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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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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71

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1)

 

 

우리는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이라 불러왔습니다. 이것은 서유럽에서 로마가 몰락한 후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이 일어서던 당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무질서했던 시기에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들이 종교에 초점을 맞춘 문화의 어떤 통일성을 지켜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도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서가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할 근거가 있겠는지요? 거의 세속화된, 도덕적으로 혼란스럽고 각양각색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유럽 대륙에서 이 거룩한 규칙서가 아직도 공동의 삶을 위한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서는 단지 고고학적 가치만 지닌 옛 문헌이 아니라 거기에 삶의 뿌리를 둔 수많은 공동체들 안에서 마치 성경 말씀처럼 계속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수도승들과 수녀들의 공동생활을 위해 규칙서가 제시하는 내용들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서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본 구조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은 베네딕도회 봉헌자로 살고자 하는 놀라운 수의 사람들과 또 정기적으로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비전을 새롭게 하는 이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회 워스 수도원(Worth Abbey)의 생활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시리즈는 영국에서 예상을 넘은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몇 달 동안 수도원 안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던 다섯 남자는 공동체의 특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베네딕도 공동체의 이러한 특성들을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는지 질문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보존되어야 하는 문화가 있다면, 규칙서의 어떤 부분들이 우리가 지키고 성장시켜야 할 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지적하고 있는지요? 좀 달리 표현해서, 규칙서에서 찾을 수 있는 정치적 미덕들은 무엇이며, 특별히 이러한 미덕들을 현재 유럽대륙의 지정학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읽어낼 수 있겠는지요? 이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성 베네딕도를 변화무쌍하고 문제 많은 우리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문화 주류의 어떤 부분에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하는지 지적해 주면서 현대 유럽의 위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주제를 규칙서 안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시간의 의미와 그 용도(the use and the meaning of time), 둘째 순종(obedience), 셋째 참여(participation)입니다.

 

 

시간의 의미와 사용

 

우선, 시간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 자세히 명시된 하루 일과는 노동과 공부와 기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하나의 율동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세기 후 아빌라의 데레사 역시 그랬지만,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이 자신들의 노동이 아닌 그 어떤 것에 의지하는 것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이가 일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동이 전부는 아닙니다. 수도원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곳이며 그래서 성찰을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수도원은 공동생활의 모든 정신과 방향이 수도생활의 가장 중심에 있는 중대한 일, 곧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로 계속 돌아서야 하는 장소입니다.

 

노동은 중요하고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규칙서 48장에 나오듯 수도원의 모든 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장상은 여러 가지 조건과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각 사람에게 맞는 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수도원의 모든 이가 다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계를 위해 없어선 안 될 기본적인 일만큼 다양한 기술과 솜씨 또한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추수하는 것같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도승 생활은 애긍에 의지하여 무위도식하면서 자신을 살피는데나 끝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생활이 절대 아닙니다.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자아’는, 많은 위기와 한계들이 응답을 촉구하는 물질세계 속에 살고 있는 ‘자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도승의 정체성은 우선적으로 생산자와 다릅니다. 우리마음과 정신은 자신을 의식하는 한편, 자신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해, 곧 찬양받으셔야 할 분에게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RB 머리말)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쁨을 느끼며 의식적인 자아가 확장되고 성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루 리듬의 균형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우리 의식을 이끌어줍니다.

 

오늘날 유럽과 북대서양 지역에서 우리는 일과 쉼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양쪽 다 비인간적이고 강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풍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간은 그 안에서 일하든지 소비하든지 아무런 구분 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의식됩니다. 노동은 하루나 주간의 리듬을 따르지 않습니다. 간혹 정신없는 놀이 때문에 산발적으로 중단되기는 하지만 거의 24시간 쉬지 않는 사업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뭔가 만들거나, 아니면 우리가 원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신 추측해 주는 오락산업들의 장단에 맞춰 수동적으로 즐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광고나 대중소설들이 계속 주입시키는 메시지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기인하는 영적 삶과 가정생활의 긴장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 안에서 희미하지만 영향력 있는 불안의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베네딕도 회원들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를 기초로 유럽 문화의 미래에 대한 어려운 질문의 방향을 적절히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된 문화는 활동과 회복의 리듬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탁월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코르넬리우스 에른스트(Cornelius Ernst)는 의미 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인류가 속해 있는 세상이 인류에 속한 세상이 되어가는 전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문화는 뭔가 만들거나 아니면 놀거나 하는 무대 이상의 것입니다. 문화는 인간다움을 키워내는 환경이어야 합니다. 기억과 지성, 사랑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 과정이나 경제의 전체 구조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지성적인지 또 인간적인 환경을 유지하도록 되어있는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적인 환경이란 자기관찰의 습관과 자기이해의 가능성들을 키워주는 환경을 뜻합니다. 지성과 상상력의 키가 클 수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베네딕도가 독서(Lectio)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합시다. 그분이 생각한 독서의 목적은 자기이해와 겸손, 그리고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수도승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유혹과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나 섬김 안에서 은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말입니다.

 

이렇듯 공부가 바르게 수행되는 삶을 위해 노동이 있듯이, 공부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기를 의식하며 개인적인 인간 성숙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하나의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규칙서가 지향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절정인 기도와 찬양으로 이끌어주는 바탕입니다. 노동과 공부로 성장한 제자, 자신을 의식할 줄 알고 지성을 갖추고 상상력이 풍부한 제자는 하느님을 고백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밖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임을 압니다.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가 명확해지므로 무익한 자기 몰두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하느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칙서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그 목적과 가치가 생산이나 교환에만 있는 경제 활동들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가 떠받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기업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성장과 지성과 의식이 자라는 환경을 돕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더 광범위하게 이것은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유럽 공동체가 유럽 내의 경제적으로 약한 국가들의 가입을 허락하는 것이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협력 모델이 될 수 있겠는지, 또 교육과 연구 분야에까지 퍼져 있는 기능주의에 저항해서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의 내적 자원을 인간 교육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사용할 수 있겠는지, 그리고 말 그대로 우리의 물질적인 환경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현재 절박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경 문제들은 단지 생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들이 가득 쌓여있는 창고 이상의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 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노동을 통해 어떤 의미로는 우리 소유가 된 이 세상을 단지 우리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관상해야할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 공간과 관상적 경탄, 계획하거나 청하지 않은 것을 받을 필요에 대한 문제입니다.

 

베네딕도회의 시간 구조는 균형을 염두에 두도록 짜여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만들어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인간 활동과 성장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생산을 보지 못하는 문화 속에 살며 이 균형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 대두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목적과 통합에 관해 질문할 능력이 있는 문명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회만이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서든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기 위해서든, 개인의 본능과 자기보호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들 곧 ‘시민’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곧 영원히 살 수 없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순종

 

저는 지금 서로 의지해야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은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베네딕도 정신의 둘째 범주 순종과 연결됩니다. 규칙서, 특히 5장을 보면 수도승들에게 순종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자세를 준비하는 훈련입니다. 여기서의 순종은 조직화된 공동생활에서 오는 실제적인 문제들과 이것이 아빠스에게 위임하는 특별한 요구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사막 수도 전통의 순종, 즉 제자가 스승에게 복종하는 그것과 다릅니다. 아빠스는 공동체의 필요와 수도원의 보편적인 사명을 잘 식별해야 합니다. 수도승 한 사람이 아빠스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빠스와 전체 공동체 사이의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거친 결과에 승복하는 것입니다.

 

규칙서의 놀라운 특성 하나는 순종에 관해 우리가 ‘거울효과’(mirror effect)라 일컫는 것입니다. 아빠스는 공동체 각 회원들의 은사와 독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온갖 주의를 다해 보살펴야 합니다(RB 2,31-32).형제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규칙에 순종할 뿐 아니라 (RB 64) 모든 형제들에게 모범적으로 순종하도록 불리운 사람입니다. 순종이 자신의 뜻에 침묵하는 것이라면 아빠스는 무엇보다도 바로 이 침묵의 모범으로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기 힘든 공동생활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수도승들 각자는 삶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면서 자신들의 선함을 그리고 그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단독적 권위 행사에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도록 수도원 행정을 조직하는 방법을 기술한 규칙서 21장(십인장에 대하여)과 65장(수도원 원장에 대하여)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규칙서 3장의 “주께서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주신다”는 유명한 구절은 71장의 권고 즉 공동체 안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순종과 서로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대위법적 효과로 상호 순종의 그림에 놀랍고도 중요한 전망을 더해줍니다.

 

규칙서가 그리고 있는 공동체는 어떤 식으로도 개인의 뜻에 지배되는 단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규칙서의 권고들은 권위에 복종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권위는 현대적 의미에서 대표는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공동체 내의 경험과 여러 성격의 다양함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권위입니다. 베네딕도회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회원을 받아들이는 순서를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정하지 않습니다. 아빠스가 달리 지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도원의 서열은 우선적으로 입회 날짜에 따라 정해지는 법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들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은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 교육정도나 나이 같은 외적인 요건들이 아닙니다. 달리 표현해서, 어느 누구의 의견도 그가 재산이 적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다는 등의 이유로 공동체 안에서 무시되거나 함부로 취급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사회적 역사적 요건들로 가치를 매기지 않습니다. 오직 공동체와의 서약만이 한 회원이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의 기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우리 대륙과 문화를 향해 던지고 싶은 질문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지요? 첫째, 규칙서에 표현된 다양성의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다양성은 여러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너그러운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규칙서는 공동선과 같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래서 개개의 다양하고 독특한 전망은 도전을 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전제합니다. 베네딕도회의 순종은 이런 전제를 기반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힘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 어떤 형태로든 개인이나 그룹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적 싸움을 단호히 거절하고, 아빠스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애착할 수 있는 위험을 막아주는 균형과 억제의 도구들이 있습니다. 권위의 역할은 모두가 서로의 피어남과 거룩함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를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협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현장에서 지역 언어나 관습 등 다양한 문화의 가치를 진지하게 평가하고, 동시에 전문적인 특수 계층이나 지역 공동체의 경제를 주도하는 이들이 권위를 독점하는 추세를 그대로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획일화시키려는 관료적 힘에 반드시 저항해야 합니다. 국제적 안건들과 토의들은 물질적으로 덜 가진 이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최근 몇 십년간 유럽 정치가 지역 자치를 강조한 것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라 봅니다. 이것은 국가 주권이라는 현 시대를 제압하고 있는 강력하고도 완고한 개념이 문화의 실제적 다양성과 개별 지역이 요구하는 자유의 필요성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베네딕도회 비전의 영향을 받은 유럽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들과 소수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현재 상황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이주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자신들을 받아준 사회의 시민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있고 또 시민권을 얻고 싶어 하는 이주민 그룹들의 소리는 그들보다 역사가 길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들의 권리만큼이나 전체 공동체 안에서 중시되어야 합니다. 서로 관계를 맺는 한 사회 안에서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이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해선 안됩니다. 규칙서가 말하는 순종의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 권위는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국가와 초국적 그룹들의 요구 사이에서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단순한 환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이방인들의 요구와 그들의 선물을 통합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신원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이런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슬람 시민 정신과 그리스도교나 서구 사회의 시민 정신은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가정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관념적으로 비종교적인 자유주의자로부터 가장 철저한 무슬림 근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이성적으로 세속화된 다원주의와 단순한 신정(神政) 사이의 불가피한 단절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경계를 넘어서서 시민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갈지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길은 분명 열릴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 안의 다양성이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포기해 버리는 대신, 베네딕도회적인 태도, 곧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다양성들로부터 보편적인 시민 목표를 끌어낼 수 있겠는지 질문하도록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규칙서 안에서 아빠스는 그 자신이 공동체의 기본 가치들을 모범적으로 살고, 소속된 이들의 다양한 필요와 관심을 존중하고 돌보는 능력을 갖출 때에 형제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단체이든 유럽 정치 공동체들의 결속과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단체라면, 그들 역시 규칙서가 그리는 아빠스다운 미덕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권위가 그 자체로 요구하는 신중한 경청의 태도를 보여주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규칙서가 장상에게 기대하던 것처럼, 권위를 가진 이가 스스로 자신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파벌이나 이해관계 사이의 어색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라 각 집단들의 이익과 계획을 넘어서는 창조적 탐색을 계속하는 길입니다. 故 길리안 로즈(Gillian Rose)가 자신의 정치철학에서 정리한 헤겔 학파의 통찰을 빌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 즉 그들의 존재가 우선 위협이나 골칫거리로 느껴지기 쉬운 낯선 이들과 아직 충분히 관계를 맺어보지 않았다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익이나 계획에 대한 모든 섣부른 자기 설명은 필연적으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통치나 정치는 언제나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에 관한 것으로, 대립이나 경쟁이 아니라 공동의 언어와 비전을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비전은 낯선 이들과 충분히 만나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비전입니다.

 

 

참여

 

이제 규칙서의 세 번째 주제, 참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보았듯이, 아빠스의 의무 중 하나는 각 사람의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회원이 공동체의 일상적인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일을 잘 하지 못해도 아주 적당한 적임자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아프거나 수도원의 다른 중요한 일에 투입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주방 일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RB 35). 수도원 안에서 모든 사람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특정한 소임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생활을 위해 책임을 지는 자로서의 존엄성도 부여 받습니다. 공동체 안의 누구라도 타인에게 기대어 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마치 하숙생이나 자선의 대상처럼 취급된다면 그런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소임을 나누는 일은 각 회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는 표시이며 이 요구들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권위를 이해하는 베네딕도회 정신의 본질입니다. 노동은 단지 물리적 조건들을 만들어내서만이 아니라 노동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도모하는 것이기에 인간적이고 지성적인 생태 환경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역 사회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개별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확실히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적 자원을 늘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수자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태학적 표현으로는 인간적 문화적 차원에서 ‘다양성 보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디언 보호구역같이 소수자들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호의적인 중앙 권력에만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앙집권적이며 비인간적인 관료정치의 힘에 맞서기 위한 자원을 제공해 줄 문화적 논쟁 같은 것들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 보존’이 실천되고 퍼져나가게 하는 발판이 되어야만 합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유럽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꼭 같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지원의 목적은 응급조치로 파국만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글로벌 시장경제 시대에 계속 대두되는 도덕적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행사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값싼 노동력과 천연 자원의 공급처로 영원히 종속적으로 살아야 하는 힘없는 소수민족 집단들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규칙서를 보면, 생명력 있는 공동체는 능동적인 회원과 수동적인 회원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베네딕도는 수동적인 삶이 강요되는 것은 영혼에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조급하게 그리고 무신경하게 강요되고 있는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약자들을 만들어내고, 이런 사회 구조는 결국 갖가지 파괴적 행위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테러리즘을 키워내는 깊은 좌절과 시민 존엄성이 폭력적으로 박탈되고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의 자기 파괴적 악순환 같은 것이 그 결과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세계화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독재 정권이나 가난한 나라의 경제적 부패 또한 경시할 수 없는 원인입니다. 그러나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지역 시장들을 개방하라는 강력한 압박과, 구호물자 공급의 성급한 중단, 생필품 조달마저 위협하며 세계 경제의 흐름이 요구하는 온갖 불리한 조건들을 무조건 따르라는 압력 등은 새롭게 일어나는 약소국가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고, 정의롭고 신뢰할만한 정부가 자리 잡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서서히 선진국 정부들과 많은 경제 기구들이 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을 짓누르는 지불 불가능한 부채를 탕감해주려는 국제적 움직임들은 이런 파괴적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려는 중대한 시도라고 봅니다.

 

공동체를 섬기고 유지하기 위해 노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공동체로부터 지원과 보호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홀로 고통 받거나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기도 합니다. 유럽 국가들은 사회복지 규정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존엄성이 중요하다는 신념만큼은 최근 몇 십년간 유럽의 공통된 비전이 되어 왔습니다. 시민 존엄성은 그간 국가의 직접적인 도움이나 국가와 자선 단체 간의 협조 등 공공 지원을 통해서 유지되어왔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경제적 압력 앞에서 줄거나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한 국가가 요구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신용 관계와 모든 이에게 보장된 존엄성의 차원에서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말입니다.

 

어떤 분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주제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세속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중대성들이 다른 모든 자유의 기초가 되는 영적 자유를 보장하고 지탱해 주겠는가 하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이런 말씀들을 드렸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토마스 머튼이 게쎄마니 수도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미국의 단 하나 진정한 도시를 발견했다고 감격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유럽에 공헌한 바는 그동안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문명의 자취가 보존된 특별한 장소로 후퇴한 삶, 마치 문화유산보관소 정도로 비추어져 왔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적극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델로 베네딕도 정신이 보여준 긍정적인 역할을 놓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도서관의 사서이기 이전에 공동체를 세운 분들이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단지 문명을 보존하는 역할뿐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정치적 미덕들로 중세 암흑시대만큼이나 야만스럽게 인간성이 상처 입게 될 우리 미래에도 유럽 문명을 지키고 새롭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규칙서에 나타난 정치사상은 베네딕도가 새롭게 창조해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 몸의 정치의 구체적인 예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상호 섬김, 모든 이들을 위해 각 사람에 주어진 특별한 선물들에 대한 존중,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상적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확신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인간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규칙서의 비전은 천재적인 정치 감각을 가진 어떤 개인이 만들어낸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에 대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것에 대한 성찰입니다. 규칙서는 최소한 두 가지를 특별히 질문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창조된 목적인 기쁨을 향해서 가장 자유롭게 성장하게 하는 삶의 리듬은 어떤 것인지, 완전한 물질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인들의 평범한 삶 안에서 찬미의 우선적 중요성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어떤 형태의 권위가 ‘분노를 넘어선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지 묻습니다. 권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약함과 한계에 대한 두려움, 저 멀리 계신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말입니다. 규칙서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하느님께 바칠 의무와 공동생활의 의무가 서로 갈등하지 않도록, 내적인 일과 바깥 일 사이의 균형을 찾으며 자기를 의식하고 마음을 넓히기 위해 애쓰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나 유능한 이들을 전문가로 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정치를 실제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권위에 대해서 일의 필요성과 관상의 필요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베네딕도는 바로 이런 문제들에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정치 체제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현대나 포스트모던 사회는 좋든 나쁘든 공공연히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투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이해를 고려할 때, 시장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종교가 사적인 영역으로 추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인간 정체성과 자의식에 대한 탐구를 가능한 한 시야 밖으로 치워야 할 부끄러운 소일꺼리 정도로 축소시킵니다.

 

규칙서의 정치사상은 어떻게 하면 국가나 사회가 초월적인 것의 가능성을 증거하는 행위나 제도들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기라고 부추기는 세상이 의미 없고 시시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대신 우리에게는 봉사와 흠숭을 통하여 올바른 관점에서 노동과 창조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자기 이해와 자기 헌신의 깊은 수준들이 있다는 생각을 지키라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규칙서는 일과 성찰과 기쁨이 서로 어우러지는 인간 공동체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스스로 순종을 실천하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만이 합법적인 권위로 인정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이가 지키는 법에 대한 순종과 사람이나 상황의 특수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더 넓은 차원에서의 순종이 있습니다.

 

규칙서는 국가나 연방의 헌법 내용 같은 것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규칙서 안에서 우리 세계에 팽배해 있는 힘의 논리를 향해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던져야 할 질문을 명확하게 해줄 정치적 미덕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호성인들은 마스코트 같은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국가와 단체들, 그리고 각 개인에게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복음의 도전을 더 날카롭게 이해하게 해주는 하느님 나라의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을 혼란에 빠진 오늘날의 유럽을 위한 바로 그런 수호자로 재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숨 막히는 오늘날의 정치 현장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으며 영을 위한 진정한 작업장을 창조할 방도들을 우리는 수호성인의 규칙서로부터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 Rowan Williams가 2006년 11월 21일 로마 St. Anselmo에서 했던 강의 내용임.

 

[코이노니아 제32집, 2007년 여름, 글 로완 윌리암스, 조성옥 에노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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