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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적자유와 베네딕도 규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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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278

영적자유와 베네딕도 규칙서1)

 

베네데토 칼라티2) / 양숙희 이사악 옮김

 

그레고리오 대종의 대화집에 실린 『베네딕도 전기(Vita Benedicti)』의 내용은 『베네딕도 규칙서에』드러난 하느님 체험(the experience of God)을 묘사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두 문서는 서로 명백하게 관련이 있는데, 그레고리오 대종 친히 『베네딕도 전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분은 수도승을 위한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 만일 누가 그분의 생활방식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 안에서 지도하신 그분의 모든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대화집 2,36)3)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부 문헌에서는 성숙한 이론적 가르침과 구체적인 체험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언급한다. 이는 정통신앙(orthodoxy)과 올바른 수덕(right practice)사이에 분리될 수 없는 연관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현대 신학은 이 점을 다시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와 달리 과거에는 계시에 대한 관념적 이해 때문에 극심한 분리가 신학을 지배했던 것이다. 계시의 고정적인 면만을 선호하고, 계시의 역동성 즉 거룩한 역사로서 진리를 능동적으로 드러내는 면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 체험을 이런 신학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체험”에 대한 의심스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이 하느님 체험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자. 이를 위해 우리는 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주지(周知)의 논쟁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신비체험과 평범한 그리스도인 삶의 체험들과 전례, 또는 수덕(修德)과의 관계에 대한 것 등이다. 이런 논쟁들은 쟁점은 같아도 대답들은 흔히 모순적이다. 이는 대답들이 체험 자체를 전체적인 통합성 안에서 보기보다 체험이 가진 모호성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모순은 쟁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불행하게도 수세기동안 모든 신학적인 저서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성과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소홀히 하였다. 하느님 말씀의 부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영성적인 차원 특히 하느님 체험에 대한 부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베네딕도 규칙서』와 『베네딕도 전기』는 예외이다. 하느님 체험은 두 문서에서 성경의 영적 의미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체험은 믿는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구원역사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카롤링 시대(Carolingian)의 위대한 주석가들도 규칙서에 드러난 이 관점을 주목하였다. 바오로 부제(Paulus Diaconus)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한 주석서는 규칙서를 구약성경 지혜문학의 잠언과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규칙서는 사랑의 관점이 아닌 모든 규율 준수적인(legalism) 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교부들에 의하면 믿는 이들은 잠언에 나타나는 하느님 말씀의 주도적인 초대에서 시작하여 전도서가 가르치는 사물을 옳게 판단하는 지혜로운 경지를 거쳐 결국에 아가에 드러난 하느님과의 깊은 체험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수도승(monk-Christian)은 사랑의 우위성 때문에 모든 규율적인 요소들을 초월하도록 도전받는다. 나는 규칙서에 드러난 방법론적 관점이 객관적으로 하느님 체험과 규칙서의 저자가 의도한 구원역사의 기본 골격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이라고 본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성규 58,7) 체험은 하느님 체험을 말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사실 규칙서는 회개하기 위하여 수도공동체를 찾고 또 수도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기본적으로 요구한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은 가장 중요한 규칙서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풍성하게 다룬 마르미온(Marmion) 아빠스의 『수도승의 이상인 그리스도(Christ the Ideal of the Monk)』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마르미온 아빠스가 규칙서의 기본 목적에 대해 가진 생각들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현시대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과 우위성,  더 나아가 믿음에 초점을 둔 사고를 하도록 도전받고 있다. 세속화는 우리에게 혼란스러움도 주지만 이로운 점도 준다. 우리시대까지 내려온 하느님 체험과 관련된 주제를 둘러싼 많은 모순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와 신심 중심의 경향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진정한 종교에서 하느님 체험은 특히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통교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은 항상 “숨어계신 하느님”(hidden God)에 대한 체험이다. 또한 하느님 체험은 참된 회심의 자세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주의깊은 경청을 요구한다.

 

나는 베네딕도가 “하느님 찾기”(seeking God)를 근본적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에 세속화가 제기하는 진정한 하느님 체험에 대한 해답을 그의 규칙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하느님을 찾기는 수도승을 믿음의 경지로 인도하고 하느님 앞에 선 가난한 존재로 이끈다. 하느님은 수도승을 부르시고 그에게 세상적인 현명함과 명예, 합리성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선물을 쏟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을 찾는 것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규칙서에는 하느님 체험이라는 명백한 언급은 없지만 수도원을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찾는 것을 철저히 요구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지 않고는 진정한 하느님 체험도 없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을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인 말씀의 생생한 역동성 안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고 인간과 통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충만히 살아있는 믿음과 철저한 회심의 표현이다. 믿음과 회심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찾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히브 11,8-12).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위대한 수도 전통에서 모든 그리스도인 부르심의 전형이다. 수도승의 부르심도 예외는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와 같이 특히 카시아노는 제3담화에서 아브라함의 결정적 순간을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수도승의 결정적 순간과 비교한다. 그것은 예언자적 공동체의 상속자가 되는 순간이다. 창세기가 아브라함에 대해 시사한 바와 같이,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과 수도승은 멀리서 “주님의 날을 볼”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처럼 규칙서에서도 하느님을 찾기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성경에서처럼 들음의 중요성이 규칙서에서도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데, 첫 단어 “들어라”에서부터 규칙서 전체가 충실함에로의 초대, 또는 주님이 믿는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모든 대화로의 초대이다. 이 과정은 규칙서 머리말의 주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주님의 자애로운 부르심과 말씀에 순명하는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확실한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규칙서 머리말의 정신을 성서적인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예언적 일관성(prophetic unity)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교회에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관성을 주신다. 우리는 구원역사의 다양한 사건들이 성령의 활동 안에서 수렴되고 있는 규칙서 머리말의 “대화” 부분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침내‘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이미 왔습니다’ 하신 성서의 말씀에 분발하여 일어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여 들을 것이니,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84); 성규 머리말 8-10). 그러므로 하느님 체험은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에서 솟아 나오는 믿음의 체험이다. 하느님 말씀의 우위성에 대한 체험 때문에 애덕을 완성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말씀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이 점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는 베네딕도의 정신을 해석하는 주석가들 대부분이 이점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 삶의 다양한 양상들과 은사들을 소홀히 하면서 규칙서가 가진 “하느님 중심”(theocentric) 정신을 대단히 강조해 왔다. 그런데 하느님 중심성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제도와 조직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는 말씀에 비해서 아주 약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저자들이 종종 있었다. 성령의 작용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새 백성을 태어나게 한다. 나는 수도생활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체험과 영적 자유 사이의 깊은 연관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수도생활은 교회 안에서 그 소명에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느님 체험과 영적 자유간의 긴밀한 관계는 무엇보다 교회 내에서 수도승이 증거해야 되는 특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규칙서의 본질적인 정신으로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모든 것을 버렸다.

 

말씀을 신앙의 태도로 충실히 들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체험은 법률(law)로 보일 수 있는 규칙의 준수를 용이하게 해준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의 절대적인 힘은 법률에서 파생되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낸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덕적이고 수덕적인 태도로 규칙을 바라보았던 시각에서 계약의 관점(theology of the covenant)으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즉 우리의 시각을 파스카의 신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물인 성령의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수도생활의 신비주의적 전통은 항상 계약의 탁월한 예를 보여주는 아가서나 묵시록에 드러난 영적 의미를 선호하였다. 이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규칙서 머리말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甘味)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성규 머리말 49).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서 규칙서의 마지막 장을 연상하게 된다. 베네딕도는 마지막 장에서 모든 법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며, 모든 법의 절정인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베네딕도는 “수도생활의 완덕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있으니, 이것을 지키는 사람은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권위로 (씌여진) 신·구약 성서의 어느 면(面)이나 어느 말씀이 인간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초보자를 위해 쓴 이 최소한의 규칙을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완수하여라.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위에 언급한 교훈과 덕행의 더욱 높은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성규 73,2-3.8-9)고 언급한다.

 

규칙의 상대적인 성격은 하느님의 말씀, 항상 성령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구원 사건인 하느님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아주 분명하다. 규칙서는 보편적으로 신구약 성경의 어느 면이나 보라고 하면서 이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단순한 법 규범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사건으로 예언적 전체성(prophetic wholeness)을 드러낸다. 성경의 이런 규범적 역할은 교부들의 경험과 가르침, 특히 같은 은사를 살아가는 다른 공동체의 경험에서 드러난다. 성경에 영감을 준 성령은 “전통”을 육성하고 보호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사람이 영의 자유로 얼마나 진보하는가에 대한 잣대로 이 전통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최종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이다. 그래서 “초보자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성규 73,8)은 사랑의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 교육적으로 계속 유용하다: “이것을 지키는 사람은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성규 73,2). 우리는 규칙의 잠정적인 특성 때문에 수도승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또한 어떻게 규칙에 의해 수련되어지고 도전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법으로서 보는 규칙의 권위는 처음부터 약해진다. 파스카의 신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수도승은 겸손에 의해 수덕생활로 나아가고 하느님 사랑이 아닌 모든 제도적 요소에서 해방된다. 베네딕도의 겸손의 사다리는 종말론적 의미를 띤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규칙서를 읽는 독자들은 그 사다리를 수덕생활의 단계라고 생각할 것이다. 겸손의 사다리가 지향하는 완전한 사랑은 하느님 나라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영적 자유, 성령께 내어맡김이다.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1요한 4,18 참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여진 당신 일꾼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성규 7,67-70). 규칙서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은 요한 1서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사랑은 항상 두려움을 갖기 마련인 법에 대한 승리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잠시 규칙서의 상세한 내용을 보류하고 성인들의 삶 안에 드러난 수덕적인 훈련들을 보자. 많은 텍스트가 있지만 하나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그레고리오가 대화집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사람 호노라투스의 경우이다. 여기에서 주된 관건은 성령께서 손수 이끄신다는 점이다. 성령은 모세와 세례자 요한을 인도하였고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을 인도하신다. 그레고리오가 말했듯이 사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이들의 순명과 겸손의 평범한 삶은 인간과 통교하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소리로 여겨져야 한다. 확실히 성령의 소리는 인간이 의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대화집 1,1).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베네딕도가 수도적 회심으로 독수도생활을 시작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체험은 성인전 작가가 주지하듯이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 직접 그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베네딕도는 형제들을 위한 영적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베네딕도의 일화 하나를 보자. 은수자 마르띠노는 쇠사슬에 묶인 개처럼 자신을 수덕주의에 묶어 버렸다. 이 일화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윤리적이고 규율준수에 묶인 수덕생활의 허상을 드러내준다. 베네딕도는 “당신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면, 당신 자신을 쇠사슬로 묶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슬로 묶으시오”(대화집 3,15)하고 마르띠노에게 말한다. 베네딕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아직 규율준수의 멍에 아래에 있는 마르띠노에게 파스카의 신비를 가르쳤고 마르띠노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성인의 훈계를 따른다. 그 순간부터 사슬은 정상적으로 우물의 양동이에 붙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믿음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 기반위에 우리는 규칙서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의 생명력을 이해할 수 있으며, 아빠스의 절대적 권위는 봉사직의 권위로 완화되고 하느님의 말씀이 형제들을 만나는 전선(前線)에 위치하게 된다.

 

수도공동체에서 아빠스의 권위는 신약성경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규칙서에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혁신적인 내용을 아빠스와 공동체에게 제시한다. 즉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것이다. 아빠스 봉사직의 근원이 되는 성서 구절을 보자: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빠스의 권위는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아빠스의 권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자유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세상적 판단이나 권위가 개입하는 것에 맞서서 하느님 자녀됨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되었고 발전되었다. 아빠스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아빠스는 늘 형제들과도 관계를 가져야 하며 젊은 형제들까지도 회의에 소집해야만 한다: “주께서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 주시기 때문이다”(성규 3,3). 하느님의 은사는 젊은 사람 안에서 작용할 수 있다. 그는 규칙의 능률성이나 인간적인 편견에 맞서 하느님 말씀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아빠스에게 이런 충고가 주어지는 것은 누군가의 경험과 능력을 유용하게 만들기 위한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공동체 회의에서 특별한 순간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관점을 명심할 때 우리는 아빠스가 왜 가장 유익한 것을 선택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는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에서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회심의 과정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아빠스가 젊은 형제를 포함한 공동체를 대신할 수 없다. 공동체의 젊은 사람들은 복음적으로 말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고 희망에 가득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음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하느님 한분만을 찾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도전이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하느님 나라와 인간의 개입이 서로 간에 가지는 관계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수도생활은 기본적으로 잠정적인 것이라는 규칙서의 정신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공동체 자체는 수도승의 삶을 고정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공동체는 수도승이 영 안에서 보다 자유롭게 하느님을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독수도생활을 가난함과 충만한 믿음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수도승들이 “하느님을 하느님이시게”(let God be God, lasciar fare a Dio)하는 영의 자유로움의 다른 표현들도 있다. 하느님 체험의 본질적인 요소인 수도승의 기도 또한 이와 유사한 믿음의 법칙을 따른다.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 믿음과 기도의 긴밀한 소통은 하느님을 찾는 근본적인 목적을 충실하게 도와주며, 하느님 체험을 드러내는 가장 본질적인 표현이다. 이 경우에 기도에 관한 이론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의 상호 교류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체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교회의 본질적인 삶의 영역에까지 해석의 근거를 제시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신비와 결합되어 가는 것이며 성령의 활동으로 그리스도로 변모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성경의 충만한 의미는 현 순간에 믿는 이들 안에서 드러난다. 수도승이 거룩한 독서에 충실한 것은 영적 생활과 기도의 수단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상 순례 여정에서 믿음의 삶과 하느님을 찾고 있음의 살아있는 표현이다. 거룩한 독서에서 - 공동체적 차원이거나 개인적 차원이거나 -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준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순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인간,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인간이 주 예수님의 진정한 성전이라는 것을 깨달아 성덕의 모든 외적 표상들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교부들의 전통 특히 카시아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과 통회의 눈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짧고 순수해야 한다”(성규 20,4). 이 가르침대로 신앙의 자세로 기도하면 말이나 양식이 필요 없다.

 

카롤링 시대와 클뤼니 시대의 신심적인 장식이나 부대시설을 가진 성당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기는 하지만, 규칙서에 언급된 수도원의 성당은 매우 단순하다. 규칙서는 구약성경에 드러난 회심의 관점과 믿는 이들의 참된 영적 희생에 따른 전례적 신심을 중요시한다. 성당은 공동체가 “찬미”와 “큰소리가 아니라 눈물과 마음의 지향을 가지고”(성규 52,4) 기도를 드리도록 아주 단순한 형태로 되어있다. 카를 대제(Charlemagne)의 통치와 그의 보호아래 지어진 성전에서 살았던 아니아네의 베네딕도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의 시대에 나타난 서구의 신심 행위(devotional practice)의 대두가 수도생활에 구조적인 경직화를 초래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양상은 클뤼니 시대가 지향한 수도생활과 이 이상에서 파생된 여러 시도들 안에서도 드러난다. 하느님을 찾는 동기는 오직 그분 자신에게서 유래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규칙서의 이러한 근본정신은 당연히 소홀히 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베네딕도의 생애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대화집에서 베네딕도의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을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떠남을 모델로 기술한다. “세상으로부터 떠남”은 하느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직면한 전적인 회심의 자세로 규칙서에 의하면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완전한 증거이다. 모든 시대의 수도승에게 그렇듯이, 베네딕도의 세상으로부터 떠남도 매우 성서적이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가 “당신 자신과 함께 홀로 지내셨다”(대화집 2,3,5.7)는 구절을 믿음의 우위성을 가지고 조명한다. “당신 자신과 함께 홀로 지내셨다”는 것은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이라기보다 베네딕도가 인식한 것처럼 하느님 체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영적 상태에 대하여 숙고해야만 한다. 영적 생활의 역동성은 믿음이 점차적으로 성숙되어 간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게 된다.

 

믿음에 대한 베네딕도의 체험이 열어준 현시(vision)는 하느님을 첫째 요인(prima causa)으로 보는 직관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지적 이해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베네딕도가 본래 떠났던 세상에 대한 현시였다. 이제 그가 세상에 돌아왔을 때 그 시각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세상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 광경에 이어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온 세상이 태양의 한 줄기 빛 아래 모아져서 그분 눈앞으로 몰려왔다는 것이다”(대화집 2,35,3). 우리는 베네딕도의 첫 번째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을 진정한 내적 힘과 영을 가지고 다시 세상에 돌아오기 위한 전략적인 떠남(tactical retreat)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결코 세상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태양이 한 줄기 빛으로 베네딕도에게 나타났듯이, 겸손의 최종목표인 완전한 사랑과 맞물러 있음을 발견한다. 믿음은 우리를 공허한 초월적 하느님 체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인간 역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진정한 하느님 체험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이것이야말로 규칙서가 말하는 완전한 사랑이고 관상(contemplation)이다.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또한 우리를 형제들에게로 인도한다. 공동체의 형제들, “가장 굳센 회수도자들”(성규 1,13)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보루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이 세상의 덧없음을 더욱더 드러내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베네딕도가 세상으로 돌아와 본 것처럼 “창조주를 뵙는 영혼에게는 온 세상이 작아진다”(대화집 2,35,6). 그러나 이런 속성 때문에 세상 안에서 진실된 하느님 체험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인간과 세상사로부터 도피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베네딕도가 보았던 것처럼 세상의 덧없음 안에서 어떠한 종교적인 교만도 하느님 찾기에 토대를 둔 믿음에 의하여 철저하게 뿌리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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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piritual Freedom and the Rule은 Monastic Studies, On Experience of God, 9, 가을호, 1972년에 실린 글이다. 원문은 이태리어이며, 미국 St. Vincent Archabbey의 Maurus Wallace와 Mount Saviour의 봉헌자 William이 영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2) Benedetto Calati, Former Prior General of the Congregation of Camaldoli, Rome.

3) 대화집 2권 36장.

4) 새 성경 번역: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광야에서, 마싸의 그날처럼”(시편 95,7ㄴ-95,8).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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