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오늘의 시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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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280

오늘의 시편기도1)

 

필립 루이야르2) / 김인희 빠스카 옮김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아침기도와 그 밖의 시간경에서 그 도입부의 형태가 다름을 인식하고 있는가? 아침기도에서는 주님께 대한 찬양을, 그 외 시간경에서는 우리가 마치 위험에 처한 사람처럼 급히 도와달라고 주님을 부른다. 시편 안에는 찬양과 환호, 불안과 걱정의 이 두 가지 태도가 계속 교차되고 있다. 많은 부분을 시편에 의존하는 수도자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 시편에 대하여 사람들, 특히 수도자들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의문들에 관한 사항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수도원들이 과거와 최근에 사용했던 전례 시편집의 역사를 간략하게 돌아보고, 이어 시편들이 지닌 다양한 성격을 고찰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편의 사용에 있어 수도공동체나 개인에게 과제로 남겨질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시편기도의 적절한 분량

 

규칙서 제18장에서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이 읽은 바에 의하면 ‘우리의 거룩한 교부들’은 시편 전체를 용감하게도 하루에 다 읽었다고 증언한다. 어디에서 이러한 정보를 얻었는지 확실치도 않지만 이 같은 실천을 사실로 인정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매일 150편의 시편을 낭독 또는 노래한다는 사람의 기도란 도대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러한 증언을 하면서도 베네딕도 성인 자신은 전통적인 찬가 몇 개를 추가하면서 시편 전체를 한 주간 안에 다 바치도록 하였다. 밤낮을 통한 하루 8번의 성무일도에 시편을 배열함으로써 한 주간 안에 150편의 시편을 읽도록 한 것은 확실히 큰 배려였다. 어떤 시편들은 매일 반복 된다: 시편3과 94는 밤 기도에서; 시편66, 50과 148-150은 아침기도에서; 3시경, 6시경, 9시경의 시편들, 그리고 시편 4와 90, 133은 끝기도에서. 여기에다 그 날 그 시간에 적절한 시편들을 첨가함으로써 하루에 약 40개의 시편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분량은 가대에서 성무일도를 노래하는 공동체에게 아주 벅차 보인다. 더구나 다소 간소화한 것이긴 하지만 이 성무일과서(Breviary)로 기도하는 본당 사목사제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니, 그는 자신의 여유 시간의 상당 부분을 성무일과를 바치는데 사용하게 될 것이다.

 

수세기동안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공동체들, 또는 더 정확하게 이러한 공동체내의 가대 수도승들은(평수사들은 이런 성무일과의 의무가 없었다) 규칙에 지시된 방법을 지켰는데, 경우에 따라 최대한 성대하게 모든 시편을 노래하거나 혹은 동정마리아의 소 성무일과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첨가하였다. 다른 한편, 규칙에 따른 이 ‘봉사의 분량(servitutis pensum)’을 가볍게 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규칙을 글자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보니 시간의 적합성에 대한 고려 없이 3시경, 6시경, 9시경이 잇달아 이어지며 시편들은 빠른 속도로 낭독되었다. 성규에 의하면 사순절 동안에는 저녁기도 후 한 번 식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오전시간의 끝자락에 저녁기도를 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습관의 힘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도 시편 배열과 성무일과 거행을 전적으로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더 면밀한 것을 요구하는 이들은 언제나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베네딕도 성인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따르기에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른 많은 점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 대해 필요한 현대화를 일으켰다. 공의회는 무엇보다 먼저 살아있는 언어 사용을 위해 전례 전체를 폭 넓게 개방하였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차 자기 나라 언어로 시편을 외우게 되었다. 물론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래를 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고도의 기준이 필요했으며 새로운 멜로디를 작곡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수도원은 오늘날까지도 라틴 안티폰을 고수하는 반면 다른 수도원들은 자기나라 언어를 채택하였다.

 

어쨌든 새로운 것에는 특별한 것들과 새로운 발견들이 많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나라 언어로 시편을 탐구한다는 것은 경이로움과 놀라움도 있지만 때로는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영과 육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는큰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느낌 사이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실 몇몇 시편들은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영성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로마전례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폭력적인 시편 57, 82, 108편을 삭제했다. 또한 야만스런 표현이 담긴 구절들은 생략하거나 괄호 속에 넣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는 부수시리라. 당신 원수들의 머리를, 죄 속에 걸어가는 자의 더부룩한 정수리를”(시편 67,22), 또는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시편 136,9). 라틴어에서 자국어로 번역할 때 지나친 언어들을 이렇게 삭제함으로써 시편의 언어는 보다 온건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따른 수도자 시편집의 다른 개편은 그렇게 신속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미 말했듯이 베네딕도 성인께서는 당신의 수도승들에게 비록 옛 수도승들이 매일 시편집 전체를 낭독한 신화를 상기시키면서도 주간 안에 매일 20개의 시편을 배분하는 주 단위를 채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복되는 시편들 때문에 하루 40개의 시편을 읽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교회가 재속 사제들을 위해 채택했던 것을 참고하여 베네딕도회와 시토회 수도승들은 소속 공동체들에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안했다: (3시경, 6시경,  9시경을 묶어) 낮기도 하나만을 유지한다거나, 무엇보다 시편을 2주 안에 배분하는, 만약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밤기도 때문에 4주 안에 배분하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하루에 읽는 매일의 시편 수는 현저하게 줄었으나 성무일도의 다른 요소들, 특히 독서들과 청원기도들 사이에 보다 좋은 균형이 이루어졌다.

 

간단한 본보기로, ‘Abbaye de la Source’3) 수도원의 기도 일정표는 공부하는 수도승들의 강의 시간표를 고려하여, 아침기도와 아침미사, 6시경, 저녁기도, 끝기도로 하루에 4번 성무일과를 드린다. 토요일 끝기도를 주일 밤기도로 대신한다. 그리하여 보통 하루 12개의 시편을 읽거나 노래한다.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시편들은 한 주간에 마치도록 분배되었고, 낮기도의 시편들은 두 주간에, 그리고 끝기도와 밤기도의 시편들은 4주로 마치도록 한다. 이러한 방식을 따라가는 이들은 이 방식에 만족한다. 동시에 서로 다른 선교 소임이나 일을 가진 수도원 또는 공동체의 인원수가 큰 수도원들에서는 시편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만일 우리의 상황들이 바뀐다면 공동성무일도도 변화될 수 있다. 성무일도는 그것을 거행하는 공동체 상황에 적합하도록 재편성되어야 한다.

 

 

시편의 다양한 성격

 

공동체의 인원수에 관계없이 모든 공동체는 지나치게 악의에 찬 시편 2-3개를 제외한 시편 150편을 모두 읽는다. 그런데 시편집을 읽어 나가다 보면, 아니면 적어도 하루 동안 수도자의 시간경에 참석해 보면 시편들의 다양성을 즉시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범주는 우주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권능과 웅대함 및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시편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편들에서 저자가 노래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아름다움보다는 그가 직접 눈으로 본 창조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이다. 저자는 그분의 영광과 인간의 선을 위해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신 우주적 힘에 경탄하며 명상가의 눈으로 또는 예술가와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초에 깃든 그분의 힘을 본다: “그분께서 기초위에 땅을 든든히 세우시어 영영세세 흔들리지 않는다”(시편 103,5). 또한 저자는 그것이 나날이 이룩되었음을 안다: “당신께서 어두움을 드리우시면 밤이 되어”(시편 103,20). “당신의 숨을 내 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3,30).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같은 반응은 주의 깊은 관찰자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내가 사는 한. 나의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르리라, 내가 있는 한. 내 노래가 그분 마음에 들었으면!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네”(시편 103,33-34).

 

위에서 인용된 시편 103편은 땅, 바다, 하늘 곧 창조 전체를 포함한다. 그래서 찬미와 영광, 축복이 높이 치솟는다. 하느님에 대한 찬양 시편들, 인류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선함을 노래한 시편들의 목록을 뽑는다면 적어도 50개 이상의 시편들을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범주는 역사시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와 더불어 인류의 역사도 지켜보신다. 특히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서 지켜보신다. ‘그분은 역사와 세기의 주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할 때뿐만 아니라 근심, 걱정, 시련 중에 있을 때, 또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에 의지가 되어주시기 위해 그러하시다. 시편 저자의 음성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역사를 상기하게 하고,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스럽게 미화된 과거 역사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느낀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희 군대와 함께 출정 하지 않으십니다”(시편 59,12). 이스라엘은 과거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그리고 영광스러웠던 때와 적들의 추격에서 구출된 일들을 환기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억하고, 약속에 충실하시며, 당신의 선하심을 드러내실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 하느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매일 기억하는 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도록 하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하였다. 긴 시편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로 되돌아가게 한다(시편 59; 67; 73; 76-79; 82; 88; 104-106). 훗날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묻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억들’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시편의 세 번째 범주는 개인적, 인격적, 또는 친근한 기도와 묵상시들이다. 이러한 시편들에서는 하느님을 향해 말하는 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분노, 신의와 신뢰를 고백하는 개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편들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씌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나’로 표현 된 단수는 ‘집합적(collective)’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또 어떤 시편에서는 단수로 시작하고 복수로 마무리되는데, 이는 아마도 개인기도가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불평과 탄식의 시편들도 많다. 저자는 사악하고 부도덕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중상모략을 당하고, 덫에 걸려 있다. 사악한 무리들은 마침내 그가 죽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께 자신을 포기 하지 않도록, 압제자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도록 간청하거나, 또는 적들이 아예 전멸 되도록 하느님께 요청한다.

 

또 다른 시편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매우 친근하고 배려가 깊으며, 낙천적인 성격의 저자에 의한 작품인 듯하다. 시편 139편은 분석적이고, 명료하며, 친밀한 감사를 나타내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 합니다”(시편 138,1.2.14). 오로지 하느님 면전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알 수 있다.  시편 118편은 ‘당신’과 ‘제가’라는 이 두 개의 인칭대명사가 계속 교대로 나타나 마치 끝없는 사랑의 대화 같다. 각 절마다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계명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계명이 거기에 충실하기를 열망하는 믿는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이며 저의 조언자입니다”(24절). 독자들의 성향과 주어진 환경에 따라 몇몇의 시편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낙천적인 성격, 삶의 기쁨, 또는 걱정, 고통의 체험은 독자로 하여금 시편이 지닌 고유한 성격을 통해 그 시편 안에 동화되게 한다.

 

우리는 시편을 자신의 개인기도에 사용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성향에 적합한 시편들의 목록을 만들어 모아두거나 자신의 다양한 상황에 어울리는 시편들을 주제별로 모아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시편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록 수도자가 혼자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그의 찬미나 청원은 이웃과 모든 인류의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도자들이 함께 드리는 시편기도는 개인을 초월하여 공동체의 기도, 교회의 기도, 전 세계를 위한 기도가 된다. 만약 우리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한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우리의 청원 안에 전 인류를 위한 자리도 마련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주변이나 저 멀리 어딘가에 감사가 터져 나오는 행복한 상황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는 불행이나 고통스런 상황도 있다. 따라서 갖가지 경험과 상황에 부합되기 위하여 시편집의 적용 범위는 넓고 다양해야 할 것이다.

 

 

2007년 시편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다시 말해 ‘오래전에 씌어진 이 시들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의 기도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과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자문하게 된다. 대다수의 수도원들은 라틴어를 자국어로 번역하였고, 매일 드리는 시편의 수가 감소되었음에도 만족하고 있다. 사실 자국어로 기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타당한 일이며, 나아가 시편 기도의 개선과 조정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우선 시편집이 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Jean-Luc Vesco 신부4)는 두 권으로 된, 1400쪽이나 되는 엄청난 연구집5)을 2006년에 출판하였다. 그는 연구집 서문에서 “각 시편은 시편집 내에서 자기 자리가 있다. 그 자리 외의 다른 자리는 없다”라고 확언한다. 그렇다면 시편을 전체적으로 어떤 구성을 가진 하나의 책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즉 시편집은 시편들을 함께 쌓아 놓은 무더기가 아니라,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부분들을 조직화하여 그것을 읽는 이에게 유익을 줄뿐 아니라 삶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현명한 대답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계획된 책으로서 보기에도 아름답다. 지난 20년 동안 책으로서 시편집 및 시편들의 분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시편의 전례적 사용이 한권의 책으로서 시편집의 구성이나 의도를 망가뜨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4세기부터 학자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아침, 저녁 성무일과 기도를 위한 작업을 해왔다. 더욱이 베네딕도 성인께서는 시간경을 위해 기도의 방대한 체계를 만드셨는데, 그는 시편집에서 각 시간경에 적합한 시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시편들은 제각기 아침, 저녁 혹은 대낮의 시간을 암시하고 있어 하루의 특정 시간들에 배치하는 것이 더 맞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밤기도에서는 시편들의 순서를 따라가는데 그것은 시편집의 구조를 염두에 두어서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인가? 어째든 Vesco 신부의 책이 출판된 이래 성서 주석학자들과 전례 학자들 사이에 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데, 전례 학자들은 전례 안에서 성경의 연속적인 독서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복음서의 독서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단락(짧은 부분) 잘라내어 읽거나 혹은 부분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되풀이 되는 질문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치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저주의 시편’에 대한 것이다. 특별히 너무 폭력적이라 생각되는 3개의 시편들은 시간 전례서에서 삭제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이 3개의 시편들의 삭제가 가능하였다면, 그리고 지나치게 야만스런 구절들을 괄호 속에 넣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다른 시편들도 뺄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진실의 문제이다. 사실 우리가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는 한 우리를 괴롭히는 사악한 자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시편들을 피할 수가 없다. 프랑스의 한 수도원 Abbey of La Pierre qui Vire의 밤 기도에 참석한 몇 명의 용감한 학생들이 아침에 객실책임수사에게, “우리는 당신들에게 그렇게 많은 적들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상의 적들을 거슬러 대항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어제 르완다나 체크냐(Chechnya)에 대해 생각했다면, 또 오늘날 이라크(Iraq)와 다르푸르(Darfur)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노래하는 시편들, 즉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부르는 시편들은 오히려 더 지독해야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한 주에 한 번 이런 시편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기도하는 대신, 미사 경본 안에 전쟁 시 봉헌하는 미사들이 따로 있는 것처럼, 때때로 전쟁에 시달린 사람들, 피난민들, 망명자들을 위한 성무일도를 거행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충실하게 시간전례(the liturgy of the Hour)를 거행하고는 있지만 시대의 전례(the liturgy of times)를 거행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 부족 때문이 아닐까?

 

저주의 시편들 다음으로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 시편들에서 문제를 느낄 수 있다. 12개 정도의 시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험담과 불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날에 그들을 보호해 주셨듯이 오늘날에도 그들을 도우러 오셔야 한다고 하느님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기나긴 역사이기에 시편들이 대부분 길다. 그들이 언급하는 지명들, 인명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낯선 느낌을 준다: “나는 기뻐하며 스켐을 나누고 수콧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앗도 내 것; 므나쎄도 내 것; 에프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 유다는 내 왕홀”(시편 59,8-9). 어떤 시편은 독자를 자신의 깊은 데로부터 끌어내어 ‘드높은 산, 곧 바산의 산’으로 오르도록 이끈다: “비둘기의 날개는 은으로 뒤덮였네. 찰몬에는 눈이 왔다네. 바산의 산은 드높은 산이요 바산의 산은 여러 봉우리 거느린 산이라네”(시편 67,14-16). 그런데 사실상 이 산은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산이다. 상식 있는 사람이 이와 같은 구절들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잠심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우리 마음의 표현이 될 수 없는 그런 시편들을 전례기도에서 빼라는 것이 성상(聖像)파괴적인 생각일까? 여기서 다시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 “우리의 마음이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청에로 되돌아가자.

 

시편들 안에 비그리스도인적인 요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명확히 말하자면, 구약의 이런 시들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해방의 메시아를 알리면서 기다리는 시편들이 몇몇 있을 뿐이다(시편 2,2; 17,51; 131,17 등). 어떤 시편들은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악당들의 무리가 저를 둘러싸 제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시편 21,2.17-19). 몇몇 시편들에서는 우리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시편 안에서 이러한 점을 찾고 발견하라 하셨다. 루카 복음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져야 한다”(루카 24,44)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교부들과 다른 영성저자들이 제시한 것처럼 대부분의 시편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아직 심리적으로 어렵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로서 시편을 읽는다.

 

사실 전례에서 시편을 그리스도화 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4세기 이래 삼위일체께 드리는 영광송, 즉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를 시편 끝에 첨가하였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각 시편 끝에 침묵의 시간을 두거나 혹은 그 시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제시하는 적합한 기도가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기도들은 현대의 시편집, 특히 수도승들의 시간 전례에 재도입 되었다. 그 밖에, 자국어로 번역할 때 라틴어에서처럼 각 시편의 앞뒤에 후렴을 넣었는데, 그 후렴은 전례시기에 따라 바뀌고, 때로는 우리를 그리스도인다운 이해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도나 노래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시편들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첨가는 시편에 그리스도교다운 색깔을 부여하거나 그리스도교 환경을 조성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들과 부르짖음 안에서, 그리고 찬가들 안에서 우리는 창조주이시고 또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신 유일하신 하느님, 그러나 아직 삼위의 위격이나 강생의 신비는 전혀 계시하지 않으신 그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간청이 들어있음을 분별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 빛이신 분, 힘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사실 전례의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게 많이 불려지지 않는 유일하신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을 우리가 시편기도를 통해 자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찬미가와 성무일도의 기도들, 미사 거행, 성사들은 구원자 하느님,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외아들 성자를 보내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일치시키시는 성령을 끊임없이 보내시는 하느님, 성부의 현존 안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무엇보다 먼저,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거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원의 신비는 결정적이면서도 또한 지속적인 창조의 신비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관상적인 삶을 사는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거행함에 있어 거시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우리 구원의 신비와 무한한 창조의 범위,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이룩하신 놀라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도자들은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것이다.” 이 초대는 우선 개개인에게 하는 말이지만 공동체, 특히 수도 공동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도와 성무일도 거행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하느님의 일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이 일을 습관적으로 거행하지 않도록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거행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 삶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자 매일의 즐거운 의무로서 우리는 이를 통해 모든 인류와 창조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들은 세기를 통해 그 시편들을 노래하고 전수해 준 모든 사람들과 우리를 일치에로 이끈다. 몇몇 난폭한 시편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편 노래들과 기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듣기를 기다리시는 바로 그 말들로 기도하도록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씌어진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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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IM Bulletin 90. 본래 원고는 불어로 되어 있으나 영어번역본(by Timothy Quick, England)에서 우리말로 번역했다.

2) Phillip Rouillard, 위스크 수도원(Abbey of St. Paul, Wisques, France).

3) 불란서 파리 소재.

4) 도미니코회원이며 전 예루살렘 성경학교의 Director.

5) The Psalter of David, A Translation and Commentary(Editions du Cerf. coll. Lectio Divina 210, 211).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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