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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28-29: 제2차 리옹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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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8 ㅣ No.452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8) 제2차 리옹 공의회 (1274년) (상)


교황 선거법 확정, 동방교회와 일치 이뤄

 

 

제2차 리옹 공의회가열린 리옹 요한 대성당.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1268년 11월 29일 교황 클레멘스 4세(재위 1265~1268)가 로마 북서쪽 비테르보에서 선종했습니다. 후임 교황을 뽑기 위해 15명으로 이뤄진 추기경단이 비테르보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쉽사리 선출되지 않았습니다.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 위원회가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프랑스 추기경들로 양분돼 있어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는 후보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3년이 흐르면서 비테르보 시민들은 지쳐버렸습니다. 주민들은 화가 나서 추기경들을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 궁전에 가뒀습니다. 그리고는 지붕을 뜯어내고 빵과 물만 내려보내며 새 교황 선출을 강요했습니다. 그래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추기경들은 6인 위원회를 구성해 교황 선출을 위임했고, 6인 위원회는 1271년 9월 1일 마침내 교황을 뽑았습니다. 거의 3년 만이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은 테오발도 비스콘티라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피아첸자 출신이었습니다. 나이는 60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습니다. 주교도, 사제도 아니었습니다. 벨기에 리에주교구 수석부제(Archdeacon)였습니다. 더구나 교황으로 뽑혔을 때는 영국 왕자와 함께 십자군 원정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교황에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은 테오발도 수석부제는 이탈리아 비테르보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 선출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레고리오 10세로 짓습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와서 사제품을 받고 1272년 3월 27일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로 축성되고 교황좌에 오릅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눈앞에 펼쳐진 무대가 심상찮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만만찮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군 원정 길에 동참했던 그로서는 십자군 원정이 성공해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려면 동방 교회와의 일치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졌던 라틴 제국이 몰락하고 다시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시칠리아 왕 샤를이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왕 생 루이 9세(재위 1226~1270)의 동생인 그는 이탈리아를 넘어 비잔틴 제국까지 넘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독일 지역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20~1250) 이후 황제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고 제후들간 왕권 다툼이 일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교황좌가 공백으로 있었다는 것도 그냥 둘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황 선거와 관련한 새로운 조치가 요구됐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목자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생활이 본래 정신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교회 생활, 특히 성직자 직무와 규율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4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리옹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소집령을 발표합니다. 공의회 장소를 리옹으로 택한 것은 샤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최와 주요 결정 내용

 

공의회는 1274년 5월 7일 리옹의 요한 대성당에서 개막합니다. 14번째 세계공의회로 기록되는 제2차 리옹 공의회입니다. 대주교와 주교 300여 명, 대수도원장 60여 명, 기사 수도회 대표, 주교좌성당 참사 대표와 신학자들, 프랑스ㆍ독일ㆍ영국ㆍ시칠리아ㆍ아라곤 왕들이 보낸 사절들도 참석했습니다.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의회에 참석하러 오는 도중 로마 근교에서 선종했습니다. 당시 동유럽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타타르(몽골)족도 사절단을 보내왔고, 동방 교회 쪽인 그리스 사절들은 배가 난파돼 6월 24일에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 개회 연설에서 예루살렘 십자군 원정, 동방 교회와 일치, 교회 개혁을 주요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5월 18일 2차 회기에서는 십자군 자금 마련 방법이 결정됩니다. 직위의 높낮이에 관계 없이 모든 성직자들이 6년 동안 수입의 10분의 1일을 내도록 했습니다. 또 십자군 원정을 위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6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7월 6일 제4차 회기에서는 동방 교회와 일치와 관련되는 내용이 논의됩니다. 그리스 사절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연옥 교리, 일곱 성사를 받아들이고 '필리오케'(성령이 성부에게서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한다는 뜻)를 삽입한 신경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황제를 대신해 로마 교회와 일치를 서약합니다.

 

7월 16일 제5차 회기에서는 교황 선거법(Ubi periculum, '위험이 있는 곳')이 마련됩니다. 이에 따르면 교황 서거 10일 후에 추기경들은 콘클라베(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들어가 교황 선출 투표를 합니다. 콘클라베에 들어간 후 3일이 지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5일 동안 추기경들에게는 매일 한 끼분 식사만 제공됩니다. 이렇게 해서 5일이 지나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매일 빵과 물과 포도주만 제공됩니다.

 

이미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는 3분의 2 이상 득표한 후보자가 교황으로 선출된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만, 3년이라는 긴 기간 교황좌가 공석이 되는 불상사가 발생했기에,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육지책으로 이런 보완 규정을 마련한 것입니다.

 

공의회는 7월 17일까지 6차 회기를 통해 모두 31개 법령을 인준하고 폐회합니다. 교황선거법, 동방 교회와 재일치에 관한 법령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혁에 관한 법령들인데 주교선출, 성직자 자격 요건, 교구와 수도회 관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고, 고리대금업 등에 관한 법도 있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수도원들이 주교들에게 예속됨을 분명히 하고 수도회 회원들에게는 여러 제약을 가하면서도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이 규정에 저촉받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두 수도회가 보편 교회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산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 기간 중에 몇 가지 정치적 결정을 내립니다. 독일 왕권을 둘러싼 다툼과 관련해서는 합스부르크 왕가 루돌프 왕의 손을 들어줍니다. 또 아라곤 왕국(스페인 중북부 지방) 야고보 1세는 교황의 충성 맹세와 봉토세 요구에 화가 나서 돌아가 버리지요.

 

한편 공의회에 참석한 타타르족 사절들은 사라센에 맞서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만 사절 가운데 한 명이 공의회 기간 중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평화신문, 2011년 8월 28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9) 제2차 리옹 공의회 (1274년) (하)


교황 선거법은 지금까지, 십자군은 물거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1274년에 개최한 제2차 리옹 공의회 모습.

 

 

공의회 이후

 

엄격한 콘클라베를 도입한 교황 선거법 제정, 동방 교회와 재일치, 십자군 지원은 14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2차 리옹 공의회의 대표적 결정 사항들입니다. 이런 결정들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 교황 선거법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교황 선거를 위해 외부와 차단된 곳)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하고, 다시 5일이 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빵과 포도주와 물만 제공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담은 교황 선거법(우비 페리쿨룸). 이 법은 어느 정도나 효력을 낳았을까요?

 

제2차 리옹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선종한 1276년. 새 선거법 규정대로 후임 교황을 선출하러 모인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첫 날에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인노첸시오 5세 교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5개월 만에 선종합니다. 다시 콘클라베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일주일 만에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하드리아노 5세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가 적어도 교황을 빨리 선출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분명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드리아노 5세는 한 달 이레 만에 선종합니다. 교황 착좌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드리아노 5세는 선종하기 전에 이 엄격한 콘클라베 선거법을 중단시켜 버립니다. 추기경들이 늙고 병들고 주교품도 받지 못한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것이 엄격한 콘클라베 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돼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는 유명 무실해졌고, 때로는 6~7개월씩 교황좌가 공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292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이 선종한 후 또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교황좌가 27개월이나 빈 것입니다. 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이런 폐단을 차단하기 위해 사장되다시피한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교황 선거법 곧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이 콘클라베 제도는 여러 차례 변경 수정됐습니다만 기본 취지는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교황령 '주님의 양떼'를 발표, 이전의 교황 선거법을 개정했습니다.

 

◇ 동방 교회와 재일치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가 보낸 사절들이 공의회에 참석해서 교황의 수위권과 연옥 교리, 일곱 성사를 인정하고,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뜻의 필리오케(filioque) 문구를 신경에 포함시켜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동방 교회와 재일치가 이뤄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은 동방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아니라, 비잔틴 황제가 보낸 사절들이었습니다. 또 비잔틴 황제가 사절들을 파견한 것은 교회 일치 정신보다는 교황권을 이용해 비잔틴 제국을 넘보는 시칠리아 왕 샤를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제국을 이어가려는 정치적 동기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황제 사절들은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동방 교회 주교들은 이 일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황 마르티노 4세(재위 1281~1285)가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를 파문한 것입니다. 마르티노 4세는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실세 시칠리아 왕 샤를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샤를의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파문으로 징벌했습니다. 샤를이 동방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려 했을 때 교황은 이를 측면 지원했고, 그 결과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했던 일치의 끈은 교황의 비잔틴 황제 파문으로 다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 십자군 지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성지 회복에 대단한 열정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될 즈음 이미 십자군에 참가해 영국 왕자 에드워드와 함께 예루살렘이 멀지 않은 팔레스티나 땅 아크르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코라고 불리는 지중해 연안의 이 도시는 당시 십자군 요새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그레오리오 10세는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십자군 지원을 위해 모든 성직자에게 수입의 10%를 6년 동안 의무적으로 내도록 결정했지요. 12번째 세계 공의회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성직자들에게 수입의 5%를 3년 동안 십자군 지원금으로 내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4배나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방 교회와 재일치를 공의회의 주요 목표로 삼고 비잔틴 황제의 사절들을 공의회에 초청한 것 역시 사실은 십자군 지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방 교회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회 이후 교황의 십자군 지원은 어떻게 됐을까요? 공의회가 끝나고 교황은 이듬해 오늘날 스위스 땅 로잔에서 독일 왕 루돌프를 만나서 루돌프 왕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하기로 합의하고는 로마로 가는 길에 피렌체 남쪽 아레초에서 열병으로 선종합니다.

 

십자군 원정에 의욕을 불태웠던 그레오리오 10세의 타계는 십자군 원정 계획에도 치명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후임 교황 2명이 잇따라 단명하고 세 번째로 교황이 된 마르티노 4세가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를 파문해 버립니다. 동방 교회를 십자군 원정의 한 축으로 삼고자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와 재일치까지 이룬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노력과 의도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흐지부지되면서 1291년 지중해 연안의 십자군 요새 아크르가 사라센에 의해 함락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시작된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2차 리옹 공의회의 직접 결과는 아니지만 공의회 기간에 사절로 참석한 타타르(몽골)족 가운데 한 명(혹은 두 명)이 세례를 받고 돌아간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몽골에 가톨릭이 전해졌고 교황 니콜라오 4세(재위 1288~1292)는 프란치스코회 신부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을 베이징에 파견합니다.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은 1294년 베이징에 도착해 괄목할 만한 결실을 거두고 나중에는 초대 주교가 되지요. 이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펼쳤으나 14세기 중엽 원 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선교사들도 모두 쫓겨납니다. [평화신문, 2011년 9월 4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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