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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리더십의 또 다른 면: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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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9

리더십의 또 다른 면 :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1)

 

 

“리더에게 있어서의 마지막 과제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은 “어떤 일을 계속하고자하는 확신과 그 의지를 공동체의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두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이다.

 

미국 경영간부들은 수천 달러 씩을 지불하며 “리더십 트레이닝”에 관한 주말 워크샵에 참가하고 있다. 그 메뉴는 공식적인 내용들로서, 목표 설정, 그룹토의 테크닉, 고용 및 평가 절차, 역할 규정, 인사정책, 상호소통 기술 등이다. 이를 위한 자료들은 통계 자료와 측정 도구 및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중요하며 흥미롭기도 하다. 이는 또한 효과적이고 타당성이 있으며 모두 다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 완전하지는 않다. 이러한 내용들은 위대함을 고취하지 않으며 정신에 생명을 불어넣지 못할뿐아니라, 지금 이행되고 있는 같은 내용을 수행하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 수 있는 신념과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이윤”을 가져다 줄뿐이다. 경제적 결과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을 위해서 즉, 자신의 내면에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섬에로 나아가게 하는 모델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이익을 지향하는 리더십에서 부족한 것은, 능숙함 그 이상의 것을 약속하고, 정신적인 실체를 가져다주며, 조직체계뿐아니라 마음을 형성하는 삶의 철학이다.

 

바로 거기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 자리하는 곳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생산성이나 이익에 대한 관심보다는 공동체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이 하나의 삶의 길이 되는 것이다. 베네딕도회 리더십은 단순히 그 어떤 것이 이행되기 위한 길 그 이상이며, 그것은 경쟁과 비용효과, 조직의 성공에 여념이 없는 세상 안에서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길이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단순히 잘 닦여진 리더십 테크닉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관한 문제이다. 베네딕도회 모델에 있어서의 리더십은 성공 그 이상의 것 그리고 생산 그 이상의 것에 관심하는 태도, 즉 사람, 일, 지혜, 권위, 관계 그리고 자아에 대한 태도의 성숙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 눈부시도록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이유를 공동체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지도자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위대한 남녀 아빠스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탄생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또한 이 리더십이 실패할 때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조직체계나 건물들, 재정, 날질서, 규율에 보다 더 관심하고 돌보느라, 오히려 그러한 외적인 내용들이 수도승 각자의 수도생활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는 잘못된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공동체에서 야기되는 결과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아무리 그 공동체가 잘 질서 잡혀 있고, 관리되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없이 수도승 개개인의 성장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세상 안에서의 수도 생활의 역할이 중요치 않게 될 때, 공동체의 핵심은 이미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그 근본을 둔다. 그것은 모든 수도승들이 그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해주며, 또한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 주변 세상과 함께 하느님의 창조적 현존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뜻한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종교적이거나 또는 세속적이거나간에 주변의 그 무엇과도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요구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확실하고 영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는 단지 잘 단련된 삶을 위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아닌 사람을 위한 에너지와 창조 중심 신학에의 헌신을 요구한다.

 

 

사람

 

베네딕도회 리더십은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을 공동체를 위해 쓰일 하나의 자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공동체는 일을 위한 단체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인적 자원의 조화, 즉 각 개인으로부터 끌어내어져야 하고 또 존중되어야 할 인적 선물들의 멋진 조화로 이해된다. 공동체 안에 그 어느 것도 수도생활에 필요치 않은 기술도 없고, 가치 없는 재능을 가진 수도승도 없으며, 수도생활을 거스르는 쓸모 없는 재주라는 것도 없다. 지도자에게는 수도승 개인의 성장과 공동체 전체의 성장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발전을 위하여 이러한 인적 선물들을 계발하고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

 

 

노동

 

내가 젊은 수녀였을 당시에는 노동, 특히 청소라는 노동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소모시켜서 육체의 일이든 영혼의 일이든 다른 일은 불가능하였다. 청소 이외의 모든 일은 이미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마루를 쉬지 않고 쓸고 닦는 끊임없는 반복 후에도 다만 부차적인 것으로만 행해졌었다. 그 후에 조금씩 조금씩 일에 대한 태도가 서서히 변화되어갔다. 리더십은 단련을 위한 노동을 넘어서 인간 발달을 위한 일로 우리를 이끌었다. 성규에 정의된 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베네딕도회의 노동은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 아무 생각없이 육체적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보다 전인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이 세상을 좀 더 거룩하게 하는 데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 베네딕도회의 노동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작은 한 부분을, 우리가 그 자리에 있기 전보다 좀 더 열린 세상, 좀 더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좀 더 무조건적인 연민으로 가득차고 지금보다 좀 더 기도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데에 더욱 가치를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청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베네딕도회의 모델에서 일은 바로 그 시간의 성사가 된다. 나환자를 치유하시고, 죽은 이를 생명으로 일으키신 그분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일’인 기도로부터 솟아나는 마음으로 행하여지는 바로 그 순간의 성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끝마쳐질 수 없는 과제라고 하더라도, 베네딕도회 리더십의 역할은 공동체의 시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공동창조를 위한 지속적인 과제를 향해 들어 높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지혜

 

‘리더십’이란 말과 ‘경영’이란 말은 동의어가 아님에도 자주 혼돈되고 있다. 관리는 그 당시의 주어진 과업들을 돌본다. 리더십은 그 시대의 지혜를 공동체 안에 불어넣어 북돋운다. 무엇보다 리더십은 다른 이들 안에 있는 지혜를 인식함으로 이루어진다. 참으로 좋은 리더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직 답을 얻지 않은 것에 대해 다른 이에게 묻고 공동체의 지혜를 듣는다. 레이번(Rayburn)은 “만일 어떤 이가 다른 사람들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지도자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다른 이들더러 자신을 따르라고 요청할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좋은 지도자는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잘 따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다른 이들의 통찰에 자신이 맛 닿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한다.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는 성규 3장의 의도와 의미를 깊이 인식해야할 것이다. 성규 3장3절에서 분명하게 말하듯, “아빠스는 어떤 중요한 일이 결정되어야할 때 공동체 전체를 가장 젊은 사람을 포함하여 소집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가로막지 않으며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성령의 활동하심을 찾기 때문이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가장 깊은 관심들을 간과하거나 임의로 다루지 않는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단지 투표의 힘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투표는 결과를 획득하기가 쉽다. 하지만 함께에의 헌신은 공동체에서 제기되는 가장 진지한 물음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숙고를 요구한다.

 

 

권위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은 총회 또는 참사회의 기능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규칙서에서 요구하는 것은 한 개인의 말을 듣는 군대 스타일이 아니다. 베네딕도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기능은 한 마디로 일 개인으로 집중되는 교회적 군주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비젼, 공동체적 해답, 공동체적 통찰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는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우선적인 물음들에 민감해야하며,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공동체가 찾을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해 주어야만 한다.

 

수도승 공동체의 지도자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저절로 그들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권위’가 ‘겸손’에 대한 대치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는 그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바로 그러한 눈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의 탤런트를 볼 수 있게 되고, 현재 공동체에 제기되는 질문들을 풀어가는데 그리고 미래의 비젼을 찾는데에 다른 이들을 환영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

 

수도승 공동체의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 안에 있는 똑똑한 형제들 또는 그들 자신보다 더 영리한 이들로인해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총회 안에서 경고의 종을 울려줄 사람, 그들 자신의 어두움 안에 빛을 비추어줄 사람, 공동체가 결정한 내용이 실행 가능해지기 위해 필요한 재능을 가져올 사람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베네딕도회의 권위는 다른 이들의 지성, 관심, 생각, 질문과 경고들에 열려있다. 권위주의자들은 주위에 흔하지만 가장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리더십은 공동체 전체의 탤런트들을 생기로 피어나게 하는 하느님 선물이요 은총이다.

 

 

자아

 

공동체의 모든 개개 회원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들 각 사람의 삶에 목적이 있으며 자아의 충만함에 이르기 위한 권리와 책임을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 이는 두 가지의 길, 즉 공동체를 자아의 성장에로 이끌어가는 길 또는 이와는 달리 생산적인 결과를 위해 공동체를 관리하는 길 사이에 있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베네딕도회 지도자의 역할은 조직 체계를 위하여 공동체 회원들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몫은 공동체 그 자체를 전 인류를 위한 하느님 뜻의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수도 공동체 전체의 창조성을 위해 회원 개개인 삶의 영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을 성장시키는 데 있다. 한 남자 베네딕도회 공동체에 물은 적이 있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포도 농장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답인즉, “우리가 처음 포도 농장을 시작했을 때는, 우리 형제들이 포도를 눌러 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과 함께 그 어느 때부터인가 포도가 우리 형제들을 짓눌러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공동체에서 포도 재배를 멈추기로 결정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공동체 그 자체의 성장을 위한 것이지 일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야말로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에서 기꺼이 배워야할 교훈이다.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들 자신은 충만한 인간애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공동체 그 자체를 귀기울여 듣고, 다른 이들의 재능을 존중하며, 수도 공동체가 사랑 가득한 환대로써, 자원을 돌보는 청지기의 몫으로써 또한 모든 이를 위한 정의와 공동 창조를 위한 삶의 표지가 됨으로써 주변 세상에 선물이 되도록 공동체 삶의 질이 성장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리더십의 몇 가지 요소들은 기업의 리더십을 위한 보증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내용들은 ‘들으라’는 베네딕도회의 가르침에 깊이 간직되어온 것들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인격과 성장에 대한 존중과 다른 이의 생각에 대한 리더십의 개방성이야말로 많은 이에게 좋은 선물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낼 수 있음을 뜻하며, 이로인하여 베네딕도회 리더십에서는 일을 계속할 의지와 확신을 회원들 안에 남겨 놓을 수 있게 된다.

 

1) 원제:  Joan Chittister: THE OTHER SIDE OF LEADERSHIP : BENEDICTINISM(AIM Bulletin 86)

 

[코이노니아 제32집, 2007년 여름, 글 조안 치티스터, 한정희 프랑카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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