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76년 임학권 바실리오, 성바실리오 성당을 봉헌하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15 ㅣ No.62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밀알 하나는 예수님을 춤추게 하고 - 1976년 임학권 바실리오, 성바실리오 성당을 봉헌하다

 

 

대구대교구 성당이름은 행정구역명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파리의 노트르담(성모)성당, 로마의 베드로성당 등과 같이 대부분 주보성인 이름으로 불린다. 물론 우리 교회도 초기에는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라 계산성당을 성모성당, 남산성당을 성요셉성당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이윤일성당, 바오로성당, 소화성당처럼 주보성인 이름으로 불리는 성당들은 특별한 사연을 지닌 곳이다. 영천의 육군 제3사관학교에는 성바실리오성당이 있다. 군종교구는 성당 대부분이 방패성당, 상무대성당 등 특수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군종교구에서도 주보성인으로 불리는 성당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 성바실리오성당은 1976년 대구의 성누가의원 원장 임학권의 세례명인 바실리오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성바실리오 성당 건립

3사관학교 안에 있는 바실리오성당은 일반인의 출입이 쉬운 곳은 아니다. 정문에다 신분증을 맡기고 똑같은 블록을 몇 개 지나서 왼편으로 꺾어들다 보면, 방문자는 전혀 다른 전경을 목도하게 된다. 커다란 충성대교회가 있고, 이어 한옥으로 된 법당이 보인다. 그 가운데의 숲을 가르고 들어앉아 있는 건물이 바실리오성당이다. 2층 대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춤추는 듯한 십자고상의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얼마나 좋으시면 춤을 추실까!

육군 제3사관학교는 1968년 초급장교 양성을 위해 창설되었다. 이곳에서의 천주교 사목활동은 개교 이듬해 박춘식 신부가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박신부는 당시 충성연병장 입구 맞은 편(현재 전차가 전시된 자리)에 20여 평의 가건물을 세워서 미사를 드렸다. 그들은 이 건물을 개신교회와 함께 사용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75년 전주교구 리수현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군종병과 사무실 옆의 조그만 강당에서 개신교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천주교 미사를 드렸다. 리 신부는 도착하자마자 세 종파를 한 건물에 배치하는 종교센터인 ‘충성당’ 건축계획을 들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각 종파의 분담금은 천주교 1천만 원, 개신교 4천만 원, 불교 2천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충성당 설계에는 성당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천주교는 개신교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리수현 신부는 장군 4명과 신부, 목사, 법사가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성당에는 감실, 성상, 14처를 설치해야 하는데 그래도 함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엇보다도 따로 짓지도 않는 성당의 건축헌금을 누가 내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이 회의에서 신부는 독립된 공간을 확보받았다. 그러나 이미 충성당에는 개신교회와 법당이 좌우양쪽에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중앙통로의 휴게실용 자리에 성당이 들어갔다. 성당은 충성대 부지 총 636평 중 63평의 공간이었다. 리수현 신부는 안으로는 이렇게 상황을 정리해 나갔지만, 밖으로는 천주교측 분담금을 마련해야 했다. 이문희 주교는 대구의 임학권 원장이 교구에서 새로운 성당을 지을 때마다 100만 원씩 내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성당을 짓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임학권에게 직접적인 권유는 김광석 군종후원회 회장이 했다. 리신부는 주교도 운을 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개신교, 불교 두 종파가 모금을 하고 있는 동안, 천주교 분담금은 임학권이 혼자 완납했다.

불교와 개신교는 특별한 이름을 짓지 않고 충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리수현 신부는 성당은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공동 건물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독자적인 이름을 붙일 수가 있었다. 임학권의 세례명을 따라 바실리오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니 바실리오 상이 필요했다. 국내에서 바실리오 성상은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리 신부는 작은 바실리오 상본을 서울로 보내 성상을 제작해 왔다. 이 상은 현재도 새 성당 입구에 있다. 충성당은 1976년 8월에 완공되었다. 다음 달 도쎄나 교황대사와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보좌주교가 이 성당을 축성했다. 리수현 신부는 이제 원로사제이다. 그는 지금도 당시의 은인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며, 바실리오 축일에는 임학권 및 은인들을 위한 미사를 지낸다. 그는 당시에도 은인들을 기려 먹판에 치하하는 글을 새겨 성당벽에 붙였다. 그는 이병구 생도대장도 애 많이 썼다고 기억한다. 리 신부는 결국 세 종파 중 가장 적은 분담금을 내었지만, 독자적 공간과 이름까지 받으며 바실리오라는 묘목을 심었다. 임학권은 씨앗이 되었다.

집은 지어 놓으면 늘 돈이 들게 마련이다. 임학권은 성당 감실 및 비품비 500만 원을 추가로 봉헌했다. 그는 1980년 윤민구 신부 때 성당 앞에 성모상을 봉헌했다. 이 성모상은 현재 15사단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93년 서정섭 신부는 4천여만 원짜리 ‘성바실리오 교육관’을 지었다. 충성당 2층 날개건물 사이를 막아 공간을 마련하는 공사였다. 임학권은 이때도 1천만 원을 부담했다.


바실리오성당의 벽돌이 된 사람들

제3사관학교는 육군장교의 약 50% 정도를 배출하는 곳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과 ROTC 장교를 제외한 군종장교, 학사장교, 군의관, 법무관 등이 이곳에서 훈련했다. 수많은 장교들이 거치는 곳이고 또 장교들은 군대에서 영향이 적지 않다. 신홍식 신부는 오늘의 바실리오성당을 지었다. 옛 바실리오성당은 정원이 200명이었다. 그런데 군의후보생, 법무후보생 등 약 400명가량이 미사에 참례했다. 성당은 사제가 제대 앞으로 갈 통로마저도 막혔다. 신부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성당건축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뿐 아니라 자신도 이듬해 전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몇 달을 고민하던 신부는 결국 장기복무를 결심하고 군종교구장께 3사관 학교 내 성당의 중요성을 의논드렸다.

당시 군종교구 1년 예산이 10억여 원 정도였다. 신부는 애초 5억 원 정도로 조립식 건물을 지으려고 생각했다. 다시 약 8억 원짜리 벽돌건물을 예산했다. 그러다 제대로 된 성당을 짓자니 결국 15억 원 정도가 필요했다. 건축비용은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늘어났다. 새로 공사를 시작한 성당은 군종교구에서 5억 원을 지원받고, 나머지는 모금으로 충당했다. 한국군종후원회 회장이며 한국샤프회장인 이관진이 6억 원을 내었다. 그는 5억 원을 내고 나중에 다시 와서 ‘모자라실 텐데 왜 더 달라고 하시지 않느냐?’며 1억 원을 더 내었다.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활동하던 양마태, 송수남, 이부옥은 셋이 함께 와서 대지를 확인하고 돈을 냈다. 양마태 할머니는 북한 피난민으로 포목상을 경영하던 분이었다. 그가 중심이 된 이들 ‘명동성당 과부 삼총사’는 여러 성당건립에 참여한 분들이었다. 이외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 광고로 2억 6천만 원이 모금되었고, 서울 서초동본당과 대구대교구 12개 본당의 2차헌금과 약정서를 통해서 4억여 원을 모았다. 대구, 부산 군종후원회도 도왔다. 총 20억 8천만 원의 공사였다. 신 신부는 임학권 회장도 만났다. 그는 은퇴하고 병원과 사택을 교구에 헌납한 뒤라면서 2천만 원을 봉헌했다.

신홍식 신부는 이 정성들로 새 성당의 벽돌을 쌓아나갔다. 성주성당과 장성성당을 설계한 김연배가 설계를 맡았고, 감실, 십자고상, 제대, 14처 등은 장동호(2007년 선종)가 만들었다. 그 외는 분도수도원 목공소와 목공예가 이성계가 제작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김도율 신부 작품이다. 신 신부는 공사 내내 현장에 매달렸다. 시공회사 ‘중덕’은 사장이 잘 아는 교우여서 설계자와 함께 성당의 동선이나 필요에 따라 설계도면을 수정해 가며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춤추는 십자고상, 감실, 14처 등 여러 특징들이 살아났다. 신홍식 신부와 김도율 신부는 세례대를 직접 디자인해서 이를 조각가에 의뢰하여 함께 만들었다. 한 곳에서 물이 나와서 아래로 흘러가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지상 2층 485평,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완공했다. 11월 30일 군종교구장 이기헌 주교가 주례하고, 군종신부 및 대구대교구 사제 20여 명의 공동집전으로 새 성당은 축성되었다. 군종후원회 은인 및 임원, 모금본당 회원 등 총 800여 명이 참석했다. 임학권도 축성식에 참여했다. 그는 그리고 나서 100여일 후에 선종했다.

현재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는 임학권 바실리오가 지은 바실리오성당이 없다. 그러나 임학권 바실리오는 처음 성당을 봉헌했고, 이후 필요로 할 때마다 합류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성당까지 보았다. 바실리오성당은 리수현 신부와 임학권에 의해 심어졌고, 전국적으로 물주는 사람 수를 늘려가면서, 엄청나게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왔다. 새 성당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왜 ‘바실리오성당’이냐고 문의했다. 장소도 옮기고 모습도 새로운 성당을 지으면서 새로 출발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데는 이성우 신부의 권고가 컸다. 이성우 신부는 신홍식 신부에게 성당 모습이 전혀 달라져도 이름은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당시 사목하고 있던 월성성당에서 모금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이름은 이름 그대로 생명을 지닌 또 하나의 역사이다. 신홍식 신부는 성당건축비를 마련하려고 당시 가톨릭신문사 사장 이용길 신부에게 광고를 부탁했다. 그리고 광고가 나가자 몇 백만 원씩 선뜻 약속하는 전화들이 이어졌다. 군의장교 등 임용훈련을 하는 동안 이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바실리오 성당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어달리기였다. 전혀 새로운 사람도 합류했다. 신 신부는 경산의 고산성당으로 모금 나갔을 때 하루에 라면 한 개 값을 절약하여 몇 년 동안 모은 돈이라며 100여만 원을 내어준 여성신자를 고맙게 기억한다. 성당을 짓는 사람의 노고에 다른 이들이 감사하며, 또 이를 감사하는 사람들은 감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다. 이렇게 하여 한 명의 바실리오가 또 다른 바실리오들을 태어나게 한다.

1월은 대구대교구 제2주보 이윤일 요한 성인의 축제가 열리는 달이다. 임학권은 관덕정 운영위원회 초대회장으로 이윤일 요한 성인 축제의 기틀을 놓았다. 그는 관덕정에서 자기 생애의 마지막 교회봉사를 수행했다. 북한에서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하겠다고 홀로 남하한 청년 임학권은 늘 주님께 받은 게 너무 많다며 살았다. 그는 살아서는 재능, 시간과 재산을, 임종 시에는 시신까지 사회에 내놓고 갔다. 예수님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던 것일까? 그가 뿌린 한 톨의 밀알에 지금도 예수님은 춤을 추신다. (도움 : 리수현 신부, 신홍식 신부, 조정헌 신부, 조은희, 임효덕, 홍춘영, 문승화)

[월간빛, 2014년 1월호, 김
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2,71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