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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임학권(1926~2004)의 감사와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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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2-13 ㅣ No.623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버렸나요?” - 임학권(1926~2004)의 감사와 그리움

 

 

임학권(바실리오)은 1926년 평안남도 진남포시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매우 엄격해서 일체의 ‘비과학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종교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혼자 신자가 되었다. 그는 1943년 진남포 공립상공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평양식산은행에 취직했다. 학창시절에 믿음을 받아들인 임학권은 당시 성당에서 젊은이들과 왕성하게 활동하며 믿음을 다져가고 있었다.


직장동맹증도 던지고 남쪽으로

1945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성모 마리아의 선물처럼 조국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곧 북한 공산화에 착수했다. 그들은 주민통제를 강화하여 모든 주민은 신분증명서에 종교를 밝히도록 했다. 종교인은 직장과 관청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밀정이 늘 신자들을 감시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사상교육사업으로 학교와 공장에서 유물론을 가르치며 반종교적인 선전을 일삼았다. 미사와 주일학교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주일 오후를 택해 회의와 강습회 등을 개최했다.

1947년 북한은 직장마다 직장동맹이 있어 공산주의의 주입이 날로 심해가고 있었다. 임학권은 일요일에 출근하라는 영이 내려졌는데, 성당에 갔다가 늦게 출근했다. 직장동맹에서는 반동분자라고 험하게 지적하고 자아비판을 하라며 맹공격을 했다. 임학권은 마침내 폭발했다. 그는 직장동맹증을 집어 던지고 종교의 자유가 없이는 이 직장에 근무할 수 없다며 뛰쳐나왔다. 그는 그날로 남하하기로 결심했다. 진남포로 내려가 부친 밑에서 오랫동안 서기로 일했던 홍덕영을 찾아가 배편을 수소문했다. 군산을 지나 서해를 돌아 남쪽 끝 부산으로 갔다. 2년 전 남하한 누나를 찾아서였다.

임학권은 부산에서 무턱대고 치과의사회관을 찾아가 자형 이름으로 누나 집주소를 알아냈다. 그는 쇠잔해서 누나에게 왔다. 방을 정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래도 그는 기력을 되찾자 바로 성당이 있는 곳을 물었다. 누이 집은 대청동 용두산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어 중앙성당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는 성당에 가서 성사를 보고, 평양에서 오게 된 사연을 말했다. 어려운 고비마다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곳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게 됐다. 본래 그는 노래를 잘 불렀다. 그리고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이 실력은 나중에 꾸르실료교육에 활용되었는데, 그는 “데꼴로레스!”를 외치며 아코디언을 켰다.

임학권은 건강이 회복되자 식산은행에 다시 취직하려고 애를 썼으나, 대신 자형의 도움으로 부산 적산관리처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속도가 빨랐다. 같은 조원이었던 양지수와 함께 부정적발의 뛰어난 성과를 올려 표창도 받았다. 그때쯤 경북대학 의과대학이 4년제로는 마지막 해라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의대 진학을 준비했고, 합격했다. 그리하여 대구에서 하숙을 하며,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입학한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 그는 공산당을 직접 무찌르겠다고 군에 자원입대했다. 군에서는 의대 학생들을 위생병으로 차출하여 최전방 야전병원에 보내던 때였다. 이때 그도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또 다른 하느님을 보았을 듯하다.

임학권은 군복무를 끝내고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처음에는 칠성시장 근처에 병원을 냈으나 곧 남산동으로 옮겼다. 그는 약을 잘 주지 않는 의사였다. 웬만하면 참아보라고 하면서 엄살을 하는 환자들을 혼내기도 했다. 그는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고, 병원도 날로 번성했다.


개척정신과 꾸르실료가 만나고

임학권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부모형제, 고향을 버리고 왔다. 그는 새 땅에서 모든 걸 개척해야 했다. 북에서 온 그의 개척정신은 교회에도 여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해 주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하느님이 뜻을 펴시도록 했다. 동료 의사를 대상으로 의사 교리반을 조직, 그들과 교리를 같이 듣고 또 일일이 출석을 독려했다. 영세자의 대부가 되어 대자들의 신앙생활도 적극 챙겼다. 이리하여 대구가톨릭의사회가 발족되었고, 그는 당연히 의사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 조직은 한국 가톨릭의사회가 탄생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구교구에 꾸르실료를 정착시켰다. 꾸르실료는 철저한 집중 교육을 통해 꾸르실리스따들을 양성한다. 꾸르실리스따들은 이후에도 지도자교육 등을 받으며 전체가 일을 나누어 한다. 꾸르실료는 이렇게 하여 구성원 전원이 자기 자존과 역할을 자각하며, 구성원들 간의 형제애를 키우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평신도의 자각과 능력을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 크게 성공했다. 대구에는 1969년 서울의 지원으로 제1차 꾸르실료교육이 이루어졌다.

세계 첫 꾸르실료는 1949년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실시되었다. 스페인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했다. 그 무렵에 스페인 청년들은 남미의 젊은이들과 함께 산티아고로 순례행진을 하려고 계획했지만 1936년 내전 때문에 순례가 불가능했다. 젊은이들은 내전이 끝나자 다시 순례를 준비하면서 순례를 위한 단기강습회를 열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3박 4일 일정의 순례지도자 꾸르실료로 확정되었다. 마요르카 교구의 에르바스 부주교와 봉사자들은 이를 더욱 정비하여 ‘크리스천 생활의 꾸르실료’로 만들었다. 이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활동의 강화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꾸르실료 운동은 1967년 한국에 전해졌다. 이 무렵 오도넬이라는 미국인 꾸르실리스따가 주한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서울에 있었다. 이때 필리핀에서 꾸르실료 운동을 하던 카이모라는 사람이 서울에 왔다가 둘이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유수철 신부, 김정수 신부와 같이 준비하여 서울 성수동본당에서 영어로 제1차 꾸르실료를 실시했다. 꾸르실료는 2년 후 대구대교구에 전수되었다. 1969년 허연구 신부는 이에 관심을 갖고, 서울의 이해남에게 서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고, 황기석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과 함께 꾸르실료 수강생을 모집했다. 이름도 낯선 운동이라 수강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 제1차 꾸르실료에는 서울과 부산으로부터 임원을 지원받았다. 이어 봉사자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설치했는데, 이때 임학권 등 10명이 수료했다. 이들은 서울임원들과 2차 꾸르실료에 봉사했다. 꾸르실료는 점점 교회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7차 꾸르실료에는 서정길 대주교와 이효상 국회의장이 참여했다. 1971년 임학권 등 6명은 꾸르실료 임원 역할을 맡아 안동교구에 1차 꾸르실료를 실시, 뿌리내리도록 했다. 임학권은 대구대교구 꾸르실료의 초대와 3대 주간을 맡았다.

한편 대구대교구에서는 사목협의회를 1980년대부터 고려했으나, 여러 준비단계를 거쳐 1991년에서야 열게 되었다. 임학권은 사목협의회가 시작될 때도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대구 가톨릭액션단체협의회의 초대회장을 했고,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 초대회장으로 대구대교구의 순교자 현양사업에 초석을 놓기도 했다. 이밖에도 계산주교좌성당 평협회장, 새얼학교 교장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했던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에서는 성체분배자로 부름을 받았다. 임학권은 2001년 퇴직하면서 병원을 교구에 기증해 지역 노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소로 사용토록 했다. 병원사택도 기증하여 매 맞는 여성들의 쉼터로 활용토록 했다. 그는 자신의 시신까지 경북대 병원에 기증했다. 그리고 3사관학교 내 바실리오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임학권의 그리움과 감사

임학권은 늘 교회 일에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하느님은 자신이 버린 만큼 주시는지도 모른다. 그는 입을 열면 늘 하느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는 아픔조차도 하느님께 감사로 올리는 사람이었다. 6.25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평양에 입성했을 때 잠시 가족들을 상봉했다. 그러나 부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를 하게 되었다. 누이동생이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통일이 될 것으로 믿어져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늘, “내가 죽으면 뼛가루를 서해 바다에 뿌려줘. 물결 따라 떠내려가서 고향 진남포 앞바다에 갈 수 있겠지.” 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다른 위로를 허락하셨다. 임학권의 부인 강안숙은 때로 그가 있어 임학권이 있다고 평을 받는 이였다. 강안숙은 믿음이 진실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평양 서문여고를 나와서 평양 식산은행에 취직했다. 그래서 임학권과는 직장 동료로 친분을 쌓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강안숙 집안은 해방 직후에 남하했다. 그의 부친이 서울 적산관리처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고, 장면 박사와도 인척간이어서 집안이 전부 서울로 이사했다. 6.25 전쟁 중에 18육군 병원이 경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학도병에 자원하여 위생병이 된 임학권은 미사를 참례하러 경주성당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강안숙을 만났다. 강안숙은 경주성당 경내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서도 혼담은 급속히 진행되어 경주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렸다. 그들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고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녀들을 키웠다. 병원을 교구에 기증할 때였다. 본래 병원건물은 임학권 명의로 되어 있고, 땅은 아들 명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퇴직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병원과 사택을 교구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했다. 그렇게 사는 집안이었다.

임학권은 늘 북한에 있는 고향과 교회를 생각해 왔다. 임학권 바실리오의 간절한 소망은 북한 땅에서도 그리스도를 받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 짙은 그리움은 북한 지역 복음화를 위한 자신의 소망과도 연계되었다. 그가 걸어온 자기 비움과 봉사의 삶에서 미진한 이 부분을 채워줄 책임은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 되었다. (도움 : 서준홍 신부, 임효덕, 임영희)

[월간빛, 2014년 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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