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라우라(Laura): 팔레스티나 수도승생활 제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6

라우라(Laura) : 팔레스티나 수도승생활 제도

 

 

라우라(laura)란 말은 은수처(은수자의 암자)와 수도원(회수도승 공동체)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형태의 수도승 공동체 조직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런 전문적 의미를 취하기 전에 이 용어는 샛길 또는 소로(小路)를 가리켰다. 수도승 제도 안에서 이 용어는 각 수도승이 자기 개인 암자에서 주간 모임이 있던 중심지역으로 이동했던 소로(小路)를 나타낼 수도 있다. 비록 이 용어가 시장(市場)을 뜻하는 아라비아어와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590년에 에바그리오스 스콜라스티코스(Evagrios Scholastikos)는 ‘라우라’를 “거주처는 다르지만 공동생활로 하느님 사랑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성취하는” 장소로 정의하였다.

 

‘라우라’는 주간 대부분을 각자 분리된 자기 암자나 동굴에서 고독 중에 보냈던 수도승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한 장상 밑에 있었고 일주에 한 번 모였는데, 보통 주말이나 주일에 최소한 성당과 제빵소, 그리고 때때로 창고나 접대실 등 복합시설을 갖춘 중앙건물에 모였다. 보다 큰 ‘라우라’에는 병자들을 위한 진료소나 병실도 딸려있었다. 종종 성당은 다른 건물들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피하기 위해서 따로 떨어져 있기도 했다. 식당에 대한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데, 이는 식사가 매우 단순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후에 이 제도가 변화되어 중앙 종합단지 안에 암자로 나가 생활할 준비를 갖출 때까지 젊은 수도승들이 거주하고 수련자들이 수도승생활을 배우던 온전한 수도원(coenobium)을 포함하게 되었다. 더 진보한 수도승들은 수도원 밖에 있는 암자에서 살았고, 매 주말마다 수도원에 왔다. 이런 종합단지의 전체 규모는 약 1만에서 1만 2천 평방미터까지 이르렀고, 수도승 150명까지 수용했다.

 

주 중에 수도승의 일상은 공동체 전체가 소집되는 여러 기도 시간을 포함하여 완전히 기도와 묵상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승들은 중앙 종합지역 가까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매일의 기도 소집 소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수도승들은 하루 대부분을 시편낭송과 성서독서, 또는 개인기도로 보냈다. 그들은 자주 단순한 손노동을 하며, 대개의 경우 돗자리나 바구니를 짜거나 새끼를 꼬며 기도하였다. 수도승들은 주간 모임을 통해 함께 부활 전례를 거행했고 다음 주간을 위한 양식을 얻어갔다.

 

‘라우라’의 기원은 팔레스티나와 연결된다. ‘라우라’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유명한 수도승생활 중심지들과 팔레스티나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생활양식을 증언하는 많은 원전이 있지만 그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중요하다. 즉 쉬토폴리스(Scythopolis)의 키릴루스가(B.C. 525) 쓴『팔레스티나 수도승들의 삶』과 요한 모슈스(John Moschus, 550-619 또는 634)의『영적 목장』이다. 비록 4세기 초부터 팔레스티나에서 수도승생활이 회수도적 형태와 은수적 형태 모두에 있어 번성했다 하더라도, 팔레스티나 ‘라우라’의 역사는 연대적으로 초기(4세기), 팽창기(5세기), 절정기(5세기 말에서 7세기 ) 그리고 쇠퇴기로 구분될 수 있다. 초기에 카리톤(Chariton)이 팔레스티나로 성지순례를 와서 머물렀는데, 그는 유대에 있는 ‘라우라’ 형태를 띤 세 수도원의 설립자였다. 이후의 성장은 두 명의 위대한 팔레스티나 수도승 에우티미우스(Euthymius, 377-473)와 사바스(Sabas, 439-532)의 공로 덕이다. 에우티미우스는 수도승들의 장상으로서의 직무를 벗고 405년에 순례자로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먼저 파란(Pharan) 지역의 ‘라우라’에 정착했다가 여기를 떠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수도승과 함께 여러 수도원과 ‘라우라’를 설립했다. ‘라우라’ 제도는 에우티미우스의 노력 때문에 주로 중앙 성당보다도 오히려 수도원 주위로 집중되었다. 이후 제라시무스(Gerasimus), 코찌바의 요한(John of Choziba) 그리고 사바스와 같은 ‘라우라’ 설립자들이 그를 추종하였다. 에우티미우스가 지도하던 시기는 또한 유대 수도승들이 예루살렘 교회 설립에 크게 연루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바로 이 둘 사이의 이런 밀접한 관계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수도원들에게 확실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던 반면, 수도승들은 반(反) 칼체돈 공의회파를 거슬러 정통 예루살렘 총대주교들을 돕고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유대 수도승생활의 정점은 5-6세기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423-529)와 유대 수도승생활의 사부 사바스의 지도하에서였다. 이 두 인물은 유대의 모든 수도승에 대한 장상 직무를 분담하였다. 즉, 테오도시우스는 수도원(coenobium)의 장상직을 맡았고 사바스는 ‘라우라’들과 은수자들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사바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거주해 오던 동굴 근처 키드론 계곡의 절벽에 ‘라우라’를 하나 설립했다. 이것이 소위 ‘위대한 ‘라우라’’(Great Laura)의 기원이었다. 사바스 때문에 이 ‘라우라’는 팔레스티나에 있는 모든 ‘라우라’의 중심이 되었다. 이 ‘라우라’는 오늘날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이 위치해 있는 곳과 같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바스는 ‘라우라’의 확산과 왕성한 설립 활동으로 인해 기억된다. 그는 유대 사막 전체에 적어도 10개의 ‘라우라’를 설립했다.

 

이 유대 ‘라우라’들의 기억할만한 특징 하나는 그 국제적인 성격이었다. 이 ‘라우라’들은 거의 모두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소수만이 팔레스티나 본토인이었다. 에우티미우스의 초기 12제자 중 단지 한 명만 팔레스티나 출신이었다. 이 ‘라우라’들에 소속되었던 수도승들 대부분이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게오르기아, 치프루스, 그리스, 이탈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 출신이었다.

 

‘라우라’들의 쇠퇴는 확실히 7세기 초 페르시아인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에 의해서 가속화되었다. 단지 몇 개의 ‘라우라’만이 무사했고 중세 초기까지 남아있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인해 유대 사막에 19개의 ‘라우라’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10개는 절벽 위나 절벽 근처에 건설되었고, 다른 9개는 평지나 고원지대에 설립되었다. 19세기에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재임기간 동안 유대 수도승생활이 잠시 부흥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비록 오늘날 ‘라우라’는 실재하지 않지만, 이 용어는 역사적 중요성과 규모 때문에 어떤 명성을 누리는 몇몇 회수도원들에 부여되었다. 예컨대, ‘아토스 산 위의 라우라’와 같은 수도원이다. 이 관습은 아토스에서 러시아로 옮겨 갔다. 러시아에서 우리는 ‘라우라’ 라고 불리는 몇몇 수도원을 발견할 수 있다.

 

Edward G. Mathews, “Laura” in Encyclopedia of Monasticism vol.1, ed. William M. Johnston, Fitzroy Dearborn Publishers: Chicago and London 2000, 746-747.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76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