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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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05 ㅣ No.447

[레지오 영성]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1. 왜 자비의 특별희년인가?

 

우리는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자비의 특별희년은 2015년 3월13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주님을 위한 24시간” 참회예식 교황님의 강론을 통해 그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교황께서는 강론을 통하여 “교회는 모든 이를 환대하며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 집”으로서,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자비의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를 위로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15년 12월8일 세계 교회는 ‘자비의 성문’을 여는 예식으로 ‘자비의 특별희년’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셨을까요? 먼저 ‘자비의 특별희년’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는 2015년 12월8일 시작함으로써 특별희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음을 말해줍니다. 교황님께서는 ‘자비의 얼굴’ 4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는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더 깊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25년 또는 50년을 주기로 희년을 선포해 왔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경축했기에 다음 희년은 2025년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는 예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왜 ‘특별희년’을, 그것도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신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교황께서 체험한 하느님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자비의 하느님을, 그래서 그 자비를 당신이 살아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자비를 같이 살아보자고 우리들에게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잡지 인터뷰(안토니오 스파다로,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인터뷰, 국춘심 역, 솔출판사, 2014, 29-33쪽 참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께서 바라보아주신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사람입니다. 저의 좌우명인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를 저는 언제나 저에게 대단히 적절한 것으로 느껴왔습니다.” 그리고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의 카라바죠의 그림 “성 마태오의 부르심”을 떠올리며 “예수께서는 세리 하나를 보셨습니다.  그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시면서 그를 선택하셨기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마태오를 향한 예수님의 그 손가락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마태오처럼.” “마태오의 동작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요. 마치 이렇게 말하듯이 돈을 움켜쥐지요. ‘아니요. 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이 돈은 제 것이에요!’ 예. 이것이 저예요. ‘주님께서 눈길을 돌려 바라보신 죄인.’ 교황직 선출을 받아들이겠느냐고 저에게 물었을 때 했던 말은 이렇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자비와 한없는 인내에 의탁하며, 참회의 정신으로 받아들입니다.”

 

 

2.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자비를 뜻하는 라틴어는 ‘미제리코르디아(misericordia)’입니다. 이 말은 miser(가난한 이, 불쌍한 이)와 cor(심장, 마음을 둠)가 결합된 합성어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난한 이들에 마음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희랍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로 ‘내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느끼다’ 또는 ‘감동을 받아 창자 속으로 들어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비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온갖 형태의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어 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느끼는 마음입니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저 멀리서 보이자, 아버지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애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는”(루카 15,20)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는 언제나 자비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한다.”(자비의 얼굴, 2항)고 하시면서 “자비라는 말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2항)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을 필요로 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아버지께 모두 내어드립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게 되어 완전히 일치를 이루십니다. 이 사랑의 일치를 성령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의 크신 사랑을 나누고자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십니다.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아버지께서는 모세에게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하느님’(탈출 34,6 참조)이라고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시고 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하신 본성을 끊임없이 보여 주십니다.”(1항)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자,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1항)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느님을 뒤로 미루고 자신을 앞세우고, 자신을 하느님처럼 섬김으로 죄를 짓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당신 아들·딸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라는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여기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는 것”(2항)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우리들은 이제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비’가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근본 법칙이 되어, 세상에서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 되어야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4월호, 서철 바울로 신부(청주교구 선교사목국장, 청주 R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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