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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1: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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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22 ㅣ No.406

한일강제병합 100년 -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 (상) 제1편 독립운동


정교분리 원칙 속 은밀히 독립운동 참여

 

 

한국사 연구에서 교회사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교회 차원의 민족 운동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 없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 무단정치로 인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태도는 '정교분리원칙''정치 불간섭주의'여서 천주교 신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주요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를 기획, 2회에 걸쳐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연재한다.

 

 

105인 사건

 

"천주교 신부들이 겉으로는 조선 독립에 관해 아무 상관도 안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인즉 비밀리에 서로 라틴어로 연락하며 또 신자를 시켜 비밀리에 상해와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거기에는 또한 프랑스 신부들도 있다. 신부들이 이러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교우들이 독립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책망하고 책벌하며 교회에서 내쫓기도 하나 내막으로는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신부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바란다."(1920년 12 월9일자 의주본당 주임 서병익 신부 경찰 고발장 내용 중에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천주교 신자가 관련된 첫 독립운동은 1911년 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애국계몽단체 신민회 간부들과 그리스도교 요인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가 평안도 지역에서 배일(排日)사상이 강한 인물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허위 날조해 조작한 사건으로 구속자 700여 명 가운데 105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1913년 6명만이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이때 석방자 가운데 이기당(안토니오)과 안성제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기당은 석방되자마자 서간도로 망명해 광제회와 병학교를 설립해 본격 무장항일운동을 시도했다.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생들이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들 신학생들은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가해 교내 운동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거리 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3ㆍ1 운동

 

우리 민족의 잠재적 항일 정신은 3ㆍ1운동으로 일시에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은 3ㆍ1운동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1919년 3월 5일 저녁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또 3월 8일 대구 시내에서 열릴 만세 행렬에 참가하기로 하고 교사 홍순일의 지시에 따라 신학생 김구정(이냐시오)이 '독립선언서' 등사를, 서정도가 태극기 제작을 분담해 준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에 발각돼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1919년 3월 11일 신학생 주도로 만세운동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이날 저녁 교외로 뛰어나가 군중 시위에 가담했다. 용산 신학생들은 또 3월 28일 밤에도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삼호정 언덕과 새남터 노들 언덕에서 벌어진 횃불만세운동에 합류했다.

 

평신도들도 각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미리 천도교와 개신교 등 각 종단과 연합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3월 18일에는 강화에서 천주교 신자인 김용순과 조기신, 신태윤 등이 주도해 군중 1만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 3월 27일 경기도 고양에선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해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면 직원은 태연히 사무를 집행하고 있으니 조선인으로서 부당하다. 속히 사무를 파하고 우리에게 가담하라"는 독려문을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만세 시위에 참가한 구산공소 청년 5~6명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들 중 남 마태오 회장 아들은 독립 선언 벽보를 붙인 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받기도 했다.

 

- 1933년 대구교구에 파견된 최초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10명의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드망즈 주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에서 사목한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달리 신자들과 주민들에게 배일사상과 독립운동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들 중 도슨(앞줄 오른쪽 두번째) 라이언(앞줄 왼쪽 첫번째) 스위니(뒷줄 왼쪽 두번째)신부는 일제로 부터 간첩 혐의로 체포 구금돼 옥고를 치뤘다.

 

아울러 3월 27일에는 경기도 광주군 망월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김교영이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29일에는 용인군 내사면 남속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한영규와 김운식이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3일 수원에서는 천주교 신자 이순모가 선두에 서서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와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 집기류를 부수고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격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이순모와 김선문, 안경덕, 김여춘, 김광옥, 최주팔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됐다.

 

4월 7일 황해도 신천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천주교 신자 김경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의무이니 한국인으로서 한국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국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구에서도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과 대구본당 신자 김찬수가 신자 2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됐고, 전라도 나바위본당 신자 박노익(아우구스티노)은 태극기를 제작해 계명학교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본측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5월말까지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후 구금된 천주교 신자는 모두 53명이었다. 이 숫자는 불교도 95명, 유교도 55명과 비교해 볼 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된 후 실제로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 처벌이 두려워 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며 이 숫자 보다 훨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3ㆍ1 운동을 지지하는 프랑스 선교사도 있었다. 당시 안성본당 주임 공베르 신부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지 묻자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일본인을 죽이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금 맨주먹이니 일본인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당신들은 수백 명이 죽을 것이오.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독립을 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고, 못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는 건물도 아예 부수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또 만세운동을 질서있게 전개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인 김중묵을 지휘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베르 신부는 일본군에 쫓긴 만세 군중이 안성성당으로 몰려오자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국제 분쟁의 위협을 들어 성당에 피신한 한국인들을 보호했다.

 

- 3.1만세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승화됐다. 특히 간도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들만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 의민단을 조직해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사진은 의민단원으로 활동을 많이한 간도 대령동 성당에 1929년 9월17일 연길지목구장 테오도르 브레허 신부가 사목방문해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모습.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

 

3ㆍ1 만세운동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으로 승화됐다.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도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황해도 은율본당 주임 윤예원(토마스) 신부는 성직 박탈이라는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신자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고,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프랑스 선교사로서 안중근(토마스)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또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상해 임정파리위원부에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상해 임정에 대한 천주교측의 일련의 협조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다. 일부 한국인 신부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 독립운동은 간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3ㆍ1운동 이후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펼쳤다. 명월구성당과 대장 방우룡의 집을 군사령부로 쓴 의민단은 무장병력 300명, 군총 400정, 권총 50정 정도로 무장,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일제는 간도 지역 성당을 한국인 독립운동 근거지로 인식하고 종교 탄압에 주력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금당촌과 동포대, 현성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교우촌 대교동에선 신자들이 학살되고 부녀자들이 폭행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 신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시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민족 활동에 대해 독립운동과 신앙 가운데 어느 것도 저버리지 않고 '국적없는 식민주의적 신앙관'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현실초월주의적 신앙관'을 탈피하고자 했던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들'이라고 평가했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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