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환대 전통과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생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70

환대 전통과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

 

 

서언

 

수도승 생활에서 환대 전통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은 ‘환대’ 주제에 대한 전문적이고 독창적인 식견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혹은 ‘관계’라는 우리 시대의 큰 명제에 비추어 베네딕도회의 환대 전통을 한 번 더 읽어 보고, 그 바탕 위에서 오늘의 우리 수도생활을 비추어보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습니다.

 

 

I. 규칙서(53장과 66장)


1. 문학적 구조

 

53장의 구조는, 1-15절과 16-20절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이 크게 보아 환대의 그리스도론적 측면을(환대의 신학적 본질) 이야기한다면, 뒷부분은 거기 토대를 두고 환대의 실제적 요소들을 다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먹고, 자고, 이야기하기).

 

2. 내적 구조 : 경계-긴장

 

그런데 53장이나 66장에서 환대의 부인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강조함에다 같이 어떤 경계-긴장이 발견됩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이해 주었다”(마태 25장)는 주님 자신의 심판 기준(‘나그네=주님’이라는 등식)에 따라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 당위성이 여러모로 강조되지만, 동시에 손님 환대가 수도승 생활에 누가 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끊임없는 노심초사가 엿보입니다. 예컨대 53장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영접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지만, 담당자말고는 손님들과 얘기하지도 말라는 금령으로 끝납니다. 여러 군데서 이런 ‘갈지자 걸음’의 행보가 엿보입니다. 3-4절 “온갖 사랑의 친절로써”와 “평화의 입맞춤” 끝에 5절에는 “악마의 속임수 때문에 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이 평화의 입맞춤을 하지 말 것이다” 하십니다. 9절 “하느님의 법을 읽어준 후에 온갖 친절을 드러낼 것이다” 하고는 10절에서 장상을 제외한 형제들은 금식 관례를 깨지 말 것을 명합니다. 16절 손님들을 ‘먹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들을 배려하여 따로 주방(식탁?)을 마련하라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게 마련인 손님들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불편을 겪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요구합니다. ‘재우는’ 것도 문젭니다. “침대를 충분히 마련”하여야 하지만, “하느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형제”가 객실을 맡아 돌보라고 규정합니다. 마지막으로 23-24절의 ‘대화’와 관련한 베네딕도 성인의 염려는 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이런 긴장의 구조는 66장에도 그대로 관찰됩니다.

 

3. 떨어져 나오기

 

이런 ‘긴장’은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를 위시해서 이전의 회 수도승 생활 교부들에게서도 한결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 점에서도 사실상 선배들의 노선에 서 계신 것이지요. 드 보귀에 신부님은 53장과 66장이 이전 수도 규칙서들의 노선을 잘 종합해 주는 탁월한 모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와 환대는 동일한 사랑의 두 표현으로서, 전자가 그리스도를 뒤따름(Sequela Christi)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 영접의 표현이다.”1) RB에서 손님을 영접하되 손님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세상’까지 함께 영접하지 않아야 한다는 노심초사가 분명히 엿보입니다. 손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손님이 성화되어야지 수도승들이 속화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드 보귀에 신부님은 수도승 생활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떨어져 나오기(separatio)’에 대해 말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떨어져 나오기’는 단지 신체적으로 멀리 떨어져야 한다거나 외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절연, 다시 말해 죄를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자세의 표지요 방편일 따름이다”라고 덧붙입니다. ‘영적으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n spirituelle)’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이해된 ‘떨어져 나오기’의 정신은 진정으로 영적인 환대와 병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도승 생활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산 위의 마을’이나 ‘등경 위의 등불’처럼 빛나게 되는 조건이라고 합니다.2)

 

4. ‘떨어져 나오기’와 ‘다름’

 

그런데 실상 RB 자체를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란 개념이 이론적으로 정리되어 수도승 생활의 요체로 제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어 자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규칙서 전체를 살펴보면 오히려 공동체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잘 접목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53장에 수도원에 손님들이 끊어지는 날이 없는 법이라 했고, 57장(수도원 기술자들)에도 보면 자급자족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와 경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64장에 보면 수도원 주변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수도원에 어떤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나옵니다(64,3-4 : “수도승들이 자기 악습에 찬동하는 인물을 아빠스로 세웠을 경우 주변(주교, 이웃 아빠스들, 신자들)은 이를 막아야 한다”).3) 후대의 어떤 문헌들에 나오는 염세적 태도(이른바 ‘세상혐오contemptus mundi’)가 RB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체로 보아, RB에 나타난 수도승 공동체를 결정짓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나 절연이라기보다는 그 사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다는 점(異質性, differance)’에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과 다름, 그것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선택한다는 점, 그 삶에 전적으로 투신한다는 사실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름’은 세상으로부터 공동체를 떨어뜨려 놓기보다는 오히려 세상 안의 아주 유니크한 자리에, 아주 각별한 어떤 자리에 위치시킵니다.4) 즉 “점점 덜 세속적이되 점점 세상에 더 깊이 현존하는(minus de hoc mundo, plus in hoc mundo)” 그런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수도승 문헌은 아니지만 <디오그네투스에게>라는 아주 오래된 교부 문헌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영혼과 육신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웅변적으로 잘 말해준다고 봅니다. 영혼이 육신 안에 있되 그에 속하지 않듯,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 살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5) 영혼이라면 육신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육신 밖에 있다면 이미 그 몸은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를 세속화시키는 것은 사람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들이 세속이라는 ‘병균’을 옮기는 숙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세속화시키는 것,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유언기도’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요한 17,14-16 참조). 수도승 전통 일각의 어떤 염세적 관점에 따라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세상 안에 있지 않음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사실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6) 자신을 신비화 시키고 특권 계층으로 만듦으로써 사실에 있어서는 대단히 교묘한 속물이 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복음적 의미로 ‘세상적’이 되어가지 않으면 공동체는 점점 ‘세속적’이 되어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조직들처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세력 확대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하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기, 다시 말해 세상과는 ‘다르게 존재하기’가 관건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투쟁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수도승 생활은 그런 영적 투쟁의 여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지, 반대로 세상에 속하되 마치 세상에 있지 않은 듯 처신하는 것의 교묘한 세속성에 대해 많이 경계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환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규칙서가 보이는 ‘경계’는, 마치 손님과 함께 세상도 묻어 들어오리란 듯이 단순히 봉쇄구역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결국 우리가 원해 살고자 선택한 복음 정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사이를 식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II. 同行의 수도승 영성

 

이처럼 경계해야 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우리가 그 일부인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정신이고 보면, 손님 안에서 단순히 우리 봉사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깊은 복음적 통찰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53장의 전반부의 구조(1-15절)를 다시 한 번 살피고 싶습니다. ‘손님=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등식이 3번에 걸쳐 명확하게 등장하는데, 한 번은 1절이고, 다른 한 번은 한 중간인 7절이며, 나머지 한 번은 제일 마지막의 15절입니다. 첫째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 찾아오는 ‘모든’ 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둘째 것은 그 손님 ─ 그리스도께 온몸으로 흠숭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마지막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들 안에 더욱 ‘강하게’ 현존하신다고 표현해볼 수 있을까요? ─ 고 강조합니다. 손님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는 눈은 일상의 모든 것에 감추인 깊이를 천착하는 관상적 시선, 다시 말해 만사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만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뵙는 영적 시선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체험, 그것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 혹은 하느님의 현존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체험은 사람에게 깊은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에 동행하시느라 힘겨운 나그네살이를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영성에서 무슨 개인적 성취를 위한 일이 될 수 없고(도를 튼다고 표현하든 성인이 된다고 표현하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과 동행하는 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끝까지 사람과 함께 계시느라 사람을 위해 죽으신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한 정점으로서 수도승 생활이 지닌 부인할 수 없는 사명이 있다면 결국은 ‘동행’이란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행’ 영성의 가장 뛰어난 표현이 바로 환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행’의 실천을 위해서는 중요한 영적 식별이 가동되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환대를 강조하되 반드시 어떤 단서를 붙인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저는 수도승의 ‘동행’에 필요한 이 식별의 원리, 다시 말해 위에서 이야기한 ‘그리스도인의 다름’에 대해 논어의 한 구절이 잘 표현해 준다고 봅니다. 바로 ‘和而不同’이란 표현입니다.7)

 

감옥이라는 ‘대학’에서 漢學을 닦은 신영복 교수는 이 和를 연대성 혹은 공존으로 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다양성이 소멸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데 어울리는 것. 반면 同은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흡수합병’이 논리의 전형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곧 지배의 논리이고,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논리입니다. 한 마디로 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의 원리임에 반하여 同은 차이와 다양성을 견디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8)

 

“화합하면서도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는다” 쯤으로 풀 수 있을 ‘和而不同’은 어떤 면에서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 정식을 상기시킵니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유일무이한 위격 안에 결합되되 “혼동되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결합된다(이른바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고 가르쳤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따른 수도승의 환대에도 이 표현을 적용시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승이 손님-세상을 맞이함은 ‘同’이 아니라 ‘和’입니다. ‘和而不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근본적 모호함(ambiguitas)을 잊어서는 안되고, 무분별한 환대-접대로 말미암아 수도승이 세속화될 위험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 ‘부화뇌동’, ‘同而不和’로서의 환대이겠지요.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적 환대가 아니라 단순히 세상의 정신과 동화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수도승, 그리고 손님과 수도승의 관계는 ‘和而不同’의 관계에 있어야 가장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친교(koinonia)’의 이치를 실로 너무도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아가, 아까 말씀드린 그리스도인의‘다름’에 대해서도 뛰어나게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和而不同’이 수도승이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III. 환대의 修行 : 그리스도인의 ‘다름’을 구성하는 환대 영성의 요소들

 

이런 맥락에서 환대의 修行的 측면을 한 번 다음과 같이 나름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떤 것은 진정한 환대를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환대의 왜곡된 형태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환대에 뒤따르는 실천적 노력의 요소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점들이 감안된 ‘동행’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우리의 ‘다름’을 형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라고 믿습니다.

 

1. 수도 형제들끼리의 환대

 

“공동체가 방문객에게 보여주는 환대는 구성원 상호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환대의 연장이다.”9) 논리적으로도, 형제들 상호간에 먼저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환대가 실천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그런 환대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공동체 안에 참된 친교를 향한 노력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 사이의 ‘화이부동’으로서의 친교가 끊임없이 함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점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 자기와 다른 점을 제거하거나 자기에게 흡수합병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 서로의 다른 점이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가 되는 분위기… 한 마디로 “형제는 짐이다”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사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이 중요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형제는 짐이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짐이 된다. ‘이교도’에게는 타인이 짐이 되지 않는다. 이교도는 타인이 자기의 짐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형제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짐이 될 때에만 타인은 내가 길들일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형제가 된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의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십자가의 친교이고, 거기서는 누구나 타인의 짐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적 친교가 아닐 것이다. 그 같은 친교를 짊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10)

 

나아가 형제에 대한 이런 수용은 형제의 악과 죄를 수용하는 지경에까지 가야 한다고 본회퍼 목사는 말합니다.

 

타인의 자유를 감당하기도 어렵지만 타인의 죄를 감당하는 일은 더욱 힘들다. 죄에서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무너지고 형제들과의 친교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짐을 감당할 줄 아는 데서 진정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드러난다. 죄인을 멸시하지 않고 인내할 줄 안다는 것은 그를 멸망할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말이며, 용서를 통해서 그와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적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견뎌주시고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죄의 용서를 통해 죄인들을 견뎌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견뎌줄 수 있으며 따라서 그를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은총 중의 하나이다. 공동체에서 저질러진 죄치고 구성원 각자가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죄가 과연 있을까? 약한 형제를 위한 기도와 전구에 성실하지 못했음을, 형제적 봉사와 형제다운 충고와 위로를 등한히 한 잘못을,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의 영적 태만을 반성하고, 이런 것으로 자신과 공동체와 형제들에게 손해를 끼쳤음을 반성하지 않아도 될까?11)

 

공동체 내부에서 형제들끼리의 이런 환대와 결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환대는 많은 경우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도피가 되어 버립니다. 공동체에서 형제관계가 힘든 사람이 도피처로서 자기를 위해 손님을 찾고, 손님에게 유난히 잘해주는 경우가 여기 해당합니다. 이 경우는 당연히 공동체나 형제들에 대해 하지 않으면 더 좋은 말을 손님에게 쏟아 붓게 됩니다. 그리하여 손님을 사유화(私有化)합니다. 손님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국은 공동체의 다른 형제들로부터 손님을 유리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예가 사실 많습니다.

 

결국, 달리 말씀드린다면 환대를 위한 공동체적 노력과 시스템 정착이 중요하지만, 환대는 시스템 보다는 공동체의 분위기-스타일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형제들 서로가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있다면 당연히 그 공동체는 환대하는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다름의 수용

 

환대는 근본적으로 ‘타자(他者)의 타자성(他者性)’과 맺는 성숙한 관계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혹은 두려움(xenofobia)이 있는데, 동일한 라틴말 hostis가 ‘적’도 되고‘이방인’(객-손님)도 동시에 뜻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적으로서의 이방인이 손님이 되던 바로 그 날, 다시 말해 인간 공동체가 형성되던 바로 그날, 문명은 결정적인 진일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12) 환대는 모든 참된 사랑이 그러하듯 본질적으로 위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적인 거처를 갈라놓는 경계선을 뛰어넘고 안전보장을 위해 설치해놓은 수많은 방책들을 때로 포기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참된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이웃을 그 타자성과 함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 삶의 자리를 내어놓을 수 있는 자세, 이웃이 내 삶에 개입되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는 자세… 이웃의 들어옴이 ‘침입’으로 느껴져야 한다면, 이웃의 존재가 위협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붉은 신호등일 것입니다. 손님은 익숙한 내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존재입니다. 그의 다름이 참으로 내 집에 수용될 때,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거부되지 않을 때, 손님을 맞는 주인들이 손님을 불편해하지 않을 때 참된 환대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 손님으로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환대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환대가 손님에게 깊은 의미에서의 ‘집’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사실 그것은 손님을 가족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손님은 한 가족으로 맞아들여질 때 최상의 환대를 체험합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에 근본적으로 열려있는 자세가 없다면 환대도 불가능하거니와 사실상 참된 의미에서의 ‘관상’(하느님의 진면목을 알아뵙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요한복음)가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이 ‘낯선 분’의 자리를 하느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계시의 자리로 삼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13) ‘이방인’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가 쓰는 말도 모르는 그런 존재를 일컫는데, 결국 예수님은 완전한 이방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당혹스런 낯섦 혹은 타자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 위에서 자신과 ‘다른 이들’, 자신의 생각과 전통과 체험에 ‘낯선 이들’을 맞아들임으로써만 하느님과 그 나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다름’이 수용되지 않고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때 우리는 ‘클라우수라’ 혹은 ‘수도승다움’을 빙자하여 사실상 관계의 거절과 단절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同’의 정신을 밀어붙여 상대방에게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거하여 나와 흡수통일 시키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세가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기 보다, 사람들에게 늘 ‘한 말씀’을 주는 사람으로 처신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3. 주기보다 받기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체험할 때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 줄 때’보다도 들어줄 때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루가 10장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환대 맥락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면 같습니다. 마르타는 사람들을 환대하려고 애쓰며 분주한 인물입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하고 베풀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손님(주님)도 자신도 그리 만족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오히려 손님에게 무엇인가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님이 자기에게 뭔가를 주도록 허락해드린다고 할까, 지극한 수용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 가장 큰 것을 드린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마리아는 받을 줄 아는 자세로 자신을 두었기에, 다시 말해 ‘섬김’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신 분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시란 사실을 알았기에(끝까지 ‘섬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마르타와는 달리) 오히려 주님으로 하여금 ‘집’에 있다고 느끼게 해 드리는 듯 보입니다. 받는 게 주는 것보다 많은 경우 더 어렵고 더 중요하지요. 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있고 좀 관대하면 되지만, 받기 위해서는 가난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여러 번 읽고 기도하면서 이 단락이 “준다고 설쳐대지 말라. 사실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란 메시지를 숨기고 있음을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사실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성부 앞에 서 계신 성자의 모습의 신령한 거울 같습니다. “아드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말씀이시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분’의 ‘사랑받는 이’이시다. 아버지께서 샘처럼 솟아나신다면 그분은 그 솟아남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우물이시라면 그분은 두레박이시다. 아버지께서 ‘무상’(無償)이시라면 그분은 감사이시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사랑받는 분이시다. 아드님은 사랑하는 것만이 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받음 역시 신적인 것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거저 주는 것도 신적이지만 감사히 받는 것도 신적이다. (…) 말씀은 주도권을 잡지 않는다. 말씀은 ‘환대’(수용)이다. 말씀은 무상으로 주는 분이 아니다. 말씀은 감사히 받는 분이다. 말씀은 (아버지의 ‘무상으로 주심’에 대한) 응답이다. 무상으로 주시는 분, 주도권을 쥐신 분은 말씀의 원천이신 침묵(성부)이다”(브루노 포르테).

 

손님 앞에서 그가 자기 자신일 수 있도록 침묵하고 경청하는 자세 역시 우리 형제들 상호간에 훈련하는 만큼만 손님들 앞에서도 실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가장 간절한 꿈은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그분의 강생 때부터 좌절되었습니다. “방에는 들어갈 데가 없었다”(루가 2,7 ),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환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객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보다도, 우리 안에 이런 그분의 빈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일, 우리 중심을 그분을 위해 비워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는 우리가 때로 손님에게 시혜자로 자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그리고 손님을 ‘지나치게’ 배려하고 위해주려는 자세의 위험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엔조 비앙키는 또 수도승 환대에서 손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임을 알아듣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바 있습니다.14) 엔조 수사님은 RB나 회 수도승들의 앞선 규칙서들에서 이런 관점이 부재한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만, 사실 53장을 잘 읽으면 손님은, 특히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하는 손님(순례자, 가난한 이)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마치 더 많이 담은 것처럼 제시되는데, 그리스도의 더 강한 현존(그런 말이 가능하다면)이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외래 수도승에 대해 말하면서도 (61,4 : “만일 그가 이치에 맞게 또 사랑에서 나온 겸손을 가지고 무엇을 비평하거나 지적하거든 아빠스는 바로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이 아닌가 현명하게 숙고해 볼 것이다”) 그 비슷한 것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아닐지요.

 

4. 무소유 - 가난

 

온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입니까? 53장에서 성 베네딕도께서 손님들을 두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며 그렇게 극진히 묘사하는 것이 하나의 문학적 과장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그렇지 않을진대,15) 손님 안에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면 정작 주인은 누구이고 손님은 누구인지요.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이 역시 이 땅에서는 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틴말 hospes는 ‘나그네’도 뜻하고 나그네를 맞는 주인도 동시에 뜻한다는 사실이 참 성서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손님들에게 환대를 제공한다고 해서 뭘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일도 참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 몸마저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면, 우리 수도원과 그 안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domus Dei)이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 집’ 혹은 ‘우리 집’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우리 거야. 다 하느님 꺼지.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수도자가 몇이나 될까요? 의외로 수도자들이 개인 것에는 욕심이 없다고 해도 자기 공동체의 것에는 큰 집착에 사로잡히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땅과 돈 등에 관련된 분쟁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수도자가 가난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기도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사실, 처지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난으로 고통받으십니까. 보십시오. 우리도 사실 가난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할 뿐, 인간관계로 또 경제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러나 우리는 행복합니다”란 말을 덧붙일 수 있다면, 우리를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을 가장 큰 희망과 힘을 얻고 갈 것입니다.

 

최근 한국 교회 안에는 교구나 수도원을 막론하고 피정집이 너무 많아 대체로 운영이 잘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 현상일까요. 피정집이 많다는 것하고 복음적 환대의 공간이 많다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수도원들, 특히 베네딕도 수도원들이야말로 복음적 환대의 자리가 되어주어야 할 곳이 아닐지요. 경제적 수익과 아무 관련없이 운영되는 환대의 집,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하느님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기도와 인정(人情)의 ‘집’이 교회 안에 너무 드물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5. 진실 있는 그대로

 

때로 우리는 사람들의 기대와 좋은 인상에 우리를 끼워 맞추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과장해서 우리의 부족함과 결점을 나타낼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길 필요도 없다고 믿습니다. 봉쇄 수도원이나 수도승 생활에 특히 자기 홍보, ‘자기 신비화’의 유혹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봉쇄 수녀원의 경우 지금도 많이 존재하는 ‘철창’이 그렇고, 구라파의 베네딕도 수도원들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지만 수도승입네 두건을 덮어쓰고 대중의 이미지에 각인되려고 하는 모습도 그런 유혹에 노출된 모습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지만, 상징이 너무 비대해지면 실상과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느낌, 어딘지 진실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도 이상적일 수만은 없고, 그런 것을 손님들에게 시시콜콜 떠벌일 필요는 결코 없지만, 그렇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출 일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참된 상호 환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 아픈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 없을까요? “우리도 힘들지만 늘 새로 시작하며 늘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며 삽니다”, 이런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손님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깨끗하고 거룩한’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거기 우리 모습을 끼워 맞춘다면, 손님들이 우리를 만날 때 우리의 이미지와 만나지 우리 실상과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잠시의 경탄을 불러는 일으킬지언정 오래 가지도 못하고, 환대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6. 종말론적 대망의 증언

 

위에서 말한 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손님 즉 나그네라는 사실의 자각은 우리 수도자들이 가장 고유한 증언인 종말론적 기다림의 자세를 깨우쳐준다고 생각합니다. 손님들에게 우리 독신 생활 자체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우리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라 ‘저 위’라는 것,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충만한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이 우리처럼 ‘촌구석’에 살며 ‘쓸데없이’ 삶을 낭비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왜 저렇게 살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좀 ‘깨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티모시 랏클리프 신부님이 베네딕도회 아빠스님들에게 하셨다는 말씀을 되씹어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요, 선두에 서지 않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승진없는 인생은 뜻이 없는 것입니다 (…) 수도승들은 무엇이 되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도승들의 삶이 외적으로 분명하게 내세울 그럴듯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밀스럽게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장터입니다. 모든 이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자신들이 팔고있는 물건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종일토록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웨이브, 컴퓨터, 유명한 해변에서 보내는 환상적인 휴가, 신제품 비누 등등. 세상은 종교마저도 이 장터로 나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소리쳐야 한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까지 아주 좋은 상품처럼 스스로를 이 진열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 주에는 요가, 다음 주에는 아로마 요법, 이런 것들 사이에 그리스도교도 섞여 진열되어 “나도 있다”하고 판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6)

 

이 첨단의 자본주의 시대에 종교와 영성도 사실 이미 상품화 되어 있고,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쩌면 각 수도회의 카리스마와 수많은 영성 프로그램들이 상품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강력한 신흥종교들의 도전에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구매력 있는 상품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프로그램 신제품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 자체가 이미 복음의 그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그것이 아닐까 하는 사뭇 괴로운 의혹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작아지고 사라져버리라고 초대하는데,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커지고 증식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라고 밀어붙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조국에 살면서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을 참습니다.  타향 땅이 그들에게는 조국과 같고 모든 조국이 타향과 같습니다. (…)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있으되 육신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17)

 

 

Ⅳ. 결론

 

‘환대’와 관련된 이 모든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다름’을 구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름’이야말로 우리를 세상 바깥이 아니라 세상 안의 특정한 자리, 세상에는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 위치시키며 세상 사람들과 동행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름’의 철저함에 수도승 생활의 본질이 달렸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례와 서원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뒤따르겠다고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 ‘다른’ 삶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환대의 객체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면, 환대의 주체, 즉 내 속에서 손님을 참되게 환대할 수 있는 참된 주체 역시 하느님 자신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손님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는다면, 그런 내 모습 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뵙는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환대할 때는 사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 생각도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나름대로 살펴본 환대는 수도승 생활에 부수적인 그 무엇일 수가 없습니다. 수도 생활이 내부적으로 튼튼해진 후에라야만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은 영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좀 어폐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환대의 수행과 더불어 우리의 수도승 생활도 튼튼히 성장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지요.

 

------------------------------

1) A. de Vogue, Commentaire doctrinal et spirituel, La Regle de Saint Benoi?t t.VII, in SCh 187, Paris 1977, 365

2) 위의 책, 371

3) Bertrand Rollin, Vivre aujourd’hui la Regle de Saint Benoi?t, Bellefontaine 1983, 310

4) 위의 책, 311

5) 서공석 역, 신학전망 20(1973), 75-86 참조

6) 말년의 토마스 머튼 일기는 특히 당대 자기가 속한 수도승 생활의 모습을 두고 이런 괴로운 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영국 교회의 수장인 R. Williams가 최근에 머튼에 관해 한 강연 하나가 머튼의 가장 뚜렷한 영적 면모들 중 하나를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R. Williams, “il coraggio di non tacere”, in , Bose 2006, 103-122 참조.

7)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논어>, 子路 편

8) 신영복, <강의>, 돌베게 2004, 160-166 참조

10) 첸치니, <헤르몬 산의 이슬처럼>, 성염 역, 바오로딸 2000, 268에서 재인용.

11)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위의 책, 269-270에서 재인용.

12) J. Danielou, Pour une theologie de l’hospitalite, in Vie Spirituelle, t.85, 1951, 340

13) 요한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나자렛, 갈릴래아 등), 사실 그분이 하늘로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8,34)라고 답답해 하십니다.

14) 엔조 비앙키, “수도생활에 있어 성숙의 구조들”, 코이노니아 선집 1, 381-383 참조

15) 고대 교부들의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은 축성된 성체를 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진짜 몸’(Corpus verum)은 형제들의 살아있는 몸과 그 친교를 뜻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Henri de Lubac, , Paris 19833, 73 참조.

16) 티모시 랏클리프, “하느님의 빈 자리”, 코이노니아 선집 3, 409-421에서 띄엄띄엄 인용

17) <디오그네투스에게>, 서공석 역, 위의 책 78

 

[코이노니아 제32집, 2007년 여름, 이연학 요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파일첨부

87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