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세계교회ㅣ기타

격동의 현대사14: 가톨릭농민회와 함평 고구마 사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9 ㅣ No.127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14) 가톨릭농민회와 함평 고구마 사건


가톨릭농민회, 농민운동 이정표 세우다

 

 

- 함평군 고구마 생산 농민들이 수매 약속을 어겨 고구마를 썩게 만든 농협에 피해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가톨릭농민회를 주축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농민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제공=가톨릭농민회.

 

 

1976년 11월. 전남 함평군에서 생산된 고구마가 길거리에서 썩어 갔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얼었다 녹았다 하며 썩는 고구마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당시 전남 무안ㆍ해남군과 함께 '3대 고구마 주산지'로 꼽히던 함평군에서 생산된 고구마는 2만5000여t으로, 전년보다 5000t이나 더 많았다. 그 이유는 당시 고구마 값이 30%나 오르면서 농협 측이 그해 9월 '협동으로 생산해 공동으로 판매하자'며 얇게 썰어 말린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고 수매 값을 17.4%나 인상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그대로 믿은 농민들은 한 가마당 300~400원씩 이익을 기대하며 예년보다 더 높은 값을 제시하는 상인들에게도 고구마를 팔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지만 11월 출하시기가 됐는데도 농협 측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사들였을 뿐 전량 수매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많은 고구마가 노천에서 얼고 썩어 들어가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창립 10주년을 맞은 가톨릭농민회는 그해 11월 17일 함평군 내 가톨릭농민회원들을 중심으로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린다. 그로부터 피해보상이 이뤄진 것은 1년 7개월 만인 1978년 4월 29일의 일이다. 이로써 한국 가톨릭농민운동사에 이정표가 세워졌고, 우리나라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사에서도 기억될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농촌 수탈' 상징이 된 함평 고구마 사건

 

농협 측의 부당한 고구마 수매 약속 불이행으로 함평군 고구마 생산농가는 '쑥대밭'이 됐다.

 

당시 농민들의 전체 손해액은 1억4000만여 원으로 추산됐지만, 함평군 일대 1개 읍 4개 면 9개 마을 160가구가 1977년 1월 11일 함평성당에 모여 농협 측에 밝힌 피해신고액은 총 309만 원에 그쳤다. 농협이 고시가격대로 수매하지 않아 발생한 손실금이 280만 원, 수매시기가 늦어져 고구마가 썩어 빚어진 손해가 223포대 29만 원이었다.

 

그럼에도 농협 측은 지정수매원인 이장 등을 앞세워 피해 농가를 찾아다니며 '농협 등 기타 기관에 대해 하등 이의가 없음을 확인합니다'라는 내용의 확인증을 반강제로 받아가는가 하면, 피해보상을 적극 주장하는 이들에겐 대책위에서 탈퇴하라고 회유했다.

 

이처럼 사태 해결이 지지부진하자 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연합회는 1977년 1월 31일 광주가톨릭센터에서 모임을 갖고 '함평군 고구마 생산농가 피해 내막과 그 경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농협의 무책임한 처사를 낱낱이 지적했다. 그럼에도 함평군 농협측은 조합장 이름으로 발표한 '해명서'를 통해 "농협은 전혀 잘못이 없고 책임도 없다"며 고구마 생산 농민들을 우롱했다.

 

가톨릭농민회와 피해 농민들은 이에 4월 22일 광주대교구 계림동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그간 농협 태도를 규탄하고 피해 보상을 촉구했다. 그제서야 당황한 농협은 피해농가 160가구에 15만 원씩 융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의 간접보상을 제안해 왔지만, 대책위원회는 '직접 보상 없이 협상은 없다'며 거부하고 예정대로 윤공희(당시 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주례로 가톨릭농민회원과 사제단 6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기도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미사, 농협 전남 지부장 면담 차례로 진행한 기도회에서 농민들은 "함평 농민의 피와 땀이 뒤범벅된 고구마가 노변에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이야말로 온 농민이 짓밟히는 것이다"며 "농민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가 보상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선언한다.

 

5일 뒤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에서 피해 상황 합동조사단을 파견했다. 이들이 조사한 결과는 놀라웠다. 당초 피해보상대책위가 조사한 피해액보다 훨씬 피해액이 큰 것으로 드러났고, 농협 전남지부장이 TV를 통해 전량수매를 약속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까지 밝혀졌다.

 

농민들은 이 조사 결과에 고무돼 피해보상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농수산부나 농협중앙회는 "계속 연구 중"이라며 사건을 얼버무리고만 있었다.

 

 

309만 원 받기까지 2년 가까이 걸리다

 

가톨릭농민회와 대책위측은 농협이나 정부 당국의 무성의한 처사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건 진상을 공개하고 농협이 조속히 사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당국은 "100만 원을 줄 테니 타협하자"거나 "보상이 곧 확정될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는 식으로 회유하며 사태 해결을 질질 끌었다.

 

사건은 또 다시 해를 넘겼다. 가톨릭농민회는 1978년 전국대의원총회에 함평고구마사건을 특별의제로 상정, 전국 차원에서 피해 보상활동을 전개키로 한다. 그 뒤 전국대책위가 새로 결성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진 끝에 4월 24일 광주 북동성당에서 윤 대주교 주례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단 공동집전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70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전국 규모 기도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이 기도회에서 "농협의 한심스러운 작태에 주인인 농민으로서 뼈저린 부끄러움을 느끼고, 함평 피해 농민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농협의 건전한 발전을 촉구한다"는 취지의 선언문과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농민들은 가두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막혔다.

 

농민 회원과 피해 농민들은 성당 뜰에 연좌하며 요구 사항을 외치고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에는 지도신부단도 동참했다. 농민들이 단식에 들어가자 당국은 4월 27일 신자들의 새벽미사 참례까지 차단, 농민들은 고립 상태에 빠졌다.

 

지도신부단은 당국의 이같은 처사에 전 교회와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해 발송했고, 광주대교구 사제단도 동참을 선언했다. 4월 28일에는 농민회원들이 '전국 회원들에게 보내는 글'을 작성해 발표했다. 단식 소식은 전국에 급속히 알려져 민주인사들의 방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단식 5일째인 4월 29일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럼에도 단식 농민들은 피해보상이 이뤄지기까지 단식을 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에 당국이 손을 들었다. 농협 전남지부 판매과장과 기관원은 이날 피해보상금 지불증과 함께 보상금 309만 원을 가져왔다. 하지만 단식은 끝나지 않았다. 연행된 이상국ㆍ조봉훈 회원의 석방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식 8일째인 5월 1일 광주 남동성당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고, 5월 2일엔 회원 2명이 석방되었다.

 

 

'농민운동 새 장' 연 가톨릭농민회

 

함평 고구마 사건은 정부의 '농산물 저가 정책'과 당시 파행적으로 운영됐던 농협의 폐해가 맞물려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농민의 이익 옹호와 사회적 지위 향상에 앞장서야 할 농협이 농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피해보상 요구를 묵살하고 회유하는 행태가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해온 농정으로 이미 큰 고통을 받고 있던 농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졌고, 농협이 주정회사와 결탁, 고구마 수매자금 80억 원을 유용한 대규모 부정사건이 폭로됐다. 이 사건은 1979년에 터진 '경북 안동 썩은 감자 씨앗 불하사건', YH여공 사건과 함께 유신독재체제 반대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농협과 관의 횡포에 맞선 농민들이 해방 이후 거둔 첫 승리인 이 사건은 우리나라 농민운동사는 물론 민주화운동사에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이 소중한 승리로 힘을 얻은 가톨릭농민회는 농민들과 함께하며 농민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흙과 사람을 살리는 '생명 일꾼'으로서 자연과 하나 되는 농사, 소비자와 함께하는 농업, 국민과 함께하는 농민운동을 지향하며 생명농업과 생명공동체, 도ㆍ농 녹색 교류, 즉 우리농촌살리기운동으로 지평을 넓혔다. 나아가 가톨릭농민회국제연맹과 함께 '식량주권과 농업다양성에 관한 국제협약'을 추진함으로써 생명농업의 세계화에까지 나서고 있다.

 

당시 안동교구 사목국 농민사목부 실무자로 함평 고구마사건에 관여한 정재돈(비오, 54)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은 "함평 고구마사건은 1950년대 이후 최초로 가톨릭농민회를 주축으로 농민조직에 의한 농민투쟁의 첫 성과였으며 농협 민주화투쟁의 시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회고했다.

 

[평화신문, 2009년 4월 19일, 오세택 기자]



1,42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