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공동체, 식탁 그리고 성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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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279

공동체, 식탁 그리고 성찬례1)

 

마르가렛 말론2) / 한정희 프랑카 옮김

 

베네딕도 규칙의 주된 관점 중의 하나가 공동체에 대한 강조임은 이미 수없이 거론되어 왔다. 베네딕도가 기술하는 생활양식은 너무나 분명한 회수도승 생활방식이며, 공동체들은 많은 시간동안 이에 대해 논의해 왔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기쁨과 상호 간의 도움을 때때로 경험하지만 공동체 생활에는 어려움과 실패 역시 끊임없이 뒤따른다. 베네딕도의 가르침과 근자의 성체성사 신학을 관련지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 사랑 안에 함께 결합되기를 바라면서 성찬례를 거행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적인 약점은 우리의 관계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때때로 사랑을 약화시키는 듯하다.

 

베네딕도가 규칙서를 공동체 안에 사는 이들 곧 회수도승 생활을 하는 이들을 위해 썼음은 분명하다. 이는 그가 네 종류의 수도승들을 언급하는 규칙서 첫 장부터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구체적으로 회수도승을 한 수도원에 속하여 규칙과 아빠스 아래에서 분투하는 이들이라고 말한다(1,1.2). 베네딕도는 그 외의 다른 세 종류의 수도승들에 대해 언급한 후, 1장 끝에서 가장 굳센 회수도승을 위한 계획을 품고 규칙서를 계속 써내려 간다(1,13). 회수도승이란 말은 제5장 순명에 대한 장에 세 번째나오는데 규칙서 전체에서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회수도승은 더 이상 자신의 판단대로 살지 않으며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식욕에 굴복하여 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길을 가며 자기 위에 아빠스를 두며 수도원 안에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5,12). 이것은 공동체 생활에 기본이 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물론 규칙서 전체에는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더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베네딕도는 1장에서 다른 세 종류의 수도승에 대해 반어적 표현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회수도승에게 가치를 두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독수도승들은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생활한 이후에만 즉, 공동체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고 상호 도움을 경험한 이후에만 그런 방식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로써 양성되었고, 악과 결점들을 혼자 힘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오직 그 후에 그들은 홀로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베네딕도는 공동체가 독수도승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베네딕도는 사라바이따들을 그들의 냉담함과 공동체 안에서 배워야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규칙서 아래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면서 공동체야말로 수도승을 이끌어주며 양성하는 장임을 보여준다. 공동체 안에 산다는 것은 그 삶을 사는 이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살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복음을 살기 위해 정주를 요구한다. 기로바꾸스는 이런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상호 지지와 변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편적 행동이나 일련의 활동들 그 이상을 말한다. 이는 세례를 통해 받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써 복음적인 삶에 온마음으로 투신하는 생활이다. 공동체에서 산다는 것 역시 그렇다. 그것은 근본적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써 전적인 삶의 방식이다.

 

 

1. 부르심과 응답

 

공동체 생활의 어떤 면은 성체성사 신학과 비교될 수 있다. 우리는 성찬례 안에서 세례를 통해 받은 부르심을 더 깊이 살도록 도전받으며 힘을 얻는다. 우리의 응답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생 동안 충실히 사는 것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의 부르심은 베네딕도가 규칙에 제시한 생활양식에 따라 투신할 의무를 받아들임으로써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규칙서 머리말에 분명하고도 긴박하게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이미 왔습니다’(로마 3,11) 하신 성경 말씀에 분발하여 일어나도록 하자”(머리말 8,8).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백성의 무리에게 외치시고 그들 가운데 당신 일꾼들을 찾으시며: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말씀하신다”(머리말 8,14-15).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58장 약속(서원) 안에 묘사되어 있다. 긴 시험 후에, 공동체의 새 회원은 정주와 수도자다운 생활에 대한 충실과 순명을 약속했으며, 공동체는 Suscipe에 대해 세 번 응답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에게 답하며 약속했다. 새로운 형제는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놓음과,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남겨두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몸에 대해서라도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함으로 이 약속을 표현한다(58,17.22.24-25).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전적일 수 없다.

 

 

2. 변화

 

그리스도께로의 성장과 변화는 우리의 일생을 통해 일어난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변화 체험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을 살도록 도전받으며, 하느님 말씀의 변화시키는 힘이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는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음미하며 공동체 몸과 하나 되어가면서 그리스도께로 변화되어간다. 그러므로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우리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머리말 49)이라는 머리말의 약속은 채워진다. 이는 하느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일어난다.

 

 

3. 섬김

 

위의 충실성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섬기는 데서 드러난다. 성찬례 의무를 살아가는 데에 바로 이 섬김이 요구된다. 우리가 성찬례 거행에서 체험한 것은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특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흘러 넘쳐야 한다. 우리는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베네딕도는 자신을 따르는 수도승들을 섬김의 삶으로 부르며 이를 거듭거듭 표현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식탁에 대한 놀라운 성찬례적 상징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제35장 ‘주방의 주간 봉사자들에 대하여’는 “형제들은 서로 섬길 것이다”(1)는 분명한 언급으로 시작되며, 이는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더 깊어진다. 섬김(주방당번)에서 면제받지 않은 모든 이는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한다”(6). 성목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여의 표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발 씻김에 대한 상징 또한 포함되어 있다. 성 바실리우스3)의 질문 “당신은 누구의 발을 닦아줄 것입니까? 누구를 섬길 것입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베네딕도는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상호순명과 섬김으로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야 함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성찬례가 우리의 전 삶을 거룩하게 하듯이, 식탁에서의 섬김은 우리 서원 생활 전체와 하나임은 분명하다. 봉사 주간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마치며, 우리가 성당에서 하느님의 일에서 드리는 같은 기도인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35,17)가 식탁 봉사 시작 때에도 바쳐진다.

 

병든 형제들은 공동체에서 섬김을 받게 되는데, 이들을 섬기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며(36,1) 손님맞이도 이와 같다. 그들 안에서 섬김 받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53,1). 제53장 ‘손님들을 맞아들임에 대하여’에서 발을 씻어주는 예식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아빠스와 모든 형제들이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53,13). 이 상징은 훨씬 더 분명하다. 왜냐하면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리하는 아빠스이기 때문이다. 손님들의 식탁도 매우 중요하다. 손님들이 잘 식사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이 일을 맡는다(53,16). 손님을 섬기는 일은 그들을 위한 잠자리를 확실히 마련하는 데에까지 연장된다(53,22). 마침내 성찬례를 위한 우리의 모임에서와 같이 낯선 이들은 이제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된다.

 

 

4. 약함과 용서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공동체 구성원들로서 함께 성장해 나가면서 서로에게 있는 인간적인 약함들을 깨닫게 된다. 이로부터 용서의 필요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성찬례를 거행하러 모이며 용서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성찬례는 완전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베네딕도는 규칙서 여러 장들에서 공동체 형제들의 약함과 결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다루고 있다(23-30장). 그는 잘못한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 다양한 방법의 훈육들과 파문을 제시한다. 이 모든 노력들은 치유를 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5. 침묵과 고독

 

우리는 성찬례에서 공동체로서 함께 기도한다. 하지만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어느 정도의 침묵과 고독도 체험할 필요가 있다. 형제 서로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묵과 고독 속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한다.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찾는데 고독과 침묵은 필수적이다. 고독과 침묵, 그리고 상호 섬김은 결코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과 형제 서로를 섬기는 것은 함께 상호작용하며,  이 두 가지 차원은 전체의 일부분이다. 이는 Iris Murdoch 에 대해 그녀의 남편 John Bayley가 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자신들의 결혼 초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독의 기쁨 역시도 함께. 거기에는 그 어떤 대립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완벽하게 다른 한 사람과 함께했다. 한 사람을 품어주고, 소중히 하며, 같이 동반해주고 있음을 느끼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홀로 있는 것, 가깝게 있는 것, 물리적으로 함께 엮여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의 친근한 현존을 사람과 함께 있음만큼이나 따뜻하게, 결코 쓸쓸하지 않게 느끼는 것.”

 

베네딕도도 개인 기도의 필요성과 공동 기도 사이의 건전한 균형을 이야기한다.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큰 침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침묵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규칙서 8-20장은 공동기도에 관한 세부 규정들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중요한 원칙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기도에로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신속한 응답에 앞서지 않는다(43,1.3). 규칙서 6장은 침묵의 본질적 가치와 침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한다(6,2.3). 많은 말로써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마음과 눈물의 통회로 우리의 기도가 들어지는 것이다(20,3).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침묵 안에서 자라나며, 정직한 자기 평가 역시 침묵으로부터 성장될 수 있다. 가장 깊은 침묵은 하느님의 일이 끝난 후에 이어지며 홀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규정도 있다(52,2-4). 마음의 갈망과 오롯한 집중 역시 침묵으로부터 길러진다.

 

 

6. 초월성

 

성찬례는 단지 현재에 관한 것이 아니다. 미래와 그 너머에 까지 우리를 향하게 하고 이끈다. 우리는 회중들의 모임과 말씀, 사제와 빵과 포도주 같은 물질적 상징을 통해 영원과 천상에로 인도된다.

 

초월성을 향한 이 흐름은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도 뚜렷하다. 성찬기도에서는 우리가 ‘복된 희망을 품고’ 기다린다고 표현한다. 규칙서의 초점은 우리가 인내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될 자격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머리말 50). 우리는 영적 욕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다(4,46). 우리가 영적 기술을 위한 도구들을 사용하고, 마지막 심판 날에 그것을 주님께 되돌려 드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하셨다”(4,75-77). 하늘의 고향을 얻으려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초보자를 위해 쓴 이 최소한의 규칙”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73,8). 규칙서의 초월적인 요소들은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분명하다.

 

 

7. 식탁의 상징

 

식탁이 갖는 놀라운 상징성을 전례와 일상생활과 규칙서에서 탐색해 본다면 엄청난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규칙서 안에 담긴 “성체성사적” 관련성 또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식탁과 식사는 상호 일치를 드러내는 핵심 상징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Parker Palmer의 글에 나타나 있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헌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식탁에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같은 식탁에 둘러 앉아있던 바로 다음 순간 당신을 배반하려는 이에게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을 상기시키는 강력한 상징이다. 이것은 깊은 결합과 거기에 따른 상처들의 각오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관계이든 그 관계를 살아내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환영(幻影)에서 깨어나는 때, 점점 더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전적인 자기증여가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식탁, 성체성사의 식탁 그리고 우리 생활의 보통 식탁에는 많은 유사한 점들이 있다.

 

 

8. 섬김의 자리

 

무엇보다 식탁은 섬김의 자리이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다면, 너희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3-16). 이 행동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며,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 선물이 식탁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식사 중에 식탁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이 복음 말씀이 규칙서에서 섬김에로 불리운 아빠스에 관한 구절에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주님’과 ‘아빠스’라고 불러야 할 것이니, 이것은 그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빠스 자신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이러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행동해야 한다”(63,13-14). 이러한 섬김은 아빠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수도승들을 위한 베네딕도의 가르침에도 그대로 메아리친다. “우리 서로 섬깁시다……. 사랑으로 서로를 섬깁시다”(35,1.6). 이러한 섬김이 가장 분명하게 행해지는 곳이 바로 공동체 식탁이다.

 

 

9. 예식이 중요한 자리

 

성찬례 식탁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식들은 중요하다. 예식은 우리가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며 소속감을 키워준다.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일을 한다. 만약 예식의 의미를 알게 되면 우리가 왜 그 행위를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예식들은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를 말해줄 것이고,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나 예식 장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통해서 표현될 것이다. 의미를 지니는 익숙한 예식들은 행해지는 것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편안하게 쉬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위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35장은 베네딕도가 예식을 행하는 곳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준다. 수건과 발과 그릇 씻기 그리고 도구들을 내어주고 돌려받음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35,8-11).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봉사하는 사람들은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음식과 음료를 받는 예식이 있다. 봉사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봉사를 마치는 사람들은 주일 아침 기도 후에 성당에서 모든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청한다. 이 행동과 함께 특별한 말씀이 따른다. 봉사를 마치는 이들은 한 주간 동안 그들을 도와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주간 봉사를 시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한다. 공동체 형제들은 이 기도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봉사하는 형제를 그들이 지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동시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울러 표현한다. 그리고는 강복을 받는다(35,15-18).

 

식당 독서에 관한 공적인 예식도 있다. 독서자는 한 주간 동안 읽게 되는데, 하느님과 공동체의 도움을 청할 것이며, 그 다음에 강복을 받는다(38,1-3). 독서자는 섬김을 수행하기 전에 약간의 포도주를 받으며, 봉사가 끝난 후에 식사 동안 다른 방법으로 봉사한 형제들 즉 주방 요리사나 다른 주간 봉사자들과 함께 식사하게 된다(38,10-11).

 

식사 시간 역시도 중요한 예식이다. 식사에 관한 규정은 하루를 위한 규칙적인 구조를 제공하며 계절과 전례 절기와도 관련되어 있다(41).

 

 

10.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자리

 

우리는 식탁에서 많은 필요를 채운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 욕구가 식탁에서 채워질 수 있다. 음식은 육체를 충족시켜줄 것이며, 함께 어울림과 격려는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으며 영적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것을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한 모임과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식탁에서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성찬례 음식과 하느님 말씀으로 양육되며, 전례 회중에게서 서로 힘을 얻는다.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가족에게서 몸을 위한 양식뿐 아니라 지지와 동반의식 그리고 신원에 대한 감각을 경험한다.

 

베네딕도는 세 장에서 식사에 관해 다룬다. 그 세 장 가운데 첫 번째인 38장에서 식당 독서를 다루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듣는 사람은 독서에 집중하도록 요구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적 성장을 위한 양분도 흡수하게 된다(38,5). 잘 읽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독서를 하며 그래야만 기대하는 만큼 듣는 이에게 양식이 된다(38,12).

 

육체적인 영양분도 잘 제공되도록 되어있고, 다양성과 실질적 내용들이 음식과 음료를 다루면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각기 다른 계절, 지역들, 맡은 일의 양에 따른 특별 규정들이 있다(39,1-6; 40,5.8). 또한 젊은이와 환자를 위한 규정이 다르게 마련되어 있다(39,10-11; 40,3). 이 장들을 통해 개개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과, 그들의 다른 필요가 채워지도록 배려하고 있다. “각 개인은 하느님께로부터 고유한 선물을 받아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40,1; 39,1)

 

 

11. 손님을 위한 나눔의 자리

 

식탁에서 손님은 기꺼이 받아들여지며, 이들은 성찬례 거행을 위한 모임과 가족 식사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된다. 손님들은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 맡긴다.

 

베네딕도는 53장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53장은 주방 봉사자에 대한 35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환영하는 것은 사랑의 한 표현이다. “손님이 온 것이 보고되면, 즉시 장상이나 형제들은 온갖 사랑의 친절로써 그를 맞이할 것이다”(53,3). 장상은 손님을 위하여 금식을 해제하고, 손님을 위한 주방은 그 직책을 잘 완수할 형제들에게 맡겨진다(53,10.17). 베네딕도는 잘못을 저지른 수도승이 식탁에 함께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내용의 장들에서 식탁에서의 나눔이 얼마나 큰 중요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신념을 담아 표현한다. 그는 수도승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나, 심지어 같은 시간에 식사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대해서 공동체로부터의 철저한 소외의 감각을 담고 있다. 이는 가장 심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23-25).

 

 

12. 공동체 - 성사

 

우리는 성체성사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식사하는 식탁과 우리 삶으로 차리는 식탁의 성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우리가 성당에서 그리스도를 흠숭하는 것처럼(52장),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오는 손님 안에서, 우리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흠숭한다. “우리는 손님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흠숭해야 한다.  실상 그분께서 맞아들여지는 그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53,7). 우리는 음식뿐 아니라 식탁 자리를, 정성스런 준비를, 서로에게 서로를 대접하는 것이며, 이는 곧 성찬례 식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수도원의 모든 그릇과 전 재산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럼 여겨야한다”(31,10)고 가르치신 베네딕도는 “평범한 일상”의 성사적 차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31,11)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이것은 진실이다. 그 까닭은 우리는 이런 일상적인 것들, 우리가 식사를 하는 식탁과 우리 삶으로 마련되는 식탁 그리고 성찬례 식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표지가 된다. 식탁이 우리 공동체의 중심적 상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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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Tjurunga 65 (2003), 74-82에 실린 글이다.

2) Margaret Malone SGS(호주의 착한 목자 베네딕도 수녀회).

3) 대 바실리우스, Longer Rule 7.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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