같은 난이었다. 황건적을 일으킨 장각은 神의 使者를 자칭하면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설교하며 포교에 힘썼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크게 호응하였고, 그 무리는 10여 년 만에 수십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교세가 성장하면서 漢 王朝에 반기를 들며 상당한 규모의 사회세력이 되어 정부와 충돌하였다.

 

백련교는 일반적으로 미륵불이 현세에 내려와 지상에 천국, 즉 극락세계를 세운다는 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종교적 비밀결사였다. 특히 南宋 이후 백련교는 대표적 비밀결사로 종종 반란을 일으켰으며, 원나라 말에는 紅巾賊의 난(1351~1366)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였다. 홍건적은 고려 공민왕 대 두 번이나 침략하여 고려 조정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명 태조 주원장은 백련교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그 조직은 뿌리 깊게 이어져 영락제 연간(1403~1424)에는 산동에서 佛母를 칭한 요녀라는 당새아(唐賽兒)의 난에는 만여 명의 사람이 따르기도 하였다. 청 역시 백련교를 금지하였지만, 대략 1796년부터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반란이 터져 나왔다. 청의 조정은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하였지만 백련교도의 반란은 이 뒤로도 9년이 넘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조선에서는 신유박해가 있은 뒤에도 천주교가 계속 확산되었으며, 중국에서의 백련교도 여전하였다. 조선 조정에는 백련교의 무리가 끝까지 관군에 항거하고 있어 승패가 계속 뒤바뀌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기도 하고,35) 백련교도들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우물과 밭 등에 독약을 살포하여 마시거나 먹은 사람들은 모두 즉시 사망한 일이 실제 증명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36)

 

이러한 상황이므로 커다란 박해 때마다 천주교로 연결된 사람들의 동향을 황건적 등의 움직임에 빗대는 것은 매번 반복되었다.

 

척사윤음을 京外에 내리기를, “…이것이 만약 광명정대한 敎라면 어찌하여 반드시 어두운 밤에 密室 가운데에서 강론하고, 深山窮谷 사이에 불러 모으며, 廢錮된 종족의 서얼로 뜻을 잃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와 지극히 어리석은 下流로서 재물을 탐내고 음란한 짓을 하는 무리가 서로 敎友라고 부르면서 각각 邪號를 베풀고는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숨긴 채 한편이 될 것인가? 이러한 자취만으로도 이미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요사한 것임이 판명되었으니, 그들이 궁극적인 계략은 黃巾賊이나 白蓮敎와 같은 것을 기대하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헌종실록》 6, 헌종 5년(1839) 10월 경진).

 

기해박해 때에도 조정의 우려는 천주교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와 같은 움직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데 있었다. ‘교우’라는 생소한 칭호를 사용하며 비밀결사처럼 맺어져 일정한 조직을 갖춘 천주교는 賊 ‧ 徒의 조직체 자체였다. 특히 국가의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많은 신자들은 살던 곳을 떠나 외진 산간지대나 아예 사람이 살았던 적이 없는 궁벽을 지역으로 가서 이른바 ‘교우촌’을 형성하며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다.37) 이러한 현상은 국가의 시각에서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보다 은밀화 ‧ 조직화 ‧ 집단화된 것이었다.

 

집의 김정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존귀한 敎主 · 神父가 엄연히 뭇 백성 위에 임한다면, 온 천하의 만물이 다 자기 한 사람의 私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 많고 넓은 곳으로부터 스스로 숨어 은밀한 곳에서 그 도를 몰래 주장합니다. 남녀를 섞어 놓고 휘장과 발을 치지 않으면 홀아비와 홀어미로서 시집이나 장가 못 간 자가 모일 것이고, 귀천을 한가지로 보고 예법과 계율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가축을 도살하고 술을 파는 자가 갈 것이고, 貨利를 농락하여 있고 없는 물건을 바꾸어 서로 구제하면 가난하고 곤궁한 자가 기뻐할 것인데, 張角의 36方처럼 배치하여 더 위가 없게 존귀하고 대비할 것이 없게 부유합니다(《헌종실록》 7, 헌종 6년(1840) 1월 신유).

 

천주교 신자들이 은밀한 곳으로 숨어 사는 것을 張角이 8州로 세력이 확장된 것과 더불어 설치했던 36방에 비유하였다.38) 조정의 눈에 천주교도는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처럼 귀천 ‧ 남녀를 불문하고 종교를 매개로 뭉쳐 조정에 대항하는 무리로 변할 집단이었다. 예수는 神의 사자를 자칭하거나 무생노모가 있는 백련교, 또는 생불을 자칭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거짓 술수로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존재였다. 그를 믿는 천주교도들은 중국에서의 황건적이나 백련교, 그리고 생불을 자칭하던 사람을 따르는 무리나 마찬가지로 자칫 세력이 커지면 조정에 반항하는 움직임을 취할 수 있는 무리였다.

 

앞서 생불을 자칭했던 장시경도 노론이 득세하고 남인은 남김 없이 쫓겨나 민생이 날로 고달프게 되었으니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노론에게 당한 수치를 설욕하자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39) 종교가 얽힌 백성들의 움직임은 때로 조선의 지배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를 대체할 새 왕조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간헐적으로 생불을 자칭하거나 음사를 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천주교가 확산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폭도나 반란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볼 때 성리학적인 지배체제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는 반란집단이었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 사회에 존재했던 종래의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조직하고 ‘교우촌’을 형성한 賊徒의 무리였다. 국가의 눈에 그들의 공동체는 백련교와 같은 무리로 될 가능성이 당장에라도 있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고종 대에 이르러서도 천주교는 물론 동학을 진압할 때도 그들이 황건적, 백련교와 같은 무리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이번에 東學이라고 일컫는 것은 서양의 邪術을 전부 답습하고 특별히 명목만 바꿔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조기에 군대를 보내 토벌하여 나라의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 중국의 황건적이나 백련교라는 도적들처럼 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고종실록》 1, 고종 1년(1864) 3월 임인)

 

이는 1월에 동학 교조 최제우를 경주에서 체포한 뒤, 그를 참형에 처할 것을 윤허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천주교가 그랬듯이 동학 역시도 조선의 위정자에게 종교를 매개로 한 공동체로서 황건적이나 백련교의 무리처럼 지배체제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5. 맺음말 - 비주류문화가 던진 저항과 분열

 

지금까지 성모와 예수의 수용, 그리고 ‘교우’들의 공동체 형성을 중심으로 성리학 중심의 조선후기 사회에 천주교가 분열의 돌을 던졌다는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천주교 수용 초기 한역서학서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이른바 서학운동에서도 이미 천주교는 조선 사회의 변혁 이념으로 작용하였다.40) 진산사건 이후로 천주교는 일종의 민중종교운동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 그렇지만 천주교가 민중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 뒤에는 서학운동처럼 지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개혁적인 성격도 약해졌다고 지적된다. 현세와의 격리를 지향하는 초월적 성격으로 고착화되어 다른 민중종교운동과는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가 현실의 문제를 적극 개혁하려는 움직임이나 외세를 배격하는 성격은 약했다 할지라도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반봉건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41)

 

천주교의 종교 문화적 현상이 성리학에 기초한 가부장 문화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조선후기 사회에서 천주교가 적극적 입장을 지닌 대항문화(counter culture)였다고 규정짓기도 힘들다. 그러나 천주교는 다른 비주류문화와 섞이고 충돌하며 마침내 고유한 종교적 진리를 구축하며 확산되어 나갔다.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까지 주류문화에 저항해 나갔다. 정부로부터 邪學으로 규정되어 대대적인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천주교야말로 조선후기 사회의 대표적인 비주류문화였다. 가부장적 질서에서 벗어나고 있던 조선후기 사람들은 비주류문화에 경도되어 갔고, 그것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물길로 확산되어 갔다. 그 물길은 사회의 변혁을 수반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천주교의 확산은 그러한 흐름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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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net, Jacques,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1250~1276,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2.

Pateman, Carele, The Sexual Contrac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 : 이충훈 ․ 유영근 옮김,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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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사회를 특징짓는 적장자 중심의 철저한 가부장 사회가 자리 잡았다는 점을 분석한 대표적 연구로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아카넷, 2003이 있다. 이에 대한 서평은 백승종, 〈서평 -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역사학보》 141, 1994와 정두희, 〈성리학은 조선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켜 나갔는가?〉, 《유교 ‧ 전통 ‧ 변용 - 미국의 역사 학자들이 보는 한국사의 흐름》, 국학자료원, 2004 참조.

 

가부장제는 가장권을 바탕으로 한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지배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체제이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가족형태와 사회체제는 서로 보완하고 연결되어 동시에 존재하며 이념에 의해 정당화되고 강화된다. 이처럼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통치를 위한 지배체제로 분석한 연구로는 Pateman, Carele, The Sexual Contract,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 : 이충훈 ‧ 유영근 옮김,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2001 참고. 조선 시대에도 가부장제는 성리학에 의해 정당화된 통치를 위한 지배체제였다.

 

2) 이 글에서 신앙 ‧ 믿음 내지 윤리 ‧ 이념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종교’라는 큰 틀 안에서 천주교와 유교, 불교, 민속 종교 등을 다루었지만, 근대 이전 한국에서의 ‘종교’와 서양의 ‘종교’와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종교’와 근대 이전의 ‘종교’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현대 사회의 종교, 특히 서양의 ‘종교’ 개념이 적용된 오늘날의 종교를 기준으로 조선 사회의 종교를 분석하는 경향은 좀 더 숙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교 등과 달리 천주교는 오직 유일한 신에 대한 배타적 신앙이므로 그 수용과 더불어 ‘믿음’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신’(信)은 대개 ‘신뢰’, 신뢰할 수 있는(trust, trustworthy) 등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信’은 인격, 도덕 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한국인은 ‘부처를 믿는다’, ‘공자 등 성현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친구 간의 신뢰를 표현하는 ‘朋友有信’의 경우가 말해 주듯이, ‘신’(信)은 대개 인격, 도덕성 등에 대한 신뢰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신’(信)은 종교 교리에 대한 신뢰, 초자연적 실체를 놓고 그 자체의 유무에 대한 믿음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주교를 수용한 이후로 ‘God’의 실존, 그의 진리가 《성경》이나 각종 교리서 등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대해 ‘신’(信)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에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信’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제 ‘信’은 천주교의 수용과 함께 ‘신뢰할만한’에서 ‘믿음’(faith)으로 의미가 바뀌었으며, 그 神의 성격도 이전에 있던 다양한 神들과 달리 전지전능하고 배타적이며 이른바 질투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은 조선 사회의 믿음과 종교 관련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Bur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Ltd., 1997 ; 도날드 베이커 저, 김세윤 역, 《조선후기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 일조각, 1997; Don Baker, Korean Spirituality,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8 ; 조현범, 〈선교와 번역: 한불자전과 19세기 조선의 종교 용어들〉, 《교회사연구》 36, 2011. 특히 베이커 교수는 조선 사회에서 윤리인 유교와 믿음인 천주교가 만나게 되었다는 매우 흥미로운 관점으로 그리스도교의 수용을 분석하였다.

 

한편 Jacques Gernet도 동아시아에서 유교와 불교의 윤리는 구분하기 어렵게 섞였고, 서로 배타적인 ‘종교’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분석하였다. Jacques Gernet, Daily Life in China, on the Eve of the Mongol Invasion, 1250~1276,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2, pp. 212~214.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 등에 그리스도교가 수용되면서 가해진 문화 충격에 관해서는 Jacques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 A Conflict of Cultur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참조.

 

다만 이 글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종교’, ‘믿음’이라는 개념 안에서 유교, 민속 신앙, 천주교를 함께 다루었다.

 

3) 백승종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정감록, 천주교를 비롯해 기생, 깡패, 무당 등을 일종의 소문화(subculture)로 규정하고, 특히 정감록과 천주교가 서로 소통했을 개연성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백승종, 〈조선후기 천주교와 《鄭鑑錄》〉, 《교회사연구》 30, 2008 참조. 이 연구에서 백승종은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던 소문화의 상호 소통은 특정 개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연중에 촉발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조정의 탄압과 박해, 멸시에 신음하던 신자들은 다른 소문화와의 소통을 통해 오히려 위로받고, 자신의 목표를 더욱 끈질기게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필자는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천주교를 비주류문화(subculture)로 부르고자 한다. 이는 천주교는 국가에 의해 이단으로까지 지목되어 대대적인 박해의 대상이었으므로 주류문화와 대응 내지 대척 관계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비주류문화가 보다 적절하다는 동아대학교 사학과 이훈상 교수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4) 조현범은 선교사와 조선을 자기와 他者의 관계로 바라보면 이미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선교 주체와 선교 대상 사이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나아가 서로 자리바꿈까지 지향할 수 있는 공통의 토대를 발견하려는 작업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였다. 19세기에 이르도록 지속되어 온 조선의 종교적 풍토 속에 천주교가 들어와 충돌하고 혼효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압골이 형성되어 종래에 없던 종교적 에토스가 싹트기 시작하였음을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조현범, 〈선교와 번역 : 한불자전과 19세기 조선의 종교 용어들〉, 《교회사연구》 36, 2011, 162~163쪽.

 

5) 조광 교수는 이런 의미에서 천주교는 집권층이 주도한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포되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260~264쪽.

 

6) 노길명, 《한국의 종교운동》, 2005, 70~71쪽 ; 이원순, 《조선시대사 논집 - 안과 밖의 만남의 역사》, 느티나무, 1992, 111~112쪽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97~113쪽.

 

한편 천주교의 조상 제사 금령과 그로 말미암아 터져 나온 진산사건 이후 교회를 떠나는 양반 신자들이 많아졌으며, 조선 교회의 신자층은 중인 이하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상과 같은 진산사건에 대해서는 조현범, 〈초기 교회의 활동과 교세의 확산〉, 《한국 천주교회사 》 1, 2009 참조.

 

7) 장영란, 〈한국 신화 속의 여성의 주체의식과 모성 신화의 전복적 기제〉, 《한국여성철학》 8, 2007, 149~152쪽.

 

8)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된 계모 설화는 모두 35편인데, 이 가운데 32편이 ‘악한 계모’ 설화이고, 단 3편만이 ‘선한 계모’ 설화이다. 이 밖에도 구비설화에서 수용된 콩쥐팥쥐전이나 장화홍련전의 계모 이야기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계모 설화이다. 장영란, 위의 논문, 155쪽.

 

9) 조선 시대 지리산에는 곳곳에 이와 같이 산신을 모시고 치제한 성모사, 노고단, 노모당 등으로 불리는 신사가 있었다. 이와 달리 국가제사를 지냈던 신사(지리산신사, 남악사)도 존재하였다. 오늘날에도 지리산에서만도 지리산 천왕제를 비롯해 성모상 앞에서 ‘지리산 성모(천왕할매)대제’를 거행하여 지리산신인 성모천왕에게 치제하고 있다. 조선 시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신사와 산신 숭배에 관해서는 김아네스, 〈조선시대 산신 숭배와 지리산의 神祠〉, 《역사학연구》 39, 2010 참조.

 

10) 유몽인, 〈遊頭流山錄〉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0, 30~31 및 187쪽.

 

11) 《三國遺事》 5 感通 7 仙桃聖母隨喜佛事.

 

12) 통일신라 시대의 경주 仙桃聖母의 성립에 대해서는 송화섭 ‧ 김형준, 〈地異山의 山神, 聖母에서 老姑까지〉, 《남도문화연구》 20, 2011, 64~73쪽 참조.

 

13) 김종직의 유산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내가 다시 묻기를 ‘성모는 세상에서 무슨 신을 일컫는 거요?’ 하고 하니,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입니다’라고 하였다. 아! 이럴 수가 있을까? 서축과 우리나라는 수천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세계인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김종직, 〈遊頭流錄〉, 《佔畢齋集》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0, 31쪽)

 

이 밖에 신라의 고승인 연기의 어머니라는 설도 있다. “절 뜰 한가운데 석탑이 있었다. 탑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있고, 네 기둥 가운데 서서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부인상이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부인상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라고 하였다. …연기는 옛 신라 사람으로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 절을 세웠다. 그를 따르던 제자가 천 명이나 되었으며, 話頭를 정밀하게 탐구하여 禪林에서 祖師로 불렸다”(남효온, 〈智異山日課〉, 《秋江集》 : 최석기 외, 위의 책, 2000, 57쪽).

 

14) 이승휴에 따르면 용왕의 장녀가 왕건의 조부와 결혼하여 송악에 살았는데, 성모(智異山天王)가 도선을 통해 송악이 명당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龍王復出謝 引入深宮裏 遂妻以長女 (是爲景獻王后 生四子二女 其長子 我世祖 是也) 乞與金毛豕 兼以七寶隨 載送西江涘 (今祠堂在焉 親幸所也) 還來松岳居 (今廣明寺也) 於焉誕聖智 聖母(智異山天王也) 命詵師 指此明堂謂 斯爲種稊田 因以爲王氏”(《帝王韻紀》 下, 本朝君王世系年代). 김종직은 이 설을 받아들여 성모를 위숙왕후라고 해석하였다. 김종직, 위의 책, 2000, 31쪽.

 

15) “점필재 김공[김종직]은 우리나라의 박학다식한 큰 선비입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증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妃인 위숙왕후라고 하였으니, 믿을 만합니다”(김일손, 〈頭流紀行錄〉, 《濯纓先生文集》 : 최석기 외, 위의 책, 2000, 86쪽).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女人像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유몽인, 〈遊頭流山錄〉 : 최석기 외, 위의 책, 2000, 187쪽).

 

“위숙왕후는 열조(烈祖 : 태조)를 이끌어 세워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러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모셔놓고서 백성들이 영원히 제사를 올리는 것은 순리입니다”(김일손, 위의 책, 86쪽). 비록 유학자들은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고 언급은 했지만, 대개 성모를 위숙왕후로 설명하였다. 이는 유학자 관료로서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16) 선도성모설은 왕실에서 국가를 보호하는 산신으로 설정하고 삼산 여신이 오악 가운데 남악인 지리산에 연결되어 국가적 신격을 부여한 해석이다. 그 흐름 속에 성모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까지 연결된다. 그런데 고려 시대 불교문화 속에서 산신 성모가 마야부인이라는 설이 확산되었다. 조선에 접어들어서 불교는 민속화 ‧ 무속화의 경향을 보이면서 일반 백성의 민간신앙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성모는 다양한 정체성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송화섭, 〈지리산의 노고단과 성모천왕〉, 《도교문화연구》 27, 2007 ; 김지영, 〈한중 여산신 신앙 연구〉, 《지리산, 그 곳에 길이 있다》, 순천대 지리산권 문화연구원 2010 국제학술대회 발표집, 2010.

 

17) 김일손, 위의 책, 86쪽에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기도문 참조.

 

18) 김종직은 산행에 앞서 聖母廟에 들어가 맑은 날씨를 베푸는 은혜를 기원하는 고유문을 올렸다. 김종직, 위의 책, 2000, 29~30쪽.

 

19) “이른바 天王像을 보았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입니다. 이 산의 山神이 되어 이 세상의 화복을 주관하다가, 미래에 彌勒佛을 대신하여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남효온, 위의 책, 2000, 51쪽). 즉 민간에서 성모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면서 산신령으로 화복을 주관하며, 언젠가 미륵을 대신해 下生할 메시아적인 권능을 지닌 여성신으로 믿어졌다.

 

20) “우리들이 진실로 성모님을 효경하면 가히 바랄 곳이 많고 많도다”(《聖經廣益》, 〈宜行之德 欽敬聖母〉 : 유은희 역, 《교회와 역사》 429, 2011. 2, 19쪽).

 

21) 이런 점에서 성모에 대한 효경을 유교와 연결지어 설명하기에는 그 고리가 약하다고 본다. 성모에 대한 공경과 유교의 부모에 대한 효경은 비슷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점이 오히려 더 많았다는 생각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어머니에 대한 공경이라는 보편적 윤리 자체가 아닐까 한다.

 

22) 《헌종실록》 14, 헌종 8년 6월 병신 ; 《현종개수실록》 16, 현종 8년 2월 신미 등을 보면 표류해 온 중국인이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이 처리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耶蘇敎徒’이니 일본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논이 일었다.

 

23) 장영란, 앞의 논문, 2007, 154쪽.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신다는 말을 무의적으로 학습한다고까지 지적하였다.

 

24) 조광 교수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千古百選’을 선정할 때 《불경》, 《노자도덕경》, 《장자》, 그리고 왕안석의 저술을 포함한 이른바 ‘이단’의 서적을 포함시켰으며,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천주교 신앙도 연구될 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389쪽. 한편 정조 재위 기간 천주교에 대한 정책과 채제공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이장우,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한국 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15~32쪽 참조.

 

25)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1987, 355쪽.

 

26) 《헌종실록》 6 헌종 5년 10월 경진.

 

27) 이른바 ‘妖女’가 스스로 生佛이라고 자칭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고, 한 道의 백성들이 선동되었다고 할 정도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어사를 보내어 이들을 효시하게 하였다(《영조실록》 91, 영조 34년(1758) 5월 계묘).

 

28) 《숙종실록》 5, 숙종 2년(1676) 11월 기묘.

 

29) 《순조실록》 1, 순조 즉위년(1800) 9월 임인.

 

30) 蓋耶蘇卽西洋海外別種, 而有妖術, 能誑惑愚民.

 

31) ‘교사한 별종’, ‘흉악한 별종’ 등으로 별종은 대개 부정적인 수식어와 더불어 사용되었다. 대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구나 북방의 오랑캐 등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선조실록》 45, 선조 26년 7월 신유 및 윤11월 임진 ; 《선조실록》 177, 선조 37년 8월 계사 등).

 

32) Jacques Gernet은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종교의 특징에 대해 종교적 활동의 목적은 대개 신이나 신성시 여겨지는 대상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하였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신들이나 신성한 대상들은 각각 홍수, 질병, 가뭄 등 각개의 일정한 영역에서 수호의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되는 공식적 제례의 최우선적 목적도 왕조의 지속을 확실히 해 주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국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도 형벌이나 법보다도 제례였다. 그러므로 유학자에게 종교는 개인의 신비한 경향을 만족시켜 주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수용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종교에 구세주라는 가장 큰 충격을 가져왔던 것이다. Jacques Gernet, 앞의 책, 1962, pp. 197~204.

 

33) 《순조실록》 2, 순조 1년(1801) 2월 신미.

 

34) 《순조실록》 3, 순조 1년 6월 신해.

 

35) 《순조실록》 12, 순조 9년 12월 경자.

 

36) 《순조실록》 24, 순조 21년 8월 갑오.

 

37) 적어도 1790년대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피난을 떠난 천주교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교우촌’의 형성은 신유박해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다. 박해기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은 《한국 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119~151쪽 참조.

 

38)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은 그 세력이 8州로 확장되어 나가자 36방을 두어 보다 조직화하였다. 방은 장군호(將軍號)와 같은 것인데, 큰 방은 무리가 1만여 명이고 작은 방은 6천 또는 7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39) 《순조실록》 1, 순조 즉위년 9월 임인.

 

40) 노길명은 한역서학서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서학 수용을 서학운동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서학운동은 조선 사회에 몇 가지 충격을 가했는데,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인간관이 봉건사회체제의 청산을 촉구하는 변혁 이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주교 신앙운동이 점차 반봉건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노길명, 《한국의 종교운동》, 고려대학교 출판부, 67 및 71쪽.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가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충격’을 가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여러 주장이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이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41) 이원순, 《조선시대사 논집 ‒ 안과 밖의 만남의 역사》, 느티나무, 1992, 111~112쪽 ; 노길명, 위의 책, 78~84쪽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도의 일상생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260~264쪽 ; 조광, 〈조선후기 서학사상의 사회적 기능〉,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19~20쪽.

 

[교회사 연구 제38집, 2012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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