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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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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73

베네딕도의 규칙 :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크리스티안 쉬츠1) / 양숙희 이사악 옮김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6세기의 문서이므로 그 시대를 말해주고 그 시대의 흔적을 반영한다. 규칙서는 이탈리아 중남부, 특히 남부 갈리아(Gaul) 지방과 동방 수도승생활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규칙서는 자극을 받고 그 자극에서 발생하는 필요와 질문에 대해 응답한다. 또한 규칙서는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적응력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규칙을 주석할 때는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맥락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사소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규칙서는 고대 수도생활의 기원과 전통에 그 원천(sources)을 두므로 규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기준들보다 훨씬 더 폭넓게 접근해야 한다. 사실 원천들은 성규의 역사를 이루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규칙서의 가르침과 규정(attitudes and customs)을 보여준다. 성규에서도 원천들은 계속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규를 형성하고 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도는 성경의 증언, 수도생활 창립자들, 선구적인 인물들, 수도생활의 영적 유산, 자신의 경험, 주위 환경조건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성규에는 전사(前史)를 형성한 다양한 인물들과의 대화가 나오는데, 그 최우선적인 관심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성규를 주석하는데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성규는 1500년 전에 씌어진 이래 계속 전해져 오면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15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는 역사의 여과를 통하여 규칙서를 읽고 주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성규를 읽는 것은 확인과 풍요(confirmation and enrichment)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대화와 거부(relativization and rejection)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종교심 그리고 해석의 차이로 빚어진 거리를 넘어 우리와 성규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 열망이 우리 모두를 회수도자로 묶는 공통된 구심점이며 베네딕도와 베네딕도 이전의 수도승 선배들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게 한다.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수도승들이 체득하고 발견한 경험들과 방법들을 시범적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성규에서 다루고 있는 경험들을 우리도 체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성규를 해석하는 공통기반이 되어야 한다. 성규를 해석한다는 것은 각각의 고유한 방법으로 성규 자체와 현실과 경험에 의지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규칙을 설명할 때에는 언제나 이 해석이 어떠한 규범을 따르는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서의 특성 때문에 한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현 주석은 무엇보다 규칙서를 영적 생활을 위한 지침서로 보는데, 이러한 넓은 관점은 성규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 영적인 응용, 전례의 쇄신, 수도생활의 이론등과 같은 풍성한 관점들과 통합을 용이하게 한다. 특히 다음의 관점들이 이 주석의 특징이다.

 

 

1. 규칙(regula)으로서의 특성

 

성규는 자신을 규칙2),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보자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3)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성규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았으며, 동시에 미래를 향해 계속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규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우리는 성경을 참된 규칙(regula)으로 간주했던 고대 수도생활의 맥락 안에서 규칙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규범들, 구전전통, 전기적인 본보기 혹은 아빠의 말씀들, 그리고 심지어 수도원의 문자화된 삶의 방식 모두를 규칙(regula)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칙”(regula)의 특성은 삶을 위한 안내, 지시, 질서, 그리고 지속성이다.

 

베네딕도의 규칙도 예외 없이 의도적으로 수도승의 삶을 돕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베네딕도는 가능한 한 우연성과 임의성을 제거하고 상황과 개인에 구애받지 않는 공동생활을 위한 지침을 세우고 있다. 베네딕도는 질서가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고, 긴장을 풀어주고, 평화를 이룩하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사실 영성생활은 질서 지어진 삶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규칙의 이러한 특성에 근거하여 성규의 각각의 규정들을 읽고 해석해야만 한다. 즉 각 구절의 의미는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이 주석은 성규의 어떠한 부분도 누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규칙서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2. 성경과의 조화

 

베네딕도는 전통과 조화를 이루면서, “하느님의 권위로 (씌여진) 신.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간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4)으로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베네딕도가 성규가 성경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열망은 성규의 구성과 구조, 성규 전체의 정신과 언어 속에 퍼져있다. 성경과 성규는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이룬다. 베네딕도가 삶에 필요한 가르침을 자주 성경말씀에서 인용하거나 성경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는 데에서 이러한 일치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성경 말씀과 성규의 말씀은 성규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통교하고 있어 어느 것이 성경에서 온 말씀인지 혹은 성규 고유의 말씀인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성규에는 성경 말씀이 분명히 인용되었음은 물론이고, 성규의 언어 자체가 성서적인 용어, 개념, 이미지로 젖어 있다. 그래서 즉시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성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분명히 성경말씀에서 취한 것이다. 이것은 성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서적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성규가 성경을 단일한 차원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규의 중심은 성경 특히 복음이다.5) 이 복음은 결정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義)”6)에 초점을 맞춘다. 결론적으로 성규는 오로지 성경의 정신만을 따르며, 성경의 정신 안에서 그 길을 생각하고, 가르친다.

 

 

3. 전통과의 연관성

 

베네딕도는 아빠스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할 때 마태오 복음 13장 52절의 부유한 창고에서 새 것들과 헌 것들을 꺼내는 집주인을 모범으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성규 전체의 편집과 구조를 특징짓는 일종의 기본적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전통을 대단히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표현, 의견과 경험들을 서술하는 것을 삼가한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성규에서 교부들의 증언을 거듭 언급할 때7) 드러난다. 그는 교부들의 살아있는 지식이 생명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속성의 요소를 강조하는데 이는 긴 세월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가치가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수도원에서의 삶 또한 지속성을 요구하며, 지속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지속성을 기초로 하여 영위된다. 지속성은 삶에 독립성과 항상성을 주고, 삶에 일정한 규범도 제시한다.

 

베네딕도는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경험을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칙으로 삼는다. 사실 베네딕도는 “경험”이라는 단어를 단지 두 군데에서만 언급하지만,8) 그가 원천들을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을 볼 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성규를 썼다는 것이 명백하다. 분별의 덕 discretio)을 보면, 그 배후에는 주관성이나 임의성의 요소가 전혀 없다.

 

이 주석은 성규 본문의 각각의 원천들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가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베네딕도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성규를 썼다는 것에서 그의 영성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경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규칙서 자체의 뛰어난 특성인 동시에 베네딕도 인격의 탁월한 특징이다.

 

 

4.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city)

 

성규는 특정한 인용9)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택하고 있는 표현방식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책(Christ-book)이다. 이것은 예상외로 많은 구절에서 발견되는데 일부는 함축되어 있으나 사실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이 성규를 머리말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이고,  우리가 성규를 그리스도의 규칙(Christ-Rule)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성규의 진정한 저자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성규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신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이고 영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천들, 교부들, 전통에 대한 증언의 배후에 계시며 이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출발점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규에서 베네딕도, 스승,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을 만난다기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성규에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그리스도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탁월한 교사이시다. 베네딕도는, 요한 카시아노와 스승과 같이,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10)으로 이해하는데 이 학원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스승이시다.11) 그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그분 자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현존, 그분의 말씀과 본보기에서 넘쳐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딕도에게 모든 가르침은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향(向)한다.12)

 

베네딕도는 성규 안에서 그리스도를 “길”로서 제시한다. 규칙이 가르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길로서 순명, 겸손, 자기낮춤, 하느님을 두려워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 봉사, 침묵, 인내, 항구함, 고통과 사랑의 길이다. 베네딕도는 이런 덕행을 말할 때 항상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이것은 성규의 다양한 말씀과 행동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초대하시며, 모든 훈계와 가르침을 통하여13)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이것은 성규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말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성규를 주석할 때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베네딕도는 어떤 그리스도를 특별히 생각하셨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바로 니케아 신경에 표현된 교회의 완전한 믿음의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교회의 전례거행, 성무일도, 그리고 설교의 자명한 배경이다. 성규에서 베네딕도는 그리스도께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명백히 이 전통을 따른다. 베네딕도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현재 계시는 그리스도이다. 처형되셨으나 부활하신 분이시며 다시 오실 주님으로 지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 안에 영으로 활동하신다. 수도승의 “오늘”이 가능한 것도 바로 주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수도승의 삶과 믿음의 시간을 지배한다. 현재 계시는 그리스도는 공동체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에서, 매일의 다양한 삶의 상황 안에서 수도승을 만나 주신다. 수도승의 모든 삶은 주님의 현존 안에서 행해진다.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은 수도승과 그리스도, 수도승과 하느님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수도승은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따른다.

 

이 주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5. 세례영성(Baptismal Spirituality)

 

규칙서에서 드러나듯이, 베네딕도는 수도생활이 초대 교회의 세례영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이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을 제시하는 성규의 머리말에 잘 반영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은 수도승으로서의 삶의 시작과 밀접히 연관된다. 베네딕도는 머리말에서 시편 15와 34편을 인용하고 해석하는데 이 시편들은 초대 교회 세례 입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성규전체의 구성(framework)을 예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세례의 신학적 의미는 통일된 주제처럼 성규 전체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수도승에게 세례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동시에 그 의미를 살아가게 한다.

 

베네딕도는 성규의 구조와 정신에서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이는 초대 교회의 세례 문답과 신앙 고백과 긴밀히 연관된다. 세례 안에서 부르시는 하느님은 수도생활 안에서 부르시는 바로 그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수도삶으로의 부르심과 세례로 부르심을 이어주는 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이고 충실한 응답은 수도승이 그의 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여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기까지, 수난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살아내는 것이다. 이 연관성은 성규 58장에 잘 나타나 있다. 지원자가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되기까지의 과정, 회개, 시험, 그리고 수련소에서 서원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인 과정은 세례의 각 단계들과 매우 유사한 용어로 묘사되어 있다. 이 연관성은 지원자를 받아들이는 예식과 조건들까지 확대되어 있다. 이러한 암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으로, 깊은 차원에서 수도생활에 관한 이해가 곧 세례의 본질에 대한 이해임을 말해준다. 더욱이 베네딕도는 수도승을 초보자로 보는데, 이것은 세례영성이 성규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이 주석은 수도생활을 세례에 담긴 수도생활의 기원과 부차적인 요소와 연결시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리하여 참되고 통일된 그리스도적 수도성소의 안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6. 교회로서의 특성

 

이코니움의 암필로키우스(Amphilochius of Iconium)의 “교회로서의 수도승의 존재”14)는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이 보여 주는 태도(stance)와 특성(character)을 정확하게 반영해 준다. 베네딕도는 가장 굳센 종류의 수도승인 회수도자15)를 중시한다. 이는 그의 교회론적인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수도원을 교회의 코이노니아(koinonia)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도원 자체를 코이노니아로 이해한다. 실제로 그의 공동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네딕도는 시편 67:7; 132:1과 사도행전 2:44; 4:32-35을 인용하면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을 보여준다. 베네딕도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한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의 공동체의 수도승들의 소유(재산), 노동, 그리고 필요에 대한 모든 내용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베네딕도가 수도원을 몸(corpus monasterii)16)과 지체(membra)17)의 이미지로 보는데 이는 1 코린 12,27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상기시킨다.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규정한다. 이 표현이 여러 맥락에서 자주 나오는 것18)을 보면 수도원 공동생활의 실상이 얼마만큼 이러한 이미지로 젖어있고 결정되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 외에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상징적이고 형상적인 일련의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모임, 양떼, 학원 혹은 제자들의 학원, 작업장, 진지(acies fraterna)19), 가족, 형제애 등인데 이 단어들은 모두 베네딕도적인 회수도공동체를 교회로 정의한다. 수도 공동체의 삶에 관련된 다양한 구조와 제도, 그리고 구성은 유사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 하느님 찬미의 실천과 구조, 단식의 실천, 초대 그리스도 교회를 모델로 한 조직과 속죄제도, 수도서원과 봉헌예식 등이다.

 

결국 베네딕도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신약 공동체의 삶에서 택하여 그의 수도 공동체의 상황에 적용한 모든 지시와 규정들은 교회적인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특히 개인소유 혹은 노동에 관한 초대 공동체의 모범적인 실천과 수도승들의 영적 수행의 일부 도구들을 들 수 있다.

 

그는 성규에서, 수도 삶이란 단지 수도원에서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교회로 사는 것을 뜻한다. 수도원의 교회성은 수도원을 넘어 전 교회와 주변 지역의 교회까지 연결된다. 이것은 특히 하느님의 집에 “합당한 관리자”20)가 필요할 때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의 독서 목록을 언급할 때도 “인정되었고 공인된 정통 가톨릭 교부들”21)을 매우 중요시한다. 베네딕도 수도승들이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교회로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의 한가운데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손님환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22) 이 주석은 이런 관련성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7. 영적인 차원(Pneumatic Dimension)

 

초대교회에서 수도승은 성령의 소유자로 간주되었다. 그레고리오 대종이 베네딕도를 서술한 것을 보면, 베네딕도 역시 이러한 전통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베네딕도를 “하느님의 사람이신 그분은, 구속의 은총으로 간택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셨던 (주님) 한 분의 영을 지니고 계셨다”23)고 묘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베네딕도의 특성을 성규의 분명한 표현에서 찾으려 한다면 당장에 실망할 것이다. 베네딕도는 단지 두 군데에서만 하느님 영의 선물을 언급한다. 첫째는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상태인24)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완전해진 사람들에 대하여 말할 때이고, 둘째는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은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25)는 사순절에 관한 장에서이다. 이렇게 베네딕도는 성령에 대하여 빈약하게 언급한다. 그렇다면 성규의 영적인 차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 점을 문제화 하는 것은 확실히 핵심을 파악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언급 외에,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묵시적으로 존재론적 성령론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완전함을 향하여 사는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구조에서 드러나는데, 수도승의 순명의 과정을 보면 온전히 성령에 감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말에 인용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라”26)는 말씀은 동시에 성규 전체의 서문이다. 말하자면 귀와 소리는 영의 “기관”(organs)을 상징한다. 규칙서 자체는 수도승이 집중하여 폭넓게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들음은 수직적일뿐 아니라 수평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성령의 소리를 감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들음과 연관된 것은 성령에 의해 지도되는(directed) 가르침,  즉 성경과 성규, 무엇보다도 아빠스의 말과 모범으로 이루어지는 가르침이다. 성규 2장 3절은 로마서 8:15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령의 영향이 최대한 표현된 부분이다. 성령으로 가득찬 외침, “아빠, 아버지!”의 고유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바로 기도의 자리이다. 이것은 수도승의 opus dei(하느님의 일)에서 드러나는데, 하느님의 일은 원칙적으로 성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고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다. 분명히 하느님의 일 자체는 성령의 영감27)에 기인한다.

 

근원적인 수도승적 덕행인 분별 또한 성령의 선물이다. 이 분별의 덕은 아빠스와 성숙한 수도승의 특징적인 표시로, 거짓 영을 분별해 내는 능력이고, 사사로운 자기의지에 의한 월권(praesumptio)과 성령이 주신 선물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수도승의 전 삶을 통해 확장된다.

 

규칙을 주석한다는 것은, 세례를 토대로 하여, 수도승의 본질이 되는 하느님의 영이 드러나는 지적이고 영적인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다. 성령은 수도승의 삶에 활동하시는 분이시고, 영적 기술(ars spiritalis)에 특성을 부여하시는 분이다.28)

 

 

8. 종말론적인 지향(志向) (Eschatological Orientation)

 

수도생활과 종말론은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네딕도는 이 관계를 실질적인 매일의 수도승 삶에 적용하고, 관련된 규정으로 반영시킨다. 성규의 정신에(Rule’s line of thought) 드러난 종말론적인 주제의 핵심단어들은,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회심, 되돌아감, 문책, 심판, 하늘, 하늘의 고향, 영원한 생명, 웃음, 죽음, 멸망, 구원, 구조, 구하기, 치유, 처벌, 지옥, 악마 등이다. 베네딕도는 성규 4장에서 종말과 심판(四末)29)에 관한 개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사말을 보는 관점은 사랑의 이중계명30)으로 집약되는 착한 행실이며, 죽음과 심판은 성규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학교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종말론적인 지향(志向)은 수도승이 삶 전부를 일관성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게 해 준다. 이 지향의 목적은 믿음에 근거한 세례와 그 안에 담겨있는 본질이 점진적으로 완전하게 드러나는데 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십자가에서 영광으로 가는 과정이다. 이 내용은 성규에서 “이후”가 아니라 “지금”을 강조하는데서 드러난다. 수도승은 종말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 순간(now)에 산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수도승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약점과 실패에 깨어있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배운다. 이 모든 것들은 시간(tempus)에 대한 민감함, 특히 지금이 “무엇을 위한 시간인지”를 주의 깊게 표현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지금”과 “오늘”은 매순간 찾아오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단순한 일들에 깊고 진지한 가치를 부여해 준다. 동시에 수도승은 그것들이 우리의 희망과 갈망이신 하느님께 비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주석은 현실과 신학적인 방향에 근거하여 수도생활에 관한 종말론적인 관점을 합리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지나치게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종말적 입장을 이용하거나 제한할 생각이 없다.

 

 

9. 로마적인 특성(Romanitas)

 

성규는 비교적 일찍부터“Roman Rule”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자격은 성규의 보급과 채택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Roman”의 분류를 단지 규칙의 기원과 파급의 역사에만 한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베네딕도와 그의 작품 모두를 로마적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지만 “Roman Rule”이라는 것은 규칙의 내용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성규의 언어만 보더라도 로마적 사고, 그리고 삶과 연관되어 있다. 이 영향력은 성규에 흡수된 일정한 명칭들과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로마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규에서 성규저자의 고전적이고 세속적인 교육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몇 가지 표현들만 가지고 베네딕도의 교육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언어라는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고, 그리고 효과적으로 구성의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수사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난다. 이외에도 그는 법에 능통하게 교육을 받았고, 로마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구조화에 대한 감각과 자질을 지녔다.

 

베네딕도는 삶을 경험한 수도승으로서, 수도 공동체의 현실과 핵심적인 요소들, 그리고 수도공동체의 개개인에 대한 사려 깊고 명확한 눈을 갖고 있다. 베네딕도는 리더십의 자질,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책임에 대한 감각, 사명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삶을 위한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그 질서는 매우 설득력 있고 믿을만하다. 이것은 통합할 수 있는 능력,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한 존중,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개방성에 근거한다.

 

성규에 드러난 이러한 로마적 특성에 대한 묘사는 그레고리우스 대종의 대화집 2권(=베네딕도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로마적 세계의 분명하고도 뚜렷한 묘사가 대화집에 흐르고 있다. 이 주석은 독자들에게 로마적인 특성에 대한 의식과 감각을 주고자 적절한 부분에서 정보를 찾아내고자 한다.

 

 

10. 시사성(Contemporary Relevance)

 

분명히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주석을 작성할 때에 생각했던 문제 중 하나는 시사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 주석은 현시대와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가? 연관성의 기준들은 다양하지만 사실 이것은 해석의 과정이 더욱 다양하다. 시사성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시대, 독자의 자질, 그리고 직접적인 문맥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베네딕도가 성규를 썼던 시대와 현대 우리시대와는 대단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은 또한 성규에서 드러난 사고와 우리 시대의 사고 사이에도 대단히 넓은 영적, 지적 공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백 때문에 성규에 대한 지식, 탐구, 역사와 관련된 재작업은 대단한 투자를 요구한다. 성규 그 자체는 물론이고 초대교회와 교부들, 역사의 전반적인 배경이 성규와 현대와의 연관성 작업에 관련된다.

 

이 점에서 정보와 번역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규와 현대와의 연관성을 위한 첫 단계는 성규를 우리시대의 지식과 연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항상 “오늘”의 관점과 사고, 그리고 오늘의 언어와 경험의 지평에서 행해진다. 우리는 이 “오늘”이라는 시각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성규를 과거의 텍스트로 이해하려고 할지라도 그렇다. 그 다음에 시사성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는 그보다 더 방대한 사항들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현시대에서 질문을 제기하여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문서가 우리에게도 질문을 하고 있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연관성을 찾기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다. 이것이 시사성 찾기의 둘째 단계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과정 끝에 현재와 과거사이의 대화의 열매로 성규의 시사성 문제에 관하여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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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ristian Schulz는 독일 Schweiklberg Abbey의 아빠스이다. 원래 Kommentar zur Benediktusregel에 실린 글을 Andrew Thornton(Saint Anselm Abbey in Manchester, NH)이 영어로 옮긴 것이다. American Benedictine Review 58(2007년)에 실린 글이다.

2) RB 3.7; 23.1; 32.5; 37.1f; 60.2; 64.20; 65.17; 66.8; 73. 참조

3) RB 73.8.

4) RB 73.3.

5) RB 머리말 21 참조 

6) RB 2.35.

7) RB 9.8; 18.25; 42.3; 48.8; 73.2, 4, 5. 참조. 

8) RB 1.6; 59.6.

10) 머리말 45. 

11) 마태 11:29. 참조.

12) RB 5.5,15= 루카 10:16. 참조. 

13) RB 머리말 50. 참조.

14) Amphil., Haer. 159(CCG3): monazein ekklesiastikos. 

15) RB 1.13.

16) RB 61.6. 

17) RB 34.,5.

18) RB 31.19; 53.22; 64.5. 참조. 

19) RB 1,5.

20) RB 64.3-6. 

21) RB 9.8; 73.4. 

22) RB 53장 참조.

23) 그레고리오 대종 대화집, 2, 8, 8-9. 교부문헌총서 11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1999년.

24) RB 49.6. 25) RB 49.6.

26) RB 머리말 11; 묵시 2:7. 

27) RB 20.4.

28) RB 4.75. 

29) RB 4.44-47. 참조. 

30) RB 4.1절이하 참조.

 

[코이노니아 제33집, 2008년 여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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