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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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300-700년경 수도원들 안에서 매일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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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3

300-700년경 수도원들 안에서 매일의 독서

 

 

1. 내용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란 표현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 시대부터 일과시간 중에 수도승에게 보장된 영적 독서의 시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1) 성서를 읽음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인들은 이 표현으로 더 자주 다른 것, 즉 성서 본문 자체를 생각하였다. 동일한 현대어들(lettura, lecture)과 마찬가지로 렉시오(Lectio)는 ‘읽는 행위’뿐 아니라 ‘읽혀진 것’도 의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던 것은 그 두 번째 의미 안에서이다. 즉 렉시오 디비나, 그것은 성서였다.

 

베네딕도는 규칙서 48장 1절에서 렉시오 디비나란 표현을 유일하게 한번 사용하고 있다. ‘손노동에 전념하다’(occupari...in labore manuum)란 말에 대조되는 ‘렉시오 디비나에 전념하다’(occupari...in lectione divina)란 말은 ‘읽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잘 명시된 그 대상과 더블어서이다. 즉 거룩한 책들인 성서를 읽는다는 것이다.

 

2) 주해서들을 읽음?

 

이것은 다른 모든 책들을 배제함을 뜻하는가? 베네딕도 자신은 하느님의 일에 단지 신구약성서뿐 아니라, 또한 성서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해서들도 읽게 한다(RB 9,8). 개인 독서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자유로움을 예측할 수 있다. 교부들의 성서해설은 분명히 성서에 합치되지만, 그 프로그램은 정확히 성서에 집중되어 있다.

 

주해서들에 의존하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거나 혹은 적절한 것인 양 여겨지지는 않았다. 「제도서」의 매우 아름다운 한 구절(제5권 33-34)에서 까시아노는 이집트인 스승 테오도로(Theodoruns) 아빠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널리 전하였다. 테오도로에 따르면, 성서에 대한 통찰력은 주해서들을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순결로써 얻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세기 반 이후에 까시오도로(Cassiodorus)는 접할 수 있는 모든 교부들의 주해서들을 열심히 읽도록 수도승들에게 권고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교부들의 주해서들을 사용하게 하였다.

 

렉시오 디비나를 위하여 수도원을 교부 도서실로 제공하려는 이러한 열정 안에서 우리는 확실히 비바리움(Vivarium) 설립자의 정신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베네딕도와 동시대의 증언은 당시 수도승생활 안에서 이러한 필요성을 널리 느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3) 이교 문화: 하나의 도움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까시오도로의 그 열망은 여전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하여」(De doctrina Christiana)의 노선 안에서 그는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유익을 위해서 하느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목적으로 세속 학문들에 전념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 또한 그의 태도는 이교 문화를 단지 기도의 방해물로만 언급하였던 까시아노의 태도와는 대조된다.

 

그러나 까시아노는 학문들 보다는 문학을 더 겨냥하고 있다(「담화집」XIV, 12-13). 까시아노에서 까시오도로까지 문화적 수준의 하락은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광범위하게 설명해준다. 즉 위험이 된 것은 더 이상 ‘아는 것’이 아니라, ‘무지’라는 것이다. 6세기 말에 그레고리오 교황은, 비록 그가 이교 문학에 대한 반감을 여러 번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성서 이해에 도움을 주는 세속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알고 있었다(In I Regum V, 84-85).

 

성 베네딕도의 경우, 이 문제에 관해 그가 절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견해를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규칙서에서 묘사된 렉시오 디비나 시간들이 성서나 혹은 그것을 직접 밝혀주는 그리스도교 저자들의 작품들을 읽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위해서 이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2. 일과표

 

규칙서에서 예견된 독서 시간들은 하루에 대략 2-3시간 정도에 달한다. 열정과 영적 의무의 때인 사순시기에 베네딕도는 3시간 동안 계속해서 읽게 한다. 한 해의 나머지 때를 위한 일과표는 보다 더 세분되며, 또한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도승 규칙서들은 3시간으로 된 하루의 네 부분 - 고대에는 하루를 이렇게 구분하였다 - 중 하나를 단순히 독서에 배당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시간은 손노동과 식사 등 실제적인 일들에 바쳐졌다. 오로지 일하지 않는 날인 주일만 독서를 위해 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1) 하루 3시간의 독서

 

때때로 2시간으로(혹은 여성들을 위해서 1시간으로, 그러나 보완책들과 함께)감소된 이 하루 3시간 독서의 규정은 약 400년경 라틴 회수도승생활 문학의 시초부터 나타난다. 우리에게 전해진 보다 오래된 두 개의 규칙서들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되는데, 즉 395년경에 쓰여진 아우구스띠노의「수도원 규정서」(Ordo monasterii)와 10년 이후에 씌어진「네 교부들의 규칙서」(Regula Quattuor Patrum) 안에서이다.

 

「수도원 규정서」는 제6시에서 제9시까지(12시-15시), 즉 하루의 유일한 식사시간 직전까지, 그리고「네 교부들의 규칙서」는 제1시부터 제3시(6시-9시)까지 독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평일에 렉시오에 할애된 3시간 길이에 관해 서로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이 두 초기 규칙서들 간의 일치에 비해 별로 주목할만한 것은 아니다. 후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수도승들의 추종을 받았던 아프리카와 갈리아 수도승들은 왜 매일의 일과표 안에 이러한 공간을 부여하는데 있어 일치하였는가?

 

서방 수도승들에 의해서 그렇게 행해진 하루의 구분은 하나의 새로움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흥미 있는 사건이다. 빠코미오도 또 바실리오도 그들의 제정 안에서 렉시오를 위한 특별한 순간들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실리오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에게 보낸 서간(Ep. 2,3-4)인 규칙서 초안에서 하루의 마지막 시간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어렵게 추측할 수 있다.

 

예로니모의 경우, 384년 이집트 회수도승들에 대한 유명한 묘사에서(Ep. 22,35,7) 그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였고, 그런 다음 기도(oratio)와 독서(lectio)에 나머지 시간을 부여하였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 여기서 역시 독서는 노동 후에, 또 어떤 정해진 시간 없이 행해졌다.

 

그러므로 서방 수도원들 안에서 독서에 유보된 3시간의 고정된 시간을 정한 것은 주목할만한 혁신이다. 이 규정은 반대되는 두 가지 실천, 즉 ‘필요한 노동’과 ‘노동의 부재(不在)’를 중재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처럼 나타난다. 까시아노에 의해서 묘사된 이집트 수도원들 안에서 형제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상이 수반된 짧은 기도들로 이어진 손노동에 종사하였다.

 

빠코미오 규칙서와 마찬가지로 까시아노의「제도서」도 독서를 위해서 노동을 중지하라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갈리아에서는 반대로 4세기 말엽 뚜르의 성 마르띠노의 제자들은 온종일 기도에 참석하고, 손노동은 오로지 보다 더 젊은 형제들에게만 맡겨지지만, 이 일 역시 매우 고상한 것으로서 곧, 텍스트들을 필사하는 것이다. 400년에 카르타고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우구스띠노가「수도승들의 일에 대하여」(De opere monachorum)에서 비판하고 있는 수도승들(아마도 동방에서 온)은 읽고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시리아의 메쌀리아니(messaliani)를 생각하게 하는 하느님을 위한 이 전적인 한가함과 까시아노의 외관상 중단 없는 이집트인들의 노동 사이에서 라틴 수도승들은 영적인 활동에 고정된 시간을 할당하는 하나의 조화로운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 시간은 하루에 두세 번으로서 노동 시간보다는 못하지만, 적어도 주님께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기에 충분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이처럼 흥미 없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의 생산적인 활동 시간을 포기하는 것은 상당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며, 영적인 것의 우위성을 단언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가 볼 때(De opere monachorum 20), 그로 인해 생기는 손실은 신자들의 재정적인 도움에 의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어쨌든 그는 수도승들의 영예인 이 세상의 재물들로부터의 이탈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집착을 권고하고 있다.

 

2) 일과표 안에서 3시간의 위치

 

주목할만한 것은 단지 이 렉시오 시간의 길이만이 아니다. 일과표 안에서 그 위치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문헌들 안에서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연속적인 구조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매일의 고유한 노동 분량(pensum)을 마쳤을 때 독서하는 것은(예로니모) 필요한 최소한의 것(minimum)을 물질적인 일들에 한 차례 조화시키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정신과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하루의 중간에, 즉 유일한 식사 시간인 제9시 이전에 독서하는 것은(수도원 규정서: Ordo monasterii) 영혼의 식사를 육체의 식사에 선행하게 하고 독서에 특권적인 시간을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 시간에는 완전하게 단식하고, 정신은 가볍고 자유로우며, 기꺼이 기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른 모든 일에 앞서 하루의 시작에 독서하는 것은(네 교부들의 규칙서) 아무것도 이 중요한 수행을 방해하거나 단축할 수 없도록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에게 여전히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은 맑은 상태에서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이 마지막 방식에 주의를 기울일만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뻴라지오가「데메트리아데에게 보낸 서간」제23에서 “하루의 이 첫 세 시간은 하느님께 봉헌된 ‘보다 좋은 부분’이다”라고 이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도처에서 계절의 변화를 고려한 기본 규칙으로 정착되면서 서방 수도승생활 안에서 일반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고유한 방법으로 그것을 밝혀주는 과거 고대 그리스도교에까지 그 기원을 재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아침 독서의 기원

 

오랜 세월을 거친 이 독서의 배경은 200년 경 히뽈리또의「사도전승」(41)과 더불어 시작한다.「사도전승」은 교회에서 아침 집회가 없는 날들에는 하루의 시작에 집에서 개인 독서를 하도록 그리스도인에게 명하고 있다.

 

비록 이 독서를 제3시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곧바로 따라오는 이 시간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3시간 동안 독서하라는 초대를 본문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게 한다. 그래서 두 세기 이후에 성 아타나시오는「동정성에 관하여」(De virginitate)에서 축성된 동정녀들에게 제1시부터 제3시까지 독서하도록 명령할 것이다. 이것은 에바그리오 뽄띠쿠스가「동정녀들에게 준 권고」(4)에서 제2시에 독서를 고정하면서 거의 같은 말들로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규칙이다.

 

조금 앞서 381-384년에 스페인 수녀 에제리아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졌던 하나의 주목할만한 수행에 대해 증언하였다. 주교는 사순절부터 부활절까지 매일 제1시부터 제3시까지 입교자들을 모아 교리교육을 하며 세례를 준비시킨다(에제리아 여행기 46,3).

 

먼저 성서와 그다음 신경이 읽혀지고 설명되는 이러한 교리교육은 입교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신자들을 포함한 회중들을 위해서 행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금욕가들이 사는 이 거대한 순례의 중심지에서 그것이 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모든 남녀들은 그렇게 몇 주간 동안 주교와 그 권한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그들 신앙을 건설하는 그 위대한 텍스트들을 되풀이해서 읽고 심화하면서 일종의 피정 혹은 재교육을 하였다.

 

4) 연중 재교육에서 매일의 독서로

 

많은 순례자들의 방문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순절 동안 공동으로 행했던 이 렉시오 디비나는 틀림없이 400년 경 갑자기 확인되는 하루의 시작에 행했던 3시간 독서의 일반적인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텍스트들을 보았다. 즉, 팔레스티나에서 뻴라지오, 이집트에서 에바그리오, 동방의 어떤 지역에서 위(僞) 아타나시오, 서방에서 네 교부들. 여기에 비록 시간의 길이를 위한 분명한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요한 크리소스또모(1디모테오서에 대한 강론 14,4)와 스케테의 이사야(로고스 3,42)를 추가할 수 있다.

 

에제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제3시 이전에 독서하는 이 수도승 규율이 어떤 의미를 얻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연중 재교육은 수도원들 안에서 하나의 연속적인 수행이 된다. 성 베네딕도는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한다”(RB 49,1)고 말할 것이다. 현재의 경우에 확인되는 것은 바로 일년 내내 이어지는 하나의 사순절 규율이다. 남녀 수도승들은 언제나 매일 아침 하느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그분께 대한 사랑을 새롭게 한다.

 

 

3. 독서의 위치와 좌표

 

예루살렘의 공동체적 교리교수 방식은 수도원들 안에서 행해진 독서와 그리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1) 공동체의 독서와 개인 독서

 

만일 성 베네딕도 규칙서가 오늘날과 같이 렉시오가 각 수도승들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행해졌다는 인상을 준다면, 그것과 가까운 스승의 규칙서는 각 십인조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이 책을 소리 내어 읽고 다른 사람들은 경청하는 그룹 독서 외에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베네딕도 규칙서는 이 수행에 대해서 하나의 분명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스승의 영적 기술에서 뽑은 “착한 일의 도구”는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RB 4,55 = RM 3,61)고 규정하고 있다.

 

2) 잡담과 기도 사이에서

 

그러나 이 권고는 그저 책들과 또 읽을 줄 아는 형제들이 별로 많지 않았던 공동체들을 위해 많은 유익함을 주었던 하나의 독서 실천 방법을 확인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 권고는 그 앞뒤에 오는 비슷한 형태의 권고들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그것 자체로 고려되어야 마땅하다.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RB 4,55). 이 영적 기술의 처방은 말의 사용에 관한 일련의 권고들 다음에, 그리고 기도에 관한 권고 앞에 온다. 연관성을 지닌 앞뒤 구절들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금욕생활과 수도승의 영성생활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역할을 모두 렉시오에 부여하고 있다.

 

앞의 권고들은 사실상 말의 여러 남용들을 단죄하고 있다. 즉,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즐기기 위해서 말하는 것, 심하게 그리고 쉽게 웃는 것 등이다. 다음에 오는 조항은 “기도에 자주 열중하라”(RB 4,56)고 초대하고 있다. 이 문맥에서 뜻하는 바가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는 호소임이 엿보인다. 독서는 말의 남용을 멈추게 하면서 그것을 종교적이고 거룩하게 사용하도록 준비시킨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면서 죄스런 인간적인 대화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말로 옮겨 간다.

 

3) 침묵과 독서

 

한편에서 독서와 침묵,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서와 기도와의 이런 관계는 고대의 많은 문헌들 안에 나타난다. 이 금언 목록을 재편집한 스승은 더 나아가 잡담을 하며 죄 짓는 것을 피하게 할 목적으로 함께 일하는 형제들의 각 그룹에서 큰 소리로 읽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대로 아를의 체사리오의 강론들에서는 잡담이 교회나 집에서 행하는 거룩한 독서들을 효과적으로 경청하는데 가장 큰 장애로 나타난다. 침묵과 독서는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낭독된 내용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읽는 것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도록 하는 보다 효과적인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4) 독서와 기도

 

한편, 기도와 독서의 관계는 분명하다. 수도승생활 훨씬 이전에 성 치쁘리아노는 교부 저술가들과 수도승 저술가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하게 될 하나의 형태로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훌륭히 표현하였다.

 

“그는 한 개종자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기도하고 독서하기를 결코 중단하지 마시오. 당신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말씀드리며, 독서 중에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띠노, 시빌뤼아의 이시도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 생각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때때로 말들의 순서를 바꾼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통상적으로 독서가 기도를 선행한다. 전(全) 구원역사 안에서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에서 주도권은 주님께 속해있다. 먼저 사랑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렇듯 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의 기도는 그분의 목소리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될 것이다.

 

이 통상적인 순서는 우리가 스승과 베네딕도에게서 보게 되는 순서이다. 즉, 독서가 선행하며, 그것은 기도를 낳는다. 이 두 가지 도구 모두 고대 수도승생활의 기도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성서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기도로 그분께 응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5) 독서와 묵상

 

그러나 기도는 지속되어야 한다. -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 이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하루의 3시간만을 독서에 전념하지 않고, 묵상이라고 하는 중요한 수행을 통하여 독서가 나머지 시간으로 연장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메디따레’(meditare)는 마음으로 알고 있는 어떤 텍스트를 소리 내어 반복하는 것이다. 일단 렉시오의 시간을 보낸 수도승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이는 그가 기억에 풍부히 저장한 성서 본문들을 암송하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암송은 언제 어디서나 행해진다. 즉, 노동 중에, 오가는 중에, 자유로운 순간들과 기다리는 순간들에 행해진다.

 

수도승은 그렇듯 되새김질하는 동물과 비슷하다. 성서에 의하면(레위 11,3; 신명 14,6), 오로지 이 반추동물들만이 순수하다고 알려진다. 수도승은 또한 항상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휴대하는 오늘날의 노동자와 닮았다. 둘은 모두 일하는 중에 멀리서 오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는다. 즉 오늘날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세상의 소리를, 그리고 고대와 모든 시대의 수도승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

 

따라서 매일의 독서는 단지 침묵과 기도와만 관련이 있지 않고 또한 묵상과도 관련이 있다. 3시간 독서의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텍스트들을 암송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마음으로 배우는 데 있다. 렉시오 시간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암기로 소요된다.

 

이 수행이 아무리 유치하고 교과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독서 시간의 영적 유익을 감소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와 반대로 마음으로 한 텍스트를 알 때, 그것으로부터 풍부하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묵상은 단지 독서를 잇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서를 최대한으로 유익하게 하여 풍부한 결실을 맺도록 해준다.

 

6) 통합하는 대화

 

이러한 연장(延長), 즉 묵상을 통하여 독서는 다소 길고 정기적인 간격을 두고 기도의 응답을 일으키면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항구한 경청이 될 수 있다. 수도승의 삶 전체는 그렇게 주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지게 된다. 성무일도 역시 동일한 구조를 통해서 들음과 응답이라는 이 계속되는 리듬에 참여한다. 즉, 시편과 기도를 번갈아 가며 바치는 행위는 먼저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런 다음 거기서 침묵 기도의 소재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수도승생활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들과 수행들의 외적 다양성 아래 완전하게 ‘하나’라는 그 이름을 입증하게 된다.

 

7) 독서, 통회, 회개

 

독서의 마지막 관계, 즉 통회와 회개와의 관계가 강조되어야 한다. 베네딕도는 스승을 따르면서 착한 일의 도구들 목록에서 그것을 암시한 다음 사순절에 관한 장(章)에서 독자적으로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

 

사실 “거룩한 독서를 즐겨 들어라 - 기도를 위해 자주 부복하라”는 한 쌍의 권고들 다음에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를 권고하면서 지난날의 자기 잘못들을 하느님께 고백하라는 권고와 또 이 잘못들을 고치라고 규정하는 또 다른 권고가 뒤이어 나온다(RB 4,57-58 = RM 3,63-64). 독서는 이처럼 기도를 통하여 참회와 회개로 이끈다. 렉시오 덕분에 쓸데없는 잡답에서 단지 기도로 뿐 아니라, 또한 마음의 변형과 올바른 행위로 나아가게 된다.

 

사순절에 관한 베네딕도의 장(章)은 모든 악습을 끊어버리는 것 외에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의 통회”(RB 49,4)를 포함하는 하나의 영적인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독서와 통회의 이러한 연속은 “마음의 통회”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의 근원인 사도행전의 중요한 본문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오순절의 광경인데, 루가의 말에 의하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말을 마쳤을 때, 그들은 “마음이 켕겨”(compuncti sunt corde) 사도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회개하시오”였다.

 

베드로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이 그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듯이 이 동일한 말씀은 렉시오 디비나 안에서 그 말씀을 듣는 수도승의 마음을 움직여야한다. 이러한 통회의 고통 혹은 상처는 독서로부터 예상된 결과이며, 그것 자체는 사도행전의 이야기 안에서 회개의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은 렉시오를 마치면서 통회의 영향으로 또한 회개하게 될 것이다. 성 베네딕도가 바로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악습을 끊어버리는 것”은 이 문장에서 역시 언급하고 있는 기도의 “눈물들”이 통회의 고전적인 표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회개의 한 프로그램이다.

 

8) 독서와 관상

 

따라서 이와 같이 마음의 통회, 눈물, 회개를 낳거나 유지하는 것은, 만약 그것이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면, 수도승들이 하는 매일의 독서에서 오는 지극히 바람직한 결과이다. 베네딕도가 그것을 조언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 앞서 까시아노가 이미 “독서와 마음의 통회”(「제도서」V, 14,1)를 결합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일종의 독서라 할 수 있는 시편낭송에 “계속해서 통회를 유지하는 것을”(「담화집」1,17,2) 그 목적으로 부여하였다. 그 이후에 그레고리오 대종은「대화집」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IV, 49,2) 첼리오(Celio)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수도원의 한 수도승 안또니오를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큰 열정과 갈망으로 지식의 말들이 아니라 통회의 눈물을 추구하면서 거룩한 성서의 말씀들을 반복하였다. 이는 그의 영혼이 그것들로 일깨워져 불타오르게 하기 위함이고 또한 이 아래 세상을 포기하면서 천상 고향을 향한 관상을 위하여 소멸되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상 통회는 단지 회개로만 이끌지 않고 또한 관상으로 이끈다. 이는 경험에 토대를 둔 고전적인 가르침이다. 즉 그레고리오가 여기서 기억하고 있고 또 독서에 무한한 새로운 전망들을 여는 가르침인 것이다. 읽는 것은 관상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 세상을 향에 시선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불어 넣는 것이다.

 

 

4. ‘렉시오’의 어려움

 

이렇게 우리는 렉시오 디비나가 통과하는 멋진 길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도승들이 언제나 열성적으로 또 즐겁게 이 수행을 실천했으리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끝으로 그들이 거기서 직면하였던 지극히 인간적인 어려움들을 되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시에 성서를 마주보고 3시간을 보내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들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보다 더 수월하지는 않았다.

 

렉시오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들 자체는 그것이 요구하는 값비싼 노력을 암시하고 있다. 일과에 대한 장(章)에서 베네딕도는 외형상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개의 동사 ‘vacare’(RB 48,4)와 ‘intendere’(RB 48,18)를 사용하고 있다. 앞의 동사(vacare)는 휴식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 독서는 손노동의 중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것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포기해야 하는 이러한 강요된 휴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 뒤의 동사(intendere, 주의를 집중하다)는 그 자체로 스승이 말한 바와 같이(RM 50,16) 참된 “영적 노동”인 독서가 요구하는 열중(몰두)을 표현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어떤 수도승들의 방심을 책망하기 위한 경우 외에는 독서하는데 필요한 이러한 열중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순절에는 연속해서 3시간 동안 독서를 한다. 길게 지속되는 이러한 긴장을 견딜 수 없는 ‘아케디아’(akedia: 영적 태만)에 사로잡힌 형제들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형제와 잡담을 하러 간다.

 

주일 역시 온종일 독서하는 것은 규칙서가 요구하는 바처럼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빠스는 실제적인 일들로써 약한 이들을 관리해야 한다(RB 48,22-23). 이러한 독서의 문제들은 단지 성 베네딕도가 대상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태리 수도승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두 명의 동시대인들, 즉 프랑스 사람 페레올로(Ferreolo)와 아프리카 사람 풀젠씨오(Fulgenzio)는 그들의 수도원들 안에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론: 교부들로부터 현대인까지

 

이런 실재적인 진술들은 우리에게 현대 독서자들이 느끼는 어려움들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면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렉시오 디비나는 늘 하나의 금욕적인 노력이자 참된 영적 희생이었으며,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모든 풍부함의 원천인 렉시오 디비나는 또한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고대 수도승 저자들을 통해서 여기저기서 알려진 실패들은 그들이 증언하고 있는 엄청난 성과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완전히 성서 말씀으로 가득 찬 그들의 작품들은, 비록 그것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그 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서 풍요롭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작품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신약성서에 관해서처럼 구약성서에 관해서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면서 구약성서의 모든 페이지에서 다양한 차원들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밝혀준다. 즉, 예수의 역사적 실재와 그분 부활의 영광, 교회 안에 그분의 현존, 그리고 우리 각각의 영혼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 등이다. 우리의 과학적인 주석과는 거리가 매우 멀더라도, 이 작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사로잡힌 마음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남아있음을 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글 아달베르 드 보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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