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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꼬회: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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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60

프란치스꼬회 - 프란체스코와 그의 형제들

 

 

1. 프란체스코는 아씨시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매우 오래된 이 로마의 도시는 12세기 후반부에 뻬루지아(Perugia) 정면의 스폴레또(Spoleto)라는 제국 공작의 영지에 속한 쿠네오(cuneo, 이태리 북부의 도시)를 설립하였다. 반면,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뻬루지아는 교황의 권위 하에 있었다. 황제의 권위이든 교황의 권위이든 하나의 참된 권위의 부재(不在)로 인해 아씨시에서 귀족들과 서민 계층에 속한 귀족이 아닌 소위 ‘더 작은 자들’(minori) 간에 잦은 대립이 일어났다. 1203년에 귀족계급과 백성 간에 최초로 평화가 정착되었다. 당시 아씨시의 경제 상황과 생활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도시 공동체에 필요한 일련의 활동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시장, 기술자들, 많은 공증인, 화폐 교역,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정신을 가진 상인들이 있었다. 또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들에는 중세 초기 내내 농촌에 존재했던 가난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생겨났다. 농촌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어떤 먹을거리를 찾았던 반면, 도시에서 극빈자는 구제수단을 발견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경우, 나병환자들과 같이 불쌍한 사람들은 직접 시민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제외되었다.

 

프란체스코는 그 도시의 상인 계층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에 속하는 매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는 아씨시에 상점을 하나 소유하였고, 고급 옷감을 취급하는 포목상을 하였다. 그는 고급 천을 수입하기 위해서 자주 프랑스를 들락거렸고, 수입한 천들을 다시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판매하였다. 결국 그는 이윤 추구를 원하는 상업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리인이었다. 만약 프란체스코의 부친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면, 그의 모친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불확실할 정도로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가문에서 프란체스코는 1181-1182년경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가 장남으로 출생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부친이 없을 때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부친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기 이름을 프란체스코로 바꾸었다. ‘프란체스코’는 그 당시 말로 ‘프랑스인’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그의 유년기와 문화적 양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부친의 계획으로 프란체스코는 성년이 되면 매우 번창한 가내 상업을 맡아 경영하도록 예정되었다. 그는 점차 훌륭한 상인이 될 정도로 부친의 정력적이고 유능한 협력자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실업가는 회심, 다시 말해 가치 기준의 완전한 변화를 체험한다. 프란체스코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심리적 변화를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 프란체스코 형제에게 그렇게 참회를 시작하게 하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떠날 때, 나에게 불쾌하게 보였던 것이 영혼과 육체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 후 나는 잠시 머문 다음 세상을 포기하였다.”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은 그의 회심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전의 시기를 죄의 시기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버렸다.

 

그의 회심의 결정적 동기는 나병환자들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된다. 그 결과 프란체스코는 중세의 전형적인 의미로 이해된 “세상”을 포기한다. 프란체스코 자신을 통해서 그렇듯 간결하게 서술된 이 회심에 대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은 프란체스코 양심의 내밀한 침묵 속에 감추어져 있다.

 

‘죄 중에 있다’는 것은 현세의 쾌락들과 연결된 삶을 사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를 잊는 것을 함축한다. 전설에 의하면, 프란체스코는 유능한 상인이었지만, 자기 부친보다 더 쾌활하고 자유분방했다. 그는 아씨시에서 친구들의 무리와 함께 밤낮으로 무위도식하며 벌어들인 돈을 연회와 오락으로 모두 탕진하면서 노래 부르고 즐기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상인의 아들인 그가 마치 위대한 군주의 자손인양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고 자주 그를 힐책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부유하였고 또 아들을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었다. 프란체스코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고, 그의 생활양식은 “기사도적”이었다. 결국 그는 젊은 상인이었지만, 사업 능력이 있고 호사와 사치를 사랑하는, 그리고 관대와 관용과 품위로 자신을 빛나게 했던 생활양식에 빠졌던 젊은이였다. 프란체스코는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고 뛰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지닌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꿈들은 가능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번창하여 단지 사회적인 수준에서만 그 가문을 귀족계급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젊은 상인의 기사도적 야심이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란체스코가 20살의 나이로 1202년에 있었던 꼴레스트라다(Collestrada) 전투에 참여한 것은 공적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하여 프란체스코는 당시 적지인 뻬루지아의 감옥에서 1년간 갇혀있었다. 그는 통상 귀족계급에 속해있던 기사들 사이에서 전투하였다. 이제 그도 비로소 귀족이 되는 순간에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1203과 1204년 사이에 풀려나 이전과 같은 야심들을 품은 채 아씨시로 되돌아왔다. 군사 원정을 위해 뿔뤼아(Puglia)로 가려는 생각으로 동료들을 찾고 있던 백작 젠틸레(Gentile)에 의해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원정대가 출동하게 된 동기는 이태리 남부의 광폭한 무정부상태에 대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염려 때문이었다. 값비싼 전쟁용 갑옷으로 완전하게 무장한 프란체스코는 밤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된다. 1205년경 그의 나이 23세에 이제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군사원정을 떠났지만, 하루 이틀 행군한 후 스폴레또(Spoleto) 근처에서 병이 났으며, 다시 꿈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2. 아씨시로 되돌아 온 그는 평범한 일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과묵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영적 발전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기 양심 안에 은밀히 남아있었던 깊은 내적 결핍을 느꼈는데, 이는 그를 회개에로 이끌었다. 그것은 기사도적 관용에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로운 관대함으로의 전이(轉移)였다.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변화의 분명한 표지 하나는 그 당시에 그가 했던 로마의 성 베드로 성전에로의 성지순례였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복음적 가난에 대한 그의 열망이 무르익어갔고, 따라서 그는 아씨시의 주교 귀도(Guido)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다. 기도를 통해서 해답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기도 중에 모든 가치 기준의 전환을 체험하였다. 프란체스코가 아씨시 교외에서 말을 타고가면서 한 나병환자를 만났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용기를 내 자연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말에서 내려 그에게 자선을 하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며칠이 지난 다음 프란체스코는 상당한 돈을 가지고 나병환자들의 거주지로 갔다. 거기서 그들을 모아 그들 각자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각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것은 그의 회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회심의 결과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언어로 참회자가 되기 위하여 세속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한 동굴로 은거하면서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된다. 거기 머무는 동안 도시 사람들의 의혹과 당혹만큼이나 그에게 고민과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는 어떤 신비 체험을 하는데, 곧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에 대한 체험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는데, 거기 있는 십자고상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프란체스코, 내 집이 무너져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복구하여라.” 프란체스코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실제로 무너졌고 또 다시 무너질 기미가 있었던 그 성당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친 상점의 고급 직물에 대한 배당 몫을 팔아 그 성당을 즉시 복구하였고 또 그 성당 담당 사제에게 돈을 넘겨주었다. 폴리뇨(Foligno)에서 프란체스코가 행한 직물과 말의 판매는 그의 부친을 불안하게 하였고, 걱정이 된 그는 아들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 프란체스코는 숨었지만, 후에 실성한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아씨시로 되돌아 왔다.

 

프란체스코에게 있어 이 경험은 불의 시련과도 같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부친은 아들을 도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프란체스코의 경우 교회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그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베르나르도네는 자기 아들을 주교의 법정에 소환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거기에 출두하였고, 주교는 아직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부친에게 되돌려주라고 명령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이에 복종하여 그가 재판을 받았던 산타 루피나(Santa Rufina) 광장 한가운데서 판매하고 남은 돈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부친에게 양도하면서 주위에 서있던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이제부터 앞으로 나는 더 이상 ‘내 아버지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가 아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싶소.” 성난 부친은 돈과 옷을 걷어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주교는 감동하여 프란체스코를 팔로 감싸 자기 외투로 그를 덮어주었다. 이 철저한 포기로써 프란체스코는 사회의 한 계층에서 또 다른 계층으로의 전이, 다시 말해서 “더 중요한 이들”의 계층에서 “더 작은 자들” 혹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계층으로의 이동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절대로 성직자나 사제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잘 보호된 사회계급으로 편입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보장된 매일의 양식을 소유한 수도승조차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이런 삶의 양식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카타리파와 발도파 운동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들을 절대로 비판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회의 변방인 가운데 하나이며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나병환자라고 생각하였던 프란체스코는 결코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었다. 이웃사랑과 애덕이 부족한 부자를 거슬러서도 역시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수도승도 사제도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군다나 이단자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기를 원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된 순간에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일해야 했다. 자신의 길을 발견한 프란체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그 성당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은수자의 복장(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은)을 하고서 아씨시를 돌며 돌들을 구하였다. 그의 부친은 길에서 아들을 만날 때마다 욕을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프란체스코는 문전걸식을 하며 성 다미아노 성당 복구를 위해 손일을 하면서 힘든 2년을 보냈다.

 

 

3. 성 다미아노 성당 복구를 마치자마자 또 다른 사건 하나가 프란체스코에게 결정적인 길을 지시하였다.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미사 복음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예수의 다음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마태 10,9-10) 이 말씀은 철저한 가난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위한 내용과 방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은수자의 복장을 벗고 보다 더 가난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가죽 띠 대신 끈으로 허리를 동이고 지팡이와 샌들을 포기하였다. 이렇게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새롭고 결정적인 단계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회개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모범을 따르려는 충동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첫 번째는 뀐따발레(Quintavalle) 출신의 베르나르도로서 그는 아씨시의 부유하고 유력한 고관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번째 동료 삐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가 합세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평신도였고, 삐에뜨로는 사제였다. 이 세 사람은 ‘거룩한 복음의 형태에 따라’(secundum formam sancti Evangelii) 살려고 하였다. 수도승 수도회와 비교할 때 이것은 하나의 새로움이었다. 수도승생활의 모토인 ‘초기 교회의 형태’(ecclesiae primitivae forma) 앞에 ‘거룩한 복음의 형태에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시대의 깊은 열망들에 응답하였고 또 교계제도에 대한 적대적인 동시대의 일탈들을 피하면서 특별하고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철저하게 가난을 살았다.

 

당분간 이들에게는 잠을 잘 곳조차 없었다. 그들은 ‘싼타 마리아 델뤼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라고 불렸던 버려진 허름한 경당 옆에 그들이 직접 지은 한 오두막을 피난처로 삼았다. 이 가난한 거처에서 두 명의 새로운 동료들, 평신도 에지디오(Egidio)와 예전에 성 다미아노 성당 관리 사제였던 실베스트로(Silvestro)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두 아씨시 출신들로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다른 도시에 설교하러 가기 위해 아씨시를 떠났다. 프란체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Ancona)를 향해, 그리고 베르나르도와 삐에뜨로는 또 다른 미지의 지역을 향해서 떠났다. 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세 명의 동료들, 사바띠노(Sabatino), 모리꼬(Morico), 죠반니 데 까뻴라(Giovanni de Capella)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 당시 베르나르도가 피렌쩨 (Firenze)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두 번째 파견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고, 그들은 “아씨시 출신의 참회자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회는 아직 수도회라고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아씨시로 되돌아왔을 때,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였다. 숫자가 더 불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했고, 그들의 생계 문제가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해결책은 바로 탁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만 자선에 호소하였고, 보통 자신의 손으로 일하였다. 이제 12명에 달한 형제 공동체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즉, 그들 자신을 위한 기도와 노동과 가난의 삶, 다른 사람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들을 돌보는 봉사의 삶, 교회에 다니고 사제들을 존경하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들을 권면하는 도시에서의 삶이었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교황으로부터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승인과 권한을 얻기 위하여 로마 여행길에 오른다. 프란체스코는 로마에서 리더로서 행동하였고, 먼저 추기경들에게, 그런 다음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그들 삶의 양식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프란체스코적 삶의 계획을 구두로 승인하였다. 이 때가 1210년 봄이었다. 프란체스코 형제회의 이 초기 단계에서 이미 하나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곧 사회의 일상생활에의 참여와 관상생활의 고유한 병존이다. 하루의 대부분이 노동과 참회에의 권고,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에 바쳐졌다.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 이외의 시간은 관상에 바쳐졌다. 이런 작은 자의 삶 안에서 몇 가지 요소들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전적이고 절대적인 가난이다. 이러한 가난으로 하나의 사회적 신분에서 또 다른 신분으로 건너갔다. 둘째는 이런 변화된 사회계층에 대한 외적인 표지인 복장이었다. 중세 때는 복장은 신분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표지였다. 또 다른 현저한 요소는 로마 교회의 성무일도에 따른 공동기도였다. 프란체스코는 문화를 지나치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문맹자들, 비천한 자들, 그리고 모두에게 종속된 자들이었다.” 12세기에 ‘비천한 자’(idiota)는 ‘문화의 결핍’, 특히 ‘교회적인 문화의 결핍’을 의미하였다. 프란체스코와 동료들에 의해 적용되고 실천된 손노동의 경우는 그러한 사실에 밀접히 연결되었다. 그들은 어떤 기술도 몰랐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수공업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가함을 피하고 좋은 표양을 주기 위한 것만큼 보수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도시에서 일거리가 없을 경우에만, 탁발이 정당화되었다.

 

그 당시 프란체스코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하여 리보또르또(Rivotorto) 보다는 더 크고 안정된 장소를 물색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는 주교와 산 루피노(San Rufino)의 참사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에게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여 결국 수비아꼬 산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소유인 ‘싼타 마리아 델뤼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혹은 ‘뽀르찌운꼴라’(Porziuncola)를 다시 생각하였다. 아빠스는 큰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공동체 참사회를 소집하여 거의 파괴되어 붕괴될 지경에 놓인 ‘싼타 마리아’ 성당(아씨시에서 가장 초라한 성당)을 무상으로 그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소유권이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아빠스는 수도원 소유를 인정하는 행위로서 그들이 매년 물고기 한 광주리를 자기에게 가져오도록 계약을 체결하였다. ‘뽀르찌운꼴라’는 프란체스코가 형제들을 위해 생각했던 최상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철저한 가난과 관상적 침묵을 실천할 수 있게 하였고 또 도시 근교에 위치하고 있어 그들이 일하고 설교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다.

 

11,12세기 종교심의 특징적인 면모들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어 공적으로 활동하였다. 여성들은 이제 교회생활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성녀 글라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프란체스코의 초기 동료들 가운데 하나인 사촌 루피노를 통해 자신도 그들의 단체에 합류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프란체스코에게 전하였다. 글라라는 프란체스코보다 11년 뒤인 1193-1194년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녀는 타고난 기질상 종교적인 삶으로 기울어졌고, 모범적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18세에 그녀 나이 또래의 소녀들 사이에서 세련미와 우아함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프란체스코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만남은 은밀히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들의 가족들 때문이었다. 많은 대화 후에 프란체스코는 그녀가 자기 부르심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서 도망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212년 성지주일 밤에 그녀는 집에서 나와 급히 2km 정도 떨어져 있던 뽀르찌운꼴라의 싼타 마리아를 향하였다. 거기서 밤기도를 하고 있었던 형제들이 그녀를 맞아들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 손으로 그녀의 두발을 잘랐고,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주었다. 그들은 처음에 그녀를 아씨시에서 약 4km 떨어진 바스띠아(Bastia)의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보냈고, 후에 또 다른 베네딕도 수녀원(Sant'Angelo di Panso)으로 이전시켰다. 머지않아 다른 젊은이들과 또한 그들의 친척들 역시 그녀에게로 와서 합류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가 직접 복구했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 안정된 거처를 그들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성들은 그 순간부터 참회과 기도와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한 안전한 장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일거리를 찾으러 외출할 수도 또 설교를 하거나 참회를 권고할 수도 없었다. 프란체스코와 형제들은 복음적이고 프란체스코적인 삶의 양식을 조금씩 가르치면서 그들을 돌보았다.

 

 

4. 한편 작은 형제들의 생활은 그럭저럭 지속되었다. 1216년에 뻬루지아(Perugia)에 온 비트리(Vitry)의 주교 야고보는 당시 그곳에 작은 형제들의 수효가 많이 불어났으며, 그들은 영혼들을 회개시키려는 갈망으로 불탔고, 낮에는 시내에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그들의 은둔지에서 기도하는데 전념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그들의 공동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토스까나(Toscana), 뿔리아(Puglia), 시칠리아(Sicilia) 등지에 퍼져 있었다. 비트리의 주교에 의하면, 그들은 일년에 한 번, 즉 성령강림 축일에 모두 함께 모여 그 해 발생했던 내·외부의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프란체스코의 형제단은 초기에는 프란체스코가 기초를 놓고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승인한 빈약한 규칙을 토대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소자들이 증가하면서 수도회로 발전되었고, 제도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프란체스코는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우골리노(Ugolino) 추기경을 후원자로 삼았다. 깊은 영성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활동가였던 이 인물은 후에 그레고리오 9세란 이름으로 교황이 되고 그 신생 수도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오스티아의 우골리노는 인노첸시오 3세와 함께 궁정 실무와 국제 관계를 가르치는 명문 학교에서 양성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우골리노를 신뢰하여 외교관으로 등용하였고 그의 후계자 호노리오 3세 역시 이러한 직무에서 그를 지지하였다. 우골리노는 피렌체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났고, 그와 죽을 때까지 지속된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다. 바야흐로 제도적인 윤곽 아래 작은 형제회가 최소한의 구조를 갖추고 있던 때었다. 즉, 지역 장상들이 생겨나고 관구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확장을 위해 이탈리아를 벗어나기로 결정되었다. 그 당시 작은 형제들은 롬바르디아에서 시칠리아까지 퍼져있었다. 1217년, 영국, 프랑스, 독일, 팔레스티나 등지로 형제들이 파견되었다. 프란체스코 자신이 프랑스로 가기로 결심함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었다. 프란체스코는 사제였던 실베스트로 수사를 동반하였다. 아레쪼(Arezzo)로 가는 길에 피렌체에 당도하였는데, 이 도시에 카타리파들도 도착하였다. 바로 이로 인해 거기서 프란체스코를 매우 친절하게 맞이했던 우골리노 추기경을 만나게 되었다.

 

여행 동기를 전해들은 추기경은 즉시 여행을 단념하라고 권고하였다. 프랑스로 가는 것을 단념시기키 위해 우골리노가 제시한 이유는 이렇다. 즉, 유럽 주교들이 로마 교황청 내부에서 그 수도회의 선익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아씨시로 되돌아가야했다. 우골리노와의 만남은 이후 프란체스코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었다. 교황 자신이 그 수도회를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체스코는 “추기경 보호자”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고, 우골리노에게 이 역할을 맡아달라고 특별히 청하였다. 동시에 프란체스코는 1218년 성령강림 총회에도 참석해 달라고 추기경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 수도회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수도회 내부의 변화는 오히려 형제들 자신의 저항, 적어도 프란체스코의 이상에 반대하였던 그들 가운데 몇몇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는 수적으로 불어난 수도회 안에서 초기의 소규모 형제 공동체 상태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많은 사제들이 수도회로 편입되었고, 형제들은 아씨시와는 상황이 전혀 다른 사회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와 교황청의 만남은 한 인간이자 이상가였던 프란체스코에게는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즉 1216년부터 1226년까지 다시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 시기에 프란체스코는 육체적인 고통에다 심리적인 고통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작은 형제들은 유럽 전역으로 흩어졌다. 독일에서는 이단자들 때문에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했고, 영국에서는 추방당했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스페인을 거쳐 마로꼬(Marocco)에 갔던 형제들이 처한 운명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수도회 안에 보다 정확하고 유기적인 구조가 얼마나 필요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하나의 규칙이 부과되었다. 이 규칙은 수도회의 삶을 토대 놓았고, 그리스도교 안에 고유의 위치를 수도회에 부여해 주었다. 보다 중대한 장애는 수 세기에 걸친 교회 전통에 집착해 있던 많은 수도승들과 참사회원들, 그리고 사제들에 의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이 새로움을 거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전통을 깨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5. 하나의 규칙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프란체스코는 비록 법적인 규정에는 친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규칙을 제정하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애 말년에 이 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지만, 규칙을 작성하기 전에 팔레스티나(성지)로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동방에서 신앙 전파 활동의 결과인 순교가 그를 매료시켰던 것 같다. 프란체스코는 팔레스티나로 떠나기로 결심하였지만, 자신의 어께에 하나의 거대한 수도회가 달려 있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가 없는 동안 마테오와 그레고리오 두 형제에게 수도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성지로 떠났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 호노리오 3세는 뻴라지오 갈바니(Pelagio Galvani)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추기경은 상황을 평정하는데 실패하면서 이집트의 다미에따(Damietta) 요새를 공격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팔레스티나에서 이슬람의 힘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삐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와 함께 이 이집트 도시에 도착했음이 분명하다. 거기서 그는 1217년 총회에 의해서 동방으로 파견되었던 엘리아 수사를 만났다. 엘리아는 주석학과 신학에 뛰어난 유명한 인물 사삐라(Sapira) 출신 체사리오를 수도회에 입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프란체스코가 동방에 머물렀던 기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다미에따의 정복과 퇴각 날짜들인 1218년 5월 9일에서 1219년 8월 29일 사이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충분한 기간이었다. 왜냐하면 프란체스코가 아씨시와 이탈리아에 남겨둔 그의 대리자들이 일련의 무질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순명을 거스른 스테파노 수사의 악행에 대해 보고를 받고서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성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던 필립보 론고(Filippo Longo)는 매우 과도한 열성으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권을 교황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요한(Giovanni de Capella)은 남녀 나병환자들을 위한 수도회를 설립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교황청에 승인을 요청하였다. 1220년 초 프란체스코가 이탈리아로 되돌아오자 모든 상황은 즉시 정상을 되찾아갔다. 당시 프란체스코는 호노리오 3세에게 가서 수도회의 보호자로서 우골리노 추기경의 임무에 제도적인 형식을 부여해 달라고 청하였다. 프란체스코의 청원은 다음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론 그의 부재시에 일어날 수 있는 돌출행동들을 피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규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준비하고 총회들에서 조금씩 채택한 모든 결정사항들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성서를 토대로 풍부하게 하도록 사삐라 출신 체사레아에게 위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규범들과 규정들에 영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는 많은 형제들의 자발적이고 신선한 생명력을 말살하는 불행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즈음 프란체스코는 수도회에 대한 법적인 통치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220년 9월 29일 성 미카엘 총회에서 그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란 가운데 프란체스코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앞으로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여기 비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그에게 순명할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모두의 동요 속에서 삐에뜨로 앞에 무릎을 꿇고 순명을 표현하였다. 그는 작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이가 되고자 했다.

 

이 근본적인 이유에 질병이라는 부차적인 이유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성지에서 얻은 질병으로 인해 몹시 병약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두 가지 중병에 걸렸었는데, 말라리아가 가장 심각했다. 또 다른 병은 트라코마(tracoma)의 결막염으로 그를 점차 실명(失明)에로 이끌었다. 1221년 삐에뜨로 수사의 조기 사망 이후 수도회의 총대리였던 엘리아 수사와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체스코의 병 때문에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프란체스코를 당시 안과치료로 유명한 리에띠(Rieti)로 데려갔다. 거기 의사는 눈에서 눈까풀에까지 살에 뜨거운 쇠를 삽입하는 일명 ‘부식법’(뜸술)이라고 하는 치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게 고통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규칙 작성에 대한 심리적 고통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규칙의 골자는 호노리오 3세에 의해서 주어졌는데, 이는 수련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그의 교서 Cum secundum를 통해서이다. 프란체스코는 규칙의 공식화를 억지로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는 초기 아씨시의 소규모 형제 공동체가 서방 전체로 확산되고 있던 수도회로 변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과 같다. 마침내 프란체스코는 사삐라의 체사리오의 도움으로 작성한 규칙서를 1221년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규칙서는 창설자의 이상에 따른 순수 프란체스코적 핵심 요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타협이 가능한 텍스트는 아니었다. 일주일간 지속된 총회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였지만, 총회는 어떤 결론 없이 막을 내렸다. 프란체스코는 이 규칙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지만, 교황청에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규칙서는 다른 텍스트들만큼 아름답고 복음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영적이고 법적인 텍스트이다.

 

이 규칙서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이 규칙서에 대해 당혹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형제들과 상의하여 그것을 다시 작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록된 두 번째 규칙서가 생겨났다. 이 규칙서는 첫 번째 것 보다 훨씬 더 간략하다. 결국 1223년 9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Solet annuere라는 교서를 통해서 이 규칙서를 승인하였다.

 

프란체스코의 건강은 계속해서 악화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엄격한 금욕적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1224년 봄에 프란체스코는 관상에 바쳐진 은수생활의 시기를 보내기 위해서 소수의 형제들과 함께 베르나(Verna)의 산으로 이전하였다. 이 은수생활은 신비 체험들로 가득 찼고 그에게 매우 깊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다. 때는 1224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다.

 

 

6. 그의 건강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말라리아가 악화되었고, 만성 결막염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실명하였다. 그러자 4명의 형제가 그를 간호하였다. 그들은 1224년 말경에 혹은 1225년 초에 프란체스코를 아씨시로 옮겼다. 프란체스코의 생애 마지막 2년은 질병과 고통으로 인한 계속되는 순교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프란체스코는 매우 아름다운 두 개의 글을 적었으니, 곧 ‘유언’(Il Testamento)과 ‘태양의 찬가’이다.

 

‘유언’은 프란체스코가 설립한 수도회의 영적인 쇠퇴를 피하려는 그의 염려를 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이 완덕을 향한 열정을 상실하고 단지 승인된 규칙의 규정들만을 준수하는 것에 만족하게 될까봐 몹시 우려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자신의 상속자에게 증여하는 것처럼 ‘유언’은 프란체스코가 자기 형제들에게 남겨 준 정신이다. 그러나 또한 사제들에 대한 충실, 노동, 생활방식에 있어서의 가난, 형제들이 유지해야 하는 영혼의 상태, 그리고 로마 교황청에 어떤 종류의 특권도 청하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결국 규칙과 유산으로 받은 ‘유언’을 수정하지 말라는 하나의 권고인 셈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유언’에 담긴 예견들로 만족하지 않고 다음 두 가지 권고를 덧붙였다. 즉, 보르찌운꼴라(Porziuncola)의 공동체를 모델로 삼으라는 것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해진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가 뽀르찌운꼴라를 위해서 남긴 규정들은 그것을 다른 모든 공동체들의 모범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수도회가 규칙을 넘어 그 정신, 즉 복음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프란체스코의 전 생애의 대미(大尾)와도 같은 ‘태양의 찬가’는 영성사의 보물로서 끝의 두 절은 그가 죽을 무렵 지은 것이다.

 

죽음이 그에게 임박해 오고 있었다. 말라리아와 실명(失明)에다가 다리에 수종과 종기가 겹쳤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을 자기 주위로 불러 그들 앞에서 베르나르도를 축복하여 후계자로 삼고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당부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를 맨땅 - 그가 “태양의 찬가”에서 찬양하였던 ‘어머니이신 땅’ - 위에 눕혀주기를 원했다. 때는 1226년 10월 3일에서 4일 밤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아버지라고 불렀던 유일한 하느님께 자기 생명을 넘겨드렸다. 그때 그의 나의 44세였다. 아씨시의 모든 시민들과 성직자들이 프란체스코의 시신을 거두러 갔고,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서 행렬을 하여 그의 시신을 성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운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창문 높이로 시신을 들어 올려 1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봉쇄의 규정 때문에 살아 있는 그를 볼 수 없었던 글라라와 수녀들이 이제 죽은 프란체스코를 관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된 우골리노 추기경은 아씨시에서 그를 시성하였다.

 

이 모든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유감스럽게도 프란체스코에 의해 복음적 근본주의로 조명된 작은 형제들의 회를 동요시키는 심각한 위기를 막지는 못했다. 갈등의 뿌리는 규범과 충동, 규칙과 ‘유언’ 간의 갈등에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유언’이 하나의 새로운 규칙이 아니라 단지 승인된 유일한 규칙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죽자 그의 인격에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적 매력도 그와 함께 사라지고 대립이 일어났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4년이 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0년 Quo elongati라는 교서를 통해 ‘유언’은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 세기 이상 이 수도회를 고통스럽게 하였던 복잡하고 힘든 프란체스코회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프란치스코회의 본래 이상은 무엇이었으며, 창설자의 ‘유언’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인가? 카이에탄 에세르(Kajetan Esser)가 이미 이 질문에 대답하였다. 에세르에 의하면,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는 그 시초부터 세상을 포기한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근본 요소는 순수하게 그리스도교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 형제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복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그저 형제들일 뿐이다. 이 공동체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개방되어 있다. 성 프란체스코 주위로 모인 형제단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결속력을 갖고 있었지만, 점차 장상, 총회, 장상들의 방문, 끝으로 규칙이 나타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삶의 양식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태동하였다. 프란체스코회 삶의 첫 걸음은 하느님 나라 선포에 밀접하게 결부된 참회에로의 부르심 안에 있다. 이러한 참회는 복음적 의미로 하나의 ‘메타노이아’(metanoia) 혹은 정신과 삶의 변화이다. 하느님 나라 선포는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순회설교로 이끌었다. 설교는 절대적인 가난에 기초한 삶의 증거를 동반하였다. 이 가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의 한 형태로서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생계유지의 불확실성은 이 새로운 공동체의 한 구성요소였다.

 

‘유언’의 중요성과 고유한 의미는 무엇인가? 에세르에 의하면, ‘유언’은 성 프란체스코의 마지막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규칙서의 정신을 터득시키고 그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쓰여졌다. ‘유언’이 담고 있는 새로운 생각은 특권을 청하는 것과 규칙서를 비평하는 것에 대한 금지이다. ‘유언’의 중요성은 특별히 그것이 초기 프란체스코회 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결국 ‘유언’은 프란체스코의 높은 이상을 보여준다.

 

어쨌든 작은 형제들의 뼈아픈 부침(浮沈)이 13세기에 이 수도회의 위대한 공로들을 망각하게 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프란체스코회원들은 중세 전체에서 중국에까지 진출했던 가장 대담하고 주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의 설교와 영적지도 덕분에 그들은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별히 재속 3회를 통해서 그러하였다. 그들은 백성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평신도 영성의 잠재적인 씨앗들을 발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도시의 가정들 안으로 프란체스코회의 전형적인 신심들을 도입하였다. 즉, 구유, 십자가의 길,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 성모 마리아 신심, 아씨시의 전대사 등등. 그들은 유럽의 지적인 삶에서, 특별히 신학에서 도미니꼬회원들과 경쟁하였다. 그들은 옥스퍼드, 파리, 쾰른에서 대학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그 강좌들은 즉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성 보나벤뚜라와 알레스(Ales)의 알렉산드로와 같은 스승들을 배출하였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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