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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순교자의 딸 유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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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25 ㅣ No.931

[특집 - 순교자의 딸 유섬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순교자의 딸 유섬이> 공연


순교자의 딸 ‘유섬이’ 유배길을 생각하며 (1)

 

 

작년 11월 즈음 교구장 주교님의 배려와 격려 속에서 <순교자의 딸 유섬이> 성극 공연 준비가 시작되었다. 몇 차례 전주 초남이 성지와 전동성당을 방문순례하면서 어린 섬이가 힘겹게 걸었을 유배길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특히 유배를 앞두고 전주감영에서 엄마와 어린 세 자녀가 생이별하는 장면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 저미어왔다. 나도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었기에 애절한 마음이 더했는지 모르겠다. 사파동본당의 몇 부부와 그 유배길 순례를 시작하면서 유섬이의 삶과 영성의 향기는 내 신앙 속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항검의 순교와 섬이의 유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유항검은 호남에서 제일 먼저 체포된다. 동생 유관검, 홍낙민, 이단원과 함께 추진한 대박청원의 계획이 드러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유항검은 대역부도죄가 적용되어 능지처참되었고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모두 처형되거나 관노나 관비로 유배되었다. 이때 9살이었던 유섬이는 대명률에 따라 죽이지 못하고 거제부 관비로 유배했다.

 

유섬이는 10월 13일(음) 즈음에 거제부로 유배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유배 갈 때의 모든 경비는 본인이 부담하게 하였다. 유섬이는 아버지가 능지처참되었고, 온 가족이 순교를 당하고 가산이 몰수되고 파가저택 되었음으로 틀림없이 걸어서 귀양길에 올랐을 것이다. 9살 난 유섬이는 어떤 길을 따라 거제까지 왔을까? 또 며칠을 걸어서 거제부에 도착했을까? 조선의 팔도에는 교통(馬)과 통신을 담당했던 역참제도가 있었다. 지방관이 파견될 때는 팔도에 있는 역참을 이용하였다. 유섬이의 유배 길도 역참을 따라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섬이가 걸어갔던 유배길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서부경남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통영별로’라고 불렀다. 유섬이가 걸었을 유배길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출발하는 통영별로이었을 것이다. 통영별로는 한양에서 전라남도 해남으로 이르는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전주 삼례역(완주군)에서 분기하며 반석역(전주시 완산구) ~ 오원역(임실군 관촌면) ~ 오수역(임실 오수면) ~ 동도역(남원시 도통동) ~ 응령역(남원시 이백면) ~ 인월역(남원시 인월면) ~ 지리산 팔량치를 거쳐 경남 함양으로 접어든다.

 

함양에서 섬이는 사근역을 출발하여-정곡역(산청읍 정곡리) - 신안역(신안면 신안리) - 평거역(진주시 평거동) - 소촌역(문산읍 문산성당) - 부다역(일반성면 운천리) - 배둔역(고성군 회화면) - 송도역(고성군 송학리 고성여자중학교) - 춘원역(광도면 황리) - 구허역(광도면 노산리) - 견내량 도선장(거제대교) - 오양역(거제시 사등면)을 지나 절골과 대봉산 옥산재를 넘어가는 유배길을 걸어서 ? 거제부 관아(거제면 동상리)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4면, 최종록 대건 안드레아(마산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시복시성분과)]

 

 

순교자의 딸 ‘유섬이’ 유배길을 생각하며 (2)

 

 

유섬이의 유배길은 복음길

 

멀고도 먼 길을 어린 섬이는 압송관(역졸)의 지시에 따라 쉬지 않고 걸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배자들이 하루에 걸은 평균 거리가 약 50리 정도라고 하니 전주감영에서 거제부 관아까지 514리라고 보면 족히 10일은 넘게 걸렸을 것으로 본다. 섬이가 걸어간 유배길에는 험준한 소백산맥이 동서로 가로 놓여 있었다. 9살 난 어린 소녀가 감당해 내기 어려운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섬이는 거제부사 이영철(李永喆) 앞에서 야무지고 단아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거제부사 이영철은 섬이가 양반의 여식이며 아직 나이가 어린 점을 고려하여 읍치 내에서 삯바느질하며 홀로 사는 한 여인을 섬이의 ‘보수주인’으로 맡겨 감시도 하고 의식주를 해결하게 하였다.

 

유섬이가 선종할 당시 거제부사를 지낸 하겸락의 사헌유집 부거제편에는 고결했던 유섬이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13,4세에 믿음에 뜻을 세운 유섬이는 그 뜻을 지키고 순명을 따랐기에 16,7세에 출입구가 없는 흙돌집 속에 들어가 25년을 넘게 살다가 불혹의 나이를 넘겨 세상 밖으로 나온다. 25년간의 흙돌집 속에서의 생활을 나는 상상해보았다. 1863년 계해년 7월 25일 경상감영에서 거제 관비 유섬이의 죽음을 의금부에 보고한다. 유섬이는 죽으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전이 거제부사 하겸락에게 말하기를 “관(棺)을 만들 나무, 염(殮)할 포목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유섬이는 청빈의 삶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순교자의 딸 유섬이는 71세를 백색 순교로 살았던 것이다.

 

그분이 하느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걸어갔던 유배길 곳곳에는 훗날 많은 교우촌들이 생겨나고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특히 1827년 전라도 곡성에서 일어난 정해박해로 많은 피난 교우들이 지리산 팔령을 넘어 함양의 백전면과 병곡면의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고, 이들은 점차 이동하여 서부 경남 일대와 서부 경남 해안 지역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신비하게도 1801년 ‘유섬이’가 걸었던 유배길 안에는 우리 교구의 땅에 복음이 들어오는 길이 함께하고 있었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가톨릭마산 4면, 최종록 대건 안드레아(마산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시복시성분과)]

 

 

유섬이를 알아본 사람들

 

 

지금 교구는 <순교자의 딸 유섬이>로 들끓고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될 줄 정말 몰랐다. 200여 년 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유배된 유섬이의 흔적이 난데없이 나타나 그 감동을 감출 길 없어 그저 신자들에게 알리고 공유하려고 했다.

그런데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처럼 유섬이의 기적이 눈덩이가 커지듯 커져가고 있다. 지난해 시극집 『순교자의 딸 유섬이』를 집필한 강희근 교수도 성령이 임하는 기적이 없고서야 그 일을 매듭지을 수 없었다고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성래 교수가 잠자고 있던 고문서를 찾아 연구논문을 써서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 교수의 논문을 조금 인용해 보면 이렇다. ‘하겸락 선생이 일개 관비에 지나지 않는 유 처녀의 장례에 모든 장례비를 마련하여 주고, 병교(兵校)를 보내 물기 없는 곳, 무너지지 않을 곳에 자리를 잡아 장례를 치르되, 바위가 있는 곳을 골라 묘표를 새기고, 제문을 지어 애도한 것은 무슨 뜻일까? 유 처녀가 비록 관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고결하고 순결한 삶을 모든 사람이 본받고, 그 삶을 영원히 기리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 처녀가 그렇게까지 철저히 동정을 지킨 것은 오라비인 유중철 요한과 올케 이순이 루갈다 동정 부부의 삶을 본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하겸락 선생이라 함은 유섬이가 71세로 세상을 떠날 1863년 당시 거제도호부사를 말한다. 그분이 집필한 <사헌유집> 속에 유섬이의 기록이 있었다니! 하겸락 부사가 지은 ‘영령이시여 / 정결한 옥 같은 자태 / 촌철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긴 제문도 남아 있었다. 그분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유학자였다고 한다. 다만 목민관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에서 일생을 고결하게 살다간 유섬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2014년 봄, 유항검을 비롯한 순교 가족들이 교황청에서 시복이 결정된 때와 같이하여 유섬이는 이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당시 교구장 안명옥 주교와 총대리 배기현 신부는 유섬이를 알아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그 전율이 몇몇 지시받은 신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낯선 유섬이를 교구 전체에 알리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교구장으로 착좌한 후에도 배기현 주교는 ‘거제 송곡마을 유섬이’를 참으로 갸륵하게 여기며 구체적인 단계를 거쳐 신자들에게 알려 나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해 『순교자의 딸 유섬이』가 출간되고 지구별 특강이 네 차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모두는 아니지만, 교구의 많은 신자들도 유섬이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교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유섬이를 알리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성령께서 저희를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순교자의 딸 유섬이> 공연을 기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추진하고 있다. [2017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가톨릭마산 4면, 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거제부사 하겸락이 지은 제문

 

 

이번에는 1863년 유섬이가 사망할 당시 거제부사를 지낸 하겸락의 제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우리가 유섬이를 알리는 공연을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할 수 있도록 불씨를 만들어준 인물이다. 한낱 관비로 유배되어 송곡마을에서 살다간 유섬이의 장례를 부족한 것 없이 치르도록 아전에게 명했고, 제문까지 지어 기렸다.

거제 유처자를 제사 지낸 글

- 거제부사 하겸락

영령이시여
정결한 옥 같은 자태
촌철 같은 마음
일찍이 국옥을 당하여
이 지방에 노예로 와
노부에 이름 올리고
백찬이 되었기에
결혼할 나이가 되어도
행동 단속하며 깊이 고행했네
저 봄 수풀 보면
시절의 경물 기운이 얽히고설켜
깍깍 꿩이 울고
떼 지어 사슴이 달리며
각기 짝을 이루어
새끼 낳아 기르니
나에게 형기 있고
음양을 갖고 태어난 때문이라
정원의 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슬퍼하지 않은 적 없건만
새와 쥐가 한 보금자리에 살아
사물의 병폐 만들고
봉황과 솔개가 무리 지어
또 그 질서 어그러뜨리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
선조에게 의로운 뜻 바치는 게 낫지 않으랴
나의 서릿발 같은 칼날 가니
누가 감히 어긋난 마음으로 보랴
문을 에워싼 발광하던 자들
혀를 내두르며 숨 죽였네
어둑어둑한 작은 집에
벌어진 틈새 하나로
햇빛이 뚫고 들어와
내 마음 비추면
바늘 잡고 밝음 향해
밤낮 쉬지 않더니
귀밑머리 반백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렸네
두 눈썹에 쓸쓸함 맺히고
백발이 온통 머리를 뒤덮더니
옥여의 이가 흔들리고
사선의 몸이 말라
고희의 나이에
초연히 세상을 떠났어라
뛰어나고 특별한 정절
청사에 보기 드물기에
옛날 내가 고을에 부임하여
대략 기리고 가엽게 여겨
상여 갖춰 정성스레 묻고
바위 다듬어 묘표 새겨
온 고을 사람들 이목에 잘 보이게 하고
무궁히 밝게 드러내 보였네
다만 지금 뒤이어
추모하는 감회 더 하여
제물을 갖추어 보내고
제문을 바쳐 어둡지 않으리니
부디 위에서 굽어보소서. [2017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4면, 교구평신도사도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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