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나의 수도생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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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72

나의 수도생활관

 

 

1. 수도자는 누구인가?


1.1. 하느님을 찾음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하느님을 찾는 맛으로 살아가는 자가 수도자이다. 과연 여러분은 무슨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가? 토마스 머튼은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는 모두가 수도자라 했다. 수도원(monastery)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집’이라 부르며, 여기서 사는 수도자(monk)를 ‘하느님의 사람’이라 부른다. 이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하루 일곱 차례 공동으로 ‘하느님의 일(Opus Dei)’인 기도를 바친다. 그러니 하느님은 수도자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수도자는 ‘무엇을 하기 위해’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 구체적 업적의 성취나 자기실현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충만한 존재로 사는 게 그의 궁극 목표다.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이다. 지상의 보이는 그 무엇을 찾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죽을 때 까지 하느님을 찾는 내적 여정 중의 순례자들이다. 언젠가 써놓은 자작 애송시, ‘메꽃’을 나눈다. 7-8월에 버려진 밭둑에 가꾸지 않아도 줄기차게 가지들 뻗어가며 꽃들 피어내는 나팔꽃 비슷한 야생화로 흡사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 가지 저 가지 /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 하늘로 가는 여정의 /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 하늘로 / 오르는 메꽃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사라지면 수도생활은 물론 영성생활은 생기를 잃는다. 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눈이 열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다. 여기서 갈망, 깨어있음, 기도, 개안(開眼), 마음의 순수, 만남이 일련의 연쇄 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노력만 강조하다 보면 우리의 삶은 고단해진다. 늘 ‘하느님을 찾는 사람’과 더불어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의식할 때 겸손할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영성이 된다. 사실 성경은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 써놓고 크게 위로를 받은 ‘고요한 호수가 되어’ 자작 애송시를 나눈다.

 

“나무에게 / 하늘은

가도 가도 / 멀기만 하다.

아예 /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역설적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이다. 이미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주셨기에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큰 힘이요 위안이다.

 

1.2. 공동생활

 

가톨릭교회의 수도생활은 공동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자에겐 공동생활 자체가 힘든 수행이다. 힘들어도 공동생활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수도자가 된다. 애당초 공동체적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 못 된 게 중 되고, 중 못 된 게 수좌 되고, 수좌 못 된 게 부처 된다.’라는 불가에 속담이 아주 시사적이다. 홀로의 은수생활은 함께의 공동생활 안에서가 바람직하다. 사실 수도공동체는 획일적이지 않고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를 충분히 배려하여 다양성의 일치에 주력한다.

 

수도공동체의 일원인 수도자는 세 측면의 신원을 지닌다.

 

첫째, 수도원은 영적 전장(戰場)이요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전사(戰士)’다. 전통적으로 수도생활은 영적전투라 불리어 왔다. 이기적 자기와의 싸움, 보이지 않는 악과의 싸움이다. 끊임없이 깨어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세상 악과, 또 이기적 나와 싸워가야 하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인 그리스도의 전사가 수도자이다. 그러니 수도원은 영적 전장이 되고 동료 수도자는 전우(戰友)가 되어 전우애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은 곳에 마귀가 들끓는다는 말이 있듯이 악의 세력과 이기적 나와의 치열한 영적 전쟁터가 수도원이기도 하다. 사실 옛 사막의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기 위해 자진하여 영적전장인 사막을 찾았다.

 

둘째, 수도원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원(學院)이요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학인(學人)’이다. 평생 현역의 ‘그리스도의 전사(戰士)’이듯이, 죽어야 졸업인 평생 배워야 하는 평생 학인이 수도자이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RB머리 45-46). 마태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 역시 주님이자 스승인 당신께 배워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학인인 수도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수행이 들음과 순종과 겸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침묵 중에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학원인 수도원에서 동료 학우(學友)들과 함께 평생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 살아야 하는 평생학인(平生學人)이 수도자이다.

 

셋째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가정(家庭)이요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형제(兄弟)’가 된다. 동료 수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맏형으로 모신 수도가정의 형제들이 되며 저절로 전우애(戰友愛)와 더불어 형제애(兄弟愛)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 72장에서 다음 같은 이상적인 형제공동체를 염원하고 있다.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 대부분 인용한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RB 72,3-12).

 

그러니 수도공동체내의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전사(戰士), 그리스도의 학인(學人), 그리스도의 형제(兄弟)라는 세 측면의 신원을 지닌다. 이 세 신원의 창조적, 긍정적 긴장 중에 깨어있는 수행자로서의 수도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선적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형제(兄弟)’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형제 안에 포섭되는 전사요 학인이다.

 

 

2. 수도자의 영성


2.1. 수행의 동기와 목표

 

수도생활(monasticism)은 수행생활(asceticism)이고 수도자는 수행자(修行者)이다. 수도자의 하루 삶 전체가 수행으로, 먹고 자고 입고 말하고.... 수행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저절로 수행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배워 습관이 될 때 덕이 되고, 비로소 수행자가 된다.

 

수행의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본능적으로 수행을 통해 표현을 찾는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 재물의 포기가 가난이요, 결혼의 포기가 독신이요, 자기 뜻의 포기가 순명이다. 수도자 쪽에서 보면 포기이고 하느님 쪽에서 보면 봉헌이다. 그러니 기도, 노동, 성독, 겸손... 모든 수행 덕목들이 사랑의 자발적 표현들이고, 자발적 사랑에서 우러난 수행생활을 통한 마음의 순결이요 내적 자유의 삶이다. 마지못해 또는 의무로서 살기보다는 자발적 사랑으로 기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래야 수행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포기의 수행들이고 이런 수행은 자유를 목표로 하나 자유 자체가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수도자의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을 목표로 한다. 사실 예수님처럼 모두의 종이 되어 주님과 이웃을 겸손히 섬길 때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다. 하여 저는 즐겨 교회와 수도원을 서비스업이라 칭하고 사제나 수도자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서비스업의 3대 요소, 즉 첫째 사람이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야 하고, 셋째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2.2. 베네딕도회의 영성

 

2.2.1. 하느님만을 찾는 영성

 

이미 수도자의 신원에서 간략히 밝혔다. 수도성소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열정으로 식별된다. 수도자의 유일한 일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요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뿐이다. 하루 이틀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찾는 항구한 내적 여정 중에 있는 수도자들이다. 이들의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찾는 방편들이다. 수행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관상(觀想)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 한 번으로 끝나는 만남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고 만나는 삶의 여정이다. 태양을 향해 아무리 달려가도 태양은 늘 거기에 있듯, 하느님은 늘 달려가도 거기에 계신 분 같으나 이미 태양빛과 태양열로 우리를 만나는 태양처럼 늘 우리를 당신 빛과 생명으로 만나신다.

 

누군가 수도원을 찾아 노(老) 수사님에게 물었다.

 

“수사님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노 수사님의 다음 대답 말씀이 지극히 평범하나 의미심장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지름길의 첩경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아마 사람 수만큼 하느님을 찾는 길도 다 다를 것이다. 단 하나, 좌절하지 않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비단 수도자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여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의 절망이 큰 죄라고 한다. 백절불굴, 넘어지면 하느님 찾는 열정으로 곧장 일어나야 영적 탄력도, 영적 감수성도 손상되지 않는다.

 

2.2.2.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수도자는 진공상태에서 막연히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성경과 규칙을 지도(地圖)로 하여 성령의 인도 하에 하느님을 찾는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이 잡혀야 존재하는 공동체는 흡사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형성하여 태양 주위를 도는 태양계 별들의 공동체와도 같다. 태양계 같은 공동체에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태양 같은 중심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수도 공동체이다. 서로 좋아서 사는 게 아니라 중심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기에 공존공생의 한 몸의 유기적 공동체이다. 바라보는 중심인 그리스도가 없다면 공동체는 곧 공중 분해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는 물론 개인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이 된다. 매일의 공동전례인 미사와 시간경의 기도는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확인하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이 함을 목표로 한다.

 

2.2.3.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3대 서약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다음 3대 서약, 정주(stabilitas),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 순명(oboedientia)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복음적 권고의 청빈, 정결, 순명의 서약이 12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립되기 이전 6세기경부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이 세 서약을 해왔다.

 

첫째, 정주(定住) 서약은 늘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산이나 나무에 견주는 게 좋겠다. 뿌리 없이 떠도는 불안과 두려움의 삶이 아니라 평생을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공동체 안에 나무처럼, 산처럼 제자리를 잡아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안정과 평화의 삶이다. 현대인의 영혼의 병은 고요히 머물지 못하고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정주의 뿌리 내림이 약해 왠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말해야 하는 현대인들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생각했던 이상대로 산다면 수도자의 정주를 위해 수도원은 원내에 일터를 마련하여 각자에게 소임을 부여함으로 공동체 성원들은 원내에 가정집 같은 본원, 기도를 위한 성당, 일하기 위한 농토나 작업장이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봉쇄 관상 분위기의 형성과 더불어 자급자족의 수도가정 공동체가 된다. 하느님만을 찾는 단순 소박한 공동생활 자체가 복음 선포의 선교가 된다. 파견(mission)으로서의 선교보다는 초대(invitation)로서의 선교며,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기 때문에 수도원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영혼들의 쉼터’가 되고 환대(hospitality) 영성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둘째 서약은 수도승다운 생활의 서약이다. 끊임없는 회개와 내적 쇄신에 전념하는 삶이요, 모든 수행 덕목들을 충실히 준수하는 삶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사람도 끊임없는 수행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 환경이 그 환경이 되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나 사람이기 보다는 마음이다. 마음이 새로우면 나날이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수도생활이다. 마음이 깨어 새롭게 살아나야 몸의 건강도 뒤 따른다. 하여 필자는 정주를 산에, 수도승다운 생활을 맑게 흐르는 강에 견주길 좋아한다. 밖으로는 산 같은 정주에, 안으로는 강 같이 흐르는 내적 여정의 수도승다운 생활이다.

 

“밖으로는 산 / 안으로는 강 / 산속의 강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강(江)이듯이,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수도승다운 생활’의 수행생활이 없으면 수도자의 정주는 안주의 타성에 젖은 생활로 전락하기 십중팔구다.

 

셋째 서약은 순명이다. 이 수행 역시 사랑의 자발적 표현이다. 의무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순명이다. 진실한 순명은 성숙의 잣대이며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순명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간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명하셨다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고백했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고 장상에게 순명하고 규칙에 순명하는 수직적 차원의 순명과 더불어 형제들 상호 간의 수평적 순명으로 나누기도 한다.

 

순명 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공동체 형성은 불가능하다. 가난이나 정결보다 더 힘든 수행이 자기 뜻을 접는 순명의 수행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한다(히브 5,8). 어찌 보면 우리 삶의 여정은 순명을 배워가는 삶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산다는 것은 순명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여 죽음은 마지막 최후의 순명이자 봉헌이라 일컫기도 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명을 잘 해야 마지막 순명인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하여 필자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세 수도서약의 영성을 유행을 타지 않는 보편적 영성이라 말하고 싶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검정 양복처럼, 1500여 년 동안 유행을 타지 않고 계속 되어 온 세 수도서약의 영성이다. 가정공동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부부 신자들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처럼 하느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가정 공동체 안에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간다.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회개와 내적쇄신으로 내용상으로는 이미 수도승다운 생활의 서약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 서로 사랑하고 순명하며 살아가기에 화목한 가정생활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세 서약은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건강한 그리스도교 가정공동체를 위한 보편적이자 필수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3. 하루 일과


3.1. 미사

 

가톨릭 수도자들의 보이는 가시적 중심은 미사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똑 같은 날은 없다. 매일이 유일한 새 하늘, 새 땅의 새 날이다.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매일미사가 하루의 내외적 질서를 잡아 준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미사의 아름다움이다. 하루의 삶은 미사로 수렴되고, 미사는 하루의 삶으로 확산된다. 부단한 하느님에로의 수렴(收斂)과 세상으로의 확산(擴散)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하다. 마침 저의 자작시 ‘온 세상을 제대로 삼아’라는 글을 나눈다. 언젠가 아침 떠오른 둥근 해가 마치 성체처럼 느껴졌고 주님께서 불암산 가슴을 활짝 열고 미사 드리는 듯 했다.

 

“임께서도 /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산(山) 가슴 / 활짝 열고 / 온 세상 제대(祭臺)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 들어 올리신 / 찬란한 태양 성체(聖體)!

‘하느님의 어린양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 태양 성체 모시고 /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미사는 가톨릭신자들에겐 영적 삶에 종합영양제와도 같다. 성경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미사가, 미사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이 필수이다.

 

3.2. 공공시편기도

 

많은 부분을 노래로 바치는 것이 좋다. 읽는 것보다 노래로 하면 두 배의 기도 효과가 있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3천 년간 검증된 기도 교과서가 성경의 시편이다. 모두가 각자의 마음과 감정을 고스란히 시편에 담아 시편을 자신의 기도로 바칠 때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성경에 기초를 둔 올바른 영성이 형성된다. 필자가 제일 사랑하고 좋아하는 기도가 수도공동체가 노래로 바치는 시편전례기도다. 영혼에 찬미와 감사의 양 날개를 달고 하느님의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이다. 좌우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에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다. 지난 4월 말 쯤 배꽃 만발했던 여기 요셉수도원의 배 밭을 보며 쓴, ‘평생 한번 만이라도’라는 글을 나눈다.

 

“아 / 이건 하늘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온 땅을 / 새하얗게 덮은 / 배꽃들 / 순결한 사랑

평생 / 한 번만이라도 / 하늘 임 향해 / 이런 사랑

활짝 꽃 피어 본적 있다면 / 두말할 것 없이 / 그 인생 성공이다.”

 

온 땅을 하얗게 덮은 배꽃들을 표현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마침 인터넷에 올렸던 위 글에 대한 다음 어느 독자의 댓글에서 위로와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 “지난 월요일 식물원에 나들이 갔을 때 가지마다 하얀 배꽃이 마음이 아렸는데... 임을 항한 사랑의 고백이었군요. 수사님은 평생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꽃으로 피어내시는 봉헌의 삶을 사시는데요.” 그렇다. 하느님 향한 사랑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시간이 여기 수도자들이 시편 성무일도를 바치는 시간이다. 시편을 노래할 때의 행복에 가득 찬 수도자들의 얼굴들이 마치 활짝 피어난 꽃들같이도 보인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의 시편들을 노래 기도로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시(詩)와 노래(歌)와 고백(告白)과 기도(祈禱)가 하나 되어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관상기도시간이 공동시편기도 시간이다. 알게 모르게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깊게 하며 더불어 우리의 하느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을 더욱 성장하게 한다. 이와 더불어 나쁜 기억으로 인한 마음의 내적 상처는 점차 치유되어 서서히 부정적 삶에서 긍정적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또한 잠재의식 안에 내재해 있던 악성(惡性)이나 마성(魔性)도 서서히 정화(淨化)되고 성화(聖化)되어 전 존재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한 번 고백으로 끝나는 시편공동기도가 아니라 평생 꾸준히 규칙적으로 바쳐야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 기도생활에 특별한 비법이나 요령, 지름길은 없다. 좋든 싫든 감정 따라 가지 말고 의지적으로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 바치는 것을 습관화 하여 제2천성으로 함이 좋다. 영성생활은 습관이요, 결국 습관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기도를 잘하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서부터 기도가 잘되든 잘 안 되든 개의치 말고 실천하면 된다.

 

3.3. 성독(聖讀 : Lectio Divina) 수행 및 그의 확장

 

요즘 많이 보급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성경독서)는 사막 수도자들 이후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어온 성경독서법이다. 특별한 독서법이라기보다는 열심한 신자라면 이미 알게 모르게 렉시오 디비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하는 독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세로, 단순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하는 성경독서 수행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깨어 눈으로 보고 입술로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듣고 코로 말씀의 향기를 맡으며 온 몸으로 느끼며 읽는, 오관을 총 동원한 전인적 통합적 독서이다. 영적독서와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말 그대로 영혼이 ‘살기위해서’, 기도 가득한 고요한 분위기에서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체화(體化)하기 위한 성경독서법이다. 하여 영적독서와 구별하여 ‘Lectio Divina’를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라틴어 발음 그대로 ‘렉시오 디비나’라 부르기도 한다.

 

대개 수도자들의 렉시오 디비나는 12세기 카르투시안 수도회 원장 귀고 2세가 마련한, 읽으며 듣고(listening), 묵상(meditation)하고, 기도(prayer)하고, 관상(contemplation)하는 4단계 방법을 따른다. 사실 15세기 이전까지는 묵상, 기도, 관상 모두가 성경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성경을 떠난 묵상이나 기도, 관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세 종류의 성경을, 즉 신구약 성경, 내 삶의 성경, 자연 성경을 예로 들면서, 렉시오 디비나는 비단 신,구약 성경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자세는 내 삶의 성경은 물론 자연 성경에까지 확대되어 전 삶이 관상적이 된다고 강조한다. 위에서 인용된 저의 시들은 자연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이다.

 

3.4. 묵상 수행

 

매일 수도자들이 여러 차례 바치는 성무일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끊임없는 기도요 늘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이다. 역시 수도자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목표로 매일 두 차례 약 30분간 집중적으로 짧은 성구를 되 뇌이며 의식적으로 듣는 묵상 수행을 한다. 요즘 가톨릭교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향심기도, 비움 기도, 기타 명상기도 등 모두가 원리는 동일하며 유구한 수도승 전통 안에서 검증된 인류의 보편적 유산과 같은 묵상기도다.

 

필자가 20여 년 간 수행해온 묵상기도 방법을 소개한다. 예전에는 ‘마라나타’ 성구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동방수도승의 전통적 기도인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네 단락으로 나눠 호흡에 맞추어 약 30분씩, 오전, 오후 2회 바친다.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준다. 정해진 수행 시간뿐 아니라 여유 시간에, 산책할 때, 잠자기 전, 성체조배 때, 미사 전, 마음과 몸을 추스르기에 참 좋은 기도이다. 이런 짧은 기도의 끊임없는 반복 수행이 늘 주님의 현존 안에 살게 하며,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주며 내적 상처를 치유해주고 분심을 없애 준다. 마침내 성무일도, 미사. 성독, 노동... 모든 수행을 집중하여 분심 없이,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할 수 있게 되고 말 그대로의 관상적 삶이 실현된다.

 

3.5. 기도, 일, 성독(聖讀 : Lectio Divina)의 균형과 조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회 수도 가정의 가훈이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하늘 향한 기도가 이상이라면 땅에서의 일은 현실이다. 기도와 일의 균형과 조화는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 하는 잣대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은 기도와 일, 그리고 성독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혹자는 기도에 있어서 신비가가, 일에 있어서 전문가가, 성독에 있어서 학자가 되면 이상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라 한다.

 

몸의 균형과 조화가 지켜져야 건강하듯 기도와 일과 성독의 균형이 갖춰질 때 건강한 영적 삶이다.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경우, 수도원 같은 조화와 균형의 일과는 아니더라도 부수적인 것들은 가능한 한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기도와 일, 성독이 어느 정도의 균형을 갖추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부수적인 것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이 낭비되며 삶의 조화와 균형이 깨지고 있는가.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기도와 일, 성독에 투자되는가? 기도와 일, 성독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되지는 않는다. 성독은 기도에 자양분이 되고, 기도는 일에 스며들어 일 또한 기도가 되게 한다. 세 요소가 서로 내적으로 순환관계를 이루며 상호침투하면서 마침내 삶이 기도가 되게 한다.

 

3.6. 일과표의 중요성

 

하루 이틀, 며칠은 되는 대로 살 수 있어도 기나 긴 세월을 무질서하게 지내다간 얼마 못가 몸과 마음은 망가진다. 일과표의 중요성은 수도 전통의 지혜이다. 평생 한 곳에서 단조로운 반복의 정주(定住)의 삶을 건강한 영육으로 늘 새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일과표 덕분이다. 수도생활의 평범한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지혜가 일과표의 준수이다. 밖으로는 언제나 그 자리의 산 같은 정주의 삶이 타성에 젖은 안주의 삶이 되지 않는 것은, 매일 일과표에 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이 이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과표가 몸에 배면서 점차 안팎으로 자유로워진다.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외적 안정과 내적 안정은 상응관계에 있다. 외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갖춘 일과표의 준수는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이런 기도와 일, 성독을 몸과 마음에 배게 하여 제2의 천성이 되게 한다.

 

일과표는 그대로 삶의 궤도를 뜻한다. 일과표라는 삶의 궤도에 따라 하루를, 평생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삶, 감정 따라, 기분 따라 살지 않고, 삶의 궤도에 따라 살아갈 때 내적 고요와 안정에 날로 깊어지는 내적 여정의 삶이다. 비록 세상 속에서의 삶에 수도원과 같은 균형 잡힌 일과표는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의 질서 잡힌 하루의 일과표는 영성생활에 필수이다.

 

3.7. 마무리

 

몇 년 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임에서 뚜렷이 부각된 문제는 셋으로 요약되었다. 첫째는 수행정신의 이완, 둘째는 수도성소의 감소, 셋째는 경제적 자립이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셋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수도자 본연의 수행에 충실할 때 성소문제와 경제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 수도 전통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수행자로서의 본연에 충실함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다. 수도생활의 타락은 언제나 세속화와 부유화로 시작되었고 개혁은 늘 복음적 고독과 가난의 원천으로 돌아감으로 시작되었다.

 

하느님으로 시작해 하느님으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수도자의 하루 일과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단순 소박한 본질적 삶이다. 전혀 환상이나 허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수도생활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단순 평범한 생활이다. 신기하고 별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심심한 맛을 즐기며 충만한 존재를 사는 수도자들이다.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떨어내고 본질적인 하느님 추구에만 몰두하는 수도자의 모습, 마치 단풍잎들 다 떠나보낸 만추의 가을 나목(裸木)같기도 하다. 하여 진정한 수도자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수도자이다. 죽음 있어 환상은 말끔히 걷혀 삶이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는다. 매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한 현재의 오늘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수도자들이다. 마치 어둔 세상 밝히다가 떠오르는 동녘 태양 빛에 사라져 가는 별들 같은 존재가 수도자들이다. 얼마전에 써 놓은 글로 강의를 끝맺는다.

 

“밤새 / 영롱하게 반짝이며 / 어둔 세상 환히 밝히다가

‘주님 / 제 사명을 다했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떠오르는 / 태양빛 속으로 /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별들”

 

[코이노니아 제33집, 2008년 여름, 이수철 프란치스코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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