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성 베네딕도 규칙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8

“성 베네딕도 규칙”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1)

 

 

I. Discretio의 의의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관해서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규칙에 관해 듣지 못한 것도 역시 많지만, 그런 것들은 너무 전문적인 것이어서 덮어두고, 규칙의 내용 중에 성 베네딕도의 정신의 핵심이 되는 몇 가지를 골라 살펴보도록 하겠다. 베네딕도의 유일한 전기 작가인 교황 대 성 그레그리오는 593년 내지 594년에 쓴 대화집 제2권 36절에서 “그는 (베네딕도) 수도승들을 위해 분별(discretio)에 있어 탁월한 규칙을 저술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베네딕도를 가장 잘 이해했던 교황은 규칙의 기본적 정신을 “분별”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이 말이 지닌 함축성과 수도 규율 안에서 갖는 그 뜻을 철저하게 알아 밝힐 필요가 있다.

 

대화집 2권 36절의 말씀은 아래와 같은데 이는 규칙서 내용의 설명이다. “그분은 수도승들을 위해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2)

 

라틴-한글 사전의 discretio: 1. 구별, 식별, 판별, 준별. 2. 사려분별, 신중.

 

 

Ⅱ. Discretio의 역사

 

(1) 고전적 전통

 

Discretio라는 말을 방금 단순히 분별(分別)이라고 번역했지만 그 의미는 매우 넓고, 그리스 로마적 예지와 그리스도교 정신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 안에서 보는 그 사용을 음미하기에 앞서 근본적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 어원적으로 볼 때 discretio는 원래 ‘끊다, 가르다, 채로 쳐서 거르다, 구별하다, 결정하다, 감각적으로 여러 성질을 식별하다’와 같은 의미를 포함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윤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다’, ‘참된 것과 거짓을 식별하다’의 뜻으로 쓰이던 말이다. 그러나 discretio 내지 discernere는 ‘측정하다, 제한하다, 적당하게 하다, 조화를 주다’의 뜻도 가지고,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에 절도와 중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요구로서 종교, 도덕, 철학, 문학, 의학, 정치학, 미술 등 모든 영역에 불가결의 요소였다. “무엇이든지 도를 넘지 말라.” 분별이란 상황을 파악하는 통찰과 예감과 함께 따뜻하고 적극적인 선의, 온화하고 안정된 감정과 행동에로 이끄는 힘을 가진 것이다. 성 베네딕도를 비롯해 그리스도교 저작가의 discretio의 개념 안에는 중용과 절도를 근간으로 한 네 개의 중추덕이 집약된 고전적 윤리사상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추덕이란 현명, 정의, 불굴, 절제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노력의 소산인 자연덕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discretio 개념 안에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 더 높은 완성에 달한 초자연적 덕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구약성서적 계통

 

구약성서 안에는 discretio 개념이 적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 문학 안에는 discretio의 덕을 가리키는 곳이 여럿 있다. 특히 부에 대해서 잠언은 “부가 야훼에 대한 외경이나 가족화합과 함께 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의 씨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또 급하게 재산을 만들려 하지 말라고 전한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자는 벌 받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한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라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8-9). 여기서 보는 것도 “무슨 일이든 도를 넘지 말라”이다. 집회서에는 이런 말도 있다. “하느님은 당신 정의를 자애 깊은 중용으로 부드럽게 해서, 죄인에게 인내를 보이시고, 벌을 주어, 그들이 통회할 때를 주셨다.”(집회 12,10).

 

(3) 신약성서적 전통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와 discretio의 결합은 신약성서에 있어 한 층 더 뚜렷해진다.  이사야서에 있는 야훼의 종의 온정과 자애에 관해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42,3)라는 표현을 마태오 12,20은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다. 에제키엘서에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고, 그가 그 길에서 돌아서 살기를”(33,11) 원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온유한 사람은 땅을 약속 받으리니”(마태 5,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을 거부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며 그들을 태워버리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지나침을 징계하신다(루카 9,55).

 

사도 바오로는 중용의 정신을 장려한다.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몫에 따라 건전한 생각을 품으시오.”(로마 12,3). 바오로의 이러한 일반적 원리는 그리스적 중용의 정신을 초자연적 질서 안에, 즉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은총에 따라 더 정확하게 더 유연하게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친절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립 4,5) 그리고 “때를 선용하시오. 소금으로 맛을 내듯 말을 하여 언제나 호감을 주도록 하시오. 여러분도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아 두어야 합니다.”(콜로 4,5-6)라는 그의 말은 비 그리스도인과 접촉할 때의 discretio를 선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또 바오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사람들을 몰락과 파멸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여러 가지 욕심에 떨어집니다.”(1티모 6,8-9)라고 해서 의식에 있어 discretio를 약간 금욕적 색채로 묘사하고 가르치지만, 또한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티모 5,23)라고 해서 수도생활에 있어서도 중용의 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특히 바오로한테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대목에서 “어떤 이에게는 영을 식별하는 은사가”(1코린 12,10)라는 발언이 있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영을 똑바로 보고, 그것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나 악마한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다. 더구나 그 능력 자체가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단지 인간의 사려분별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가 가르친 윤리가 단지 형식적 금욕주의가 아니며 향락주의나 범용한 중도주의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성령을 통하여 밝혀지는 하느님의 의지에의 절대적 순종에서 성립된다고 하면, 이 바오로의 한 마디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와 수도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4) 교부적 수도원적 전통

 

수도원 전통 안에서 특히 살아난 것은 바오로의 이 발상이었다. 수도제도의 조상 사막의 안토니오의 친구였던 성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의 영을 식별하는 재능을 칭찬하고 있다. 수도자는 기적을 향할 능력을 꼭 필요로 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도 영을 식별하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가 마음의 불안이나, 천사로 변해서 나타나는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는 유혹과 거룩한 발상, 좋은 영과 악한 영을 분별해야 한다. 영혼의 지도자인 포이멘은 똑똑히 말하고 있다. 또한 안토니오의 격언으로서 전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많은 사람이 금욕 그 자체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체적 상황에 맞지 않는 그 무분별, 무계획, 무사려한 강행을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원장 포이멘은 말한다. “많은 사람이 늘 도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무를 찍어 넘길지를 모른다. 다른 사람은 찍어 넘기는 데에 익숙해 있어서 단지 몇 번 찍어서 넘어뜨린다.” 이 도끼야말로 discretio이다. 그것은 수도자가 많은 경우에 그 갖가지 상황을 파악하는 세세한 식별이라고 해도 좋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이야기는 수도자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에서수도자들이 통상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고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먹는다. 그런데 포이멘은 그것을 먹지 않는다. discretio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후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포이멘이지요?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는 답했다. “실례를 용서하시오. 당신들이 고기를 먹어도 아무도 어떤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먹으면 아주 많은 수도자가 보고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그들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말할 것입니다. ‘포이멘이 고기를 먹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먹지 않는다’고.” 거기서 모든 사람들은 그의 discretio를 칭찬했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는 세 명의 수도자가 수도원장 아킬라스에게 그가 손으로 만든 그물을 청한다. 아킬라스는 처음 두 사람에게는 거절하고 셋째 수도자에게 그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평판이 나쁜 수도자였다. 아킬라스는 일부러 까닭이 있는 자에게 수제(手製)의 그물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먼저 두 사람은 원장이 짤 시간이 없었겠다고 생각해서 별로 섭섭해하지 않지만, 셋째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청이 거절되었다고 매우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discretio는 많은 행동의 가능성 안에서, 상황에 따라 최선의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다. 또 엄격함과 관용을 구체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요한 카시아노는 “어떤 것도 discretio에 의하지 않고는 완전할 수 없고, 완성되지 않고, 또 성립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덕의 어머니, 수호자, 지도자이기 때문이다.”라고까지 찬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수도생활에 있어서의 이 덕의 귀중함을 인식하고 “나는 모든 덕 중에서 정점과 수위를 보존하는 discretio의 탁월함과 은혜에 대해 좀더 여러분을 위해 논하고, 그 뛰어난 것의 효용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discretio의 역할은 양 극(極)에서 같은 거에 놓고, 중용이라는 덕으로 인도하고, 올바른 정도의 범위를 넘는 여정을 멀리하는 동시에, 영적 즐거움이나 이환을 일소하는 것이다. 카시아노는 “양 극은 같다.”라는 격언에 호소해서, 과도한 단식과 폭식, 불면과 타면 - 게을리 자는 것 - 은 같은 모양으로 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카시아노는 discretio를 사도 바오로의 전통에 따라 “영적식별”이라는 의미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중용을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외적, 양적 기준에서 중간을 이끌어 내는 평범, 범용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단지 숙련이나 재빠름이나 타개하는 기술도 아니고, 배려에서 생기는 판단과 결의와 행동이다. 이런 뜻으로 discretio는 범용한 덕이 아니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어디서나 파악되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의 선물로서 또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현명한 생각의 선물에 가까운 것으로 봐도 된다. 성령은 마음의 빛으로서 영혼의 속을 비추고, 우리 마음이 판단의 헷갈림, 무지의 밤에 갇히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이 은총의 길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솔직히 마음을 여는 것, 즉 겸손이다. 참된 discretio는 겸손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카시아노는 이 사상을 요약해서 말한다. “discretio는 복음서에서 육체의 눈, 빛, 등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세주의 말씀에 따르면‘몸의 등불은 눈이다. 눈이 맑으면, 당신의 전신이 맑지만, 흐려져 있으면 전신이 어둡다.’”(마태 6,22-23) 그와 같이 discretio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해야 할 모든 행위를 꿰뚫어보고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discretio의 개념과 역사는 첫째로는, 그것이 중용과 절도라는 자연적 요소와 상황에 따라 영을 식별하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초자연적 요소의 종합에서 성립되어 있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는, 그러한 discretio의 조용한 숙고 없이는 참으로 올바르고 조화 있는 내적, 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모든 사회관계는 가족이든 다른 공동체이든, 교육과 일과 친구 사귐에 있어서, 권위와 자유에 기초한 올바른 질서의 기준을 discretio에서 얻기 때문이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러한 개념을 이어 받아 그 훌륭한 결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Ⅲ.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있는 아빠스와 분별

 

베네딕도는 머리말과 73장으로 된 그의 규칙서 안에서 discretio라는 말을 세 번만 사용하고 있다. 제 70장에서 그는 “아빠스로부터 권한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린 사람을 처벌하거나 혹은 분별없이 어린이들에게 화를 내거든 규칙에 정한 벌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처벌의 지나침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이 조금 앞의 문장에서 ‘처벌은 언제나 정도와 이치에 맞게 할 것이다(cum omni mensura et ratione)’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베네딕도는 처벌에 대해서 죄의 올바른 객관적 통찰과 거기에 대한 유효적절한 처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결코 냉정함과 사랑을 결한 거친 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규칙서 제 64장은 아빠스의 선출에 대한 중요한 장인데, 여기서 두 번 discreti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아빠스는 분별있고 절도 있어야 하며,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하여야 한다. 즉,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버릴 것이다.”(창세 33,13). 따라서 모든 덕의 어머니인 이 분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모든 일에 있어 베네딕도는 카시아노의 생각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베네딕도가 그것을 특히 아빠스의 덕으로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서는 아빠스의 규칙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수도원 안에 있어 최고의 장의 지위와 재량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즉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은 아빠스가 그것에 의지해 자기 수도원을 다스려 가기 위한 지침이고, 그 내용은 그의 의향이 수도원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것으로 이상을 삼고 있다. 매일의 수도일정의 편성에 있어서도 빈틈없이 정해져 있는 규칙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규칙의 모든 규정을 획일적이고 법률조문보다는 훨씬 유연성이 풍부하고 아빠스의 분별력에 의한 재량에 맡겨져야 할 면이 극히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규칙에 있어서의 아빠스의 지위와 책무를 더 깊이 규명할 필요가 있다. 제 63장에 있어 수도원의 참된 아버지는 그리스도라고 똑똑히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의 전 존재와 행동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는 대리자는 아빠스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아버지(Abba)요 주님으로 임명되었다. 규칙은 아빠스보다 중요한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그것은 ‘존경할 장로, 성별 되다’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극히 깊은 것이다.) 이 말의 어원은 물론 아람어 Abba이지만,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친밀함이 스민 육친의 아버지라는 뜻이어서, 천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외의 생각에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피하고, 별로 쓰이지 않던 Ab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자신과 천상 아버지와의 연결에 의해,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과 친밀함 그리고 소박함을 가지고 일부러 Abba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뜻을 알아차린 유대인들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다. 이 참으로 하느님이시오 또한 참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모든 사람도 천상의 아버지를, 다음에 그리스도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수도원장도 그 신성 때문에 경외의 대상이면서, 그 인성 때문에 친밀함의 마음을 가지고 부르는 명칭인 것이다.

 

규칙은 두 번이나 아빠스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한다. 그는 신앙의 눈만이 언제나 이 내용을 인정하고 덧붙여서 말한다. 신앙에 의해 비추어진 이성이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한다. 수도원의 참된 주인이요, 아버지이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의 임명에 의해 장상에게 한 순종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라고 한다. 또 장상의 명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빠스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개념은 이중의 오해에 노출될 위험에 처해있다. 첫째는 초자연적 의미에서 합법적 소명과 임명에 의한 것으로 판단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완전히 인간적인 평가 밖에 놓는 태도이다. 이와 같은 극단은 수도원적 전통에서의 이탈이다. 전부터 수도자는 그들의 지도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한테서 개인적인 덕과, 성성, 및 성도들의 공동체를 지도하는 능력과 적성이 요구되는 동시에 아빠스직에의 초자연적 의미에서 합법적 임명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개인적 성성과 통치에의 적성도 뗄 수 없는 것이다. 규칙서 제 7장은 “우리는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말하고 있다. 너의 사사로운 뜻을 피하라”고.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구하기 때문이다.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뜻”을 언제, 어디서든 이룰 수 있다. 확실히 수도승들은 아빠스보다 훨씬 더 쉽게 하느님의 뜻을 채울 수 있다. 이것은 규칙이 당연한 것으로 전하는 태도이다. 이에 대해 아빠스는 무조건의 권능을 가지지만, 또 무조건의 책임도 져야 할 입장에 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의 인식과 실행에 대해서 수도원의 거의 모든 짐을 져야 한다. 규칙은 다섯 번에 걸쳐 그 점을 지적하고, 아빠스는 가장이 양 무리에 너무 적은 이익만을 남길 때, 목자가 벌 받을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규칙서 2장과 64장은 아빠스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64장은 특히 품위 혹은 행위와 현명한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아빠스를 임명하라고 한다. 즉 이것은 discretio를 가능하도록 하고 보장하는 지적이며 도덕적인 전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빠스에게는 자신 뿐 아니라 수도원 전체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특히 discretio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Discretio는 사람들을 옳게 인도하고 다루는 기술이다. “그는 지배하기보다는,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알아야 한다.”(64,8) 명석한 통찰과 올바른 지시가 본질적 사명인 것이다. 각자에게 잘 맞도록 지시해야 한다.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64,12) 따라서 아빠스는 “때에 따라 엄격하게도 하고, 준엄한 스승과 어진 아버지의 정을 드러내야 한다.”고 규칙서 2,24에서 말한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개인적 성성과 통치에의 적성을 겸해서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아빠스에 대해 수도승들은 안정된 보장과 성실한 이해자라는 감정을 가지기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은 가부장한테 기대해야 한다(33,5).

 

따라서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에게 아빠스에게 무조건적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멋대로의 생각이나 권세욕에 의한 지배를 결정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기초에 두고 있다. 물론 수도승들은 사사로운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에 대해서 재빨리 또 자발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따르는 것이지만, 아빠스는 강한 책임의식과 명석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과의 따뜻한 접촉 안에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종적인 결정은 스스로 할 것이지만, 수도승의 충고도 구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규칙서 68장 “어떤 형제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다면”에 나와 있다. 이것은 베네딕도의 discretio가 가장 아름답게 나타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Ⅳ. RB 전반에서 보는 Discretio

 

“성 베네딕도 규칙”은 특히 아빠스의 필수품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요 덕목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Discretio이다. 그런데 이제 규칙 전체의 기본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아빠스와의 직접적인 결부를 상정하지 않아도, 규칙 전체를 일관해서 흐르는 Discretio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 베네딕도가 Discretio를 특히 아빠스에게 강하게 요구하지만, 수도승 전원에게도 그것을 원한 것은 당연하다. 적어도 이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실베스텔 프리에리아스(1456-1523)는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찬양해서 말하고 있다. 이전의 동방 여러 규칙에 비해 “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로마적 예지의 특색과 서구의 도덕적 절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대 성 그레고리오가 밝힌 Discretio의 걸작이다. 또 실용에 있어, 비판자들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건강한 인간의 이성과 관용, 참된 인간적 따스함과 도리에 맞는 절도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민적 교화를 받은 로마인의 법에도, 어떤 시민 사회 안에서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 그레고리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피렌체의 안토니우스(1389-1459) 등은 이 규칙이 직접 성령에 의해 저자에게 불어넣어졌다고 한다. 모든 교황과 군주들은 그 Discretio 때문에 이 규칙을 충분히 칭찬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찬사는 의복과 음식, 금욕, 청빈과 기도의 배분, 권위와 자유의 조화 등 개개의 점을 음미할 때 옳다는 것이 인정된다. 의복은 수도원의 위치한 지방의 상태, 기후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55장). 식사에 대하여서도 자연히 많은 식품을 생산하는 장소에서는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서도 언제나 두 접시는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를 먹을 수 없어도, 다른 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39장). 노동이 심한 경우에 식사는 그만큼 넉넉해야 한다. 식탁봉사자와 식당에서 책을 읽는 낭독자는 식사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간단한 음식을 취할 것을 허락해야 한다(38장). 이와 같은 다정함과 호의는 불평과 기력상실의 위험이 있는 경우에 특별히 나타날 것이다. 규칙은 참된 제자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금욕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원리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수도규칙과 같다. 그도 원죄를 범해서 하느님께 등을 돌린 인간을 하느님께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모습에로 되돌아가도록 교육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태만의 불순종에 의해 멀어졌던 분에게 근면과 순종에 의해 되돌아 와야 한다(머리말). 그렇지만 그는 이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 각 개인이 유일한 균등 목적을 위해 초대되었다 해도, 또한 거기에서 공동생활의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음을 다하기는 하지만,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기계적 획일성을 만들려고는 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그 개성에 따라 영혼을 구한다는 공동목적에 매진해야 했다. 각 사람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교육하는 것이 베네딕도의 목표였다. 그는 극단의 금욕적 이상에 빠져 자기기만의 결과에 떨어지는 악한 폐습을 이미 수비아코에서부터 시작된 수도승들의 지도에 있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수덕적 노동에 수도승을 묶어놓고, 마음의 정화를 차츰 증거하고, 내적 생활에 있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깊이를 더해가도록 바랐다. 이 기본노선과 그것을 상황에 따라 추진해 가는 심적 태도를 그는 Discretio에 구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늘 초심자를 위한 단순한 규칙을 썼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73장). 특히 동방 수도제도에서 자주 보는 무의미하고 비인간적 금욕의 과격함을 그는 피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머리말). 죄를 뉘우치기 위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사슬, 그리고 같은 뜻을 가지고 사용되던 밧줄,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매질하는 편태, 과도한 단식 같은 것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수도승은 여유가 많은 생활에 빠지지 말고 과도하지 않게 정해진 단식을 사랑하고, 포도주에 빠지지 말고, 과식(過食)이나 지나친 잠에 떨이지지 말고, 게으르지 않고, 나아가 지금은 통회의 업으로 된 노동에 언제나 종사해야 한다. “그러나 결점을 고치거나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공정한 이치에 맞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이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라(머리말 47-48).”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수도승에게 요구한 생활양식은, 당시의 경건한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태도와 본질적으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에는 극히 소박한 신자들의 순수하고 복음적인 영성생활이 바로 수도생활이었다. 그러다가 수도생활의 시조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오가 사막으로 가서 극기의 은수생활을 하자 일반신자 생활과 수도생활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베네딕도는 입회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거칠은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위로에 찬 약속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그는 이와 같이 모든 회원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될 금욕을 가능한 한 견디어낼 만한 것으로 하는 한편, 개인이 아빠스의 허락을 받고 엄격한 길을 가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제49장).

 

베네딕도의 Discretio는 자기 영혼을 위해 전념하고자 수비아코에 은둔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침묵에 대한 사랑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침묵이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고 단지 많이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도록만 했다(6장). 더구나 엄격한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손님이 있을 경우에는 접대의 역할을 명령받은 수도승이 손님과 이야기하기를 허락하고 있다(42장). 베네딕도는 매일의 일과에 대해서는 절도를 잘 정하고 있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긴 시간 연속할 경우에는 피로를 낳는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번갈아 하는 것은 모든 수도승들에게 있어 단지 피로를 피하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전인적인 인격을 육성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베네딕도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교대로 배치하고, 그 위에 충분한 잠에 의해 피로를 회복하도록 도모했다. 그의 현실에 따른 인간관에 근거한 훌륭한 Discretio에 의한 배려이다. 그는 동방적인 규정을 배척하고 기도는 짧게 하라(제20장)고 말하고, 성령이 명하시는 때에만 연장하라고 말한다. 즉 하루 일곱 번의 공동기도를 끝낸 다음, 성령의 지시를 받은 개인은 혼자서 기도하기를 연장하면 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특별한 행동을 취하는 경우의 기준은, 단지 길고 짧은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맡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되어 있다. 손님이 많을 경우 주방 책임자에게는 보조원을 주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직무에 대해서도 같다. 그리고 약한 자도 도움을 받도록 정해져 있다(제34장). 물론 병자와 약한 자는 노동의 배당에서 참작되어야 한다(제48장).

 

규칙도 여러 가지 예외를 고려하고 있지만 특히 수도원의 용무로 여행 중인 수도승이 성무일도를 바치지 못하거나, 거주의 규칙을 바꾸어야 할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제50장).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행동이라는 것이 베네딕도의 생각이다. 또 그는 결코 완강하거나 사리에 어긋나지 않다. 여행하는 어떤 수도자가 수도원을 방문해서 얼마동안 지난 후 그 수도원의 생활방식에 대해 이유 있는 비난을 할 때, 아빠스는 하느님이 그를 이 목적으로 보내시지 않았나 하고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제60장). 베네딕도는 밖에서의 자극으로 생기는 생활의 긴장을 열매 있는 것으로 하는 기술도 터득했다.

 

노인, 어린이, 병자에 대한 규칙의 가르침은 사려에 넘친 discretio의 멋진 묘사이다. 어린이와 노인에 대하여 규칙은 신중한 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노인과 어린이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지 마련이기 때문이다.”(제37장). 실로 예리한 심리적 통찰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특히 병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배려해야 한다. 아빠스는 병자를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배려해야한다(제36장). 병자는 쾌적한 방, 목욕의 기회, 좋은 음식, 그리고 특히 경건하고 충실해서 잘 배려할 줄을 아는 간호자를 필요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베네딕도는 히스테릭하고 불만이 많은 병자도 흔히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병자에 대해서도 인내해야한다고 한다.

 

베네딕도는 자연적 질서를 넘는 권위에 의해 수도승들을 교육하기를 희망했다. 그래도 그는 이 권위가 엄격하고 가혹하게 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랑과 관용에 의해 완화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 새로 입회하려는 사람에 대해 엄격한 교사로서 뿐 아니라 호의와 애정에 찬 아버지로서 말을 걸고 있는 것에서 밝혀졌다. 그가 윗사람과 아래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친밀한 사이에 놓는 것으로 양자의 대립은 사라지고, 권위와 자유가 접근했던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정도로 거만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아빠스도 그와 같이 행동한다.

 

다른 장상 특히 경리담당자(당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 “수도승들 중에서 한 사람을 당가로 뽑아야 한다. 그는 지혜롭고 완숙한 인격을 가진 자로 절제 있고, 많이 먹지 않으며, 거만하거나 부산떨지 않으며, 낭비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그는 만일 어떤 형제가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경멸적으로 다루어서 상처를 입히지 말고,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친절한 말은 값비싼 선물보다 낫다.”(지혜 18,17)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형제들에게 정해진 음식을 주어야 한다(제31장). 이 충고를 베네딕도는 수도원의 모든 임원들이 지킬 것을 원하고 있다.

 

discretio 는 특히 벌칙(제23-30장)에서 나타나있다. 이것은 규칙 안에서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베네딕도가 정도가 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해서 썼기 때문이다. 그는 무의식이나, 망각이나, 경솔함에서 생기는 잘못에는 결코 벌을 주지 않는다. 다만 악의에서 생긴, 그래서 중대한 죄만을 특히 다루고 있다. 불순종한 자, 거만한 자, 고의로 규칙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한 번 이어서 두 번 장상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 공적으로 또 모든 이 앞에서 교정을 요구받는다. 도덕적 영향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점점 더 강하게 미쳐야 할 일이다. 이렇게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죄인은 공동의 업무 - 미사성제, 전례기도 - 에서 배제된다. 그런데 베네딕도는 현명하게도 이러한 벌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자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거칠고 둔한 자에게는 체벌을 명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공동생활에서 떨어져 있는 죄인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아빠스는 병든 회원이 치유되도록 열심히 배려하여야 한다. 그가 스스로 죄인을 되돌리는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경우에는 이해심이 깊은 장로를 보내어 죄인을 극도의 슬픔이나 자포자기에서 구해 회개에로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그 위에 이와 같은 도덕적 개선을 목표로 하는 권고나 질책이나 공동생활에서의 추방이라는 처벌은 인내 깊게 재차 되풀이된다. 그래서 정신적 치유의 가능성이 한계에 달했을 때 비로소 병든 한 마리 양이 무리 전체에 병을 옮기지 못하도록 수도원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이 벌칙 전체를 통해 공통된 정신은 첫째로 죄인을 때려눕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및 수도원의 질서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뜻으로 창조적 및 건설적인 것이다. 둘째로 죄의 정도와 벌을 받는 자의 이해에 응해서 처벌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죄인에 대한 벌하는 자의 애정에서 생기는 상세한 마음 씀이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서 discretio가 찬란한 빛을 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은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일관해서 discretio 정신에 의해 파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첫째로는 discretio가 수도원을 무조건으로 통제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의 지도 정신이기 때문이다. 또 둘째는 아빠스가 의지할 규칙의 주요 조항 하나 하나의 기초가 베네딕도의 discretio, 즉 인간과 세계에 있어서의 조화와 질서의 원인인 중용과 절도의 이념 및 각 순간에 그 상황에 따라 성령의 작용하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식별하는 정신적 능력에서 이루어진다. 전자는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정신의 유산이고 후자는 성서와 교부들에 뿌리를 갖는 수도제도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쪽은 자연적 예지의 소산이고, 다른 쪽은 실천생활에 있어 사람을 이끄는 초자연적 성령의 선물이다. 이 양쪽의 종합 위에 discretio는 수도제도의 전통에서 인계되어서, 전체를 꿰뚫는 정신에까지 개화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1) 이것은 일본 동경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상지대학교 중세사상연구소가 펴낸 “성 베네딕도와 수도원 문화”에 실린 사가구지 고기지 교수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2)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교부 문헌 총서 11(분도출판사), 233쪽.

 

[코이노니아 제32집, 2007년 여름, 글 사가구지 고기지, 황춘흥 다미아노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파일첨부

83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