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수도 ㅣ 봉헌생활

에바그리우스의 그노스티코스(Gnostikos)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4

에바그리우스의 그노스티코스(Gnostikos)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그노스티코스」(Gnostikos) 소개

 

이 작품은 에바그리우스의 3부작 가운데 하나로「프락티코스」와 함께 하나의 단일체를 이루어「모나키코스」(Monachikos)로 알려졌다.「그노스티코스」는「프락티코스」의 100개의 장들과는 대조적으로 단지 50개의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상당히 흥미 있는 단편들이 그리스어 원문으로 보존되어 왔다 하더라도, 이 작품은 단지 시리아어와 아르메니아어 번역본들로 전해져 왔다. 1989년 앙뚜앙 귀오몽과 클레르 귀오몽이 그리스어 단편들에 대한 비평본과 시리아어와 아르메니아어 번역본들을 갖고 확립한 전체 본문에 대한 번역 및 주해를 담은 가치 있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주로 금욕생활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관상가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사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무리의 수도승들을 위한 실천적인 조언에 집중한다.

 

 

해 제

 

1.「프락티코스」와「그노스티코스」의 관계

 

에바그리우스의 작품 안에서「그노스티코스」는「프락티코스」뒤에 나온다. 이 작품은「프락티코스」와「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와 더불어 삼부작을 이룬다. 에바그리우스는「프락티코스」머리말에 있는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수행적인 가르침은 100개의 장으로, 그리고 영지적인 가르침은 50개의 장과 다시 6백 개의 장으로 짧게 나누어 요약하였습니다.”(머리말 9) 반(半) 세기로 구성된 50개의 장으로 된 이 작은 작품은 한 세기로 구성된「프락티코스」와 6세기로 된「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사이에 일종의 전환점을 이룬다. 특히「그노스티코스」와「프락티코스」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장들은 서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첫 번째 편집된「프락티코스」의 결론이었을 제90장은 수행의 눈물과 노고 이후 인식이 관상가에게 가져다 줄 기쁨을 전한다. 한편「그노스티코스」의 첫 세 개의 장은 수행자를 앞 책에서 묘사된 길을 통과한 사람으로, 그리고 관상가를 수행을 통해 얻은 아파테이아에 힘입어 인식에 접근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게다가 두 작품 간에는 내적인 일치가 존재한다. 즉, 관상가의 유혹과 죄가 정의되는 「그노스티코스」42장과 43장은 수행자의 유혹과 죄가 정의된「프락티코스」74장과 75장을 반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프락티코스」89장과「그노스티코스」44장은 서로 상응한다. 두 장 모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똑같이 언급하면서 전자는 수행자의 덕을, 그리고 후자는 관상가의 덕을 정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두 작품 간에는 구조상 어떤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표지는「그노스티코스」가 100개의 장으로 된「프락티코스」의 편집 이후에 편집되었다고 생각하게 해준다.

 

 

2. 관상가의 정의와 역할

 

수행(praktike)은 ‘영혼의 욕정부(欲情部 the passionate part)를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영혼을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여 영지적인 삶, 곧 관상(gnostike)생활로 들어가 영지(gnosis) 혹은 영적 인식를 맛보기 위해 필요한 ‘아파테이아’를 얻게 해준다. 수행을 통해 수도승, 곧 수행자(praktikos)는 관상가(gnostikos)가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더불어 덕행의 실천과 공부를 통해 어떤 영적 인식에 도달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문학 안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그노스티코스’(관상가, gnostikos)란 말을 직접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 말은 수도승 문학 안에 널리 유통되었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의 ‘관상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서 유래한다.

 

따라서 클레멘스의 관상가처럼 에바그리우스의 관상가는 가르침을 그 본질적인 역할로 하고 있다. 관상가가 된 수도승은 더 이상 수행자처럼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정화에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가고,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욕정에서 정화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다른 한편, 그는 충분히 정화되어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영적 인식의 신비로 안내해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그노스티코스」제3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관상가는 전자를 위해서는 소금의 역할을, 후자를 위해서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관상가는 스승이자 교사이다. 이 짧은 작품의 주제는 정확히 관상가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관상가는 어떤 조건에서 가르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이 작품에서는 이 물음들에 대답하고 있다.

 

 

3. 가르침을 위한 조건

 

관상생활은 아파테이아 혹은 어느 정도의 아파테이아 획득을 전제한다. 사실 에바그리우스는 아파테이아에 대해 매우 미묘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아파테이아에는 단계가 있다. 즉, 영혼의 욕망부(慾望部 the concupiscible part)에서 오는 욕정 혹은 ‘육체의 욕정’을 극복했을 때 이르게 되는 ‘작은 아파테이아’ 혹은 ‘불완전한 아파테이아’ 이후, 정념부(情念部 the irascible part)에서 오는 욕정 혹은 ‘영혼의 욕정’을 포함한 모든 욕정에 대한 승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완전한 아파테이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계를 포함한다. 관상생활은 우리가 아파테이아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시작되며,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가면서 발전된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고유하게 천사적인 삶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 조건 안에서는 충만히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 즉 영혼의 정화는 어느 정도 관상생활에서도 계속된다. 관상가는 수행의 덕들을 계속해서 실천하면서 그것들을 계발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 에바그리우스가「수도승생활의 토대」에서 수행자에게 준 권고들은 관상가를 위해서도 유효하게 남아있다.

 

많은 사람과의 잦은 교제에서 오는 분심(11장)과 음식과 의복에 대한 모든 걱정(38장)과 같은 근심(10장)을 경계하라. 성 바울로가 그랬듯이 엄격한 규율로 자기 육체를 굴복시켜라. 그러나 만일 모든 덕들이 관상가에게 길을 평탄하게 해준다면(5장), 관상가는 무엇보다도 관상생활에 나아가기 위해서 영혼의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들, 그리고 우선 영적 인식에 주된 장애인 분노 그 자체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오류가 외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분노는 영적 인식에 장애가 된다(4장). 또한 관상가는 분노와 증오와 슬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10장). 슬픔은 분노에 밀접히 연결된 영혼의 한 욕정이다. 관상가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특히 소송을 피하고 모욕(불의)을 당해야 한다(8장). 동일한 이유 때문에 그는 험담과 비난이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임을 알고 그러한 것들에 초연해야 한다. 악령들은 인식을 맛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관상가 안에 증오와 원한을 일으키려고 노력한다(32장). 따라서 그는 온갖 분노를 없애야 한다(5장). 영혼의 정념부가 평온한 이 상태는 에바그리우스가 다른 곳에서 애덕에 매우 근접한 ‘온유’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아파테이아의 딸’과 ‘인식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온유는 관상가의 탁월한 덕이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아파테이아, 애덕, 그리고 인식은 서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애덕은 우선 자선이다(7장). 관상가는 가르치면서, 하지만 이익이나 복리 혹은 지나가는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가르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과 같을 것이다(24장). 덕들의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하여 지나친 관대함 없이(6장)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 대하여 상냥하고 친절한 관상가는 그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22장). 사실 어떤 욕정에 의해서 영감을 받거나 오직 선을 위해서 행해지지 않는 모든 탐구는 특히 ‘관상가의 죄’인 그릇된 인식에 이를 수 있다(43장).

 

 

4. 가르침의 내용

 

이미 본 바와 같이 관상가는 확실히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욕정에서 정화되는지를 부단히 가르친다(3장, 31장). 그러나 관상가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획득한 영지 혹은 역적 인식을 받을 능력을 갖추게 된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를 통해 이 영적 인식 혹은 관상에 접근(45장)하게 되지만,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매개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또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피조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즉, 피조물의 ‘로고이’(logoi)를 알게 된다. 사실 한 피조물의 ‘로고스’(logos)는 그의 원리, 즉 존재이유이다. 한 피조물의 ‘로고스’를 관상하는 것은 그것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였던 그 개념 안에서 그것을 통찰하는 것이며, 따라서 피조물을 그 본질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로고이’ 중에는 에바그리우스가 ‘신적 섭리와 심판의 이유’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에바그리우스의 우주론과 종말론에 대한 큰 주제들에 부합하면서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구원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취하신 태도와 세계의 형성과 관련된 것들이다(36장, 48장).

 

영적 인식에서 또한 성서 해석이 이루어진다. 성서 해석은 관상가의 가르침 안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며, 이 작품의 여러 장들이 성서 해석에 바쳐진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그것의 감각적인 모습을 넘어 그 존재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제자인 에바그리우스가 관상가에게 권고하는 해석 역시 성서 텍스트의 문자를 넘어 그 영적 혹은 우의적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관상가는 오리게네스가 이미 권고한 바와 같이 성서의 ‘관습’을 설명하면서(19장) 텍스트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자 노력한다. 또 관상가는 에바그리우스에게 친숙한 삼중 구분에 따라(18장) 수행이나 윤리에 관한 것이든, 자연학(피조물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든, 신학(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든 자신이 들추어내는 교훈적인 영역을 결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 텍스트의 우의적 의미가 반드시 문자적 의미와 동일한 영역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20장). 에바그리우스는 우의적인 해석에 어떤 제한을 두고 있다. 그는 성서 본문에 언급된 모든 말씀에 대해 영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21장) 또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도 말라고 관상가에게 권고한다(21장).

 

 

5. 가르침의 방법

 

관상가는 오로지 자기 제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칠 뿐이다. 따라서 그는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영적 진보 상태에 따라 다양하다. 모두에게 매번 모든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관상가 역시 각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자기 청중의 상황과 삶의 종류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각자에게 유익한 것을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15장).

 

에바그리우스는 자기 스승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배운 바에 따라 관상가에게 고유한 덕들을 열거하면서 정의(正義)를 그 신분에 따라 각자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지닌 덕으로 정의(定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관상가는 단순한 이, 즉 아직 영성생활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명확하게 설명하지만, 충분히 진보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교의는 불명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44장). 영혼의 정화와 욕정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윤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에게, 특히 세속인과 젊은 수도승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단계가 있다. 관상가는 젊은이에게는 영혼의 욕망부에서 오는 욕정을 극복하는 방법을, 그리고 보다 더 연로한 이에게는 영혼의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31장). 그러나 초심자들, 젊은이와 세속인에게는 자연학(피조물에 대한 인식)과 신학(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12장, 13장). 이 역역에 대한 가르침은 욕정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져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유보된다. 신적 섭리와 심판의 이유와 관련된 교리, 즉 에바그리우스의 형이상학과 우주론과 종말론에 대한 주제들을 세속인과 젊은이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는 그들이 단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 인식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잘못 산 사람에게 있어 무지가 벌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36장). 또한 관상가는 이 교리를 젊은이에게 설명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그들이 이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25장). 따라서 그는 자기 가르침 안에서 항상 청중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수준을 너무 쉽게 높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청중의 수준보다 약간 위에 두어 만일 청중이 요청할 경우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29장). 만일 그가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는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면, 이 경우 그것에 대해 모르는 체 해야 한다(23장). 관상가는 두 시기로 자기 가르침을 계획한다. 즉, 설명의 때와 토론의 때이다. 토론은 충분히 진보한 사람에게만 허락된다(26장).

 

그러므로 관상가는 자기 가르침 안에서 현명을 사용하여 영적 인식이라는 보다 고차원적 주제에 관해 침묵하거나 또는 그것을 능력 있는 사람에게 유보하고 성서 자체가 비유라는 베일 아래 보다 고차원적인 진리를 계시하는 것처럼 이 주제를 희미하고 불명확한 용어로 설명한다. 어떤 주제는 특정인에게 유보된다. 즉, 성체성사 거행의 상징적 의미는 원칙적으로 관상가인 사제들과 오로지 그들 가운데 더 나은 이에게만 유보된다(14장). 하느님에 대한 인식(신학)에 관해서는 자연학에 관해서 보다도 더 큰 주의가 요구된다. 만일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정의(定義)에 의지해야 한다면(17장), 그것이 하느님과 관계될 경우에는 그분을 정의하려고도 또 경솔하게 그분에 대해 말하려고도 해서는 안 된다((27장). 사실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것이 그분께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분에 관해서는 침묵이 요구된다(41장). 관상가 자신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자연학)을 뛰어 넘으면서 어느 정도로 제일 원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신학에 다가가야 한다(49장, 50장).

 

 

6. 작품의 구성

 

「그노스티코스」의 구성은 매우 자유로워 보이며,「프락티코스」의 장들 안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순서나 진행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50개의 장을 다음과 같이 주제별로 구분할 수 있다.

 

1-3장 : 이 장들은 도입부이다. 여기서는 관상가의 고유한 역할이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4-11장 : 관상가가 스승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과 그가 획득해야 하는 덕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12-15장 : 관상가가 자기 청중에게 적응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16-21장 : 가르침의 내용, 주로 성서 해석에 대해 말하고 있다. 

21-36장 : 관상가가 자기 가르침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37-43장 : 관상가가 빠질 수 있는 유혹과 죄에 대해 경계시키고 있다. 

44-48장 : 이 책의 가르침에 유리한 증언이 되는 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49-50장 : 이 장들은 결론부이다.

 

 

본 문

 

1. 수행자는 수행의 이유를 이해하지만, 관상가는 영지적인 대상을 볼 것이다.

 

2. 수행자는 오로지 영혼의 욕정부에서 아파테이아를 획득한 사람이다.

 

3. 관상가는 불순한 자에게는 소금의 역할을, 순수한 자에게는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마태 5,13-14 참조).

 

4. 밖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인식은 존재이유를 통해 그 대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서 오는 인식은 정신에 직접 그 대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정신은 그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존재이유를 파악한다. 첫 번째 인식에는 오류가 장애가 되고, 두 번째 인식에는 분노와 격정, 그리고 이것들을 뒤따르는 것이 장애가 된다.

 

5. 모든 덕은 관상가에게 길을 평탄하게 해주지만 무엇보다도 분노의 억제를 쉽게 해준다. 사실 인식에 도달했지만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철 핀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사람과 비슷하다.

 

6. 관상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관대함이 습관이 될까 우려하여 관대함을 사용할 때 엄격하다. 또 그는 모든 덕 역시 부단히 실천하려고 노력하여 그 (관상가) 안에서 역시 덕들이 하나가 다른 것을 계속 뒤따르게 한다. 이는 덕이 약해질 때 정신은 자연히 왜곡되기 때문이다.

 

7. 관상가는 언제나 자선을 베풀려고 힘쓸 것이며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돈이 없다면 자기 영혼의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는 자기 본성상 등불을 꺼뜨린 다섯 처녀에게 부족했던 바인 자선을 베풀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5,1-13 참조).

 

8. 불의의 희생자이든 혹은 불의를 행한 자이든 관상가가 소송 중에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만약 그가 불의의 희생자라면 그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가 만일 불의를 행한 자라면 그것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9. 인식이 유지될 때, 그것은 거기에 참여한 사람에게 어떻게 인식이 보존되고 커가는지를 가르쳐준다.

 

10. 관상가는 자기가 가르치는 순간에 분노와 증오, 슬픔, 육체적 고통과 근심에서 자유로운지를 이해하지 않는가!

 

11. 완전해지기 전에 네 정신이 환상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잦은 교제를 피하라.

 

12. 수행과 자연학 혹은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우리 구원에 유익한 것을 죽을 때까지 말하고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대수롭지 않은 것은 말하거나 행할 필요가 없다. 이는 쉽게 충격을 받는 사람들 때문이다.

 

13. 올바른 품행에 대해서 수도승과 세속인들에게 말하는 것과 또 자연학과 신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에게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합당하다. 이 가르침 없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브 12,14 참조).

 

14. 만일 사람들이 너에게 질문을 하면 오직 그들 가운데 더 나은 이들인 사제들에게만 대답하라. 그들을 통해서 거행된 또 내적 인간을 정화하는 신비들, 그 신비들을 받아들이는 그릇들 - 영혼의 욕정부와 이성부를 나타냄 - 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게 혼합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들 각각의 능력과 하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 각각의 활동 완수에 관해서 대답하라. 또한 그것들을 완수하는 인물은 누구인지, 그와 함께 순수한 행위를 방해하는 자를 몰아내는 이는 누구인지 그들에게 말하라.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들 가운데 어떤 것은 기억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것은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라.

 

15. 상황과 삶의 종류, 그리고 직업의 이유와 법칙을 배워 알아라. 이는 네가 각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그에게 쉽게 말할 수 있기 위함이다.

 

16. 너는 (성서에) 언급된 것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가질 필요가 있고 또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설사 어떤 부분이 네 이해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천사들에게는 지상에 있는 것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2사무 14,20 참조).

 

17. 사물의 정의(定義), 특히 덕과 악습의 정의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사실상 거기에 인식과 무지의 근원, 하늘나라와 고통의 근원이 있다.

 

18. 우의적인 구절과 문자적인 구절이 수행에 관한 것인지 혹은 자연학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신학에 관한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것이 수행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정념(분노)과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혹은 욕망과 그것을 따라오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그것의 움직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것이 자연학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자연과 그것과 관련된 가르침 가운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일 신학에 관계된 어떤 우의적 구절이 있다면, 되도록 그것이 삼위일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 삼위일체가 단순하게 드러나는지 혹은 일치 안에서 드러나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일 전혀 그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관상(현시)이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예언을 의미하는 것이다.

 

19. 또한 성서의 관습을 아는 것과 될 수 있는 한 증언들(성서에서 취해진 예들)을 통하여 그것을 밝히는 것이 좋다.

 

20. 이것 또한 알 필요가 있으니, 곧 윤리적 성격을 띤 모든 텍스트가 윤리적 성격에 대한 관상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며, 또 자연과 관련된 어떤 텍스트가 자연에 대한 관상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윤리적 성격을 띤 사람은 자연에 대한 관상을 허용하며 자연에 대해서 다루는 사람은 윤리에 대한 관상을 허용한다.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간음과 예루살렘의 간통(에제 16,15-34 참조), 건조한 땅의 영혼들과 물과 새들, 순결한 이와 불결한 이들(루가 11,2-19), 뜨고 지고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태양(잠언 1,5)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은 일차적으로 신학에 부합하고, 두 번째로는 윤리학에 부합하며, 세 번째로 자연학에 부합한다. 그렇지만 첫 번째 텍스트는 윤리학과 관련이 있고, 다른 두 텍스트는 자연학과 관련이 있다.

 

21. 너는 비난받을만한 사람의 말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또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경륜을 이유로 그렇게 하시지 않는 한 그의 말에서 어떤 영적인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하느님께서 발라암과 가야파 안에서 하나는 그 탄생을 예언하고(민수 24,17-19 참조), 다른 하나는 우리 구세주의 죽음을 예언(요한 11,49-59 참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과 같다.

 

22. 관상가는 침울해서도 또 접근하기 어려워서도 안 된다. 사실 전자는 피조물의 존재이유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오며, 후자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진리에 대한 인식에 도달(1디모 2,4)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유래한다.

 

23. 이따금 모르는 체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질문하는 사람이 들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일개 육적인 존재이며 현재의 대상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너는 진실 될 것이다.

 

24. 마치 너 역시 성전에서 비둘기와 같은 하찮은 것들을 판매하여 성소(聖所) 밖으로 쫓겨나지 않도록 이익이나 복리 혹은 지나가는 영광을 위하여 밝혀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 너 자신을 바라보라(마태 21,12-13 참조).

 

25. 모르고서 논쟁하는 사람을 끝이 아니라 처음부터 진리에 다가가게 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에게는 영지적인 것에 대해서 전혀 말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관상이 초래하는 위험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욕정의 공격을 받은 사람에게 평화의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그가 어떻게 적들에게 승리를 거둘 것인지를 말할 것이다. 사실 전도서가 “전쟁의 날에 외교사절단은 없다.”(전도 8,8)고 말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욕정의 공격을 받는 사람과 또 육적인 존재와 영적인 존재들의 존재이유를 탐구하는 사람은 건강에 관해 논쟁하는 병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영혼이 욕정으로 인해 더 이상 동요되지 않을 때, 인식의 달콤함으로 가득한 이 벌집을 맛보아야 한다.

 

26. 설명하는 때와 토론하는 때는 동일하지 않다. 또한 너무 빨리 반대하는 사람을 꾸짖을 필요가 있다. 사실 이것은 이단자와 논객의 습관이다.

 

27. 하느님에 대해서 경솔하게 말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신성을 정의하지도 말라. 사실 정의는 창조된 피조물에 고유한 것이다.

 

28. 버려짐의 다섯 가지 이유를 기억하라. 이는 당신이 고통으로 상처받은 소심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기 위함이다. 사실상 버려짐을 통해 감추어진 덕이 드러난다. 덕이 소홀히 되었을 때, 버려짐은 벌을 통해서 감추어진 덕을 회복한다. 그러면 버려짐은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의 원인이 된다. 덕이 탁월해 질 때, 버려짐은 천부적으로 덕을 소유한 사람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정말로 악을 경험한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그래서 그 경험은 버려짐의 한 후예이며, 이 버려짐은 아파테이아의 딸이다.

 

29. 당신이 가르치는 사람은 항상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더 높이 올라가시오.”(루가 14,10) 사실상 위로 올라간 후 당신이 당신 청중에 의해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30.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인색하다. 왜냐하면 집사는 합리적인 돈주머니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31. 노인을 격려하여 그의 분노를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젊은이를 격려하여 그의 배를 다스리게 하라. 사실 전자는 정신적 악령을 거슬러 싸워야 하며, 후자는 대개의 경우 육체적 악령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32. 네 귀에 험담하는 사람에게 입을 닫아걸고, 많은 사람에게 비난받았다고 놀라지도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사실 관상가는 증오와 원한에서,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33. 주님 때문에 사람을 치유하는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 역시 치유한다. 왜냐하면 관상가가 쓰는 약은 가능한 한 그의 이웃을 치유하지만, 반드시 그 자신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34. 당신은 비유에 적합한 모든 것을 영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다만 주제에 맞는 것만을 설명할 것이다. 사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요나의 배에 관해서 각각의 선구(船具)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요나 1,5 참조). 또 당신 청중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의 비웃음만 살 것이다. 당신 주위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선구(船具)를 상기시킬 것이며 조소하면서 당신이 잊어버린 것을 얻어낼 것이다.

 

35. 당신에게 오는 수도승이 윤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초대하라. 그러나 교의에 관해서는, 누가 이 주제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명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지 말라.

 

36. 세속인과 젊은이들에게 심판과 관련된 너무 고차원적인 논제는 감추어라. 왜냐하면 그것은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무지에 처해진 이성적 영혼의 고통을 모른다.

 

37. 성 바울로는 자기 육체를 억압하면서 그것을 종속시켰다(1고린 9,27 참조). 그러므로 당신 생애 동안 단식을 소홀히 하지 말며, 비대해진 육체로 단식을 무시하면서 ‘아파테이아’를 망치지 말라.

 

38. 음식과 의복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마태 6,25 참조), 레위인 아브넬을 기억하라. 그는 주님으로부터 궤를 받은 후, 가난했지만 부유하게 되었고, 업신여김을 당했으나 영광스럽게 되었다(2사무 6,10-11 참조).

 

39. 관상가의 양심은 그에게는 하나의 혹독한 고발자이며, 그것은 그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은 그의 마음속 은밀한 것까지 알기 때문이다.

 

40. 창조된 모든 것의 존재이유는 단지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그것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드러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천사들(거룩한 능력들)은 대상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알지만, 첫 번째 존재이유는 모른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41. 모든 명제는 유형이나 차이점, 종류나 특성, 또는 어미변화나 이 모든 것으로 구성되는 것을 술어로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삼위에 관해서는 언급된 것들 중 어떤 것도 적합하지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분은 침묵 중에 흠숭 받아 마땅하다!

 

42. 관상가의 유혹은 정신에게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면 존재하는 것을 실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처럼 제시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43. 관상가의 죄는 대상 그 자체나 그 개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그 어떤 욕정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혹은 선을 위해서 대상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44.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관상을 위해서는 현명, 용기, 극기, 정의 이 네 가지 덕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현명의 역할이 정신적이고 거룩한 능력들(천사들)의 존재이유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관상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들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계시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용기의 역할은 설사 싸울 필요가 있더라도 진리 안에 항구히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것에 모험하지 않는 것이다. 으뜸 농부에게서 씨앗을 받는 것과 이후의 씨 뿌리는 자를 거부하는 것, 이것이 극기에서 오는 고유한 것이라고 그는 대답한다(마태 13,25 참조). 정의의 역할은 어떤 것은 불명확하게 이야기하고, 다른 것은 수수께끼로 표현하면서, 그리고 단순한 사람의 유익을 위해 어떤 것은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각각의 능력에 따라 각 사람에게 그 존재이유를 전해주는 것이다.

 

45. 진리의 기둥(1디모 3,15), 카파도키아의 바실리우스가 말했다: 사람에게서 오는 인식은 공부와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강화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은 정의, 분노의 억제, 자비로써 강화된다. 첫 번째 인식은 욕정에 굴복한 사람 역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식은 오직 욕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그는 기도 중에 자기를 비추는 정신의 고유한 빛 역시 관상한다.

 

46. 이집트의 거룩한 등불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다: 모세는 식탁을 북쪽으로 두라는 명령을 받는다(출애 26,35 참조). 관상가는 누가 자기를 반대하는지 알며, 모든 유혹에 용감하게 맞서고 또 제자들을 양육한다.

 

47. 트무이스(Thmuis) 교회의 천사(묵시 2,1.8.12; 3,1.7.14) 세라피온이 말했다: 정신은 영적 인식을 마셨을 때 완전하게 정화되고, 애덕은 정념으로 불붙은 부분을 치유하며, 나쁜 욕망의 흐름은 고행을 통해 멈추어진다.

 

48. 위대한 영지적 스승 디디무스(Didimus)가 말했다: 섭리와 심판과 관련된 이유에 관해 끊임없이 묵상하라. 그리고 그 내용을 네 기억 속에 간직하도록 노력하라.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문제에 직면한다. 너는 육체와 세계의 다양성 안에서 심판과 관련된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악과 무지에서 덕과 인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 안에서 섭리와 관련된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49. 수행의 목적은 정신을 정화하여 그것을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연학(자연에 대한 인식)의 목적은 모든 존재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대상에서 멀어지게 하여 제일 원인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것, 그것은 신학의 한 선물이다.

 

50. 항상 원형(?ρχeτυπον)을 바라보면서 죄인을 구제하려고 돕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이 형상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라.

 

[글 에바그리우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1,03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