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십자군 운동과 프란치스코의 선교활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522

[교회사에서 배운다] 십자군 운동과 프란치스코의 선교활동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종교의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최근에도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전쟁이 단순히 신앙의 이유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세속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욕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전쟁에는 반드시 끔찍한 폭력과 학살 그리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동반되었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200여 년간 지속된 십자군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 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와중에서 평화적인 선교방법을 시도하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노력에 대해서도 살
펴보자.


십자군 운동의 배경

처음에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였을 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셀주크튀르크가 1071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한편
비잔틴 제국에 대한 셀주크튀르크의 압박이 심해지자, 알렉시우스 1세 황제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1095년에 클레르몽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이교도와의 성전(聖戰)과 순교의 영광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교황은 십자군으로 종군하는 이에게 전대사를 베풀고 보속의 고행을 면하게 하며, 종군한 이의 재산을 빼앗는 자는 파문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차 십자군과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

왕과 제후들이 십자군을 결성하기 전에, 설교가인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민중 십자군이 먼저 발생하였다. 민중 십자군은 농노와 부랑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따라서 체계적 조직, 효과적 무기, 엄격한 군기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행군하는 도중에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비잔틴 제국 안에서도 현지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결국 소아시아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셀주크튀르크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전멸하였다.

이후 귀족들을 중심으로 제1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며 이들은 1099년 7월에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안에 거주하고 있던 유다인들과 이슬람교도
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작령,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등 4개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복 이후에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귀국하면서 십자군 국가들을 보전할 인적 자원이 부족했고, 이것이 후일의 화근이 되었다.


2차, 3차 십자군과 살라딘의 등장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한 데에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이라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다. 그러나 1128년에 셀주크튀르크의 술탄인 장기가 이슬람 세계의 내분을 수습하고 통합을 이
루어내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위기에 봉착하였다.

장기는 1144년에 에데사 백작령을 점령하였다. 2년 뒤 십자군은 에데사 백작령 탈환을 시도했으나 장기의 아들 누레딘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1147년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참전한 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셀주크튀르크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누레딘이 죽고 나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떠오른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118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에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한 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대립하면서 내분이 일어나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출발이 늦어졌으며, 먼저 출발한 프리드리히 1세는 소아시아의 살레프강에서 익사하였다. 결국 이들의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1192년에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휴전 조약을 맺었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순례자들도 평화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의 타락과 종말

이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성지 회복이라는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탈선 행위를 하였다. 1204년에 결성된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과 결탁하여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그다음에도 4차례나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291년에 십자군 국가들이 모두 소멸되었고,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1212년에 이른바 소년 십자군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목동인 스테파노와 쾰른의 열 살짜리 소년 니콜라오의 인솔 아래 프랑스와 독일의 소년소녀들 수천 명이 성지로 급히 출발하였다. 이 광신적인 계획은 무서운 비극으로 끝났다.

원정은 벌써 이탈리아에서 흩어졌고, 많은 아이들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마르세유와 브린디시에서 배를 기다리던 나머지 아이들은 비양심적인 선주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렸다.


프란치스코의 선교활동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폭력적인 진압과 정복 대신 평화적인 선교를 시도하였다. 1219년에 그의 동료인 피에트로 데이 카타니와 함께 십자군의 배에 승선하여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갔다. 그는 다른 십자군처럼 무장을 하고 간 것이 아니었다. 십자군들의 방종한 행동을 꾸짖었고 그들의 패배를 예언하였다.

그는 이슬람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술탄을 직접 찾아갔다. 술탄 앞에서 열정을 다하여 복음을 설교하였으며 술탄은 그의 말을 경청하고 나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비록 프란치스코의 선교 노력이 전황을 바꾸거나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한결같이 평화에 대한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었다.


십자군 운동에 대한 평가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십자군 운동을 평해보려고 한다.

첫째, 십자군 운동에서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걸고 일어났던 폭력적인 일들에 대한 평가이다. 교회사가인 아우구스트 프란츤은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지 회복 이후에 저질렀던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행위들은 확실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인간적인 부족함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지나친 행동은 그 후에도 십자군의 사건들을 여러 번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열정이 생사를 건 싸움의 쓰라림과 혼합되었을 때, 거칠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거의 교양이 없는 이 전사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누가 미리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A. Franzen, 「세계교회사」, 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2001년, 225-226쪽)

십자군의 폭력행위에 대한 평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어쩌면 당초 무력수단을 동원하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그 안에 양민 학살이라는 비극을 안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일시적인 성지 회복에 그쳤으며 이슬람과의 관계는 물론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더욱 고착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도 자체가 복음화를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이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성지 회복과 선교를 시도한 점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의 방식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 방법과 의도에서는 결코 교리나 인간의 도의에 어긋나지 않았기에, 교회가 선교를 위해 지향해야 할 모범을 남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성과 지혜가 결여된 맹목적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며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 사건이 십자군 운동이었다. 초기 십자군 시기에 일어난 민중 십자군과 후기 십자군 시기에 일어난 소년 십자군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충분한 사전 지식과 준비 없이 그저 신앙만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맹목적인 열정이 결국 비참한 결말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데 강한 종교적 열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지식이 갖추어지지 않거나 어려운 상황을 잘 판단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결국 교회 공동체에 해악만 끼친다는 점을 특히 두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에는 종교적 동기가 매우 강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세속적인 이익을 더 추구하면서 결국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구나 전쟁이라는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복음과는 맞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이성이 결여된 맹목적 신앙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함은 민중 십자군과 어린이 십자군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러한 오류와 실수 가운데에서도 평화적인 방법을 시도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노력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희망과 교훈을 전해준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명분을 앞세웠다고 해도 올바르고 지혜로운 방법을 택해야 하며 폭력보다는 평화가 우선이라는 점을 십자군 운동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 김규성 요셉 - 인천교구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한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6월호, 김규성 요셉]


1,83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