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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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에바그리우스의 프락티코스(Praktik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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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5

에바그리우스의 프락티코스(Praktikos)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프락티코스] 소개

 

이 작품은 에바그리우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서 금욕생활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즉, 욕정적인 감정들과 무질서한 충동들을 정화하는 작업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기도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비록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에바그리우스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그노스티코스」와「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와 더불어 하나의 3부작을 이룬다. 에바그리우스는「프락티코스」를「모나코스」(Monachos: 수도승)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한 세기, 즉 100개의 작은 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 자신이 ‘프락티케’라고 부르는 금욕적인 가르침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수도승이 그것을 통해서 ‘아파테이아’를 얻게 되는 길이다.

 

 

[프락티코스] 의 구조

 

머리말 : 수도복에 대한 영적인 해석(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1-5장 : 수도승생활에 대한 요약

6-53장 : 악령들과의 싸움

6-14장 : 여덟 가지 주요 생각들

15-33장 : 여덟 가지 생각들의 치료법

34-39장 : 욕정들에 대하여

40-53장 : 여러 가르침들 - 악령론

54-90장 : 아파테이아에 대한 분석

54-56장 :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

57-62장 : 아파테이아에 가까운 상태

63-70장 : 아파테이아의 징후들

71-90장 : 실천적인 고려들

91-100장 : 교부들의 금언들

맺음말 :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프락티코스] 본문


에바그리우스로부터


머리말

 

[1] 친애하는 형제 아나톨리우스여, 최근에 당신은 거룩한 산에서 스케테에 거주하고 있는 나에게 편지를 써서 이집트 수도승들의 의복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실 당신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의복과 다른 것은 이유 없이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거룩한 교부들로부터 우리가 배운 모든 바를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2] 꾸꿀라는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때려서 상처를 입히려고 애쓰는 자들 때문에 영혼의 가장 중요한 핵심 기관인 이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 안에 어린이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머리 위에 이것을 걸치는 사람들은 힘껏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시편 127,1). 이러한 말들은 겸손을 낳고, 아침에 떠오르는 샛별(Lucifer)(이사 14,12 참조)을 땅에 떨어지게 한 근원적인 악인 교만을 뿌리 뽑습니다.

 

[3] 손의 노출은 그들 삶의 형태가 위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헛된 영광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고 신앙을 몰아내면서 덕들을 숨기고 그늘지게 하는데 있어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당신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않으니 말입니다”(요한 5,44)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선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 자신을 위해서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선의 성취에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행해진 선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는 어떤 것을 하느님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극단적인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4] 십자가의 형태로 그들의 어께를 덮는 스카풀라레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온순한 이들을 일으켜주시고(시편 147,6a 참조),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언제나 그들을 보호하시며, 방해받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십니다.

 

[5] 그들의 허리를 감싸는 띠는 모든 불결함을 몰아내고, “남자는 여자와 아예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1고린 7,1)라고 선언합니다.

 

[6] 그들은 멜로테를 걸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2고린 4,10), 육체의 비이성적인 모든 욕정들에 부리망을 씌우고, 선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의 악들을 제거하고, 가난을 사랑하며 우상숭배의 어머니인 탐욕(골로 3,5 참조)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7] 지팡이는 그것을 붙잡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나무이며, 주님에게서와 같이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확고한 지주(잠언 3,18 참조)입니다.

 

[8] 이상은 수도복이 상징하는 바들입니다. 교부들은 이 수도복을 수여할 때마다 젊은 수도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 아들들이여,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통해 강화되고, 고행은 이 두려움을 강화한다. 항구함과 희망을 통하여 고행은 흔들림이 없게 되고, 그것들로부터 ‘아파테이아’(apatheia)가 얻어지는데, ‘아파테이아’는 사랑(agape)이라 불리는 한 자녀를 갖고 있다. 사랑은 ‘자연학’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다음 ‘신학’이 그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지복’(至福)이 온다.”

 

[9] 거룩한 수도복의 의미와 원로들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수행생활과 관상생활에 관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교부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수행적인 가르침은 100개의 장으로, 그리고 영지적인 가르침은 50개의 장과 다시 6백 개의 장으로 짧게 나누어 요약하였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또는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기 위하여’(마태 7,6 참조) 우리는 어떤 것들은 감추었고, 다른 것들은 모호하게 하여 잘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같은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명해질 것입니다.

 

 

수행에 관한 작품


100개의 장들

 

1. 그리스도교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프락티케’와 ‘프쉬케’, 그리고 ‘테올로지케’로 구성된다.

 

2. 하늘나라는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과 함께 영혼의 ‘아파테이아’이다. 

 

3. 하느님 나라는 정신의 능력으로 확대되며, 부패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정신에 부여하는 성삼위에 대한 인식이다.

 

4.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추구한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또한 분투한다. 만일 모든 쾌락이 그 갈망을 통하여 시작한다면, 갈망은 감각으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욕정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5. 독수도승들을 거슬러 악령들은 노골적으로 싸운다. 반면, 수도원들이나 공동체들 안에서 완덕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거슬러서 그들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부주의한 이들을 무기로 이용한다. 두 번째 전투는 첫 번째 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악령들보다 더 흉포한 사람들이나 혹은 그들의 모든 악한 행위를 동시에 지지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생각들에 관하여

 

6. 모든 생각들을 포함하는 발생론적 생각들은 모두 여덟 가지이다. 첫째는 탐식, 둘째는 음욕, 셋째는 탐욕, 넷째는 근심, 다섯째는 분노, 여섯째는 아케디아, 일곱째는 헛된 영광, 여덟째는 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들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 능력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서 머물러 있느냐 머물러 있지 않느냐, 욕정들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7. 탐식에 대한 생각은 위, 간, 비장, 수종과 오랜 질병, 생존 수단들의 결핍, 그리고 의사의 부재(不在)를 수도승에게 묘사하면서 그로 하여금 금욕적 수행을 즉시 포기하도록 유혹한다. 또한 자주 그에게 이 고통에 떨어진 어떤 형제들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이따금 이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불행을 드러내고 그들이 금욕적 수행으로 인해 그렇게 되어버린 것처럼 이야기 하도록 설득한다.

 

8. 음욕의 악령은 다양한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며,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고행을 통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중단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악령은 불순한 종류의 수행으로 영혼을 굴복시키고 영혼을 더럽히며, 마치 눈에 보이는 그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영혼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듣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9.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 닥치게 될 질병들, 궁핍의 고통,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생필품을 받는데서 오는 수치심을 제시한다.

 

10. 근심은 때때로 갈망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데서 온다. 그것은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 그것이 욕구의 결핍에서 생겨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발생한다. 먼저 어떤 생각들은 영혼을 가정과 부모에 대한 기억이나 혹은 이전의 삶에 대한 기억에로 이끈다. 이제 이런 생각들은 영혼이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따르며, 아직 본성상 단지 정신적인 쾌락들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을 보게 될 때, 영혼을 사로잡아 슬픔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는 영혼이 탐닉해 있던 이러한 생각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사실 그들은 영혼의 현재 삶의 방식 때문에 실재할 수 없다. 그래서 비참해진 그 불행한 영혼은 과거에 대한 생각들에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그만큼 더 의기소침해진다.

 

11. 분노는 가장 격렬한 욕정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불의를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거스른 흥분과 영혼의 동요라 불린다. 그것은 영혼을 하루 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동안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우리에게 떠올리면서 정신을 빼앗는다. 이따금 오래 지속되고 격노로 바뀌면서 밤에 동요와 체력소모, 창백함과 위험한 야수들의 습격을 야기한다. 격노에서 나오는 이 네 가지 결과들은 아마도 많은 생각들을 동반하여 나타난다.

 

12. ‘정오의 악령’(시편 91,6b 참조)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케디아’(?κηδια)의 악령은 모든 악령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 그는 제4시(오전 10시)경 수도승을 공격하여 제8시(오후 2시)까지 그의 영혼을 포위한다. 먼저 그는 마치 태양이 느리게 움직이거나 혹은 멈추어버린 것처럼, 그리고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수도승으로 하여금 눈을 계속해서 창문을 향하도록, 독방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제9시(오후 3시)가 가까웠는지 알기 위해 태양을 주시하도록,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오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도록 강요한다. 그런 다음 다시 수도승에게 그가 머무는 장소와 그가 하고 있는 똑같은 종류의 생활, 그리고 손노동에 대한 염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사랑이 거의 사라졌고, 자신을 위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만일 이 시기에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한다면, 악령은 이 역시 그러한 염증을 증가하는 기회로 사용한다. 그 다음 악령은 필요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또 덜 힘들면서도 더 이익이 많은 노동을 할 수 있는 다른 장소들에 대한 갈망을 그 수도승 안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실상 성서에서 하느님은 모든 곳에서 경배될 수 있다(요한 4,21-24 참조)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장소에 달려있지 않다고 그를 부추긴다. 악령은 또한 이러한 생각들에 부모와 이전의 생활방식에 대한 기억을 결부시킨다. 그는 수도승의 머릿속에 인생은 오래 지속되고 영적 수행들은 매우 수고스럽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악령은 수도승으로 하여금 자기 독방을 떠나 소위 경기장(1고린 9,24 참조)에서 달아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놈을 따라올 악령은 아무도 없다. 반면 영혼이 승리하면 영혼 안에 평화의 상태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1베드 1,8 참조)이 일어난다.

 

13.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은 덕스러운 사람에게 쉽게 숨어 있는 매우 미묘한 생각이다. 이것은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기를 갈망하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게 한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울부짖는 악령들과 치유된 여성들과 그의 겉옷을 만지는 군중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그에게 사제직을 예언하고, 그를 만나려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만일 그가 그들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릇된 길로 빠져 포로가 될 것인지를 그에게 보여준다. 그가 이런 식으로 헛된 희망에 사로잡힐 때, 그 악령은 사라지고 그의 희망에 반대되는 생각들을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교만이나 근심의 악령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에 그를 내어준다. 때때로 그가 포로가 되고 거룩한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를 음욕의 악령에게 역시 넘긴다.

 

14.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끄는 자이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그 자신이 선행들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형제들 중 아무도 자신의 이러한 면모를 몰라주기 때문에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간주하며 그들을 거슬러 거만을 떨게 한다. 분노와 근심이 이 악령에 뒤따라온다. 그리고 악령들 중 마지막은 정신 착란으로서 이것은 허공에 있는 악령들의 무리를 보는 것이다.

 

 

여덟 가지 생각들을 거슬러

 

15. 독서와 밤샘, 그리고 기도는 산만한 정신을 안정시킨다. 굶주림과 수고와 고독은 불붙은 갈망을 잠재운다. 시편낭송과 인내와 자비는 흥분한 영혼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들은 적절한 때와 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극단적으로 행해지거나 혹은 정도 없이 행해진 것은 잠시 동안 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잠시 지속되는 것들은 오히려 해롭고 무익하다.

 

16. 우리 영혼이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감소할 것이다. 사실 포만함은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하며, 반대로 주림은 빵만으로 채우는 것을 복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17. 물의 제한된 섭취는 절제에 큰 도움을 준다.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정복했던 삼백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이에 대해 너를 납득시킨다(판관 7,5-7 참조).

 

18. 삶과 죽음이 같은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사람 안에 사랑과 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사랑은 재물의 파괴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 현세 생활 자체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19. 모든 세속적 쾌락으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은 근심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望樓)이다. 사실 근심은 실재하거나 바라는 쾌락의 결핍이다. 만일 우리가 지상 사물들 가운데 어떤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사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면 바로 거기에 올가미를 놓아 근심을 만든다.

 

20. 분노와 미움은 증오심을 키운다. 동정과 온유는 존재하는 증오심조차 감소시킨다.

 

21. 밤에 악령들이 다가와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다음날의 전투에서 정신을 더 소심하게 하지 못하도록 해가 질 때까지 분노를 품고 있지 말라(에페 4,26 참조). 사실 무시무시한 환상들은 영혼의 동요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동요하는 영혼보다 정신을 더 도망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2. 우리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이 번번이 변명을 하면서 몹시 동요될 때, 바로 그때 악령들은 우리가 근심의 원인들을 해결하기 보다는 동요를 피하도록 우리에게 고독이 아름답다고까지 속삭인다. 그러나 욕망적인 부분이 달구어질 때, 악령들은 반대로 우리를 사교적이 되게 하고, 우리가 거칠고 사납게 되도록 부추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욕망을 느끼는 중에 육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할 필요가 있다.

 

23. 너를 슬프게 한 사람과 마음속으로 다투면서 너 자신을 분노에 대한 생각에 넘기지 마라. 또한 계속해서 쾌락을 꿈꾸면서 음욕에 대한 생각에 넘기지도 마라. 그것은 한쪽으로는 영혼을 어둡게 하며, 또 다른 쪽으로는 욕정을 불붙이도록 영혼을 초대한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너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그리고 기도의 순간에 환상들에 사로잡히고 하느님께 순수한 기도를 바치지 못하면서 너는 즉시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지게 된다. 이 악령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며, 하나의 개의 모습으로 새끼 사슴과도 같은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다.

 

24. 정념적인 부분의 본성은 악령들과 교전하는 것이며, 어떠한 쾌락에 대해서도 거슬러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영적인 쾌락과 그것에 따라오는 지복(至福)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악령들을 거슬러 우리의 정념적인 부분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권고한다. 반면에 악령들은 우리를 세속적인 욕망에로 유인하면서 정념적인 부분에게 본성을 거슬러 사람들과 다투도록 강요한다. 이는 인식에서 혼미해지고 쇠퇴한 정신으로 하여금 덕들의 반역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25. 너 자신을 살펴라(신명 15,9 참조). 이는 네가 형제들 중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떠나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너 자신이 기도의 순간에 언제나 너에게 걸림돌이 될 근심의 악령으로 인해 네 삶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6. 선물은 화를 가라앉힌다. 이에 대해 야곱이 너를 납득시킨다. 그는 선물로써 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왔던 에사오의 호의를 구하였다(창세 32,7 참조). 그러나 가난한 우리들은 식탁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을 보충한다.

 

27. 우리가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눈물과 더불어 우리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위로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위로받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좋은 희망을 심고(2데살 2,16 참조), 거룩한 다윗과 함께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시편 42,5)고 노래한다.

 

28. 비록 꾸며대는 변명들이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유혹의 순간에 독방을 떠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독방 안에 앉아 항구하게 있으면서 용기 있게 모든 공격자들, 특히 ‘아케디아’의 악령을 맞아들여 대항할 필요가 있다. 이 놈은 모든 공격자들 가운데 가장 고약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을 가장 괴롭힌다. 사실 이런 싸움에서 도피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정신에게 무능하고 비겁하며 겁쟁이가 되도록 가르친다.

 

29. 우리의 거룩하고 매우 실천적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날 죽어야 하는 것처럼 늘 그렇게 준비할 필요가 있으며, 반대로 마치 여러 해 동안 육체와 동거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육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실제로 전자는 ‘아케디아’의 생각들을 잘라내고, 수도승을 보다 열심하게 하며, 후자는 그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주고 언제나 한결같은 고행을 유지시킨다.”

 

30.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피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네가 행하는 바 자체가 너에게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올바른 생각들에 반대하는 것은 언제나 악령들만이 아니라, 종종 우리가 빠지는 악습들 역시 그렇다.

 

31. 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이 거의 모든 악령들에 의해서 쫓긴다는 것과 자신을 추적하는 악령들이 몰락할 때, 넉살스럽게 접근하여 수도승의 눈앞에 그의 덕행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32. 인식을 얻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괘락을 그에게 제시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엇이 영적 관상보다 더 큰 것을 그에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 인식을 맛보지 않은 한, 하느님께 우리의 목표,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을 보여드리면서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자.

 

33. 너의 과거의 삶과 너의 옛 잘못들, 그리고 네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하여 ‘아파테이아’로 건너갔는지, 또한 네가 버리고 떠나온 세상이 얼마나 자주 심하게 너를 비참하게 하였는지를 기억하라. 이것을 또한 생각하라: 누가 너를 사막에서 보호하였는가? 누가 너를 거슬러 이를 드러내는 악령들을 몰아냈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들은 겸손을 낳고 교만의 악령을 허용하지 않는다.

 

 

욕정들(passioni)에 관하여

 

34.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욕정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이전에 그 대상들을 욕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우리가 욕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들은 우리에게 욕정적인 기억들을 갖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악령들을 물리친 자만이 그들이 이용하는 것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싸움이 물질적인 싸움 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35. 영혼의 욕정들은 사람들로부터 유래한다. 반대로 육체의 욕정들은 육체로부터 온다. 육체의 욕정들은 고행을 통하여 제거되고, 영혼의 욕정들은 영적인 사랑을 통하여 근절된다.

 

36. 영혼의 욕정들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죽기까지 끈질기다. 반대로 육체의 욕정들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더 빨리 물러선다. 뜨거나 지는 해와도 같은 다른 악령들은 영혼의 한 부분만을 붙잡는 반면, 정오의 악령(시편 91,6b 참조)은 보통 영혼 전체를 움켜쥐고 정신을 억압한다. 이 때문에 독수도승생활은 욕정들의 제거 이후에 감미롭다. 사실 그때 오로지 순수한 기억들만이 있으며, 이제부터 그 투쟁은 수도승을 더 이상 싸움이 아닌 싸움 자체에 대한 관상에 배치시키기 때문이다.

 

37. 욕정들을 일으키는 것은 그 표상인가, 아니면 그 표상을 일으키는 것이 욕정들인가? 이것은 숙고를 요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견해를 취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두 번째 견해를 취한다.

 

38. 욕정들은 감각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만일 사랑과 고행이 있다면, 욕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을 때, 욕정들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은 욕망적인 부분보다 더 많은 치료법들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다(1고린 13,13 참조). 왜냐하면 사랑은 정념적인 부분의 제동기(制動機)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위대한 성인 모세가 자연에 대해서 다루는 중에 ‘오피오마케스’(Ophiomakes)라고 상징적으로 부른 것이다.

 

39. 악령들에게서 악취가 나올 때, 영혼은 생각들을 거슬러 흥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때, 영혼을 괴롭히는 자의 욕정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영혼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르침들

 

40. 모든 상황에서 일상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매순간에 주의하고, 가능한 한 받아들여진 계명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악령들도 이러한 기회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가능성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를 거스른 그들의 욕정으로 악령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것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사실 그들은 병자들이 고통에 대해 감사하고 봉사자들을 향해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또한 악령들은 병자들이 비록 쇠약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고행을 실천하도록 권고하며, 그들이 비록 몸이 무겁다 하더라도, 선 채로 시편을 바치도록 권고한다.

 

41. 우리가 도시이나 마을에서 얼마간 머물러야 할 경우에 세속인들을 가까이 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절제를 유지하도록 하자. 이는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무뎌지고 평소의 주의를 못하게 된 우리 정신이 원하지 않은 무언가를 하게 되고, 악령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망자가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42. 네가 유혹받을 때, 너를 괴롭힌 자에게 분노로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기도하지 말라. 사실 네 영혼은 생각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네가 분노로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한다면, 너는 적들을 통해서 제시된 표상들을 깨뜨려 사라지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분노의 자연적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표상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43. 또한 악령들 간의 차이점들을 알고,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대상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우리의 생각들로부터 우리는 이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악령들 가운데 어떤 놈들이 이따금씩 오면서도 보다 악질적인지, 어떤 놈들이 꾸준하면서도 보다 약한지, 그리고 어떤 놈들이 함께 동시에 들이닥쳐서 정신으로 하여금 신성모독을 하도록 유혹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생각들이 그들의 대상들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또 우리의 상태로부터 너무 멀리 빗나가게 되기 전에, 우리가 그것들을 거슬러 어떤 것을 말하고 또 누가 현존하는지를 알리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쉽게 진보할 것이며, 우리에 대해서 놀라 분개하게 된 그 녀석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44. 만일 악령들이 수도승들을 거슬러 싸우면서 무력해질 경우, 그때 그들은 약간 물러나서 덕들 가운데 어느 것이 소홀히 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거기를 통하여 갑자기 들이닥쳐 불행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45. 사악한 악령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오도록 그들보다 더 사악한 악령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성질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그들은 오로지 영혼의 파멸을 위해서는 일치한다.

 

46. 우리는 정신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모독하고 금지된 것들 - 내가 감히 글로 적지 못했던 - 을 상상하도록 유혹하는 불순한 악령에 의해서 동요되지도 말고, 또 우리의 열정을 무디게 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는 분”(사도 1,24; 15,8 참조)이시며, 우리가 세상에 있었을 때조차도 그러한 광기로 미치지 않았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단념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주 우리 하느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그분을 거슬러 그러한 생각을 했던 분을 향해 감히 손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7. 발설된 어떤 말이건 혹은 어떤 돌발적인 육체의 움직임이건 간에 그것들은 영혼 안에 현존하는 욕정들의 표징이다. 이것을 통하여 원수들은 우리 안에 그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그것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는지, 혹은 우리의 구원을 걱정하여 그것들을 쫓아 버렸는지를 감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정신을 아시며, 또한 그분은 마음 안에 감추어진 것을 알기 위하여 표징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48. 악령들은 세속인들과는 주로 사물들을 통해서 싸운다. 그러나 수도승들과는 더 자주 생각들을 통해서 싸운다. 사실 수도승들은 고독으로 인해 사물들이 별로 없다. 행동으로보다 내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더 쉬운 만큼, 그만큼 내적인 싸움이 사물들을 통해서 행해지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움직이기 쉬운 어떤 것이며, 금지된 상상들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49. 우리는 일하고 철야하며, 계속해서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라”(1데살 5,17)는 법이 있다. 사실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치유하는 앞의 명령들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또한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몸은 그 고유한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한 노고들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기도는 싸움을 위해서 정신을 강하고 순수하게 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 육체 없이도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영혼의 모든 능력들을 이용하여 악령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50. 만일 어떤 수도승이 경험을 통해 잔혹한 악령들을 알고 그들의 기교에 익숙해지고자 한다면, 그로 하여금 생각들에 주의하고, 그들의 격렬함, 그들의 느슨함, 그들의 교착, 그들의 순간들을 관찰하게 하라. 그리고 어느 악령들이 이것 혹은 저것을 하는지, 어떤 악령이 또 다른 악령 뒤에 오는지, 어느 악령이 다른 악령을 따르지 않는지를 주목하게 하라. 또한 이것들의 이유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게 하라. 사실 악령들은 보다 관상적인 방식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하기”(시편 10,2) 때문이다.

 

51. 이 관찰을 통하여 너는 악령들 가운데 둘이 매우 빠르며, 우리 정신의 움직임을 거의 앞지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은 음욕의 악령과 하느님을 모독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악령이다. 그러나 두 번째 놈은 잠시 지체하는 반면, 첫 번째 놈은 만일 그가 일으키는 생각들이 욕정으로 자극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52.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을 결합한 분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것은 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역시 속한다. 사실 우리 교부들은 죽음에 대한 훈련과 육체로부터의 탈출을 ‘아나코레시스’(anachoresis) 라고 불렀다.

 

53. 자신의 육체를 너무 잘 키우는 우(愚)를 범하는 사람들과 육체를 돌보면서 육체의 욕망들을 자극하는 사람들은 육체가 아닌 그들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육체를 수단으로 하여 영혼의 ‘아파테이아’를 획득하였고, 어느 정도 존재들에 대한 관상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창조주의 은총을 알기 때문이다.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54. 악령들이 수면 중의 환상들로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공격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친구들과의 만남, 친척들과의 연회, 여자들의 가무, 그리고 쾌락의 산물들인 비슷한 종류의 다른 모든 광경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환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병들고, 욕정은 강해진다. 다른 한편, 악령들이 정념적인 부분을 괴롭힐 때, 그들은 우리에게 험한 길들을 따라 가도록 강요하며, 거기서 무장한 사람들과 독성이 있는 야수들과 육식성의 맹수들을 만나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짐승들과 사람들로 인해 놀라 달아날 때, 우리는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철야 중에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약들을 사용한다.

 

55. 만일 수면 중에 육체의 자연적인 움직임들이 환상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영혼이 어느 정도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만일 환상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표지이다. 만일 그것들이 불명확한 모습들이라면, 옛 욕정의 표지로 간주하고, 만일 그것들이 분명한 모습을 띤다면, 최근의 공격의 징후라고 생각하라.

 

56. 우리는 낮에는 생각들을 통해서, 밤에는 꿈들을 통해서 ‘아파테이아’의 증거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파테이아’를 영혼의 건강이라고 말한다. 반면, 영혼의 양식은 인식인데, 이는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거룩한 능력들에 결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육체적인 존재들과의 결합은 어떤 유사한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다.

 

 

‘아파테이아’에 가까운 상태에 관하여

 

57. 영혼의 평화 상태가 둘 있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씨앗들로부터 유래하며, 다른 하나는 악령들이 물러감으로써 온다. 첫 번째 상태에는 겸손, 통회, 눈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열망, 그리고 노동을 향한 엄청난 열성이 따른다. 반면 두 번째 상태에는 허영심과 교만이 따르는데, 이는 수도승을 넘어뜨리려 하던 악령들이 사라질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상태의 영역에 항구한 수도승은 악령들의 습격을 보다 더 재빠르게 알아차릴 것이다.

 

58. 헛된 영광의 악령은 음욕의 악령에 반대한다. 그리고 둘 모두 동시에 영혼을 공격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영예를 약속하고, 후자는 불명예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둘 중에 하나가 접근하여 가까이서 너를 압박한다면, 그때 그것에 대립된 악령에 대한 생각들을 네 안에 생기게 하라. 만일 네가 격언처럼 못(걱정)으로 못(걱정)을 쫓아낼 수 있다면, 네가 ‘아파테이아’의 경계들에 가까이 있음을 알아라. 왜냐하면 너의 정신은 인간적인 생각들로 악령들의 생각들을 사라지게 할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을 통하여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거나 혹은 절제를 통하여 음욕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은 가장 심오한 ‘아파테이아’의 증거일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모든 악령들에도 역시 이 방법을 적용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동시에 너는 어느 욕정에 의해서 네가 더 영향을 받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하느님께 두 번째 방법으로 적들을 쫓아달라고 청하여라.

 

59. 영혼이 더 진보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수의 적대자들이 영혼을 거슬러 일어난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동일한 악령들이 영혼 옆에 머무른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유혹들을 보다 빠르게 지각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획득한 ‘아파테이아’가 뒤이은 공격들로 인해 흔들린 것을 보게 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이것을 알 것이다.

 

60. 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수행에 반대되는 모든 악령들을 거슬러 승리한 이후에 영혼 안에 온다. 반면, 불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여전히 영혼과 싸우는 악령의 능력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61. 만일 정신이 그 내면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정신은 진보하지도 또 이 아름다운 이주(移住)를 완수하여 비육체적인 존재들의 영역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적인 동요는 정신으로 하여금 그가 남겨두고 떠나 온 것들에 습관적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62. 덕들이건 악들이건 간에 그것들은 정신을 눈멀게 한다. 덕들은 악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악들은 덕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아파테이아’의 징조들에 관하여

 

63. 정신이 분심 없이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 때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 주변에서 온갖 전투가 밤낮으로 일어난다.

 

64. 정신이 그 고유의 빛을 보기 시작하고, 잠자는 중에 나타나는 현시들 앞에서 고요히 머물며, 침착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파테이아’의 증거이다.

 

65. 정신은 기도의 순간에 이 세상 사물들 중 어떤 것에 관해서도 상상하지 않을 때, 활기에 가득 차게 된다.

 

66.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행을 잘 완수하여 인식에 가까워진 정신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정신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그것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67. ‘아파테이아’를 소유한 영혼은 단순히 변화하는 사건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 영혼이 아니라,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 앞에서도 역시 동요되지 않는 영혼이다.

 

68. 완전한 사람은 고행을 실천하지 않고, 욕정에 초연한 사람은 인내를 훈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내는 욕정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것이고, 고행은 충동들로 고통 받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69.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분심 없이 시편을 낭송하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70. 자신 안에 덕들을 확립하고, 그것들에 완전히 혼합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 혹은 형벌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고, 탁월한 상태가 그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한다.

 

 

실천적인 고려들

 

71. 악령의 노래들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들 속으로 던져 넣는다. 시편들과 찬가들과 영가들(에페 5,19 참조)은 끓어오르는 우리의 정념을 식히고 우리의 욕망들을 끄면서 정신을 덕행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에로 초대한다.

 

72. 만일 공격을 하고 또 공격을 당하는 것이 싸움꾼들의 일이라면, 악령들 역시 우리를 거슬러서 싸울 경우, 우리를 공격하는 그들 역시 우리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사실 시편저자는 말하기를 “내가 때려눕히니, 원수들은 발밑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시편 18,38), 또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시편 27,2) 하신다.

 

73. 안식은 지혜에 연결되는 반면, 노고는 현명함에 연결된다. 왜냐하면 전투 없이 지혜를 얻을 수 없고, 현명함 없이 그 전투를 잘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영혼의 능력들이 본성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하면서, 그리고 지혜의 길을 준비하면서 악령들의 적의(敵意)에 대항하는 역할이 이 현명함에 맡겨졌다.

 

74. 수도승의 유혹은 정신을 어둡게 하는 생각인데, 이것은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통해서 올라온다.

 

75. 수도승의 죄는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것이다.

 

76. 천사들은 악이 감소할 때 기뻐하고, 악령들은 덕이 감소할 때 기뻐한다. 사실 전자는 자비와 사랑에 봉사하고, 후자는 분노와 증오에 복종한다. 천사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를 영적인 관상으로 채우는 반면, 악령들은 가까이 다가와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들 속으로 던져 넣는다.

 

77. 덕들은 악령들의 공격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사하도록 지켜준다.

 

78. 수행은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이다.

 

79. 계명들에 대한 단순한 실천은 만일 그것들에 부합하는 관상들이 정신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혼의 능력들을 완전하게 치유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80. 천사들에 의해서 우리 안에 불어 넣어진 모든 생각들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악령들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모든 생각들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다. 앞의 생각들에는 평화의 상태가 따르고, 뒤의 생각들에는 동요의 상태가 따른다.

 

81. 사랑은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다. ‘아파테이아’는 수행의 꽃이다. 수행은 계명 준수로 이루어지며, 계명들의 파수꾼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고, 이는 참된 신앙에서 나온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의 내재적인 선으로서 이는 하느님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도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82.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작용하면서 병든 지체들을 감지하는 것처럼, 정신 역시 마찬가지로 그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능력들을 알게 되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을 통하여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계명을 발견한다.

 

83. 정신은 욕정들을 거슬러 격렬하게 싸우기 때문에 그 싸움의 이유들을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신은 밤에 싸우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신이 ‘아파테이아’를 획득하게 되면, 적들의 술책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84. 수행의 목표는 사랑이고, 인식의 목표는 신학이다. 수행의 시작은 신앙이요, 인식의 시작은 자연에 대한 관상이다.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공격하는 악령들은 수행에 반대된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부분을 괴롭히는 것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진리의 적들이자 관상의 적대자들이라고 말한다.

 

85. 육체를 정화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육체가 정화된 후에 육체와 함께 남아 있지 않지만, 덕들은 모두 함께 영혼을 정화하며, 정화된 후에도 여전히 영혼 안에 머문다.

 

86. 이성적인 영혼은 그의 욕망적인 부분이 덕을 열망하고, 정념적인 부분이 덕을 위해 투쟁하며, 이성적인 부분이 존재들에 대한 관상을 지각할 때,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87. 수행에서 진보하는 자는 욕정들을 감소시킨다. 관상에서 진보하는 자는 무지를 감소시킨다. 그런데 욕정들의 경우, 어느 날 완전히 파괴될 때가 올 것이지만, 무지와 관련해서는 어떤 이는 거기에 끝이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88. 그 사용 방법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사물들은 덕들이나 혹은 악들의 생산자들이다. 이 두 목적들 중 하나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사용하는 것은 현명함에 속한다.

 

89.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에 따르면, 이성적인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덕이 이성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현명함, 지성, 지혜로 불리고, 욕망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는 절제, 사랑, 극기로 불리며, 정념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는 용기와 인내로 불린다. 전체 영혼 안에 있을 때는 정의라 칭한다. ‘현명함’의 역할은 적대적인 힘들을 거스른 작전들을 지휘하고, 덕들을 보호하며, 악들을 거슬러 대항하고, 상황에 따라서 중립적인 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지성’의 역할은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위해 공헌하는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지혜’의 역할은 육체적 존재들과 비육체적 존재들의 이유들을 관상하는 것이다. ‘절제’의 역할은 우리 안에 이치에 반하는 상상들을 일으키는 대상들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의 역할은 설사 악령들이 그를 타락시키려 노력할지라도 하느님의 모든 형상들에 대해 그 원형(原形)에게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극기’의 역할은 입의 모든 쾌락을 기꺼이 거절하는 것이다.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들 앞에서 용감하게 굳건히 머무는 것은 ‘인내’와 ‘용기’의 역할이다. ‘정의’의 역할은 영혼의 이 부분들 사이에 일종의 조화와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90. 씨앗들의 산물은 곡식단이고, 덕들의 산물은 인식이다. 씨 뿌리는 노고에 눈물이 따르는 것처럼, 곡식단에는 기쁨이 따라온다(시편 126,5-6 참조).

 

 

거룩한 수도승들의 금언들

 

91. 올바른 방법으로 우리를 앞서간 수도승들의 길들을 살펴보고, 그 길들을 참조하면서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언급된 혹은 행해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가운데 다음의 말이 있는데, 이는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말하는 바이다. “사랑에 연결된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식이요법은 수도승을 ‘아파테이아’의 문으로 보다 빠르게 인도한다.” 그 수도승은 밤에 고통을 당한 한 형제에게 환자들에 대한 봉사를 단식에 부가하라고 명령하면서 그를 환상들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욕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92. 당시의 현자들 가운데 하나가 의로운 안또니우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 사부님, 책들의 위로가 없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안또니우스가 대답했다. “철학자여, 나의 책은 창조된 존재들의 본성이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들을 읽고 싶을 때, 그 책은 거기에 있소.”

 

93. “선택된 도구”(사도 9,15)인 이집트인 원로 마카리우스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 영혼의 기억력을 사라지게 하고, 반면 악령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 무사합니까?” 나는 대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정념적 부분의 본성에 반대되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그 본성을 따르기 때문이오.”

 

94. 한 낮에 나는 거룩한 사부 마카리우스를 방문하였다. 매우 심한 갈증으로 목이 탄 나는 그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늘로 만족하시오. 왜냐하면 지금 걷거나 항해 중인 많은 사람들 역시 물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고 나서 내가 그에게 극기에 관해서 논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내 아들이여, 용기를 가지시오. 나는 20년 동안 꼬박 빵도 물도 잠도 충분히 취하지 않았소. 사실 나는 내가 먹은 빵을 달아 보았고, 내가 마신 물을 측량해 보았으며, 벽에 등을 기대면서 선잠을 피하였소.”

 

95. 어떤 수도승이 자기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고 자기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지 마시오. 내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시오.”

 

96. 어떤 형제가 원로들 가운데 하나에게 그가 자기 집을 방문할 경우,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식사해도 좋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원로가 대답하였다.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마시오.”

 

97. 어떤 형제가 오로지 복음성서 하나만을 소유하였다. 그는 이것을 팔아 그 돈을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내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기억할만한 말을 하였다. “나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마태 19,21)라고 나에게 말한 바로 그 책을 팔았소.”

 

98. 알렉산드리아 주변, 마리아(Maria)라고 부르는 호수의 북쪽 편에 위치한 섬이 하나 있다. 거기에 한 수도승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는 신비가들의 무리 가운데서 가장 경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도승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 본성, 습관, 필요성, 손노동, 이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 덕은 본성상 하나이지만, 그것은 영혼의 능력들 각각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형태를 취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실 태양 빛은 형태가 없지만, 그것이 들어오는 창문으로부터 자연적으로 그 형태를 취한다.”

 

99. 수도승들 가운데 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만일 내가 쾌락들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의 모든 구실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사실 나는 정념적 부분이 언제나 쾌락들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과 내 정신을 혼란시키고 인식을 쫓아버린다는 것을 안다.”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사랑은 음식이나 돈 창고를 지키는 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같은 문제로 두 번씩이나 악령들에 의해서 속았다는 것을 모른다.”

 

100. 모든 형제들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두를 초연하게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사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거룩한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원로들을 천사들처럼 공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투를 위해 우리에게 기름을 바르고, 들짐승들로부터 물린 상처들을 치유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친애하는 형제 아나톨리우스여, 이것이 지금 수행에 관하여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무르 익어가는 포도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수확한 전부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태양”(말라 3,20)이 우리 위에 강렬히 빛나고 그 포도송이가 익을 때, 나를 심었던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와 지금 나에게 물을 주는 거룩한 교부들의 기도와 중재를 통하여, 그리고 나를 자라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1고린 3,6-7 참조)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시편 104,15) 포도주를 또한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 영원히. 아멘(1베드 4,11; 묵시 1,6 참조).

 

 

[프락티코스]의 가르침

 

[프락티코스](Praktikos)란 에바그리우스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금욕생활 혹은 수행생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프락티케'(praktike)란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들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1. 프락티케(Praktike)의 정의

 

에바그리우스의 영적인 가르침은 ‘프락티케’와 ‘퓌시케’, 그리고 ‘테올로지케’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며, 뒤의 두 가지는 ‘그노스티케’를 형성한다. ‘프락티케’는 바로「프락티코스」의 중심 주제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은 곧, ‘프락티케’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개념을 공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프락티케’는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으로 정의된다. 그것의 목적은 ‘아파테이아’에 이르는 것이며, ‘아파테이아’는 영적 인식에 필요한 조건이다.

 

희랍 철학자들에게 있어 ‘프락티코스’란 말마디는 언제나 이교적인 성격을 띤 어떤 활동과 관련된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루스에 의해서 최초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활동에 연결된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흔히 ‘프락티코스’를 ‘활동 생활’로, 그리고 ‘테오레티코스’(thoretikos)를 ‘관상 생활’로 규정짓는다. 오리게네스는 이 두 삶이 마르타와 마리아에 의해서 상징화된다고 보았는데, 곧 마르타는 활동생활을, 마리아는 관상생활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두 삶이 서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프락티코스’와 ‘테오레티코스’는 더 이상 서로 독립된 두 가지 활동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영성생활의 두 측면을 반영한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며, 전자는 후자에 종속되고 직접 거기로 정향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역시 필루스와 오리게네스의 전통을 받아들여 ‘프락티케’를 영성생활의 두 단계 중 첫 번째 단계로 이해하였다.

 

에바그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이 용어의 발전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플라톤은 손노동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스토아학파는 보다 특별하게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에게 이 단어를 적용하였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 이 단어는 ‘활동생활’을 지향하는 성직자들과 영적인 통치 임무를 맡은 주교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가 ‘프락티코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수도승이며, 더 정확하게는 독수도승을 뜻한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이며, 인간적인 일들에 종사하기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적인 역할들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관상에 전념하고 ‘헤시키아’(hesychia)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실제로「프락티코스」안에서 언급된 가르침은 회수도승들이 아닌, 독수도승생활이나 반(半)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를 에바그리우스 이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활동적’ 혹은 ‘활동생활’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프락티케’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어떤 면에서 ‘프락티케’는 ‘덕들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그것은 서로 연결된 다섯 가지 덕들을 향한다. 예컨대, 신앙,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절제, 인내, 그리고 경험이다. ‘아파테이아’를 앞서는 이 다섯 가지 기본 덕들이 ‘프락티케’를 구성한다.

 

하지만, ‘프락티케’는 무엇보다 ‘로기스모이’(logismoi), 곧 ‘악한 생각들’을 거스른 싸움이다. 그것은 주로 ‘악한 생각들’을 거스른 싸움으로 이루어진다. 사실상 ‘프락티케’의 차원에서 ‘로기스모이’는 무엇보다도 악령들이 일으킨 악한 생각들이며, 수도승은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그것들을 거슬러 싸운다.

 

 

2. 여덟 가지 생각들과 그 순서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의 작품들 안에서 악한 생각들에 대한 분석과 그것들을 극복하는 방법들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프락티코스」는 특별히 여덟 가지 주요 악한 생각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그것들 각각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악한 생각들’은 ‘악령들’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각각의 ‘생각’(loghismos)에는 그에 부응하는 악령이 있다는 것은 에바그리우스 이론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어떤 생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에 부합하는 악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도승의 진정한 싸움은 악령들 자체와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생각들은 수도승을 괴롭히기 위하여 악령들이 사용하는 수단들이다. 한편, 수도승은 악한 생각들과 싸워 그것들을 정복함으로써 그것들 반대편에 있는 참된 덕을 발견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여덟 가지 생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생각들을 포함하는 발생론적 생각들은 모두 여덟 가지이다. 첫째는 탐식, 둘째는 음욕, 셋째는 탐욕, 넷째는 근심, 다섯째는 분노, 여섯째는 아케디아, 일곱째는 헛된 영광, 여덟째는 교만이다.” 이 생각들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분석은 예리하며 실천적인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생각들은 어느 정도 경험에서 오는 논리적 순서를 따르고 있다. 예컨대, 음욕은 식욕을 채운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그리고 만일 누가 돈을 사랑하고 그것을 모으는데 실패하게 되면 그는 슬프거나 분노하게 된다. 헛된 영광과 교만은 다른 생각들을 거스른 싸움에서 이긴 수도승에게 위협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체계적인 형태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에바그리우스는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영적 진보의 순서에 따라 여덟 가지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처음에 언급된 탐식과 음욕은 수도승이 초기에 거슬러 싸우는 것들이다. 분노와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무엇보다도 수도승이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에서 유래하는 생각들을 쳐부수면서 ‘아파테이아’의 낮은 경계들에 도달할 때, 맹위를 떨친다. 헛된 영광과 교만의 악령들은 무엇보다도 다른 악령들이 물러갈 때, 모습을 드러내며, ‘프락티케’에 진보한 수도승을 더욱 더 공격한다. 이러한 분류는 전통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3. 악령들

 

우리는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로기스모이’와 악령들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이 두 말마디는 자주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악령들은 그들 고유의 실재와 인격을 지닌 구분되는 존재들이다. 악령론은「프락티코스」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락티케’는 주로 ‘생각들’을 거스른 싸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생각들’은 단지 수도승들을 거슬러 싸우기 위해 악령들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사실 실제의 적은 악령들이다. 금욕생활은 본질적으로 악령들과의 싸움이다. 이 점에서 에바그리우스는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다음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권력과 권세의 악신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에페 6,12).

 

이 전통적인 개념은 사막 수도승 영성 안에 하나의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즉 사막은 특별히 악령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거기로 물러나는 수도승은 악령들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안또니우스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로서「프락티코스」5장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사막에서의 금욕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악령들을 거스른 싸움이며, 따라서 수도승은 악령들을 거슬러 싸우는 사람이다. 수도승이 ‘프락티케’의 끝에 이를 때, 그에게 승리가 주어진다.

 

이 전투에서 악령들이 선호하는 전술은 속임수이다. 그들은 급습하기 위하여 자주 패배하여 퇴각한 것처럼 가장한다. 악령들은 수도승들과의 싸움에서 보통 영혼의 상태를 살피곤 한다. 실제로 그들은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실뿐이다. 악령들은 외적인 표지들을 관찰하는 일 외에 영혼의 움직임들을 알 수는 없다.

 

수도승들 역시 관찰을 통해서 악령들과 그들의 술책을 아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이 관찰은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악령들 자체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에 대한 관찰이다. 관찰에 토대를 둔 이러한 경험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수도승은 ‘프락티케’ 안에서 진보하면서 ‘로고이’(logoi, 이유들)에 대한 관상에 바탕을 둔 참된 학문인 보다 높은 인식에로 들어 높여지게 된다.

 

「프락티코스」에서 이 싸움이 묘사될 때, 악령들은 특별히 ‘프락티케’에 반대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아파테이아’를 획득한 수도승이 영적 인식을 얻게 될 때,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정신을 잃게 하고 관상을 방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다른 악령들의 표적의 대상이 된다. ‘프락티케’에 반대되는 악령들의 모든 활동은 수도승으로 하여금 ‘프락티케’의 끝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영혼 안에 욕정들이 거주하는 부분을 공격하고, 생각들을 통하여 욕정들을 자극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욕정들과 생각들과 악령들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즉, 악령들은 생각들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생각들이 오래 머물 때, 우리 안에 욕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악령들이다. 욕정들을 일으키는 이런 구조에 대항하기 위하여 생각들이 우리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수도승은 생각들에 대한 깨어 있음과 유혹을 받는 즉시 그것을 몰아내려는 열성을 통해서 그를 거스른 악령들의 행위를 무력화시키며, 더 이상 어떠한 욕정도 작용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게 된다.

 

 

4. '아파테이아'(apatheia)

 

‘아파테이아’(영적 태만 혹은 영적 무기력)는 ‘프락티케’(수행)의 꽃이다(81장 참조). ‘프락티케’를 실천하는 사람은 훌륭한 문인 ‘아파테이아’로 인도된다(91장 참조). 제54장부터 시작되는「프락티코스」후반부 전체는 주로 ‘아파테이아’에 대해서 다룬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두 분분으로 나누어진 이 작품의 본질적인 주제처럼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 번째 부분(1-53장)은 욕정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즉 적절한 치료제들의 도움으로 악령들이 일으키는 생각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아파테이아’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두 번째 부분(54-90장)은 ‘아파테이아’가 무엇인지를 묘사하고, 거기에 다가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표지들을 가리킨다. ‘아파테이아’는 에바그리우스의 금욕적 가르침의 핵심 개념이다.

 

이 개념과 용어 자체는 강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성 예로니모에게 심한 반발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예로니모는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아파테이아’를 하느님에게 고유한 ‘무죄성’으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는 스토아학파에 따라 ‘아파테이아’를 ‘영혼의 건강’으로서 정의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파테이아’는 영혼을 구성하는 세 부분이 치유되어 각각이 본성에 따라 움직일 때 얻어진다(86장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사실 철학 전통으로부터 영혼의 세 부분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영혼의 이 세 부분은 ‘이성적 부분’, ‘정념적 부분’, 그리고 ‘욕망적 부분’이다. 첫 번째 부분과 뒤의 두 부분 사이에는 기원상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성적 존재의 본질 자체인 정신은 처음에 순수하고 비육체적으로 창조되었지만, 후에 타락하여 하나의 육체를 입게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뒤의 두 부분을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부분은 영혼의 질병인 욕정들에 사로잡히는 부분이다. ‘프락티케’는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이다(78장 참조). 이 정화가 이루어질 때, 정신은 더 이상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으로부터 올라오는 생각들에 의해서 혼미해지지 않게 된다(74장 참조). 그리고 그때 영혼은 그의 자연적인 활동에 방해 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파테이아’는 ‘덕스러운 상태’와 같다. 왜냐하면 덕을 영혼의 건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각 부분 안에 그에 고유한 덕들이 지배한다. 이성적인 부분 안에는 현명함, 지성, 지혜가, 욕망적인 부분에는 고행, 사랑, 절제가, 정념적 부분에는 용기와 인내가 다스린다. 그리고 영혼 전체 안에는 정의가 지배하는데, 그 역할은 영혼의 부분들 간에 일종의 일치와 조화를 실현하는 것이다(89장 참조). ‘아파테이아’는 정확하게 영혼의 세 부분들 각각이 자기 본성에 부합하는 하나의 활동을 가질 때, 이 세 부분들 사이에 확립된 이러한 조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에바그리우스가 생각하는 아파테이아는 영혼의 욕정들(thumos: 영혼의 정념적인 요소)와 육체의 욕정들(epithumia: 육체의 욕망적인 요소)에 대한 억압이 아니다. 사실 영혼의 이 부분들은 그것들이 의지해 있는 육체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아파테이아를 유지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창조주가 타락한 정신들에 하나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그들의 선익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들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육체는 ‘프락티케’의 실천과 감각적인 인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인간은 감각적 인식으로부터 영적인 인식에로 들어 높여질 수 있다. 인간이 ‘프락티케’에 충분히 진보할 때, 육체는 악령들을 거슬러 싸우는 정신을 위한 피난처가 된다. 따라서 에바그리우스는 육체의 건강을 해치는 지나친 금욕을 피하고 중요을 지키도록 권고한다(29장, 91장 참조).

 

‘아파테이아’의 표지들은 특별히 54-70장에서 보다 더 상세하게 언급된다. '아파테이아’의 표지는 무엇보다도 생각들로 인해서 더 이상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이 복된 ‘아파테이아’는 항구하게 ‘프락티케’에 전념하는 수도승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러나 ‘아파테이아’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보다 높은 목적인 영적 인식을 향하고 있다. 사실 ‘아파테이아’ 없이 영적 인식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1-3장; 머리말 8 참조).

 

 

에바그리우스의 생애

 

우리가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그의 제자였던 빨라디우스(Palladius, 363-423)가 저술한「라우시우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이다. 이 책은 에바그리우스가 죽은 지 약20여년이 지난 420년경에 쓰였는데, 이 책 제38장에서 빨라디우스는 에바그리우스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빨라디우스에 의하면, 에바그리우스는 345년경 뽄뚜스(Pontus)의 이보라(Ibora)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보라의 사제였다. 이보라는 성 바실리우스의 소유지였던 안네시(Annesi) 근처였으며, 이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에바그리우스는 그 유명한 까빠도치아(Capadocia)의 교부들과 일찍부터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357-358년에 성 바실리우스(St. Basilius, 328-378)와 그의 동료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 329-390)는 안네시로 물러나 수도승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독서직을 받고, 379년에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에바그리우스는 바실리우스가 죽자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가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뜻한다. 그 후, 380년에 그는 고향을 떠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에바그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중에 주교들과 함께 하였고, 모든 이단을 거슬러 싸워 승리하였다. 이는 에바그리우스가 성서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지혜로써 모든 이단을 공박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이러한 능력이 콘스탄티노플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에바그리우스는 결국 교만의 유혹에 빠지게 되었고, 아울러 여성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악령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한 고관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꿈을 통해서 이 일로 인해 자신이 당하게 될 모든 어려움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탈출하여 올리브 산에 있는 루피누스(Rufinus, 345-410)와 멜라니아(Melania, 342-410)의 수도원에 피신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거기서 몇 개월을 보냈다. 빨라디우스에 의하면, 이 수도원은 도시 안에 있었는데,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오면서 했던 결심들을 즉시 잊어버리고 자주 외출하여 젊은 여성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질병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여섯 달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그를 완전히 쇠진시켰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 병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멜라니아는 그 병의 주도권은 바로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결국 하느님께 의탁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로 가서 수도승이 될 것을 하느님께 약속하였다. 그러자 며칠 후에 그의 병은 기적같이 치유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멜라니아로부터 수도복을 수여받고, 383년에 이집트로 갔다. 그는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50km 남동쪽에 위치한 니트리아(Nitria)에서 2년 동안 생활하였다. 그 후, 사막으로 더 깊이 나아가 이집트 수도승생활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켈리아(Kellia)에서 죽을 때까지 14년간 생활하였다.

 

켈리아는 니트리아에서 약 1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켈리아 수도승들은 반(半)은수생활을 하였고 각각의 암자에서 생활하였다. 각 암자들은 서로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일정 거리 떨어져 있었다. 수도승들은 자신의 암자에서 주간 내내 머물렀고, 매일 손노동을 하면서 성서의 구절을 암송하였으며, 하루에 한 번 소금과 기름으로 양념된 약간의 빵을 섭취하였다. 토요일 저녁에 모든 수도승들이 성당에 모여 함께 아가페 식사를 하였고 주일 전례를 거행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의 사제인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Macarius d'Alessandria, 4c)와 또한 스케테(Scete)에서의 수도승생활 창시자인 이집트인 마카리우스(Macarius l'Egiziano, 300-390)도 알고 있었다. 루피누스는「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Historia Monachorum)에서 에바그리우스를 “복된 마카리우스”의 제자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에서 필사가로 일하면서 약간의 빵과 소금과 기름으로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원고들을 필사하고 또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저술하였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수도승들 가운데서 에바그리우스는 지적인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식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스스로 매우 작은 자가 되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의 적대감을 침묵으로 인내하였다.

 

에바그리우스는 매우 깊은 학식과 통찰력을 지닌 수도승으로서 빨라디우스가 에바그리우스의 ‘형제회’ 혹은 ‘동료들’이라고 불렀던 탁월한 수도승 무리의 지도자였다. 이 수도승들은 오리게네스의 우의적인(allegorical) 성서주석에 깊이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지나친 열성과 무분별로 인해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왜곡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리게네스가 단지 가능성으로만 제시한 내용들을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인 양 주장하였다. 그 결과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접하지 못했을 뿐더러, 대부분이 신인동형론(Antropomorphism)자들이었던 단순한 수도승들에게는 그들의 주장과 가르침이 마치 이단처럼 들렸다. 이것은 마침내 오리게네스 논쟁을 야기했다. 이 논쟁은 400년에 시작되어 오리게네스의 제자들이었던 켈리아 출신의 이 수도승 무리가 이집트로부터 추방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논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 399년에 사망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4살이었다.

 

 

에바그리우스 사상의 핵심 주제들


1. 이성적 존재들

 

1) 정신의 원(原)창조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원래 당신 모상에 따라 이성적 존재들(loghika)을 창조하셨는데, 그들은 순수 정신(nous)들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정신의 창조 목적은 바로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정신들은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있어서나 또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어서나 서로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는 ‘정신’이란 용어로써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영혼과 육체로 된 정신

 

에바그리우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원(原) 타락을 이야기 한다. 그에 의하면, 창조 이후, 원래의 순수 정신은 하느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정신의 타락), 그 결과 육체와 결합된 하나의 영혼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순수 정신이 아니고 육체와 영혼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의 실제 조건은 처음 창조된 때와는 달리 육체에 결합된 하나의 영혼을 지닌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타락의 정도에 따라 크게 천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악령들과 같은 세 가지 범주의 타락한 정신들이 있다고 보았다.

 

이 세 범주의 타락한 정신들은 모두 영혼과 육체로 혼합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 다른 형태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의 조건은 천사들의 조건과 동시에 악령들의 조건에도 연결되어 있다. 천사들은 우리의 친구들로서 우리가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반면, 악령들은 우리를 악에 떨어지게 하는 우리의 적들이다.

 

 

2. 영혼의 세 부분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인간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the rational part)과 ‘정념적(감정적)인 부분’(the irascible part), 그리고 ‘욕망적인 부분’(the concupiscible part)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의 이런 삼중 구분은 희랍 철학 전통, 특별히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에바그리우스 인간학의 주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영혼은 타락한 정신을 구원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성적인 부분’은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서 타락한 정신의 직접적인 연장(延長)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인 부분’을 통해서 정신은 여전히 그 본래의 능력(본질적인 인식)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흔히 ‘욕정적인 부분’(the passionate part)으로 통칭해서 부르는 ‘정념적인 부분’과 ‘욕망적인 부분’은 영혼이 육체에 연결되는 부분들이다.

 

‘본질적인 인식’에서 멀어진 타락한 정신은 한 육체 안에 있는 영혼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육체를 정화하고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함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본질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

 

정신(Intellectus) → 영혼(Anima)

이성적인 부분

정념적인 부분

욕정적인 부분 → 육체(Corpus)

욕망적인 부분

 

결국 수도승생활 혹은 영성생활은 영혼의 이 다양한 부분들 안에 그에 부합하는 적절한 덕들을 심고 인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영적인 투쟁으로 간주된다.

 

 

3. 영성생활의 두 측면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영성생활은 크게 두 부분, 즉 ‘프락티케’(praktike: 수행)와 ‘그노스티케’(gnostike: 관상 혹은 인식)로 구분되어 있다. ‘프락티케’는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이고, ‘그노스티케’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인식 혹은 관상에 전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도승생활은 욕정적인 부분과 관련된 ‘악’과 이성적인 부분과 관련된 ‘무지’를 제거하여 영혼 안에 ‘덕’을 심고 ‘인식’을 얻기 위한 전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수도승생활 초기에 수도승은 주로 ‘프락티케’에 전념하게 되며, ‘프락티케’를 완수하여 그 목표에 도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노스티케’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프락티케’의 직접적인 목표는 ‘아파테이아’(?π?θεια)이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 수도승은 오로지 ‘사랑’으로부터 ‘인식’에로 건너갈 수 있다. 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과 ‘정념적인 부분’이 건강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두 부분은 서로 함께 작용하여 영혼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키며, 또한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인 이성적 부분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욕망적인 부분’은 덕과 인식을 갈망하며, ‘정념적인 부분’은 영혼의 세 부분 모두를 공격하는 악한 생각들을 거슬러 싸운다. ‘아파테이아’에 이른 영혼에게는 ‘욕정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더 이상 정신을 흐리게 하지 못하며, 그의 ‘이성적인 부분’은 이제 인식으로 건너갈 준비를 갖추게 된다. 영성생활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에바그리우스의 여러 작품들 안에서 나타난다.

 

 

4. 인식의 여러 차원

 

육체에 결합된 영혼으로 전락한 정신은 일단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면서 그 본래의 창조 목적인 ‘본질적인 인식’에 다다를 때까지 여러 차원의 인식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인식’(그노스티케)을 크게 두 차원으로 나누는데, 곧 ‘퓌시케’(phusike)와 ‘테올로지케’(theologike)이다. 전자는 보나 낮은 차원의 인식으로서 ‘자연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자연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피조물들의 창조 이유들(logoi)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다. 후자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신학)이다.

 

피조물의 창조 이유들에 대한 인식은 점차 우리로 하여금 다음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즉 모든 피조물은 그 정신으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느님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인식’은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하느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누어져 있고, 전자를 통해서 후자로 나아가게 된다.

 

 

에바그리우스의 영향

 

에바그리우스는 희랍인들 사이에서는 단죄되었는데, 이는 그가 오리게네스 논쟁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러한 단죄는 그의 작품들을 전달하는데 있어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는 시리아인들에게는 매우 존경받았다. 그들에게 있어 에바그리우스는 위대한 신비 교사였다. 특별히 그의 영향력은 고백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 il Confessore, 580-662) 와 성 요한 끌리마꾸스(St. J. Climacus, 570-649)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자(Gaza)의 교부들 가운데 성 바르사누피우스(St. Barsanuphius, 5c-6c)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을 읽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수련자들에게는 각자의 영혼에 유익한 것을 선택하라고 제안하면서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을 읽도록 허용하였다. 성 도로테우스(St. Dorotheus, 6c초-570경)는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전통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고대 로마인들 가운데서 성 예로니무스(St. Hieronimus, 342-420)는 에바그리우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는 그가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 개념을 잘 못 이해한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니모는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를 하느님에게 고유한 ‘무죄성’(無罪性)으로 이해하여 그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요한 까시아누스(J. Cassianus, 360-435)는 에바그리우스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루피누스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하였다. 서방에서는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승으로서 보다는 오히려 대담한 신학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영성생활과 수도승생활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금욕적, 신비적 가르침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이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고전과도 같다. 실제로 그의 가르침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역시 항구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에바그리우스는 오리게네스 논쟁에 연루되어 희랍인들 사이에서 단죄되었다. 이러한 단죄는 그의 작품들을 전달하는데 있어 하나의 장애가 되었다. 에바그리우스는 ‘넵틱 Neptic 교부들’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영향력은 고백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 il Confessore, 580-662) 와 성 요한 끌리마꾸스(St. J. Climacus, 570-649)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자(Gaza)의 교부들 중 바르사누피우스(St. Barsanuphius, 5c-6c)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을 읽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수련자들에게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을 읽도록 허용했는데, 오로지 그의 영혼에 유익한 것을 선택하라고 제안하였다. 도로테우스(St. Dorotheus, 6c초-570경)에게 있어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에바그리우스는 시리아인들에게서 매우 존경받았다. 그들에게 있어 에바그리우스는 위대한 신비 교사이다.

 

고대 로마인들 가운데 예로니무스(St. Hieronimus, 342-420)는 에바그리우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는 그가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 개념을 잘 못 이해한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니모는 에바그리우스의 ‘아파테이아’를 ‘무죄성’(無罪性)으로 이해하여 그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요한 까시아누스(J. Cassianus, 360-435)는 에바그리우스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루피누스는 에바그리우스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하였다. 서방에서는 에바그리우가 수도승으로서 보다도 오히려 대담한 신학자로 알려졌다.

 

영성생활과 수도승생활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금욕적이고 신비적 가르침은 전통적인 것으로 이는 하나의 고전과도 같다. 그의 가르침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역시 항구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글 에바그리우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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