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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켈리아 수도승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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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62

켈리아 수도승들의 이야기

 

 

그리스도교 수도승생활에 있어 가장 고대의 시기인 4-5세기 동안 이집트 북부의 가장 중요한 수도승생활 중심지는 스케테(Scete)와 니트리아(Nitria), 그리고 켈리아(Kellia) 혹은 첼레(Celle) 사막에 걸쳐서 형성되었다. 고대 스케테 사막은 오늘날의 ‘와디 엔 나트룬’(Wadi En Natrum)이라고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고대 니트리아는 델타(삼각주)에 있었다. 켈리아는 니트리아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니트리아와 스케테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문학적인 원천들을 통해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약 330년경에 대(大)마카리오 혹은 이집트인 마카리오에 의해 스케테에서 수도승생활이 시작되었고, 니트리아에서는 이보다 몇 년 앞선 약 325년경에 아문(Amun)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막의 관계는 언제나 긴밀했지만, 켈리아와 니트리아 사이에 보다 특별한 연결이 있었다.

 

우리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서 켈리아의 설립과 관련된 일화를 접할 수 있다. ‘수도승들의 사부’라고 불렸던 안또니우스는 니트리아에 있는 아문을 방문하였다. 아문은 안또니우스에게 니트리아에서 자기 주변에 정착한 수도승들의 수가 너무 불어나서 그들이 애당초 건설하려고 생각했던 암자들을 위한 공간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사실 북쪽에는 마을이 있었고, 동쪽과 서쪽에는 경작지들이 있었다. 수도승생활을 위해서 적합한 곳은 오로지 남쪽 사막 지대 뿐이었다. 그러나 니트리아 사막에서 얼마나 떨어져서 새로운 중심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아문이 안또니우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아문은 안또니우스에게 식사 후에 즉시 떠나 사막을 향해 계속 앞으로 걸어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해질녘에 걸음을 멈추었고, 안또니우스가 바로 그 장소에 새로운 암자들을 짓자고 제안하였다. 텍스트는 그곳이 니트리아에서 18 km 혹은 19 km 떨어진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또니우스는 이 거리가 적합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이 원하던 충분한 고독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 거리면 니트리아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식사 후에 서로를 방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반(半)은수생활을 하였던 이 사막(켈리아)의 수도승들을 위해 중요한 두 가지 요구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고독과 공동체 간의 이러한 균형은 켈리아에서 이루어진 수도승생활의 본질적인 한 요소이다.

 

켈리아는 언제 설립되었는가? 우리는「안또니우스의 생애」를 통해서 안또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가기 위해 홍해 근처에 있는 자신의 은수처를 두 차례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또니우스가 아문을 방문한 시기는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소송을 지원하기 위해 338년 7월, 알렉산드리아 방면으로 했던 여행 중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7월에 낮은 길었고, 이 사실은 제9시와 일몰 사이에 이루어진 긴 여행을 설명해 준다.

 

이 일화에서 두 가지 특징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안또니우스가 했던 역할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역시 일화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반론이 제기된다. 고대 교회 안에서 수도승생활 전체를 안또니우스의 보호 아래 두려는 경향이 매우 확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단지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와 심지어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다른 곳에서 역시 있었다. 오늘날 역시 우리는 안또니우스를 수도승생활의 창설자로 내세우는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스케테와 니트리아 사막의 수도승생활을 안또니우스에게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꼽트(이집트) 원천들은 가끔 안또니우스와 마카리우스의 관계를 과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계는 실제로 존재하였다. 안또니우스와 아문 간에 유지된 관계들에 대한 증거들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켈리아의 설립에 관련된 그 일화의 역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켈리아 사막의 반(半)은수생활은 니트리아와 스케테의 그것과 같이 전적으로 안또니우스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아문에 의해서 설립된 켈리아는 니트리아에 예속되어 있었다. 켈리아의 수도승들은 비록 니트리아의 수도승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니트리아에서는 불가능했던 보다 고독하고 집중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머지않아 곧 하나의 관습이 생겨났다. 즉, 수도승들은 먼저 니트리아에서 2-3년 공동생활을 했는데, 이는 일종의 수련기와도 같았다. 그런 다음 은수생활을 하러 켈리아로 갔다.

 

켈리아의 설립 이유였던 고독과 고요에 대한 요구는 켈리아에 있는 암자들의 배치를 설명해준다. 수도승들은 니트리아의 지나친 혼잡함과 수도원 건물들을 버려두고 고독 속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켈리아로 갔다. 켈리아 사막은 개인 암자들로 다시 붐비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암자들(Celle)을 뜻하는 겔리아(Kellia)라는 이 새로운 수도승생활 중심지의 이름이 생겨났다. 이 암자들의 증가와 그것들 간의 상호 고립으로 인해 새로운 중심지는 즉시 매우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빨라디오에 의하면, 켈리아의 수도승들의 숫자는 그가 390년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 6백 명이었다고 한다.「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에 따르면, 켈리아를 방문한 팔레스틴 수도승들의 무리는 암자들이 서로 일정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그곳에 거주하였던 수도승들은 서로를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없었고,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또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당에서 4-6km 정도 떨어진 곳에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이 암자들은 어떠했는가? 암자는 울타리로 폐쇄된 정원 안에 있었다. 정원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어 식수를 공급하였고, 또 작은 채소밭이 있어 수도승들에게 그들 식사의 일부였던 야채나 채소를 공급하였다. 이 정원은 비교적 넓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은수처를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산책도 할 수 있었다.

 

에바그리우스 역시 오침 시간에 잠을 쫓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암자 자체는 벽돌로 지어졌다. 이 벽돌은 진흙과 모래를 섞은 것인데, 그 지역의 공장에서 제조된 것이었다. 지붕 역시 벽돌 지붕이었다. 창문을 통해 채광을 해결하였고, 시건장치를 갖춘 하나의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암자 내부는 어떠했는가? 암자 안에는 적어도 두 개의 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문이 니트리아에서 세운 첫 번째 암자와 마카리우스가 스케테에 도착하여 지은 암자는 두 개의 방으로 되어있었다. 동쪽에 위치한 방은 기도소로 사용되었다. 이는 고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관습에 부합한다. 그들은 자기 집 안에 기도방 하나를 마련하였다. 기도 자체가 방향성을 지녔는데, 흔히 동쪽은 담 위나 혹은 벽감 안쪽에 그려진 십자가를 통하여 지시되었다. 각 은수처에는 하나의 기도소가 있었고, 그 안의 동쪽 벽에는 벽감이 마련되어 있었다.

 

암자는 이 두개의 방 이외에도 다른 방들을 포함할 수 있었다. 특별히 창고와 자주 영적 사부와 함께 지냈던 제자를 위한 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방들의 숫자도 늘어갔던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7-8개의 방들을 가지고 있던 은수자들도 있었다. 암자에는 식사나 노동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다른 물건들도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제9시(오후 3시)에 있었는데, 단식을 고려하여 식사 시간은 더 늦추어 지거나 아예 생략되기도 하였다. 주식은 기름과 소금으로 양념된 빵이었다. 켈리아 수도승들은 빵 굽는 기계가 있었던 니트리아로부터 빵을 공급받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일종의 마른 비스켙이었다. 익힌 음식들은 단지 환자들을 위해서만 제공되었다.

 

켈리아 수도승들은 스케테 수도승들처럼 추수 일을 하였다. 여기서 수확한 곡식은 니트리아로 보내져 빵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수도승들 가운데는 필사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소수였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수도승들 대부분은 글을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켈리아 수도승들 가운데 가장 박식한 수도승은 에바그리우스였다.

 

독방에서의 노동은 수도승의 본질적인 활동이었다. 이 노동의 의무적인 성격에 관해서 많은 문헌들, 특히 ‘아포프테그마타’(교부들의 금언집)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수도승은 자신의 생계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은수자들의 가장 나쁜 적인 ‘아케디아’(akedia)의 악령, 즉 한가함을 몰아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만이 아니라 기도도 역시 해야 했다. 이 두개의 활동은 가능한 한 계속 되어야 했다. 노동과 병행해서 수행되었던 기도는 ‘멜레테’(melete)였는데, 이것은 기억해 두었던 성서 구절, 특히 시편 구절을 작은 소리로 되뇌는 것이었다. 수도승은 독방에서 간단한 성무일도를 바쳤다.

 

‘독방을 지킴’은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었는데, 이는 그것만이 욕정들의 제거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헤시키아’와 고독 등을 보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시키아 안에서 사는 것’과 ‘자기 독방 안에 앉아 머무는 것’은 같은 표현들이다. 수도승은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에서 열렸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외출하였다.

 

사실 켈리아에는 교회가 하나만 있었다. 니트리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4세기부터 스케테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바로 수도승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암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벽돌로 지어졌다. 수도승들이 모였던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에는 열쇄로 잠겨져 있었다.

 

수도승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교회로 갔다. 만일 누가 오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그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안부를 물으러 갔다. 가끔 집회에 불참한 어떤 형제가 3-4일 전에 이미 죽어 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켈리아에서는 보다 더 엄격한 독수도승생활을 하였고 또 토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았던 수도승들도 있었지만, 이것은 아주 드믄 경우이다. 토요일 집회는 은수자들에게는 공동생활의 기회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켈리아 수도승생활의 큰 특징인 고독과 공동체, 독수도승생활과 공동생활 간의 조화를 다시 보게 된다.

 

토요일 저녁에 수도승들은 함께 ‘아가페’(agape)라고 칭했던 식사를 하였다. 아가페는 성체성사에 앞서 행해졌는데, 2세기에 성체성사로부터 분리되었다. 공동으로 행한 이 식사는 수도승들을 서로 일치시켰던 사랑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음식은 암자의 것 보다 더 양호했다. 위에 언급된 경우들 외에 익힌 음식을 먹는 유일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고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절제 있게 포도주를 마시기도 하였다(자주 그것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켈리아에서 어느 토요일 저녁, 주간 내내 준수했던 단식을 깨지 않기 위해서 가끔 형제들이 식탁에 앉은 순간에 도망쳤던 어떤 수도승에 대한 일화도 있다. 켈리아에서 어느 날, 포도주가 분배되는 동안 어떤 젊은 수도승은 그것을 마시기를 거부하며 지붕 위로 달아나기도 했다.

 

아가페 후에 초기 교회에서와 같이 밤에 이루어진 긴 전례를 거행하였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전례의 내용을 묘사하는 어떤 정확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까시아노가 이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거(「제도서」제2권)이지만, 그가 말하는 바를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먼저 시편 낭송으로 이루어진 성무일도의 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편들 사이에 신.구약 성서에서 뽑은 독서들이 행해졌다. 그런 다음 성체성사가 거행되었고, 참석자들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으로 가서 영성체를 하였다.

 

수도승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주일의 일부를 함께 보냈다. 젊은 수도승들은 원로들로부터 어떤 조언을 구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가끔 영적 강화들이 행해졌다. 그런 다음 주간 양식인 빵과 노동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각자 자신의 암자로 되돌아갔다.

 

전례 거행을 위해 자연히 두 명 혹은 적어도 한 명의 사제가 있었다. 당시 수도승 운동은 근본적으로 평신도 운동이었고, 대부분의 수도승들이 일생동안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었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는 겸손 때문에 사제 혹은 주교로 서품을 받지 않으려는 강한 저항이 있었다.

 

이사악 압바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자신을 사제로 서품하려는 낌새를 채고 달아나 약초밭에 숨었다. 저녁이 되자 그를 쫓던 사람들이 그가 숨었던 밭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추었고, 그들의 당나귀를 풀어주어 약초를 뜯어 먹게 하였다. 그러자 거기에 숨어 있던 이사악 압바는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켈리아의 사제가 되어야 했다. 켈리아의 가장 유명한 사제는 이사악의 선임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였다. 그는 394년에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켈리아의 사제였다.

 

이사악은 단지 성체성사만을 거행했던 것이 아니라, 또한 사막의 모든 수도승들에 대한 일종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법적 관점에서 켈리아에 수도승적 제도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게 된다. 암자 안에서 수도승의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로 공동체 생활 역시 기록된 하나의 규칙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헌들 안에 나타난 많은 예들을 통해서 사제가 권위를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괴팍한 성격을 가진 골치 아픈 수도승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팔레스티나 출신의 발렌떼(Valente)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있었는데, 그는 켈리아에 와서 정착하였다.

 

빨라디우스는 악령의 속임수에 넘어간 그가 교만해져서 사제 마카리우스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자 교부들이 그를 결박하여 1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당시에는 교회에 부속된 건물들 가운데 감옥도 있었다. 니트리아에도 매로 다스리는 징벌이 있었다.

 

결정해야할 어떤 중요한 문제나 중대한 경우가 생기면 사제는 원로회의(synedrion)를 소집하였다. 원로회의에서 교부들이 어떤 문제를 토의하고 있을 때 에바그리우스가 말을 하자 사제(아마도 마카리우스였을 것임)가 다음과 같이 혹독하게 말하며 그를 제지하였다. “에바그리우스, 우리는 당신이 만일 당신 고향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주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단지 한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오!” 아마도 니트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켈리아에도 여러 명의 사제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가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다소 조직화된 수도승 공동체와는 달리 이 공동체의 구역 내에는 또한 사부혹은 교부의 역할을 맡은 수도승들 주위로 자발적으로 형성된 보다 긴밀한 그룹들도 있었다. 이들은 소위 ‘형제회’라고 불렸다. 4세기 말에 켈리아에서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는 형제회는 소위 ‘에바그리우스의 형제회’ 혹은 ‘암모니우스와 에바그리우스의 형제회’이다. 이들은 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승들로서 켈리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형성하였다.

 

뽄뚜스 출신의 에바그리우스는 젊은 시절에는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다. 그는 위에서 언급된 당시의 관습대로 니트리아에서 2년을 보낸 후, 385년경에 켈리아에 도착하였다. 그는 399년에 사망할 때까지 켈리아에서 14년간을 생활하였다. 거기서 에바그리우스는는 매우 중요한 작품 하나를 저술하는데, 이는 사막 교부들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탁월한 철학을 독창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암모니우스라는 수도승과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데, 에바그리우스와 같이 암모니우스 역시 상당한 교육을 받았고, 오리게네스의 추종자였다. 그들과 세 명의 형제들은 한 역사의 영웅들이었던, “오랜 형제들”(lunghi fratelli)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에바그리우스와 암모니우스, 그리고 그들 주위로 모였던 사람들은 농부 출신이었던 대부분의 수도승들과는 달리 유식하고 교육을 잘 받은 수도승들이었다. 따라서 머지않아 이 두 부류의 수도승들 간에 긴장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특별히 스케테의 수도승들 사이에서 ‘신인동형론’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하나의 가르침이 확산되었다. 이 수도승들은 창세 1,3을 자구적으로 받아들여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였다. 에바그리우스와 암모니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은 이 조잡한 가르침에 반대하여 일어나 하느님의 비실체성 뿐만 아니라, 또한 ‘순수한 기도’, ‘참된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신인동형론자들’과 ‘오리게네스주의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오리게네스주의 수도승들은 켈리아 사막에 살았던 수도승들 가운데 보다 탁월했고, 거기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스케테의 수도승들 사이에서 켈리아는 좋지 않은 평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두 명의 수도승이 스케테에 도착했는데, 압바 아킬라(Achilla)가 그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이 켈리아에서 왔다고 말하지 못하고 니트리아 출신인 것처럼 소개하였다. 켈리아는 니트리아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반은 맞는 말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루스(Theofilus)는 처음에는 신인동형론자들에게 적대적이었으나, 개인적인 이유들로 인해 399년에 오리게네스주의자들, 특히 암모니우스와 그의 동료들(당시 에바그리우스는 막 사망하였다)을 반대하여 모질게 돌아섰다. 이듬해 테오필루스는 오리게네스주의로 의심을 받던 켈리아의 수도승들을 반대하여 원정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군대를 동반하여 켈리아 사막에 당도하였는데, 그 군대는 약탈을 자행하였고 암자들과 거기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 특히 책들을 불태워버렸다. 암모니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우물 속에 숨어 그들의 수색을 피하였다. 그 후 400년에 그들은 팔레스틴과 콘스탄티노플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서 환대를 받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사망하였다. 여기에 암모니우스도 포함되었다. 몇 년 후 생존자들은 켈리아 사막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켈리아의 사제 이사악도 있었다. 그는 켈리아에 돌아왔을 때, 거기에 니트리아에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크세노도케이온’(xenodocheion)을 건설하게 하였다. 이 건물은 일종의 숙소이자 동시에 병든 수도승들을 위한 병실로서 교회에 부속된 건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5세기에 다른 사막의 수도승들 사이에서처럼 켈리아 수도승들 가운데서도 분열이 생겨났다. 이러한 분열은 내부의 불일치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전체 교회를 양분하였던 단성론이라는 이단 때문에 촉발되었다. 이것은 451년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들에 따른 결과로서 야기되었다. 다른 사막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켈리아 사막에도 단성론에 빠졌던 수도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코로(Dioscoro)를 따랐다. 그리고 다른 수도승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정통교리에 충실히 머물렀다. 이러한 분열은 켈리아에 두 번째 교회의 건설을 허용하였다.「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즉 어떤 젊은 수도승은 이러한 분열에 당혹스러워 했으며, 그는 이 분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느 교회로 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켈리아 수도승들에 관한 문학적인 원천들은 이 시기 이후에 대해서는 별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에게 이후 세기에도 이 수도승 공동체가 생존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반면 거주 지역이었던 니트리아는 아마도 5세기에 수도승생활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멈추었다.

 

‘와디 엔 나트룬’(Wadi En Natrun), 즉 스케테의 수도원들은 총대주교 다미아노(578-604) 시대에 파괴되었다. 이 파괴는 또한 켈리아의 수도원들로 확산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랍의 정복(640) 당시, 대주교 벤자민은 정복자 ‘아므르’(Amr)의 호의로 스케테와 켈리아의 수도원들을 복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스케테의 수도승들 사이에서처럼 켈리아의 수도승들 사이에는 6세기에 단성론 교회 안에서 발전된 여러 분파들이 있었다. 이러한 분열들은 8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9세기에 켈리아의 수도승생활 중심지는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한 낮선 수도승이 켈리아에 와서 에바그리우스가 머물렀던 암자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사제는 거기에 한 악령이 거주했었다고 말하면서 그를 단념시켰다. 그 사제는 아마도 에바그리우스의 오리게네스주의가 남긴 나쁜 기억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마도 단순히 그 암자가 버려졌기 때문에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막에 퍼져 있던 은수처들은 유목민들의 침입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5세기 전반기 동안만도 스케테는 유목민에 의해 세 번씩이나 약탈을 당했다. 암자들은 파괴되었고, 수도승들은 살해되었다. 우리는 켈리아에 대해서는 이러한 증언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케테 보다는 피해가 적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일들로 인해 켈리아의 수도승들 역시 스케테의 수도승들이 했던 것처럼 방어를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5세기 후반기부터 고립되어 있던 은수처들을 버리고 서로 가까이 담으로 보호된 암자들을 세웠을 것이다.

 

이런 집단화 이후에도 역시 켈리아에서 수도승들은 각자 자기 암자에서 분리된 삶을 살았던 은수자들로 있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은수자들의 부락은 10개의 은수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각 은수처는 여러 개의 방들을 갖추었으며, 서로 잇대어 지어졌고 하나의 공동 담장으로 보호되었다. 또한 북서쪽 담장에는 공중화장실이 있었고, 주방과 우물이 있는 안뜰이 있었다. 뜰의 가장자리에 6-8개의 방들이 배치되었고, 뜰 한 가운데에 우물이 있었다. 모든 것은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이 담은 효과적인 방어 기능보다는 오히려 상징적인 봉쇄의 기능을 하였다.

 

다우마스 신부(F. Daumas)는 여기서 발견된 토기를 토대로 이들이 5세기 말 혹은 6세기 초의 은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보호 없이 한두 명의 제자와 함께 살 수 있는 고립된 은수처들을 선호했던 수도승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인근 대수도원들의 울타리 안으로 도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도원들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 자체가 불충분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 침략자들은 수도원들 내부로 난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도원 안에 피신용 망루들이 세워졌다. 이 망루들은 오늘날에도 ‘와디 엔 나트룬’의 유적지들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발굴된 거대한 건축물들 안에서 이런 망루들 가운데 하나의 내부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고고학적 발굴들이 켈리아의 초기 역사를 알려주는 문학적인 자료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 발굴들은 대개 5세기 말에서 8세기 말까지에 걸친 시기에 관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 중에 발굴된 거대한 지역 안에서 연대가 표시된 많은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들은 모두 8세기 전반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건물들의 마지막 모습과 관련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비문들 가운데 하나가 이와 관련하여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그 비문이 단지 가장 길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러한 수도승적 환경들에서의 영성생활에 관한 귀한 정보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발굴지의 한 기도소 안에서 소위 ‘예수기도’와 관련된 정보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오랫동안 매우 사랑받아 왔던 기도의 한 형태로서 예수의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켈리아의 비문은 단지 콥트 수도승들 사이에 이 기도의 유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수행과 이 기도에 제기된 이의들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제시해주고 있다. 또한 오늘날 버려진 장소들과 담벼락 여기저기를 장식한 프레스크화들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글 앙뚜안 귀오몽,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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