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오래된 새로움: 생태위기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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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281

“오래된 새로움” : 생태위기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라는 책이 있다.1)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우리 사회 현실을 진단하고 생태적 전환을 제안하는 책이다. 우리 경제는 지난 몇 십년간 전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2008년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적 불황의 시대에 한국의 백만장자 증가율이 세계 평균의 3배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린 잔치는 아니었지만, 선진국들이 누려온 발전과 풍요의 뒷자리를 차지하고 흥청망청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 잔치가 끝나고 있고 그 뒤를 따라오는 후유증이 경제적 파산을 넘어 총체적 파국으로 예상된다는 사실이다.

 

 

1. 불편한 진실들

 

지구 온난화만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받아들이기 난처한 불편한 진실들로 가득하다. 고소득자의 연봉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중산층이 거의 무너지고 비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 극빈층이 급증하고 있다. 주 5일 근무의 여유를 누리며 연휴 때면 많은 이들이 비행기표 구하기 어려울 만큼 해외로 나갔지만 실업자와 노숙자, 해체된 가정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녹지대와 공원에 숲이 푸르지만 새소리가 안 들리고 제비들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애완용 동물 애호가들의 극성으로 동물 성형수술까지 한다고 야단이지만, 습지대와 갯벌을 없애고 산을 뚫고 물길을 막아댄 대가로 수많은 동식물종이 사라지고 있다. 수도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고 고속도로 휴게실마다 아름다운 화장실 문화를 자랑하지만, 계곡에 물소리가 사라졌고 그나마도 하천이 오염되어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안전한 물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닐하우스나 먼 외국에서 키워낸 철 아닌 과일과 채소를 계절이 무색하게 즐기고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율은 약 25%로 OECD 30개국 중 26위라고 한다(미국, 캐나다 150% / 프랑스 200%).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지만, 예약이 없이는 진찰받기도 어려울 정도로 온 나라가 아프다. 일인당 에너지 사용량이 미국 다음을 자랑할 만큼 과학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는 IT 최강국이라지만, 오일쇼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이 외국투자 전문가들의 전망이고 그 예상은 이미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 인류는 뜨거워지는 지구와 바닥난 천연자원, 심각한 식량난 등 인간 삶의 기초가 되는 환경과 자원, 먹을거리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2008년 7월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의 논제 역시 온난화를 막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것과 식량위기 타결이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그리고 식량위기이다.

 

1)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인류가 큰 재난을 겪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의 경고는2) 진실이랄 것도 없이 이미 드러나 겪고 있는 사실이다. 뜨거워진 지구는 혹독한 가뭄과 홍수, 해일과 지진 등 기후변화를 일으키며 몸살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한 인명 피해와 자원 손실은 물론 환경 난민과 식량생산 감소는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온난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는 곡식의 성장에도 영향을 주어 갈수록 영양분이 없는 질이 낮은 곡식이 재배되고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 녹아내린 빙하로 해수면이 올라가 몇 십 년 내로 많은 섬나라들과 뉴욕이나 상하이 같은 항구도시들이 바다 밑으로 잠길 것으로 예상된다. 아프리카 내륙의 대형 호수들이 말라붙는 것도 결국 만년설이 녹아 지층에 스며든 것이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 자원 고갈

 

‘피크오일’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와 함께 지난 몇 년 간 무섭게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물가 상승은 우리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현대문명의 이기와 편리를 누리느라 인간은 수억 년 걸려 만들어진 석유와 석탄을 지난 이백 년 동안 마구 파내어 물 쓰듯 써버렸다. 에너지 소비를 극도로 줄이지 않는 한 지구가 제공할 수 있는 화석연료는 아주 길게 잡아 40년 정도 쓸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수자원의 고갈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아프리카에서 가뭄과 물 부족은 에이즈보다 무서운 재앙이라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흙탕물일망정 우물을 서로 차지하겠다며 부족간 살인극이 끊이지 않고, 국가간 ‘물 전쟁’도 그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정말 불편한 진실은, 석유와 석탄, 물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인간은 에너지 없이 사는 불편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 소비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는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 에너지의 대부분은 주로 재생 불가능한 석탄과 석유에서 나온다. 식생활만 해도 자기 집이나 동네 마을에서 기른 먹을거리가 아니면 석유의 도움 없이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밭에서는 화학비료, 살충제를 먹고, 석유와 전기를 이용하는 농기계의 도움을 받아 비닐하우스에서 길러지고 수확된 후에는 비행기와 트럭으로 운송되어 엄청난 전력을 쓰는 대형마켓의 거대한 냉장 진열대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아침에 일어나 손에 쥐는 칫솔부터 매일 사용하는 대부분의 일용품은 거의 다 석유로 만든 제품들이다. 천연 재료로 되어있다 하더라도 공정과정과 운송과정에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의식주의 기본인 수돗물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에도 이미 엄청난 에너지가 투입된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인간이 몸을 사용해서 했던 많은 일들을 전자제품이 하고 있다. 전기코드를 꽂지 않으면 당장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고 밥통, 세탁기, 청소기……. 의식주를 위한 수많은 가전제품들……. 마늘을 빻는데도, 모기를 쫓는데도, 하다못해 이를 닦는데도 현대인은 전기를 사용한다. 머리를 말리는 데도, 음식을 얼리는데도, 그 음식을 다시 녹이는데도 전기가 필요하다. 조금만 어둑해지면 전깃불을 켜야 하고, 여름엔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어 실내온도를 낮추고, 겨울엔 내복이 필요 없을 만큼 난방을 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조금 낡은 것, 유행이 지난 것, 싫증난 것은 뒤도 볼 것 없이 버려지고 백화점과 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 사이를 헤엄치며 계속 새 것을 사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팔다리는 쓸모가 적어져 퇴화될 지경이고, 자동차와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필수품이 되었다.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과 소비 중독에 빠진 인간은 땅과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없이 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하느님이 주신 자신들의 몸을 쓸모없게 만들면서 급기야 에너지 고갈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3) 식량위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장 지글러라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기아의 진실을 설명하는 책이다.3) 전 세계 인구의 두 배가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는데도 하루에 10만 명 이상이,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비롯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어린이들은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생계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고, 프랑스의 생산량만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다는 식량과잉의 시대에 기아로 아사한 어린이들의 시신이 피라미드처럼 쌓이고 있다고 지글러는 통탄한다. 이 시대 기아의 주원인은 식량부족만도, 자연재해나 전쟁 등 일시적 재난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가뭄, 사막화, 전쟁으로 경작지가 줄고, 화학비료와 살충제로 토지가 오염되고 해수면 상승으로 농경지가 줄고 그나마도 토양이 염분화되는 등 식량생산을 저하시키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게다가 오일쇼크로 인한 식량가격 폭등은 가난한 이들을 치명적 굶주림에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극심한 식량 위기의 더 직접적이고 고질적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고 한다. 이 시대의 굶주림은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이들에게 가해진 구조적 폭력이다.

 

a) 불합리한 <세계경제질서> : 자유무역과 기업농

 

북미와 유럽에서 수입된 덤핑 곡물과 축산품은 아프리카 농산물보다 턱없이 싼 가격으로 시장을 점령하여 경쟁을 버틸 수 없는 가난한 나라 농민들은 차례로 농사를 포기하게 되었다. 과거 식량 수출국이었던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농민들은 부자나라에서 소비되는 카카오와 사탕수수, 커피와 과일 등 특수작물만 단작하는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며 자신들을 위한 식량은 철저히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불합리한 농업 구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식량은 돈과 무기가 되었고 다국적 곡물회사들은 국제 식량 가격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조정하며 엄청난 이득을 올리고 있다. 식량주권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식량 확보가 문제가 되면서 식량 수출국들은 농산물 수출을 제한하거나 금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 기아의 시대에 유럽 어느 나라는 축산물 가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멀쩡한 소 40만 마리를 죽여 폐기처분하는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프고도 불편한 사실이다.4)

 

b) 세계적 육류 소비 증가

 

북미와 유럽에 채식주의자가 느는 추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육류 소비가 계속 늘어나는 것도 기아의 직접적인 원인이다.5)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의 삼분의 일이 가축 사료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구수가 많은 이 두 나라의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가축들이 곡물 사료가 아니라 풀을 먹으면 10억 인구의 식량이 해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소는 배불리 먹는데 사람은 굶은 것이 현실이 되었다. 육식에도 원인이 있는 심장마비와 뇌졸중, 암등으로 사망하는 북반구 사람들의 숫자와 기아로 죽어가는 남반구 사람들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것은 이 시대 양극화의 뼈아픈 진실이다.

 

c) 바이오 에탄올 연료 생산에 사용되는 곡물 수요

 

석유 대체연료로 개발된 바이오(에탄올) 연료 생산에 곡물을 사용하는 것도 2008년 세계 식량 가격 급상승에 75%나 책임이 있다는 세계은행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6) 선진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에탄올 생산이 식량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돌려져야 할 잉여곡식으로 부자들의 차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비인도적이다.

 

식량부족과 자원 고갈, 기후변화 등으로 드러나는 지구촌의 위기는 각 나라의 주권과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문제이다. 쌀을 제외하면 곡물 자급율이 5%에 불과하고, 밀가루(95% 수입), 옥수수, 콩, 등을 거의 대부분 수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식량주권, 식량안보의 차원에서 대단히 취약한 상태이다. 쌀은 거의 자급되는 수준이지만 소비량이 나날이 늘어나는 밀가루를 포함하여 무섭게 치솟는 식품가격을 생각하면 상황은 암울하다.

 

식량 자급 문제와 관련해서 쿠바가 이뤄낸 성공은 좋은 모범이 된다. 1990년대 초 쿠바는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로 식량, 석유 등의 기초 자원이 끊긴 상태에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영양실조와 기아의 위험에 놓였었다. 그 때 쿠바가 선택한 것은 제한된 식량으로 어린아이와 노인, 여성 등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식량배급정책과 작은 땅이라도 효과적으로 먹을 것을 심고 가꾸기 위한 유기농법과 생명공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 도시 안에 텃밭을 가꾸며 식용작물을 재배하도록 장려하는 정책 덕분에 쿠바는 불과 몇 년 후 자급율 40%에서 거의 자급자족 수준까지 식량생산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석유뿐 아니라 화학비료와 살충제도 구할 수 없었던 경제적 고립은 결국 쿠바를 세계에서 가장 유기농이 발달한 나라, 자신들의 땅을 살려내며 식량자급을 이뤄낸 기적의 나라로 만들어주었다.7)

 

4) 가장 심각한 문제 : 극단적 양극화

 

지금 세상에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부와 힘을 소유한 사람들과, 기후변화의 결과로 고통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있다. 한 쪽은 대기가 과포화 상태가 될 때까지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여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다른 쪽은 이 기후 변화의 결과로 갈수록 더 고통 받는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주도한 ‘성장과 개발’이란 폭군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권까지 박탈하는 보이지 않는 큰도둑질을 정당화시켜왔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기아로 하루에 10만 명 이상이 굶주려 죽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음식물 처리에 매해 15조원을 낭비하며 땅을 오염시켜도 괜찮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자신들만을 위해 더 많이 확보하려는 부자들의 이기심은 오랜 정치적 불안정과 식민정책의 후유증, 기아와 질병, 가난과 전쟁으로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진 사람들을 참담한 고통에 몰아넣고 있다.

 

오백 명 넘는 신학생이 공부하던 나이지리아교구 신학교가 고유가와 식량가 폭등을 견디지 못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고 2008년 6월 바티칸 뉴스에 보도되었다.8) 식량을 조달할 수 없고 전기를 사용할 수 없어 수많은 신학생들이 사제직에로의 부르심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좌절은 제삼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20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작가 도리스 레싱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수상 연설을 했다.9) 이 연설에서 레싱은 글을 배웠지만 책이 없어 읽지 못하고 불을 켜지 못해 숙제를 할 수 없고 며칠을 굶었어도 먹을 것보다 책에 더 굶주린 아프리카 사람들과 이런 비참한 상황을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부유한 영국 사립학교 학생들, 아무도 읽지 않는 그들 학교의 아름다운 도서관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을 비교하며 세상을 선명하게 갈라놓고 있는 극단적 불공평을 비판한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초적인 악은 전체를 보는 능력의 부재”라고 했다.10) 바로 내 옆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비도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동조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인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고,11) 서경식은 인간의 교양을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상상력’이라고 정의했다.12) 우리는 성장과 풍요라는 표지판을 따라 달려가느라 더 큰 우리를 살피지 못하게 되었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 상부상조의 정신,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 같은 인간적 품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2. 회심과 새로운 길

 

이제 필요한 것은 멈추고 다시 길을 찾는 것이다. 길을 잃으면 다시 뒤로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가서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어떤 표시판이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했는지 확인하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인류가 처한 위기상황은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추구해온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그리고 잃어버린 진정한 삶의 가치를 되찾기 위한 방향 전환, 회심을 요구한다.

 

아미쉬 공동체

 

종교박해를 피해 18세기에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하여 지금까지 300년간 현대 문명의 한 복판에서 생태친화적인 소박한 삶을 사는 아미쉬(Amish)라는 공동체가 있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자들로 미국 내 몇 곳에 20여만 명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로 산다. 전기와 자동차를 비롯한 현대문명을 종교적 도덕적 이유로 거부하고 지금도 마차를 사용하며 17세기 의식주를 고수하는 아미쉬들의 삶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바깥사람들에게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구원에 이르려면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의 방식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따르며 타협 없이 살아온 생활방식은, 그들이 거리를 두고 피해온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온 나머지 인류가 맞닥뜨린 총체적 위기의 원인과 그것을 피해갈 대안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자만심과 개인주의와 경쟁심을 인간의 가장 나쁜 특성으로 간주하며, 대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초한 겸손과 수수함, 자발적 순종을 미덕으로 여긴다. 2007년 아미쉬 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 후,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공동체 안에 깊이 육화된 비폭력 정신과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석유와 전기를 쓰지 않는 아미쉬 마을은 당연히 공해와 오염이 적고 천연자원이 낭비되지 않는다. 전기나 화석연료를 쓰는 기계 대신 인력을 최대로 활용하며, 노동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한다.제 손으로 집을 짓고 농사를 하고 바느질과 요리를 하면서 아기를 기르며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한다. 모든 일에 상부상조하면서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노동을 배우고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자체 교육을 받는다.

 

이런 아미쉬들의 삶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무한질주, 과소비와 자원낭비로 인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식량난, 전쟁과 난민, 양극화로 인한 갈등 등 이 시대의 온갖 난치병들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함께 지켜온 것은,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소박하고 겸손한 생활, 일상생활의 중요성과 손노동의 가치이다. 그들을 인도하는 별은 성장과 풍요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3. 베네딕도회 수도생활 : 다름을 사는 ‘산 위의 마을’

 

인류가 돌아서야 할 회심의 방향은 너무 분명하다. 바로 아미쉬들이 살고 있는 공생공락(共生共갪) 공동체로의 전환이며, 자원을 덜 소비하며 단순하게 사는 검박한 생활과 노동의 거룩함을 사는 소농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이며, 친교와 환대, 우정과 섬김을 나누는 인간적이고 영적인 관계의 회복이다. 생태위기를 극복할 대안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이런 가치들은 사실 우리 베네딕도 회원들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천 오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추구해온 삶, 세상과 구별되는 생활방식의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1) 공동체(개인주의의 극복)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은 기다림을 사는 삶이다. 수녀원에 입회해서 익히게 되는 언뜻 사소해 보이는 여러 가지 관습들은 기다림의 훈련이다. 장상의 신호가 떨어지기까지, 모두 모일 때까지, 다른 형제들이 준비될 때까지, 함께 수저를 들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 사람이 끝낼 때까지……, 혼자 가지 않고 함께 가기 위해 우리는 기다린다. 형제의 속도와 필요를 의식하며 기다린다. 기다림은 듣는 훈련이다. 공동생활은 형제를 느끼고 기다리고 맞추는 경청과 순종의 삶이다. 빠르게 간편하게 경쟁적으로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21세기에 서로 배려하며 천천히 조화롭게 걸어가라고 6세기의 성인 베네딕도는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루에 몇 번씩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우리의 공동생활은,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렵다는 오늘의 가정이 잃어버린 가치, ‘함께’를 생활의 중심에 둔다. 고독을 호소하면서도 각자 취향대로 혼자서 편하게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 현대인에게는 수시로 한 자리에 모이는 우리의 삶이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혼자서 효율적으로 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성가신 점이 있더라도 함께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좋은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내 사정’이 아니라 ‘네 사정’을 살피고 그래서 양보하고 도와주는 상부상조는 세상이 잃어버린 가장 고귀한 가치 중 하나이다.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기초월, 성공이 아니라 어울림이 우리 생활의 가치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연출자가 아니어도 같이 있을 줄 안다.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으로, 피조물의 분수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곧 내가 중심이 아닌 줄 아는 사람으로, 그래서 주인공이 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우리는 초대되었다.

 

공동체는 개인주의의 유혹과 자기실현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포기와 상부상조의 가치로 건너가는 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도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함께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어려운 것도 함께하는 것이다. 조화와 어울림은 쉽게 얻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평생을 갈고 닦으며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이루어지는 자기포기의 결실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섬세함, 기도할 때 옆 사람의 속도와 음정을 들으며 내 소리를 내는 조심성, 내키지 않는 일도 때론 내 뜻과 반대되는 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탈자기중심성……, 다양한 요구와 각기 다른 기질과 습관들 사이에서 조금씩 양보하며 전체 안에 조화를 추구하는 이 쉽지 않은 예술은 ‘겸손’의 덕을 요구한다. 수도원은 일상이라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랑의 학교이다.

 

2) 항상성(하느님 중심)

 

매일의 우리 삶은 단조롭다. 베네딕도회 생활을 ‘창조적 단조로움’이라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외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 각자 맡은 소임의 성격과 내용은 다르지만 기도와 일이 반복되는 수도자의 하루는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고지식할 정도로 그대로 지켜진다. 십여 년 전 수녀원 뒷산에 산불이 난 날, 소방대원들과 마을사람들과 함께 불길을 잡고 내려와서도 저녁기도는 제 시간에 성당에서 바쳐졌고, 2002년 월드컵 4강전의 연장전 페널티킥만 남겨두고 온 나라가 골대를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당에 갔다. 물론 마음까지 데리고 들어갈 순 없었지만…….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적인 환경이란 자기관찰의 습관과 자기이해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환경을 뜻한다”고 하면서 베네딕도 수도원의 하루 흐름과 리듬은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가르쳐주는 질서’라고 했다.13) 기도와 노동과 독서의 삼중주인 수도원의 하루는 여러 번의 “멈춤”과 “정지”로 우리를 ‘제자리’, 즉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첫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자기 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

 

기도 전, 성당 앞에 모여 대기하는 Statio는 ‘멈춤과 정지’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중요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가도, 바쁘게 대축일 준비를 하다가도, 외출했다가도, 주방에서 분주하게 식사 준비를 하다가도……, 5분 전 종소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당 문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성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받아들여지기를 열망하며 수도원 문 앞에 선 지원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떨리는 심정으로 대기하던 첫서원과 종신서원 입당 직전의 바로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를 찾는지, 무엇을 약속했는지,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해지는 순간이 바로 성전 앞에 멈추어선 Statio이다.

 

선배 수녀님들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수녀원의 전통적인 관습들 안에는 우리 삶의 의미와 정신이 담겨있다.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가 지키는 크고 작은 규율들은 무의미하고 고루한 형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 오백년 동안 지켜진 이 단조로운 삶 덕분에 우리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세상의 흐름과 속도에 휘말리지 않고 우리가 찾고 있는 변함없으신 분을 향해 거듭 거듭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3) 검박한 생활(지속가능한 생활)


재활용과 절약의 전통

 

지금 생각해 보면 수련소는 생태적 저소비 생활을 배우는 모범적 장소였다. 초콜릿을 먹고 나면 포장에 사용된 은박지, 금박지를 잘 펴서 보관했다. 크리스마스 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탄과 부활시기 침방문에 붙인 장식은 단순한 상징들을 수놓은 헝겊으로 여러 차례 사용되고 보관되었던 소박한 것들이었다. 예쁘고 다양한 색지도 귀했지만 환경을 오염시키는 스티로폼이나 아크릴 계통의 재료들은 아예 없었다. 잡지와 종이상자의 고운 색깔들이 오려져 카드가 되고 나비가 되고 꽃이 되었고 병원에서 나온 엑스레이 필름 상자가 지금의 플라스틱 파일의 기능을 훌륭히 했었다. 낡아서 버려도 땅을 훼손시키지 않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생태적으로 착한 재료들이었다.

 

여기저기 기운 속옷을 개키며, 몇 번이고 고친 낡은 수도복들을 보면서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너무 흔해 귀하지 않은 세상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쓰레기장으로 들어가는 물건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수도자는 수도복 몇 벌로 평생을 넉넉히 산다. 편지봉투와 서류봉투를 잘 뜯어서 뒤집어 풀로 붙여 다시 재활용하는 것도, 몇 십 년 된 그릇을 그대로 쓰는 것도 세상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알뜰함이다. 선배수녀님들은 절약과 창조적 재활용의 달인들이셨다. 수녀원에서나 볼 수 있는 작고 정스러운 물건들……, 정성과 지혜가 담긴 소박한 집기들……, 들꽃 한 송이가 꽂힌 엄지 손가락만한 약병과 오래된 상본 한 장이 놓인 축일상…….

 

환경 위기의 시대가 아니라도, 가난을 약속하는 수도생활이 아니라도, 한 사람이 세상을 잘 살았다는 기준은 그가 얼마나 가볍게 살았는지, 얼마나 적게 사용하고 덜 남기고 떠나는가에 있다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가벼운 삶으로 초대되었다. 낡은 것이 초라한 것이 아님을, 비싼 것이 멋있는 것이 아님을, 새것을 자꾸만 사는 것은 단지 낭비가 아니라 부도덕하다는 것을 아는, 그 앎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초대되었다.

 

사물과의 올바른 관계

 

규칙서가 제시하는 물건을 다루는 태도와 방법은 사물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는 현명한 조언들이다. 우리는 수녀원에서 생명 없는 물건도 조심스럽게 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작은 컵 한 개라도 깨거나 손상시켰을 때 그것을 들고 가서 장상에게 용서를 청하는 관습은 이런 정신에서 나온다. 물건을 정성스럽게 사용하고 잘 관리하는 손길은 그 물건을 성화시킨다. 모든 물건은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인격을 반영한다. 오래된 것, 전통이 느껴지는 것, 헌 것이지만 깨끗하고 사용가능한 품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물건들……, 미사에 쓰이는 제의방 제기들로부터 걸레터의 빨래집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들은 그렇게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광안리 수녀원 초기부터 수녀들의 ‘Suscipe me’(저를 받아 주소서)를 들어온, 우리의 기도와 희망이 새겨진 성당의 제대와 독서대, 장궤틀은 쓰임새 때문에만 거기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 서원의 증인이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징들이다. 아무 것도 쉽게 버리지 않고, 쉽게 바꾸지 않고 사는 전통은 우리가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를 드러낸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사올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고급 가구가 아니라, 수도원 목공소에서 만든 단순한 디자인의 나무 침대와 책상, 걸상들……, 수도원의 모든 물건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한다.

 

4) 환대(비움과 연대)

 

뒷사람을 생각하면서 내 몫의 반찬을 덜고 시들고 맛없어 보이는 과일을 먼저 집는 배려와 양보는, 입회한 지원자가 선배들의 모범을 통해 배우는 애덕이다. 수도자의 형제 사랑은 공동체 형제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면서 내 옆의 형제들뿐 아니라 북한과 아프리카에서 굶고 있는 이들의 곤궁까지 마음에 담는 사람으로 성장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이의 삶을 그들의 처지에서 느끼고 같이 아파하는 연민, 낯선 이들을 우리 안에 맞아들이고 기꺼이 삶을 나누는 환대는 베네딕도 수도원들의 공동체적 천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수녀원의 미사와 전례에 참석하고 싶은 신자들이 많이 방문할 때마다 앨토석의14) 수녀님들은 자신들의 성당 자리를 손님들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가서 좁혀 앉아야 한다. 아주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여기 환대가 요구하는 ‘비움’이 있다. 나 아닌 타자를 내 자리에 맞이하기 위해선 물러서야 한다. 그래서 환대는 음식을 대접하고 거처를 제공하는 단순한 손님맞이가 아니다. 내 자리와 우리의 공간을 낯선 이들을 위해 내어놓는 선선한 비움 없이 환대는 불가능하다. 베네딕도 수도원의 환대는 세상과 거리를 두기로 작정한 이들이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문이며 세상을 위해 비워놓은 자리이다. 이 문을 통해 하느님께서 낯선 이들의 모습으로 예기치 않은 이웃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이 비워진 자리에서 우리에게 섬김을 가르치신다. 이기심과 자기보호의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내 생각과 신념이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만의 안전과 질서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낯선 이를 내 안에 맞이할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사람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 그래서 불편하고 위협적인 이들과의 친교를 위한 물러섬 없이 진정한 환대는 불가능하다.

 

가진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세상 안에서 베네딕도회의 환대를 실천하기 어렵다. “새것을 받으면 헌 것은 즉시 되돌려주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보관하라”(RB 55)는 규칙서의 말씀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된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암시한다.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살아야 할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 환대의 전통은 이 시대의 강요된 가난과 끔찍한 기아에 대한 인류공동체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공동선을 추구하고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도 ‘우정과 환대’의 정신으로 인류가 회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로완 윌리암스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탈출한 수많은 난민으로 고심하는 유럽 사회가 베네딕도회의 환대 정신으로 그들을 맞아들여 유럽의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15) 우리의 환대가 단순한 손님맞이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 그리고 고통을 분담하는 형제적 친교와 연대, 적극적인 나눔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손노동(노동과 자급자족)

 

월요일 아침 공동빨래는 수녀원의 오랜 전통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것 없이 정해진 시간에 걸레와 비로 함께 청소하고 사용한 걸레를 깨끗이 빨아 걸레터에 널어놓는 일 역시 수녀원의 한결같은 풍경이다. 개인 소임 외에 식당복사, 설거지, 풀뽑기, 대청소 등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이 있다. 일상생활을 만들어가는 노동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귀한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우리 모두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아무도 주방 일에서 제외됨이 없게 하라는 규칙서의 말씀은 모든 이가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또 형제에게 봉사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 일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마음과 생각, 또는 특별한 재능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날까지 몸을 바쳐 일하는 것이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다.

 

우리 사부 베네딕도는 ‘일’을 기도와 동등한 자리에 두셨다. 리 호이나키는 그의 저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천재성의 주된 면은 노동에 관한 그의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날카롭고 심오한 비전에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16) 노동을 수도생활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둥들 가운데 하나로 강조하는 베네딕도회 영성을 사는 수도원들은 수도승들의 노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수도원만이 아니라 지역을 비옥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 시대 많은 이들은 실업자이다.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현대과학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몸을 사용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하여 호황을 누리고 있는 반면 우리 몸은 삶으로부터 일로부터 갈수록 소외되고 있다. 비행기로 씨를 뿌리고 중장비 농기계로 경작하는 선진국 기업농들이 땅을 점령하면서 작은 땅을 일구는 소농들은 땅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도시에서도 기계화된 작업구조와 불황으로 인한 계속되는 구조조정으로 사람이 일할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대책은 모든 이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국민이 땅으로 돌아서서 정직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활은 노동의 신성함과 축복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삶이어야 한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에너지 고갈과 기후변화의 재앙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기계에게 빼앗긴 노동의 권리를 다시 인간이 되찾아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석유나 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없음을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알아들어야 한다. 대체에너지라 하는 핵에너지나 식물성 연료의 생산 역시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의 몸이라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최대한 쓰는 것이 에너지 위기 시대의 최고의 대안인 것이다. 손노동과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은, 산업화, 기계화로 도태된 인간의 노동력이 얼마나 중요한 창조적 동력인지를 이해하고 증명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6) 정주(지역화와 땅 살리기)

 

미국의 사회비평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가장 건강한 사회란 농업이 70-80% 차지하는 사회이고, 식량 자급과 인간성이 중시되는 사회’라고 말했다. 작은 땅이라도 지켜내는 사람들, 제 손으로 가족의 먹을 것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풍요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삶을 책임진다. 지금의 세계 경제 구조로는 곡물이 남아돌아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비싼 그림의 떡이다. 식량위기의 대안은 각 나라 지역 공동체가 산업화 공업화로부터 방향을 틀어 땅과 바다에서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1차 산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곡물과 비료가격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유전자조작 종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다국적 곡물회사들의 횡포에 더 이상 인간의 기본 생계권이 유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을 지키고 농업을 살리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베네딕도 수도원들은 전통적으로 넓은 땅을 지닌다. 수도원의 땅은 꽃과 나무를 기르는 정원이 아니라 수도승들의 노동과 자급자족의 터전이다. 땅은 우리에게 노동의 필요성과 습관을 익히게 하는 원초적 자리이다. 땅을 갈고 경작하여 먹을 것을 길러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일이다. 땅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삶이 좋은 삶이고 건강한 삶이고 생명력 있는 삶이다. 땅을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고, 그 땅과 가까이 사는 삶을 하찮게 여기면서 인간은 서서히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고 몸에 대한 감각까지 잃게 되었다. 인간을 살리는 것은 땅이다. 땅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 땅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정주가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노동으로 연결되는 땅과의 밀접한 관계는 베네딕도회의 정주서원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신이 속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그 땅을 지키며 땅과 더불어 사는 삶은 전통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다.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하느님이 주신 자연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보존하는 청지기의 역할에 충실했다. 오늘날도 세계의 많은 베네딕도회와 시토회가 농사 이외에도 자신들의 땅에 습지대나 야생서식지를 정하고 생물종의 멸종을 방지하거나 손상된 강을 되살리고 숲을 재건하는 등의 생태보전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다.17)

 

한 장소를 안다는 것은 그 땅의 성스러운 기운에 사로잡혀, 거기에서 두려움과 공경심,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리 호이나키는 말한다. 한 지역에 속한 사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 곳의 ‘토박이’가 되는 삶, 황폐해진 전 지구를 구하겠다고 나서진 않지만 자기가 딛고 선 발밑의 땅과 흙의 소리를 듣는 삶, 자연의 질서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며 자신의 땅에서 살아갈 양식을 얻어내는 삶이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다.

 

 

오래된 새로움

 

늦게나마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새로운 삶의 대안은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베네딕도회의 전통 안에 담겨있다. 베네딕도 성인이 제시한 수도승 생활에는 탁월한 생태적 관점이 엿보인다.18) 자신들이 속한 지역 공동체에 뿌리내리며 땅을 충실히 지키고 가꾸면서(정주), 누구도 제외됨 없이 모든 이가 손수 노동하고(노동과 자급자족),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식별하면서 아무 것도 자신의 소유로 갖지 않고(단순, 소박), 모든 물건을 제대에 축성된 성물처럼 소중히 다루고 보존하면서(생태보전), 남는 것을 이웃의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자선, 환대),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으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영원한 생명) 우리는 함께 모여 산다(공동체). 이 시대에 요청되는 ‘세상과 구별되는 다름’은 베네딕도 성인께서 6세기에 회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쓰시며 제안한 바로 그 삶이다. 더 많은 이들이 규칙서가 안내하는 삶의 방식과 질서, 자원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인류는 생태 위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이 삶에 초대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수도회 전통 안에 보존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삶의 지혜를 충실히 구현하며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이 위기의 홍수 속에서 희망의 방주를, 산위의 마을이 밝힌 등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잔치가 끝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이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천 오백년 전에 이미 시작된 다름, ‘오래된 새로움’을 살도록 초대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벗이여,

새로움이란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네

이렇게 거짓 없이

낡아가는 것이네

(김해화 ‘새로움에 대하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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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승옥,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제언』, 2007, 녹색평론사.

2) 앨 고어의 지구 온난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 An Inconvenient Truth> 2006.

3)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영미 옮김, 2007, 갈라파고스.

4)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79쪽 참조.

5) 존 로빈스,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이무열 옮김, 2000, 아름드리미디어.

6) The Guardian/UK (July 4, 2008), Biofuel Caused Food Crisis: Internal World Bank Study Delivers Blow to Plant Energy Drive by Aditya Chakrabortty.

7)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 생태적 삶을 위한 귀농총서-13』, 안철환 옮김, 2004, 들녘.

8) ZE08060511,  Food Crisis Forces Nigerian Seminary Closure, zenit.org/article-22827?=english

9) 도리스 레싱, “노벨상을 못 받는 사람들에 관하여”, 녹색평론 100호.

10) 떼이야르 드 샤르댕, 『떼이야르 신부가 장따 여사에게』, 최영인 옮김, 2002, 분도출판사.

1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정화열 해제, 2006년, 한길사.

12) 서경식·노마 필드·카토 슈이치, 『교양, 모든 것의 시작 : 우리 시대에 인문교양은 왜 필요한가?』, 2007, 노마드북스.

13) 로완 윌리암스, “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 코이노이아 32집, 77-81쪽 참조.

14) 광안리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회 수녀들은 전례 성가를 위해 성당 안에서 파트별로 앉는다.

15) 로완 윌리암스, “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 코이노니아 32집.

16)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김종철 옮김, 2007, 녹색평론사.17) Forum on Religion and Ecology: Christian Engaged Projects http://fore.research.yale.edu/religion/christianity/projects/index.html 참조.

18) Roman Catholic Religious Orders and Ecology: The Benedictine Tradition http://www.ofm-jpic.org/ecology/recorders/index.html 참조.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조성옥 에노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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