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28 ㅣ No.84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 (상)

 

 

보혈선교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고아원에서 수녀들이 아이들을 돌보며 하느님 나라 완성에 투신하고 있다. 원내는 창립자 프란치스코 판너.

 

 

영성과 삶

 

대전에서 신탄진을 지나 청주 방향 40번 국도를 타고 가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진입로로 들어서서 5분 남짓. 도로 왼편에 세워둔 팻말 너머로 보혈선교수녀원(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164)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도심에서 불과 20여분 거리. 그러나 수녀원이 자리한 그곳은 마치 깊은 산속인양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급작스레 맛보는 고요함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다. 수녀원을 둘러싼 주변 봉우리들 모양새 하며 수도(修道)하고 기도하기에 이보다 더한 「명당(明堂)」이 없을 듯 하다.

 

보혈영성

 

보혈선교수녀회(한국지부장=장효은 수녀)의 영성은 「보혈」(보배로운 피, Precious Blood)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피의 영성」이다. 물론 십자가에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쏟으신 그리스도의 피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의 현시이듯이, 피의 영성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피의 영성」은 그러나 보다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생명의 영성이고, 살림의 영성이다. 사람에게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듯, 보혈은 우리의 영적 생명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그 피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피」, 즉 「보혈」은 그분의 강생과 죽음,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신비」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 구원하심을 뜻한다.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원들의 영성과 삶은 『예수님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피에 담긴 사랑과 용서, 구원하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이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려는 노력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영성과 삶은 날마다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미사성제,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기념)제사에서 비롯되고 확산된다.

 

수도자요 선교사

 

『아무도 가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소』

『우리의 선교 영역은 하느님 나라요, 그 나라에는 국경이 없다』

 

창립자 프란치스코 판너(1825~1909)가 강조한 이 말은 보혈선교수녀회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삶과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수도자이면서 또한 선교사로서의 삶은 타 수도단체와의 차별성이자 이들의 고유한 카리스마이기도 하다.

 

특별히 보혈선교수녀들은 그들 고유의 「내적 영성」과 「덕목」에 따라 살아간다. 초대 총장인 마더 파울라 수녀가 남긴 「내적 영성」은 곧 회원들이 성혈을 공경하는 구체적인 방법일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있는 회원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영적 구심점이기도 하다. 내적 영성 가운데 첫째가 「보혈신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보혈을 특별한 방법으로 공경한다. 둘째가 「보혈의 샘이신 예수성심과의 일치」다. 세 번째가 「보혈선교수녀의 모델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다.

 

회원들의 순간 순간 삶을 규범짓는 4가지 「덕목」은 ▲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음 ▲ 끊임없는 하느님의 흠숭 ▲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끊임없는 자기극복 ▲ 희생하는데 있어서의 관대함 이다.

 

이러한 내적 영성과 덕목의 지침에 따라 보혈선교수녀들은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라 고백하며 「아버지의 딸」로서 일치를 이루며 하느님 나라 완성에 투신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16일, 전대섭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보혈선교수녀회 (하)

 

 

보혈선교수녀회는 현재 전세계 21개국에서 960여명이 활동중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수도생활에 종사하고 있다. 아시아에선 한국 수녀회가 유일하다. 사진 왼쪽부터 1986년 한국진출 주인공인 성신학교 교장 장효숙 수녀, 강효선 수녀(본부 총참사), 한국지부장 장효은 수녀.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하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에 따른 창설자의 고뇌와 희생, 초창기 공동체 회원들의 고난도 적지 않았다.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를 이해하는데는 『아무도 가지 않으면 내가 가겠소』라는 창설자 프란치스코 판너 아빠스의 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수도회 탄생의 역사적, 신앙적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 「수도자이며 선교사」란 말의 뜻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제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간략하나마 창설자의 이력을 살펴보자. 창립자 프란치스코 판너(본명 웬들린 판너)는 1825년 오스트리아 랑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5년 브릭스의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수업을 받았고, 1850년 교구 사제로 서품됐다.

 

13년간 사제로 활동하던 그는 건강악화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성지순례 도중 트라피스트 수도회원으로 여생을 마감할 뜻을 갖게 되고, 1863년 당시 나이 38세에 독일 아이펠에 있는 마리아발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한다. 1869년 보스니아(현 유고슬라비아)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세우도록 명을 받은 그는 「마리아 스틴」 수도원을 세우고 이후 11년간 아빠스로 헌신했다.

 

사부(師父)의 선교열정

 

1879년 9월 프랑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남아프리카 주교의 초청을 접한 판너는 『아무도 가지 않으면 내가 가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아프리카 선교를 자원한다. 1880년 31명의 다른 수사들과 남아프리카 단브로디에 도착한 그는 현지 주교의 도움으로 1882년 12월 「마리안 힐」 수도원을 세우고 정착하게 된다.

 

당시 수사들은 원주민과의 직접 접촉이 불가능했으므로 선교잡지를 발간하고 유럽에서 젊은 여성들을 초대했다. 마침내 1885년 9월 8일 독일에서 5명의 젊은 여성들이 선교 협력자로 살기 위해 도착했고, 이것이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이다.

 

보혈선교수녀회의 창설 역사에선 초대 총장 마더 파울라를 빼놓을 수 없다. 공동창설자로 불리는 파울라 수녀는 1886년 아프리카에 와서 이듬해부터 수련장을 맡으며 온전한 신뢰와 용기, 뛰어난 지혜와 책임감으로 사부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1905년 모원(母院)의 유럽 이주와 1906년 보혈선교수녀회 승인을 주도했고, 1907년 초대 총장에 선출되어 이후 12년간 공동체를 이끌며 초창기 수도회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보혈선교수녀회는 현재 전세계 21개국에서 960여명이 활동중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수도생활에 종사하고 있다. 아시아에선 한국 수녀회가 유일하다.

 

한국에는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중이던 장효은, 장효숙, 강효선 3명의 한국인 수녀(사진 참조)가 1986년 11월 24일 당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현 서울대교구장)의 초청으로 입국했다. 외국인 선교사를 동반하지 않고 한국인 수녀들만 입국해 수도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사례다.

 

1988년 첫 지원자 4명이 입회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서원자 35명이 본당사목, 장애인 및 노인복지, 교육사업, 피정지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9년 현재의 자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1990년 10월 수녀원과 피정의 집을 신축 봉헌했으며 1998년에 한국지부로 승격됐다.

 

※ 성소상담 및 문의=(043)260-1638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3일, 전대섭 기자]



1,20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