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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규칙서를 통해 본 카오스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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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277

규칙서를 통해 본 카오스와 평화1)

 

 

사전에 의하면 ‘카오스chaos’는 ‘쏟아져 나오다’ ‘무너지게 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cheo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카오스는 구성되지 않은 공간, 암흑, 혼돈, 무질서로 이해된다. 그 반대는 질서이다. 다른 의미로 카오스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 혹은 혼돈을 의미한다. ‘악마devil’라는 단어 diabolus는 말 그대로 ‘혼란시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카오스는 죄, 반감, 증오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평화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카오스다. 9.11 테러와 이라크전, 그 뒤를 따라 일어난 사건들만 생각해도 그렇다.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성직자들의 성 스캔들과 유럽 사회의 가치 상실은 분명 카오스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수도원들은 카오스의 바다에 떠 있는 평화와 질서의 섬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원의 전례에 참석하는 방문객들은 똑 같은 수도복을 입고 서열대로 장엄하게 입당하여 함께 노래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카오스의 사막 가운데 있는 평화의 오아시스나, 거룩한 여가를 즐기는 천사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베네딕도 성인이 살던 6세기는 어떠했나? 그가 규칙서를 저술했던 당시는 동고트족과 비잔틴 사이의 격렬한 전쟁으로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난무했다. 몬테카시노는 바로 이 난리 한 가운데 있었다. 당연히 정치적으로 카오스 상태였다. 민족들이 뒤섞이고 한 문명이 또 다른 문명으로 바뀌어가던 당시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카오스였음을 증명한다. 도덕적으로도 카오스였다. 간음, 노예와의 동성애, 소아성애 등의 난잡한 성문화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만 상대한다면 보통으로 허용될 정도였다. 교부들의 강론을 보면 당시 신자들이 범한 엄청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거의 속수무책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경험하는 카오스와 베네딕도 시대의 카오스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딕도 성인이 카오스와 평화의 관점에서 수도승 생활을 어떻게 보는지 묻는 것은 규칙서를 지침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본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카오스에 대한 수도승 전통(특별히 스승의 규칙서에 나타난)의 대응

2) 무질서로서의 카오스 - 그 처방인 질서

3) 여덟 가지 악습을 통해서 본 더 깊은 차원의 카오스

4) 카오스에서 평화로 가는 길

 

 

1. 스승의 규칙서에 드러난 카오스에 대한 대응

 

베네딕도는 그가 마주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 주위의 혼돈을 피해 낙원을 하나 만들자!”고 하면서 천사들이나 살 것 같은 섬을 만들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현실의 카오스를 심각하게 직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종말론적 비전을 강조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천상적 삶이 카오스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낙원에 대한 희망이 지금 겪는 혼돈의 답이 될 수 있는가?

 

스승의 규칙서는 이렇게 끝맺는다. “수도원 문이 언제나 굳게 닫혀있게 하라. 그러면 주님과 함께 그 안에 갇힌 형제들이 하느님을 위해 세상에서 분리되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RM 95,22-23). 이것은 카오스의 한 가운데 천사들의 오아시스를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악마는 담 밖에 있게 하고 말이다.

 

사실 우리 역시 이것을 바란다. 그러나 스승의 규칙서 전체는 악마가 공동체를 완전히 손에 넣기 위해 수도원에 발을 들이밀려고 얼마나 집요하게 애를 쓰는지 보여준다. 본시 우리 삶은 이 악마에 대항하는 힘겨운 투쟁이다. 악마는 우선 우리 생각 속에서 일을 시작해서 우리 의지를 움직이려 한다. 그러기에 자기의지는 순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아빠스가 순교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RM 7; RM 2). 수도원은 학원이다. 수도승들은 이 학원에서 온갖 유혹들과 맞서 싸우며 서서히 영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이런 맥락에서 수도원은 일종의 감옥이고, 수도승들은 이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순교해야 한다. 여기서 고문은 아빠스의 몫이다. 영성생활의 기본 도식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현세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천국에서 천상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스승의 규칙서는 길게 두 번이나 이 천국을 생생하게 표현한다(RM 3,84-94; 10,92-120). 이 천국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참담한 현실을 잊을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스승의 규칙서는 모든 종류의 카오스를 철저하게 섬멸하려한다. 여기서 공동체는 우리 안의 온갖 불결하고 무질서한 본능들을 정화시키는 도구이다. 카오스는 몸과 육으로, 평화는 영으로 이어진다. 스승은 우리도 영적인 존재가 될 때 천국을 어떤 방법으로든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 곧 악마와 맞서 싸우며, 매일 필요로 하는 음식처럼 자기 자신에게 억압과 폭력과 훈련을 강요하기만 하면 질서와 평화를 어느 만큼은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도원은 아주 분명히 천상 예루살렘에 그 뿌리를 둔다(RM 3,52). 스승의 규칙서는 부정적 인간학(이원론)에 기초를 둔 매우 심각한 형태의 삶, 영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높은 이상을 제시한다. 그러니 수도승들은 종말론적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참회와 희생, 고행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스승의 규칙서 저자는 어떤 카오스든 몹시 과민하게 반응하며 카오스라면 그 어떤 것도 수도승들로부터 멀리, 수도원 담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으려 한다.

 

베네딕도 성인의 방법은 어떤가?

 

카오스의 정의에 따라 규칙서 안에서 두 종류의 카오스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카오스는 6세기 수도승들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경험하는 일반적인 무질서 상태로 베네딕도는 ‘질서있는 삶’을 그 처방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질서가 카오스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유혹과 죄의 대상이다. 두 번째 더 뿌리 깊은 카오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덟 가지 악습에 대한 카시아노의 설명을 살펴보고 나서 카오스를 초래하는 악습들의 더 나쁜 영향을 규칙서 안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두 가지 형태의 카오스를 보기 위해서 먼저 ‘전례’를 예로 들어보자.

 

 

2. 무질서 상태 카오스와 그 처방인 질서

 

규칙이나 질서가 없는 전례를 상상해보자. 박자와 음은 물론 소리 크기까지 모든 이가 자기 마음대로 노래하고, 서든지 앉든지 왔다 갔다 하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상상해보자. 종소리, 시계, 날질서도 없다면 수도승들은 한 장소에 모이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말 그대로 카오스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린 함께 모이는 시간을 약속하여 날질서를 만든다. 성당에는 자기 자리가 있고 입당할 때에도 순서가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알고 따라할 수 있도록 성가책을 펼쳐줄 사람도 정한다. 성가를 노래하는 정해진 음정과 박자가 있고 거기에 맞춰 공동체는 모여서 성가연습을 한다. 이와 같이 전례는 확실한 규칙과 훈련이 있어야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다. 공동체 생활에 날질서는 꼭 필요하다. 정해진 장소도 필요하다. 무엇을 입을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공동체들은 좋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치게 좋은 규칙들을!

 

베네딕도 성인은 6세기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청결하지도 못했던 거친 수도승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질서 잡힌 생활방식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 틀림없다.

 

규칙서를 보면 당시의 무질서함이 과연 어떠했는지 엿보인다. 우선 지각생들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없도록 극히 조심해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있거든……”(11,12-13). 하느님의 일이나 식사에 늦게 오는 것에 대해서도 짧지 않은 단락이 할애되어 있다(43). 베네딕도는 시간을 알리는 일에 엄격했는데 모든 것이 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47,1). 당시 수도승들은 선창대에서도 실수를 많이 한 듯하고(45), 청소를 하거나, 물건이나 의복을 다루는 일에도 능숙하지 못했던 모양이어서 특별한 경고가 필요했음이 짐작되고도 남는다(32; 55; 35,10). 또한 수련이 제대로 안 된 젊은이들이 부주의하게 떠들면서 함부로 웃어대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소리를 지르기도 한 모양이다. 매사에 거칠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율, 훈련, 청결을 중요시했고 전례가 올바로 정중히 진행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여러 가지를 두루 고려하여 매일의 날질서(48), 식당독서를 하는 순서(38), 의복과 물건을 분배하고 다루는 법(33-34; 54-55) 등을 정하였다. 규칙서의 이런 세세한 규정들은 놀라울 정도이다. 규칙이 사랑을 보존하는 일에 봉사한다는 사실은 이해될만하다(65,11).

 

베네딕도 역시 규칙을 지키는데 실제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 스승의 규칙서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48,7-8). 그리고 일단 규칙을 정하고 나면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사실이 계속 드러난다는 것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규칙은 끝없이 수정을 필요로 한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이런 점에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많은 형제들의 다양한 필요와 공동체 안의 새로운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베네딕도 규칙의 특성이다.

 

지난 몇 십년간 젊은이들에게 베네딕도 규칙서가 준 매력은 ‘질서’라고 생각한다. 아주 보수적인 공동체들은 무엇보다 규칙과 훈련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변화의 시기에는 불안전에서 오는 혼란스러운 요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혼란은 그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품고 있어 우리가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도전해온다. 여기서 다룰 주제는 “카오스와 규칙”이 아니다. 사실인즉 카오스를 치유하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평화이다. 그렇다면 더 깊은 차원의 카오스는 무엇인가?

 

 

3. 더 깊은 카오스 : 유혹, 죄, 악습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규칙서가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베네딕도의 공동체에 있었음직한 갖가지 죄를 규칙서에서 일일이 들춰내는 것은 대단히 지루하고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대신 여덟 가지 악습에 대한 가시아노의 고전적인 가르침2)을 길잡이로 더 깊은 카오스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욕구, 본능, 충동과 관련된 악습

 

탐식 : 베네딕도 당시는 수도승들이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도록 또 지나치게 먹지 않도록 제재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규칙서 39장과 40장에서 과식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절대로 피해야 하며, 술은 지혜로운 사람들까지도 탈선하게 한다고 아주 단호히 경고하고 있다(39,8; 40,7).

 

性 : 베네딕도는 이 문제에 대해 직설적으로 또 스승의 규칙서만큼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간음하지 말라,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말라(4,59; 겸손의 첫째 단계 참조), 쾌락을 찾지 말라(4,12)는 등의 훈계로 우회한다. 그렇다면 베네딕도는 성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다고 보아도 되겠는지? 침방에 대한 규정인 규칙서 22장을 보면 장로들의 침대와 젊은 형제들의 침대를 섞어놓으라, 등불은 아침까지 계속 밝혀두라, 옷은 (벗지 말고) 입은 채로 자라는 등의 구체적인 지침들이 나온다. 이런 규정들은 분명 성적 유혹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수치심을 은근히 피하면서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는 교묘한 수법들, 즉 애매모호한 농담이나 천박한 태도, 미친 듯이 웃으면서 자기통제를 잃어버리는 행동들에 상당히 주의했다.

 

욕심 : 이 악습은 수도원에서 꽤 많이 발견된 듯하다. “훔치지 말라”는 이미 착한 일의 도구 앞부분에 나온다(4,5). 물건을 공동소유하고, 필요한 것은 모두 청하고, 물건을 비축해 두거나 침상 아래 숨기지 않도록(5,16; 33; 54)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당가는 욕심에 기울지 말아야 하고, 수도원에서 만든 것을 판매하는 형제들은 탐욕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57,7). 가시아노에 의하면 허위와 거짓은 욕심의 결과이다. 베네딕도는 이 악습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57,4-6; 4,7; 24-27).

 

그는 경험을 통해 음식, 성性, 물건과 관련된 이 세 가지 악습이 공동생활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는지, 또 혼란을 초래하는지 잘 알았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신중함, 말의 절제, 중용, 정도와 분별력 등의 치료제들을 처방하면서 동시에 각 개인 수도승과 담당자들에게 자신감과 책임감이 주어지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2) 정서적 차원의 악습

 

분노 : 분노에 대해 베네딕도는 가시아노보다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다. 화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거나(4,22), 원한을 오래 품거나(4,23), 어린이나 자기보다 어린 형제들에게 분별없이 화를 내는 모습으로(70,6-7) 이 악습은 시작된다. 결국 큰소리를 지르거나(7,60) 복수하거나 무례하게 굴거나 악담과 증오, 때론 살인까지 언급될 만큼 좋지 못한 모습이 된다(4,29-32; 65-67; 4,3).

 

슬픔 : 이 악습은 침울해 있거나 씁쓸해하거나 불만족해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슬픔을 거절하고, 형제들을 낙담시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 악습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악마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54,4). 베네딕도는 늘 부정적으로 쓰여지는 단어 ‘비통함’과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무기력과 절망’을 다루느라 어려웠던 듯하다. 공동체 안의 무기력은 베네딕도가 원하는 만큼 공동체에 철저함을 요구할 수 없게 방해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는 유혹(4,74) 때문에 어떤 수도승들은 조금만 힘이 들면 수도승 생활에서 멀어져 도망치려 한다는 것도 경험했다(64,18; 48,24; 머리말 47). 불평은 가시아노에 의하면 교만에서 나온다. 규칙서에서는 일에 짓눌리거나 심한 요구로 힘이 들 때 불평하게 된다고 보았다(35,13; 41,5; 53,18).

 

태만 : 태만acedia3)은 48장 18절에만 나오지만 의미로 보면 더 많이 등장한다. 규칙서와 수도승 생활에 대해 쓴 글들을 보면, 분명하게 구별되는 두 종류의 나태를 볼 수 있다. 첫 번째 태만은 한가함, 무관심, 귀찮아하기, 게으름이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48,1). 베네딕도는 너무 많이 자지 말라고, 너무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한다(4,37-38). 당시 수도승들은 노동을 어려워하고 거룩한 독서를 싫어했던 모양이다(48,7-9.23). 베네딕도는 이런 수도승들을 미지근하고 무관심하다고 표현한다(22,8; 73,7). 또 다른 태만은 불안해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수다를 떨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48,5; 43,8; 52,3). 어떤 수도승들은 수도원 담 밖으로 나가 통제를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고(66,1;  67,6), 떠들어대며 농담을 주고받고 놀려대는 것을 좋아한다(3,1-2).

 

이 세 가지 악습을 고치는 처방은 반대로 하기, 참아내기, 축복해 주기, 기도하기, 사랑하기, 관심과 연민을 보이기 등이다.

 

3) 정신의 악습 : 허영심과 자만심

 

이 마지막 악습은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미덕까지 오염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허영심의 영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38,2). 베네딕도의 공동체 안에서도 허영심과 교만이 많이 드러났다. 특별히 책임이 맡겨진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의기양양해하고 잘난 체 할 위험이 있다(49,8; 57,2; 62,11). 베네딕도는 자주 저항이나 불순종과 함께 언급되는 교만이라는 악습을 멀리하라고 충고한다(4,69). 모든 이, 특히 책임을 맡은 이들은 그 영향을 더 받을 수 있는데(31; 62; 65) 주제넘은 행동을 하는 것이 그렇다. ‘주제넘다praesumere’는 단어는 규칙서 안에서는 소임에서 드러나는 자만심을 말한다. 베네딕도는 이 단어를 28번이나 사용하는데 주로 건방진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권위나 힘, 물건 등을 횡령하는 행위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 베네딕도는 그런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 때문에 상당히 많은 문제들을 경험했음이 틀림없다. 가시 돋친 논쟁, 흥분하며 거칠고 오만한 태도로 요구를 거절하는 당가(31,1.7), 질투와 논쟁, 비방과 시기심과 불화……, 많은 종류의 무질서(65,7)들이 여기 해당된다. 규칙서 전체를 훑어보면 공동체 생활을 어렵게 하고 때론 불가능하게 만드는 카오스의 원인들이 무수히 많다. 아빠스 조차도 질투나 시기심의 불꽃(65,22)에 희생될 수 있음이 경고된다.

 

우리는 엄청난 카오스 한 가운데 있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된다. 수도승들은 단지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다. 계속 혼란을 일으키는 죄인들이다. 죄를 표현하는 단어는 약함, 죄책감, 죄, 태만, 악습 등 상당히 다양한 반면,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는 수단들은 언제나 계속 실패했다. 악습과 악습의 결과들이 모든 선한 시도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4. 카오스에서 평화로 가는 길

 

1) 우리 자신의 죄와 혼란을 인정하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좋은 말로 포장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현실인 한심스런 상황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해방 경험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베네딕도는 놀라울 만큼 열린 자세로 카오스 상황을 직면하고 그것을 묘사한다. 규칙서 65장은 가장 좋은 예이다. 베네딕도는 여기서 ‘질투, 논쟁, 비방, 시기심과 불화 등 온갖 종류의 무질서와 혼란’으로 진짜 카오스를 묘사한다. ‘풀무불, 올가미, 모욕, 저주, 거짓형제와 박해’까지 등장하는 상황들이 있다(7장, 겸손의 넷째 단계). 자신들의 악한 행실에 찬동하는 인물을 아빠스로 추대하도록 공모하는 수도자들도 있었던 듯하다(64,3). 책임을 맡은 이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베네딕도의 현실적인 통찰은 그의 규칙서를 스승의 규칙서와 구별 짓는다. 베네딕도는 당가에게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자만하지 말라고, 부산떨지 말라고, 욕을 하지 말라고, 느리거나 낭비를 하지 말라고(31,1), 아빠스에게는 부산스럽거나 소심하지 말고, 과격하거나 고집스럽지 말고, 질투하지 말고 너무 의심하지 말라고(64,16) 권고한다. 부정적이고 장애가 될 만한 요소 중 한 가지라도 있으면 공동체 안에 반드시 카오스가 따라온다.

 

카오스는 모든 이의 아주 깊은 내면에 있다. 규칙서 7장은 죄를 피하는 의인에서 시작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까지의 영적 단계를 그린다. 공동체 안에 온갖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넷째 단계 다음에는 수도승이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불의,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다섯째 단계가 이어진다(7,44-48). 겸손의 절정에서 수도승은 말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7,65).” 우리는 영적 여정 안에서 우리 내면,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카오스를 갈수록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공동체 안의 카오스는 자신 안의 카오스를 반영한다.

 

2) 연민을 훈련하기

 

연민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들과 마음에서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자기 자신도 자비가 필요한 처지임을 알아듣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연민에 대해 상당히 많은 말을 한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남을 더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자비로운 법이다. 아빠스에 관한 장에서 이 원칙을 볼 수 있다. 64장 둘째 부분(7-22절)의 핵심은 ‘자신의 약점을 항상 바라보라’는 것이다. 약점을 의식하는 것은 아빠스를 기운 빠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자기 약점을 아는 아빠스는 부러진 갈대도 꺾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한다.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서짐을 받아들일 때에만 모든 부서진 인간 존재를 향해 연민의 팔을 펼치게 된다는 것은 영성생활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수도승이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는 겸손의 다섯째 단계에서 “주님은 좋으시니 그분께 고백하라.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구절이 중심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 또 하나 감동적인 구절은 규칙서 27장 8-9절이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착한 목자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빠스는 공동체 안의 잃어버린 형제(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이 분명한)를 돌봐야한다. 베네딕도는 여기에 “그분은 그 양을 당신의 거룩한 어깨에 메고 양의 무리로 다시 데려다 주실 만큼 그 양의 연약함에 동정이 극진하셨다”고 덧붙인다. 규칙서 안에는 바로 이런 연민의 정신이 깊이 스며들어있다. 착한 일의 도구 마지막 절, 즉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4,74)” 역시 베네딕도 성인의 고유한 표현이다. 우리의 카오스는 그분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고 죄인을 위해 오셨다. 거기 희망이 있다(27,1; 마태 9,12).

 

3) 화해를 시도하기

 

수도승들은 주님의 기도를 매일 두 차례 큰 소리로 바치게 되어있다.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악습을 고치고 깨끗해지기 때문이다(13,12-14). 이런 점에서 착한 일의 도구들 중,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 불목한 자와는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라”(4,72-73)라는 구절은 아주 중요하다. 멀리 떨어져있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가까이서 계속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가 더 어렵다. 그런 형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면 분노가 솟구친다. 원수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착한 일의 도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를 덧붙인다. 어려움이나 무능함조차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열어놓는다. 우리 자신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므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사랑은 그렇게 보잘것없고 가련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와 내 원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형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는 다른 이를 향해 자신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해가 지기 전에 진정으로 평화의 입맞춤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해는 저녁기도 시간에 한 듯하다. 적절한 기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도할 때이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거짓평화를 주지 말라”(4,25) 하셨다.

 

베네딕도는 화해의 한 본보기를 보여주시고 우리 행동의 원천과 방향을 가르쳐주신다. 71장에 선배가 후배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나온다. 베네딕도는 여기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시비를 가리는 일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다. 후배는 비폭력적 태도로 그 선배 발 앞에 엎드리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강복을 청하는 자세이며, 어떤 의미로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그의 호의를 청하는 것이다. 강복은 마음의 불안을 치유한다. 선배도 치유가 필요하다. 후배 수도승의 겸손한 태도를 통해서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주어진다. 둘은 모두 평화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4) 상황을 호전시키기

 

베네딕도는 카오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참고 또 참아내라고 하지 않는다.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수용하고 자비를 보이고 화해하고 상처를 낫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이기심의 방해 없이 카오스적 상황을 평화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더 바람직하게는, 하느님께 카오스를 평화로 바꾸어주실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형제들이 회의를 하면서 겸손하게 그러나 진실하게 자기 의견을 말 할 수 있고, 때론 장상의 의견에 반대되는 것도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65,14). 형제들은 장상의 견해를 인내심을 가지고 적절한 때에 지적할 수 있다. 외래 수도승도 이치에 맞게 또 사랑에서 나온 겸손을 가지고 비평할 수 있다(61,4). 그러나 베네딕도는 형제 사이의 교정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그 일에 책임을 맡았거나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자격 있는 이들에게 돌렸다.

 

그는 서방교회의 참회 관습에서 교정 과정을 도입했고 그 단계는 겉으로 볼 때 스승의 규칙서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나 속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규칙서는 동방교회 교부들의 정신이 가득하고 치유를 강조한다. 공동체 생활의 심각한 분열들은 마치 그런 상태가 정상인 것처럼 묵인되어선 안 된다. 판단하지 않으면서 치유를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장상에게나 전체 공동체에게나 하나의 도전이다. 치유와 화해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베네딕도는 공동체에 나쁜 영향만 주면서 아무 도움이 못되는 사람은 퇴회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분열을 조장하는 회원 때문에 전체 공동체의 평화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동체는 인간의 몸과 같다.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떠올릴 만하다.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이나 한 다리만 갖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마태 18,8). 물론 이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공동체의 모든 말썽꾼을 내쫓는다고 평화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상적인 회원들은 반드시 모든 일에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공동체 안에는 바로잡거나 훈계해야 할 일들이 있고, 회심을 불러일으킬 호의에 찬 말들이 필요하며, 치유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상의 인도 아래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모든 것이 실패할지라도 기도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분이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28,5). 평화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의 열매이다.

 

 

맺음말 :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 이 구절은 평화가 진리와 성실의 열매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평화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찾아야 하는 것으로 때로는 고통스럽기 조차한 수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에서좀 더 나아갈 수 있겠다.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는 분명 사회적인 것으로, 카오스를 극복한 공동체 안의 화해와 사랑이다. 이것은 마음의 평화, 즉 고요, 평온, 차분함, 그리고 내적 자유까지 포함한다. 그런 내면의 평화는 공동체 안에 선한 열매를 맺는다.

 

교부들은 이 시편을 보통 그리스도론적 방법으로 해석한다. 이런 전통을 따라 깊이있게 분석할 때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리게네스도 말한다.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 평화가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다.” 구체적으로 평화를 찾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분께서 가신 역설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복음 성서의 인도함에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가자”(머리말 21). 에페소서는 “그분께서는 당신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둘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4-16)라고 말한다. 여기 우리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성경의 첫 구절로 돌아가자. 세상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채 비어 있는 카오스였고,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생겨라!”(창세 1,1-3) 카오스에서 새로운 창조, 질서, 우주, 평화가 생겨났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들 안에 새로운 평화를 창조하실 때 하시는 일이다. 평화는 값을 치른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그 값은 죽음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 곧 은총이다!

 

이런 희망 안에 살면서, 평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화해를 위해 조금씩 나아가며, 또 은총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이 카오스의 세상에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상가로서 우리의 소명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깊이 일치되어 세상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다. 온 세상, 곧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 그리고 수도원 밖의 카오스를 향해 주님의 손을 잡고 나아감으로써 평화를 창조하시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 안에 깊이 동참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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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aos and Peace according to RB”, TJURUNGA (66/2004)에 실린 글로 2003년 영국과 아일랜드 수도회 장상들에게 한 강의.

2) 코이노니아 30집, 141-170; 33집, 90-134와 139쪽 참조.

3) acedia(그리스어: akedia)에 대해 코이노니아 33집, 135-161쪽 참조.

 

[코이노니아 제34집, 2009년 여름, 글 아퀴나타 뵈크만 수녀, 조성옥 에노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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