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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4: 청조는 왜 천주교 금교령을 내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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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98

[니하오 중국교회] (4) 청조(淸朝)는 왜 천주교 금교령을 내렸나?

 

 

"서양 선교사들은 6개월 이내에 마카오로 떠나라. 그리고 천주교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신앙을 버려라. 이를 어길 경우 형벌로 다스리겠노라."

 

강희제에 이어 청나라 5대 황제에 오른 옹정제(재위 1722~35년)는 1724년 천주교 금교령을 내렸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호해주던 부친 강희제와는 딴 판이었다. 중국 천주교는 이때부터 120년간 박해를 겪는다.

 

옹정제는 애초부터 천주교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교황청이 공자 숭배와 제사 문제에 개입(의례논쟁)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데다 황자(皇子)들이 황위를 놓고 암투를 벌일 때 한 선교사가 아홉째 황자의 황제 옹립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의 즉위 무렵 신자 수는 30만 명, 성당과 공소 수는 300개가 넘었다. 성당과 공소는 파괴되거나 창고와 관공서, 서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북경 황실에서 근무하는 선교사 2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100여 명은 모두 마카오로 쫓겨났다.

 

황실 선교사들은 선교와 관계 없는 천문ㆍ건축ㆍ회화ㆍ자명종 제작 등의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옹정제는 선교사들의 금교령 해제 요청에 "당신들 종교가 위교(僞敎)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믿는다. 그러나 만일 짐이 당신들 나라에 승려나 라마승을 파견해 교의를 선포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금교령을 고수했다. 강희제의 13번째 아들 윤상도 "우리나라 사람이 유럽에 가서 고현(古賢)이 정한 풍속을 고치게 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나의 형(옹정제)은 이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끊으려는 것이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마카오로 내몰린 선교사들은 유럽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일부는 화물선 배 밑창에 숨어 본토로 다시 들어가 지하 선교를 했다. 중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100년이 지났기 때문에 황제의 명이라고 해도 하루 아침에 천주교를 말살할 수는 없었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복건성에서는 한 유생이 "선교사들이 성당을 짓는데 사람들이 귀중품을 마구 팔아 바치고 있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 또 남녀가 한 곳에 모여 풍속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탄압이 더 극심했다.

 

건륭제(재위 1735∼95년) 치하에서도 박해는 여전했다. 규모와 범위가 가장 컸던 것은 1784년 섬서성 서안 박해다. 그곳 신자들로부터 비밀리에 초청을 받은 선교사들이 도중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두 해 동안 선교사 6명이 북경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나마 황실 선교사들은 드러나지 않게 선교를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이 무렵이다.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1790년 10월 6일자)에 당시 정황이 기록돼 있다.

 

"1784년 조선 왕국에서 온 사신들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승훈)이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찾아왔습니다.우리는 그에게 수학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책도 건넸습니다. 그는 마침내 천주교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요청했습니다.…"

 

천주교는 프랑스와 중국이 맺은 황포조약(1844년) 덕에 박해 터널에서 빠져 나왔다. 이어 유럽 열강의 중국 진출에 힘입어 다시 선교의 기지개를 켰다.

 

[평화신문, 2008년 9월 14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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