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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가르멜회: 탁발 수도승들로 변한 은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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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61

가르멜회 - 탁발 수도승들로 변한 은수자들

 

 

1. 12세기 말경 제1차 십자군 원정 후, 한 무리의 유럽인들이 팔레스티나 북부 갈릴레아에 있는 가르멜 산에 정착하였다. 13세기 초에 그들은 구약 예언자 ‘엘리아의 샘’ 근처에 분리된 작은 암자들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하나 지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다. 그 지역의 거주자들은 인근 성녀 마르가리따 수도원의 희랍 수도승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그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방의 관습에 따라 이 은수자들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알베르또에게 현행규정들에 의거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삶에 참사회적인 형태를 부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206년에서 1214년 사이의 어느 날에 성 알베르또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여 은수자들 자신이 제시한 제안에 적합한 하나의 생활 규범을 그들에게 부여하였다. 이 규범은 동시에 교회법적인 규정과 새 수도회를 이끄는 정신의 일차적인 원천이 되었다. 당시 이 규범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완성된 본문이 나타나는 것은 1370년경으로 카탈로냐(Catalogna) 가르멜회 관구장 펠립 리보트(Felip Ribot)의 「열권의 책」(Decem libri)이라는 전집 안에서이다. 최근에 네델란드 가르멜회 전문가 그룹이 이 규범에 해제와 주석을 달아 출판하였다.

 

그 규칙은 수도자들이 선출하고 순종해야 하는 한 원장의 선정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한 순종 아래 각 수도자에게 개인 아파트가 배당되어야 하며, 거기서 그는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머물러야 한다. 사실 그들의 주된 일은 중단 없는 개인기도이다.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전례기도가 이 개인기도에 부가된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교정제는 과도한 개인주의를 극복하게 해준다. 공동생활은 시편 낭송으로 시작되며 이른 아침에 거행되는 성체성사 거행에 집중된다. 또한 주일에는 결점들을 교정하고 삶의 양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동체 모임이 있다. 식사는 당시 관습이었던 성 십자가 현양 축일부터 부활절까지 이어지는 단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고기는 일체 먹지 않았지만, 병자에게는 관면되었다. 유혹들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노동과 침묵이 찬양되고 강하게 권고되었다.

 

알베르또가 영위한 삶의 양식은 근본적으로 베네딕도 이전 은수자들의 고전 영성으로 돌아간다. 거기서는 개인에 강조점이 부여되지만, 동시에 공동생활을 명령하면서 과도한 개인주의를 경계한다. 이렇게 그는 은수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통합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알베르또는 널리 알려진 아우구스띠노 규칙과 베네딕도 규칙처럼 교회법적 의미에서의 규칙이 아니라 삶의 한 양식을 부여한다. 이는 초기 가르멜 수도자들이 교회법적 의미에서 하나의 수도회를 설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삶의 양식에서 원장은 베네딕도회적 개념에 따라 ‘아버지’ 혹은 공동체의 기원이다. 원장은 공동체의 지지로 공동체 심장부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규칙서에서 말하는 순명의 영성은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코미오와 바실리오의 금욕적 순명과는 같지 않다. 알베르또의 규칙은 사막 교부들의 순명 개념을 성 아우구스티노의 순명 개념과 혼합하고 있다. 즉,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에 충실한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로 모인 은수자들과도 같다.

 

초기 수도승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묵상 또는 입술과 마음으로 성서의 말씀을 되새김하는 것은 새로운 가르멜 은수자의 살과 피를 이룬다. 묵상에서 기도, 다시 말해 지혜로운 관상이 생겨나야 한다. 주간 집회에서 새로운 점은 집회가 원장의 앞선 설교 없이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대화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수도승들의 집회와 그것을 차별화한다. 이 가르멜의 대화는 또한 분별의 수단이기도 하다. 영적 투쟁에 대해서 다루는 규칙서의 부분은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사막 교부들의 영성은 이제 십자군 원정의 빛에서 새로운 실현을 보게 된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공의회가 새로운 수도회들의 설립에 부과한 제한들 때문에 알베르또는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승인은 1226년 교황 호노리오 3세에 의해서 주어졌다. 교황청의 승인으로 초기의 규범은 참된 규칙이 되었다. 그렇지만 3년 후인 1229년에 그레고리오 9세는「직무로부터」(Ex officii) 란 교서를 통해 가르멜 은수자들을 탁발 수도회들의 생활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하면서 가르멜회원들에게 탁발 혹은 공동체적 가난을 부과하였다.

 

회교도들의 계속된 탄압으로 은수자들은 1235년에 서방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그룹은 치쁘로(Cipro)에 당도하였고 다른 그룹들은 시칠리아와 플랑드르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241년에는 영국으로 간 그룹도 있었다. 이미 십자군 기사들에 의해서 잘 알려진 그들은 가는 곳마다 대환영을 받았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러하였는데 루이 8세 왕은 그들의 훌륭한 보호자였다.

 

 

2. 서방으로의 이전은 적응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가르멜회원들에게 부과한 탁발은 즉시 그들에게 이런 문제를 느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자선을 구하게 하였고 또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연루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수도회 총회 중에 그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자신들의 규칙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허락을 청하였다. 그러자 인노첸시오 4세는 1247년 10월 1일「창조주께 영광을」(Quae honorem Conditoris) 이란 교서를 통해 그것을 허락해주었다. 이 교서로 초기 규칙의 회수도적 은수자들이 증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수도회는 은수적이고 관상적인 수도회에서 탁발 수도회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상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도회를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새로운 삶의 형태로 인해서 실현되기가 더 어렵게 되었지만 규칙의 핵심 요소인 지속적인 기도의 규정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새로운 세대의 가르멜회 영성은 관상과 활동 간에 균형을 잡아나가게 된다. 관상과 활동 간의 조화 문제는 당시에 이미 긴박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후 가르멜회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관상-활동’이라는 이 미묘한 축은 가르멜회 영성의 발전 안에서 중심축을 형성하며, 동시에 그 고유한 특성을 탐지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해 준다.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서 주어진 변화 가능성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갔다. 사도직 활동들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공동체들은 고독한 장소에 설립되지 않고 오히려 마을과 도시에 설립되었다. 점차 수도회 안에 성직자들이 불어났고, 미사와 성무일도, 즉 전례생활이 가르멜회의 일상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253년 6월 26일 인노첸시오 4세는 가르멜회를 탁발 수도회들의 목록에 포함시켰다.

 

13세기 중엽 이후 가르멜회의 총원장이었던 니콜로 갈리꼬(Nicolo Gallico)는「불화살」(Ignea sagitta)이란 책을 저술하면서(1270-1271년) 수도회를 순수한 은수생활로 되돌리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수도회의 이런 급속한 변화를 애석해하였다. 그러나 런던(1281년)과 보르도(1294년)의 회헌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침묵과 고독과 열심한 노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몽뻴리에(Montpellier) 총회(1287년)에서 역시 관상적 이상이 다시 강하게 주창되었다.

 

1291년 예루살렘의 라틴 왕국의 붕괴와 더불어 이 수도회는 성지에서 사라졌다. 13세기 말경 수도회는 볼로냐(1293년)와 페라라(1295년)와 로마(1299년)에서 최초로 본당들을 맡게 되었다. 리용 공의회에서 가르멜회원들은 단지 잠정적으로 용인되었다. 그러나 호노리오 4세는 그들을 실제로 추인해주었다. 그리고 보니파시오 8세(1298년 5월 5일)와 요한 22세(1317년 3월 13일)는 이미 프란치스코회원들과 도미니꼬회원들에게 부여된 교서「주교좌에 관하여」(Super cathedram)를 가르멜회원들에게 확대 적용하면서 법적으로 승인하였다.

 

일반적으로 1317년 요한 22세의 교서「거룩한 수도회」(Sacer Ordo)와 더불어 탁발 수도회를 향한 이 수도회의 발전과정은 종결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가르멜회원들은 언제나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수도회의 주된 목표, 즉 공동체 전례기도에 밀접히 연결된 관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 종속시키면서 이제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회헌 안에서 가르멜회 삶의 이상, 특히 관상적인 이상은 엘리야와 마리아 이 두 명의 인물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예언자 엘리아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해주는 가르멜 산에서 수도회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엘리아적 자의식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324년 회헌에서는 심지어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이 수도회의 초기 은수자들 간의 연속적인 계승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14세기 전반부에 이런 생각이 확산되어 엘리아를 수도회의 창설자로 제시하게 된다.

 

이 영성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초기 수도승들의 제도에 관한 작품」(Liber de institutione primorum monachorum)이란 책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 책은 가르멜 영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이고 교의적인 설명을 제시하였고, 후에는 수도회에 대한 주된 영적독서용 책이 되었다. 이 책에서 엘리아란 인물 위에 토대를 둔 은수적이고 관상적인 이상은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즉, 첫 번째 목적은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은 우리의 노력으로 죄의 온갖 허물에서 씻겨진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을 얻어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하느님 현존의 능력과 초자연적 영광의 감미로움을 단지 죽음 이후에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마음으로 맛보고 정신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시각에서 가르멜의 영적 가르침의 일반적인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엘리아와 그 후예들의 예언적 활동 위에 토대를 둔 사도적 차원도 결합되고 있다.

 

초기부터 성모 경당 주위로 모였고 또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형제들’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었던 이 수도회의 은수자들은 유럽으로 이전하면서 그들의 마리아적인 특성도 역시 함께 옮겨갔다. 1263년의 교서에서 이미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가 수도회의 수호자로 불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럽에서 새로 설립된 공동체 성당들도 역시 초기 가르멜 산에서의 모범에 따라 성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그래서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가르멜 산의 성 마리아의 형제들’이란 명칭을 유지하였다.

 

이 사실은 유럽에서 하나의 오랜 논쟁을 야기했으며, 이 논쟁은 1374년 영국 갬브리지 대학의 한 학기 중에 절정에 달했다. 거기서 그러한 명칭을 교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이 명칭에 이의를 제기한 반대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가르멜회원들에게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150년 동안 지속된 이러한 논쟁에서 자기방어의 요구들은 가르멜회원들로 하여금 수도회의 정신과 마리아적 성격에 관해 숙고하게 하였다. 이미 1264년부터 여러 번에 걸쳐 점진적으로 그러한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1264년에 가르멜회원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헌신할 것을 서원하였다. 1325년에 가르멜회 안에서 큰 권위를 지닌 요한 바콘트롭(J.Baconthorp)은 세 편의 글을 썼는데,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즉, 그 수도회는 가르멜의 주보 마리아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 설립되었다.

 

가르멜회 수도자들은 그들의 모든 활동을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의 영예에 맞추어야 한다. 그녀는 당신의 덕행들을 본받도록 요구하신다. 마리아는 이 수도회의 주보로서 수도회를 돕고 보호하신다. 성모 마리아 모방 개념은 이미 언급된「초기 수도승들의 제도에 관한 작품」에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동정 생활 안에서 실현되는 모방이다.

 

가르멜회의 이 마리아 신심에 대한 최초의 개요는 이후 15세기 말경에 ‘마리아를 본받는 삶’의 창시자인 아르놀드 보스티오(Arnoldo Bostio)에 의해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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