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과 불가능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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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74

수도승과 불가능한 일들1)

 

 

베네딕도 수도규칙 68장은 규칙서의 종결인 듯한 인상을 주는 66장 뒤에 나오는 장으로, 일반적으로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나중에 쓴 것으로 본다. 이 장의 제목 “Si Fratri Impossibilia Iniungantur”는 “어떤 형제에게 내려진 불가능한 일”(RB 1980)2), 혹은 “어떤 형제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다면”(Kardong)3) 등으로 번역되었다. 68장은 5장 ‘순명에 대하여’에 나오는 가르침을 확인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인간적 배려를 보여주는 규칙서의 백미(白眉)라 하겠다.

 

가시아노와 스승의 규칙서 저자도 수도승에게 주어진 불가능하거나 비합리적인 명령들에 대해 다루었다. 그들에게 이런 명령은 겸손과 순명을 시험하는 방법으로서 덕을 연마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그 경우에는 아빠스 스스로 자신이 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베네딕도는 바실리오 규칙의 견해들을 더 발전시킨다. 바실리오는 가시아노나 스승의 규칙서 저자와 달리, 순명 문제에 있어서 아빠스와 수도승 사이의 대화의 역할을 이해했다.

 

우리는 68장에서 현실주의, 인간존중, 그리고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수도승은 어떤 여지도 없이 무리한 명령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태도로, 교만하거나 반항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긴장 상황에서 아빠스와 수도승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일하는 가이다. 진정한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수도승의 신앙, 즉 이 상호작용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다는 그의 믿음에 달려있다. 어떻게 결정되든 수도승은 그것이 자신의 유익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시큰둥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또 마지못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면서 사랑을 다해 순명할 수 있게 된다. 아빠스 또한 그런 믿음의 소유자로 연민과 이해심을 보이며 행동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장은 아빠스의 태도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아빠스가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2절을 참고할 수 있겠다. 아빠스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수도승은 진정한 결과를 주도하는 주체로서, 그것은 일이 어떻게 실행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정신으로 그 명령을 받아들였느냐에 달려있다.

 

68장은 수도승의 성소를 보호해주는 고마운 장이다. 머리말 시작을 보면 성소는 순명의 노고와 동일시된다. 순명은 마치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하는 싸움처럼 중대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다. 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한 열쇠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수도승의 능력으로, 수도승은 수도생활 초기에 단번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여정 안에서 언젠가는 하게 되는 것이다. 5장 순명에 대한 가르침은 가시아노와 스승의 규칙서가 전하는 사막 교부들의 높은 이상주의를 그 배경으로 한다. “겸손의 첫째 단계는 지체 없는 순명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일이며, 그들은 서약한 거룩한 섬김 때문에, 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원한 생명의 영광 때문에, 장상들로부터 어떤 것을 명령 받았을 때 즉시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함에 지체할 줄을 모른다”(RB 5,1-4).

 

더할 나위 없이 멋있지만 대단히 단호하다. 여기엔 어떤 인간적인 오류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 각이 분명하다. 이 가르침을 따르자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 선 수도승은 영웅적으로 비합리적인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물속에 가라앉든지 수영을 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피해 결국 불순명에 떨어지든지 말이다. 그런 일이 용납되던 오래 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5장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모든 명령을 무조건 감당해 내거나 일방적으로 그만두는 것 말고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의 순명은 아빠스 사무실에 순명 못하겠다는 쪽지 한 장을 밀어 넣는 식의 일방적인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 역시 자신의 뜻을 따르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으로 결국 수도승의 서원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런 식으로 처신한 수도승은 훗날 뒤를 돌아보며 자기가 한 선한 일들조차 그것이 자신의 뜻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5장에서 말하는 순명을 넘어서는 다른 규정들이 규칙서 안에 없다면 수도승은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구석에 몰릴 것이다. 다행히 베네딕도 성인은 68장에서 순명의 이상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수도승을 존중하는 길을 열어준다. 수도승 순명의 문제에서, 아빠스와 마찬가지로 수도승 역시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참으로 경청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68장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 주신다는 3장 ‘형제들의 의견을 들음에 대하여’와 71장과 72장에 나오는 상호 순명에 대한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이 규정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순명을 수행하는 데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수도승의 서원을 보호한다. 아빠스가 마지막 말을 하기 전까지는 수도승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수도승의 말과 아빠스의 말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고 그러니 양쪽 다 존중되어야 한다.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아빠스의 결정은 바뀔 수도 있고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뜻을 전한 수도승은 이제 아빠스가 자신의 입장을 알고 있음을 안다. 아빠스의 명령이 바뀌지 않더라도 수도승이 말하고자 한 것은 전달된 것이다. 수도승은 아빠스 때문이 아니라, 아빠스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순명하는 것이다. 순명을 다루는 5장과 68장의 접근이 서로 다르지만 궁극적 현실은 같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마지막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순명과 믿음을 모두 잃게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침착한 관용의 분위기가 68장 시작에 자리한다. 수도승 생활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잘못 진행되거나 옳지 못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되어져야 할 일에 의견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 수도승 자신이 보기에 능력 밖의 일을 아빠스가 시킬 수도 있다. 아빠스는 그것이 수도승에게 어려울 수 있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힘들고 불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은 수도승 자신이 한다. 베네딕도는 여기서 어떤 수도승에게 할 수 없다고 예상되는 일을 아빠스가 의도적으로 강요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첫 문장에 forte 즉, ‘만일’ ‘혹시’라는 부사가 덧붙여진다. 하지만 주어진 일이 수도승에게 너무 짐스럽다면, 대화를 하고 의논하는 중간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68장 제목에 ‘impossibilia’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이런 일이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더 자주 발생할 수 있으며 사실 수도승 생활의 한 부분임을 짐작하게 한다.

 

주어진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해도 수도승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의 넷째 단계에 의하면, 순명하는 것이 가혹하고 부당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해도 도망쳐선 안 된다. 68장 1절에 나오는 “받아들인다suscipiat”는 단어는 수도승이 발하는 서원의 “suscipe”를 상기시킨다. “주님, 주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suscipe me, domine). 그러면 나는 살겠나이다. 나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RB 58,21). 계속되는 순명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수도승 서원생활에 나날이 주어지는 시험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 앞에서 수도승이 취할 우선적 태도는 비겁하게 우는 소리를 하지 말고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최소한 그것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고 일단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이다. ‘받아들인다suscipiat’는 단어가 미리 암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예”라고 응답하는 것은 믿음의 경기장에서 싸우는 것이고, 서원의 약속을 잃지 않는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사숙고한 후에도 그 일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어렵게만 생각된다면 수도승은 아빠스에게 알려 주의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자기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본인만 알고 아빠스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수도승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잘 알고 있다면, 수도승의 길을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수도승이 먼저 결정할 수 있다면 수도생활이라는 모험은 계속될 수 없다.

 

도미니코회 전 총장 티모시 래드클리프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 선거와 관련된 위험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총회에 앞서 형제들에게 만일 장상으로 선출된다면 받아들이겠는지 먼저 물어보는 풍조에 늘 단호히 반대하곤 했다. 어떤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스스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순명하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서원을 하면서 자신을 공동체(하느님)의 손에 맡긴다. 규칙서 68장은 그 약속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어려움이 시작될 때, 아빠스나 수도승 모두 무엇이 최선인지 모를 수 있다. 아빠스의 의견을 무조건 하느님의 소리로 간주하는 스승의 규칙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베네딕도는 그것을 인정한다. 68장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빠스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 일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닌 수도승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68,4). 수도승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빠스의 필요 역시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방해가 없는 적절한 때에 이 문제를 아빠스와 의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그는 참을성 있게patienter 자기 뜻을 밝혀야 한다. ‘patienter’는 ‘고통patior’이라는 단어와 ‘열정passio’이라는 단어의 조합어로, 머리말 끝의 아름다운 문장에도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patientiam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머리말 50). 복음적 인내의 정신으로 수도승은 “거만하거나 반항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알려야 한다. 이 문장에서 단어들을 분사형으로 쓴 것은(non superbiendo aut resistendo vel contradicendo) 이런 태도가 어떤 특별한 상황에 일시적으로 보이는 응답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어야 할 태도임을 말해 준다.

 

자신의 생각을 아뢰는 조심스럽고 순종적인 태도는 suggestionem이라는 단어에 표현된다. 이것은 주장하는 것도 타협하거나 최후통첩을 하는 것도 아니다. 목표는 높은 데 있다. 진정한 주제는 바로 수도승의 믿음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정당하지도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수도승은 하느님께서 아빠스를 통해서 그를 위해 일하신다고 믿을 수 있는가? 만일 수도승이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BR 2,2)’인 아빠스와의 상호관계 안에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그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수도승 생활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정된 것이 결국 자신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유익하다고(RB 68,4)’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마지막 절로 요약된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 사랑으로써 순명할 것이다.” 수도승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 수도원에 들어온다.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그가 알아듣지 못했다면 베네딕도 성인이 이미 똑똑히 말한 머리말 3절의 다음 내용을 볼 것이다. “자기 뜻을 버리고 참된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위해 분투하고자 순명의 극히 강하고 훌륭한 무기를 잡는 자여, 나는 이제 이 말을 너에게 하는 바이다.” 이는 자기 뜻과 거짓자아의 족쇄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자유를 받아들이라는 초대이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는 아빠스와 공동체를 통해 일하고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겸손한 순종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68장은 순종의 싸움터에서 분투하는 수도승을 도와주고 보호한다. 만일 순명함에 있어서 수도승이 따라야 할 기준이 5장뿐이라면 질문을 하거나 대화를 청하는 것조차 쉽게 불순종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 68장은 숨 쉴 공간을 열어준다. 즉 수도승이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하느님 손에 맡기면서도, 자기 의견을 말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만일 아빠스가 뜻을 바꾸지 않거든, 그것이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원하시는 것으로 알기에 수도승은 명령받은 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으로 확신하며 “사랑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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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biaco Abbey의 Jerome Kodell 아빠스님이 2003년 8월 미국 남자수도회장상모임에서 한 강의로 The American Benedictine Review(58:4, Dec. 2007)에 실렸습니다.

2) RB 1980 : The Rule of St. Benedict by Saint Benedict, editors Timothy Fry, Timothy Horner, and Imogene Baker3) Benedict's Rule: A Translation and Commentary (1996) by Terrence G. Kardong.

 

[코이노니아 제33집, 2008년 여름, 글 제롬 코델, 조성옥 에노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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