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도미니꼬회(도미니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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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9

도미니꼬회

 

 

1. 도미니꼬와 프란치스꼬는 새로운 형태의 축성생활을 일으키면서 그 시대의 깊은 열망들에 응답한다. 1170년에서 1175년경 스페인 까스띨뤼아(Castiglia)의 고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은 구쯔만의 펠릭스(Felice de Guzman)와 아짜의 요안나(Giovanna de Aza)의 아들 도미니꼬의 탄생을 맞이한다. 당시는 알퐁소 8세와 교황 알렉산드로 3세 치하에 있었고, 그 지역은 오스마(Osma)의 주교 관할구역에 속해 있었다. 도미니꼬는 유년기부터 수석 사제인 삼촌에게서 성직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에는 당시 자유주의 예술 연구로 명성이 높았던 빨렌시아(Palencia)의 주교좌 학교에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5-6년간 예술을 공부하였고, 또 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그곳에 신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니꼬가 학업을 마칠 무렵, 오스마 참사회 원장인 디에고 데 아체베스(Diego de Acebes)가 도미니꼬를 방문한다. 디에고는 자기 주교 마르땡 바쟁(Martin Bazan)을 대신하여 교구를 위해 일할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 그곳을 순회하고 있었다. 디에고는 주교에게 도미니꼬를 추천하여 주교좌의 참사회에 한 자리를 주도록 요청하였고, 주교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1196-1197년, 24/25살이 되던 해에 도미니꼬는 오스마 참사회의 한 일원이 된다. 끌뤼니와 씨토의 종교적 개혁 이후, 세 번째 종교적 격류가 까스띨뤼아에 밀어닥쳤는데, 곧 정규 참사회원들의 개혁이었다. 주교 마르땡과 참사회의 원장 디에고가 이 변혁을 주도하였다. 이 세 번째 변혁은 1131-1136년에 시작되었는데, 이 때는 주교 베르텅(Bertand)이 방금 설립된 지역들에 정규생활을 하는 참사회를 설립했을 때였다. 참사회원들은 성 아우구스띠누스 규칙과 ‘고대 수도회’(ordo antiquus)에 속해 있는 프랑스의 쌍 루프(San Rufo)의 관습들과 매우 유사한 관습들을 따르면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 수도회는 성직자 학교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참사회원들은 모두 12명이었다. 바쟁 주교와 아체베스 원장에 의해서 개혁된 그들은 오로지 성찬례 거행과 하느님 찬양과 중재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관상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도미니꼬가 시작한 새로운 삶의 토대가 된 주요 서적은 까시아노의『담화집』(Collationes)이었다. 도미니꼬는 참사회에서 서원을 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이 사건은 그의 관상생활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해 준다. 1119년에 그는 주교좌의 문화생활을 조직하도록 임무를 부여받게 되고, 2년 후인 1201년 1월에 부원장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직무로 2년을 보낸 후, 도미니꼬는 보다 넓은 차원의 교회를 열기에 이른다. 1203년과 1205년 여름에 까스띨뤼아의 알퐁소 8세는 마르땡 바쟁을 승계한 오스마의 새로운 주교 디에고 데 아체베스에게 덴마크 왕실에 혼인업무 처리를 위한 두 명의 교황사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디에고는 네 번에 걸친 유럽 횡단 여행에 도미니꼬를 동반한다. 이 여행 중에 디에고와 도미니꼬는 똘로사(Tolosa) 지방에서 우연히 카타리파와 발도파 이단에 빠졌던 까스띨뤼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여행 끝에 늘 도미니꼬를 동반하였던 주교 디에고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을 거슬러 싸우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들은 알비(Albi) 지역의 이단자들을 더 잘 알게 된다. 카타리파(catari)와 발도파(valdesi) 등은 만일 누가 두 명씩 짝지어 걸어 다니며 금이나 은도 지니지 않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라는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를 진정한 복음 설교가로서 인정하지 않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하였다. 디에고는 알비파들(albigesi)처럼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그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동반자들을 오스마에게 보내고 오로지 도미니꼬와 함께 머무르면서 즉시 순회 설교가들과 사도적 생활(vita apostolica)을 취했던 지난 세기의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설교를 시작한다. 디에고와 도미니꼬는 탁발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빵을 구걸하며 신자들과 타종파 사람들을 복음화하면서 프랑스 남부의 나르본느 지방 전역을 순회하였다. 교황 특사들 가운데 두 명이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그 임무를 포기하였지만, 1207년 4월에 그들은 남아 있던 약 30명가량의 씨토회 설교가들을 강화시키러 갔는데, 그들 중 12명이 아빠스들이었다. 그 순간부터 설교 원정이 조직화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로마에서 이 포교사업 전체를 이끌었다. 디에고와 라울(Raul: 유일하게 남은 교황특사)은 나르본느 지방의 영역을 설교가들에게 분할하였다. 그 지역 주교는 나서서 자기 돈으로 그들이 탁발 사도직을 하던 여러 지역에 그들을 위해 휴식과 회복 센타들을 설립하도록 하였고, 이로 인해서 그 사업은 보다 체계화 되었다. 1207년 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Predicazione di Gesu Cristo)라고 불린 이 단체들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라울의 죽음과 정기 총회 참석차 씨토회 아빠스들의 출발, 그리고 마침내 주교 디에고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돌아왔던 오스마에서 죽음으로 인해 그 포교사업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초기에 그의 눈부신 성공은 신학적 양성에 있어서는 열등했지만, 수적으로는 우세했던 카타리파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감소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상황은 발도파들에게 더 유리해졌다.

 

디에고는 죽기 전, 1206-1207년 겨울에 도미니꼬를 까르까손(Carcassonne)과 똘로사 교구의 경계에 위치한 팽조(Fanjeaux) 마을 어귀에 있는 프루유(Prouille)에 자리 잡게 하였다. 팽조는 이단자들의 아성이었다. 도미니꼬는 프루유에서 즉시 그의 노력으로 개종한 카타리파의 귀부인들을 모아서 그들을 한 원장을 책임자로 하는 여성 공동체로 조직하였다. 그렇게 해서 프루유는 예수 그리스도 포교의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의 모델로 부상하였다. 그곳의 기도와 영적인 발산, 그리고 회심한 수녀승들의 노동은 교황청 설교가들에게 하나의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여기서 도미니꼬는 알비파들을 거스른 인노첸시오 3세의 십자군 대장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와 똘로사의 주교인 씨토회의 풀끄(Fulques) 등을 친구로 사귀게 된다. 동시에 그는 부단한 설교 이외에도 1211-1213년에 수녀승들을 위한 하나의 수도원을 설립한다. 1214년 사순절에 도미니꼬는 여행으로 인해 부재중인 까르까손의 주교 대리자로 임시로 임명되었다가 팽조로 돌아와 본당 신부로 임명된다.

 

9년간의 체험의 열매로서 1215년에 똘로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즉 이제 사상에 있어 성숙한 도미니꼬는 인노첸시오 3세의 대사, 삐에뜨로 디 베네벤또(Pietro di Benevento)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단체를 재건할 준비를 한다. 다시 말해 설교가들의 임시 단체 대신에 이제 그는 설교에 전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정규 공동체를 갖게 된다. 이렇게 교구 안에서 설교가들의 새로운 회의 기초가 놓여진다. 1215년 4월 7일과 25일 사이에 최초로 두 명이 서원을 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설립의 표지가 된다. 6월 중순에 똘로사의 주교 풀끄는 도미니꼬와 그의 두 명의 새로운 형제, 삐에뜨로 세일라(Pietro Seila)와 토마소(Tommaso)에게 자기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설립을 서면으로 승인한다.

 

설교의 목적은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랑스 남부의 주교들에게 했던 다음 말들 안에서 표현된다. 즉, ‘이교의 부패를 일소하고, 악습들을 근절하고, 신앙의 상징을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건전한 윤리를 터득시키는 것.’ 이러한 목적으로 도미니꼬와 그의 형제들은 설교와 관련하여 주교의 대리자들로 바뀌었다. 설교의 임무가 한 공동체에 항구한 방식으로 부여되었다는 데에 새로움이 있었다. 이 공동체는 설교가들의 중심지인 삐에뜨로 세일라 수사의 집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풀크 주교가 그들에게 수익 혹은 한정된 자선을 베푼 것은 바로 이 단체의 유지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복음적 가난을 손상시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공동체 형제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4월에 귈레롬 라이몬도(Guillerom Raimondo)라고 하는 세 번째 형제가 공동체에 입회하였고, 8월에 나바라의 요한(Giovanni di Navarra) 수사란 이름으로 수도복을 받았다.

 

 

2. 1215년 9월 초순, 도미니꼬는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로마로 가는 풀끄 주교를 동반한다. 그는 로마에 체류하는 기간을 이용하여 교황에게 무엇보다도 한 수도회에 설교를 위임하는 보다 새로운 영역에서 교구 공동체 설립 승인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 통상권은 주교들에게 속해 있었다.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 서원의 효력으로 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변화를 어렵게 하는 하나의 장애가 나타났다. 즉,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교령 제13조는 새로운 수도회들의 설립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황은 도미니꼬의 설립이 이미 이루어졌고 또 교구 차원에서 승인되었기 때문에 그가 교회로부터 이미 승인된 하나의 규칙 밑에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설립을 허가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풀끄 주교에게 그 새로운 수사들에게 교구 내의 성당 하나를 주도록 지시하였다. 교황은 아마도 이를 통해 그들을 공동 성직자단 안으로 편입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1216년 1월, 풀끄 주교와 도미니꼬는 똘로사를 향해 떠난다. 도미니꼬는 교황의 결정사항들을 실행에 옮기면서 공동논의와 만장일치를 통한 동의로써 하나의 규칙을 선택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설립 참사회에 소집하였다. 당시 서방에서 보다 확산된 두 개의 규칙서는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서였다. 그들 모두는 주저 없이 이 두 규칙서 가운데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서를 채택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띠노가 탁월한 설교가였고, 또 사도적 생활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도미니꼬 자신이 오스마 시절부터 그 한 부분을 이루어왔던 참사회 전통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똘로사 공동체의 생활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참사회는 그 입법상의 기능을 추진해나갔다. 그들은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서를 선택한 후, 음식과 단식과 침대, 그리고 모직 옷 착용과 관련하여 엄격한 관습들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의 전통에 따르면「관습」(Consuetudines)은 공식 규칙서의 규율들을 해석하고 발전시킨 것으로서 관례로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법규였지만, 12세기 이후「회헌」으로 바뀌어갔다.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서의 경우에「관습」은 공동체의 참된 법규로서의 주된 역할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도미니꼬와 그의 형제들은 참사회적 삶을 적용하였지만, 많은 부분의 감면을 통하여 그것을 설교 직무에 적응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도미니꼬회의 가장 전형적인 혁신들 중 한 가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수도회의 조직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서약, 즉 수도회 장상과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순명 서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로써 교황이 부과한 첫 번째 조건이 채워졌다. 두 번째 조건은 풀끄 주교가 설교가들의 원장이자 수련장인 도미니꼬와 그의 동료들에게 쌩-로망(Saint-Roman) 경당을 넘겨주었을 때인 1216년 7월과 10월 사이에 충족되었을 것이다. 도미니꼬의 동료들은 1216년 중순에 이미 12명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풀끄 주교는 그들에게 두 개의 새로운 성당을 맡겼는데, 그곳은 설교 지원 센터들로 자리를 잡았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채운 도미니꼬는 10월에 로마로 다시 떠난다. 인노첸시오 3세는 7월에 사망하였고, 호노리오 3세가 그를 계승하였다. 교황은 1216년 12월에 ‘수도생활’(Religiosam vitam)이란 칙서를 통하여 도미니꼬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그의 수도회와 그가 얻고자 했던 모든 것에 대해 전적으로 추인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1217년 1월 교서를 통해 그들에게 ‘설교’와 ‘설교가들’이란 명칭 역시 승인해주었다.

 

이 교황 문서들이 새로운 수도회를 설교에 연결하면서 똘로사 교구 안에 정착시키는 것처럼 보였을 때, 도미니꼬가 사태를 개선할 목적으로 로마에서 몇 주간을 보내면서 설립에 필요한 문서들을 준비하던 일도 끝나게 되었다. 사실 도미니꼬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전체 교회의 생활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로마에서 북부 국가들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덴마크 교회의 몇몇 대표들을 만났다. 스칸디나비아인들과 폴란드인들과 헝가리인들이 1월에 로마에서 모였다. 거기서는 오로지 선교와 외방 선교 파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지역들에 사제의 부족에 대해서만 논의되었다. 도미니꼬는 이에 감동되었다. 그는 알비파들 가운데서 11년 동안 설교를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카타리파들의 완고함, 봉건 영주들의 부패, 중산층 고리대금업자들 무관심, 그리고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에 의해서 그의 활동에 가해진 장애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도미니꼬에게 복음적 일꾼들에게 필요한 그리스도교의 넓은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도미니꼬가 11년 전에 주교 디에고와 함께 열망했었던 오래된 선교의 꿈들이 그 안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로마는 그에게 교회와 교회 선교의 보편성을 밝혀주었다. 이제 장벽들이 제거되었다. 그의 시선은 알비 지역의 좁은 경계 너머로 향하였고, 교회의 심장부에 자리 잡으면서 넓어졌다. 도미니꼬는 수도회를 국제적인 차원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자기 의무로 생각하였다.

 

도미니꼬는 로마로부터 최종 교서를 얻고 1217년 2월에 형제들이 이미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똘로사로 돌아와서 모든 수도자들을 소집한 후, 그들에게 그들을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파견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1217년 8월 불굴의 정신으로 형제들을 분산시켰다. 수도자들과 주교들과 백작들의 저항에 그는 “반대하지들 마십시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응수하였다. 7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본대(本隊)는 신학 사상의 중심지인 빠리로 파견되었고, 다른 4명은 스페인으로, 그리고 2-3명은 프루유에 보내졌다. 그들 가운데 3-4명은 똘로사에 남았다. 도미니꼬 자신은 1217년 12월 말에 한 동료와 함께 다시 로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법학의 중심지인 볼로냐에 다른 4명의 형제를 보냈다.

 

1218년 5월 경, 교황의 교서들로 무장한 도미니꼬는 긴 여행에 착수한다. 그 여행을 하던 중에 그는 수도회를 엄청나게 발전시켜 나갔다. 도미니꼬는 볼로냐와 프루유를 방문한 후, 스페인으로 갔다. 그는 살라망까, 마드리드, 세고비아 등 스페인 전역을 다니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최초의 설교가들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1219년 7월, 그가 빠리에 당도했을 때, 쌩 자끄(Saint Jacques) 공동체의 구성원은 이미 30명가량으로 불어났다. 도미니꼬는 그 공동체를 대학 교수들로 채우면서 거기서 다시 볼로냐로 갔고, 11월에 당시 비떼르보(Viterbo)에 있던 로마 교황청에 다시 한번 접촉하여 1219년 12월 12일 교황으로부터 ‘공동체 탁발의 도입’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승인을 얻어내었다.

 

 

3. 수도회는 이미 100여명의 수도자들로 불어났고, 7-8개의 분원들과 여러 개의 양성소들을 갖추었다. 이 토대 위에서 도미니꼬는 1216/17년에 허용된 공동체들을 위한 수입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절대적인 가난으로 설교하는 권한을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요구하여 얻어낸다. 이제 그 수도회는 어떠한 종류의 지상 재물을 소유함이 없이 의지적 가난의 포기 안에서 설교 직무를 수행하는데 전념하게 된다. 탁발 교서와 다른 다양한 추천 교서들과 더불어 그 달, 즉 12월은 참으로 도미니꼬회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

 

역시 이 12월에 호노리오 3세는 로마에 하나의 모델이 되는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자신이 위임했던 참사회원들로부터 성 시스또 성당을 접수하여 역시 같은 임무를 부여하며 그것을 도미니꼬와 설교가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들은 거기에 자리를 잡았고, 철저히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1220년 1월에 공동체 설립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로마에서의 최초의 설립이다. 도미니꼬는 여전히 비떼르보(Viterbo)에 남아 있던 교황청을 향해 다시 떠났다. 여행 중에 그는 만성 장염으로 시달리게 된다. 같은 해 2월 17일,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교서 하나를 얻게 되는데, 이 교서와 더불어 교황은 그에게 ‘설교가들의 수도회 원장’(prior Ordinis Praedicatorum)이란 명칭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교황은 참사회 공동체들의 고유한 연방제 법령을 파기하고 설교 직무를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한 장상을 그 수도회에 임명한 셈이다. 2월 말경 도미니꼬는 스페인, 프로방스, 프랑스, 이태리에 있는 공동체들에 편지를 써서 일정 수의 대표들을 선정해서 볼로냐로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거기서 그는 1220년 5월 17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총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각각 두 개의 공동체 설립을 준비한다. 5월 초순에 도미니꼬는 성령강림 대축일의 중요한 총회에 형제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교황청을 떠나 볼로냐로 갔다.

 

그 당시 도미니꼬는 교황 다음으로 설교가들의 수도회 전체 안에서 조직하고 명령하고 교정하기 위한 전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최고의 권위로 몇몇 ‘결정권자들’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다른 일들을 맡겼고, 그가 통괄하였다. 처음에 도미니꼬는 설교가들의 수도회의 법적인 설립과 입법 문헌들 안에 ‘사도적인 규칙서’의 완전한 삽입과 같은 두 가지 주요한 협의사항들을 제시하였다. 설립 문헌은 본질적으로 다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즉, <총회에 관하여>(de capitulo generali), <학업에 관하여>(de studio), 그리고 <설교에 관하여>(de praedicationes)인데, 이것들은 라는 개괄적인 명칭 하에 모아졌고, 라는 명칭을 간직해 온 1216년「관습」에 부가되었다.

 

입법 활동을 마친 도미니꼬는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로마,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수도회의 발전을 위해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한 스위스와 덴마크에도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파견하였다. 동시에 그는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선교 수행에도 전념하였다. 그것은 이태리 북부의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도미니꼬는 프랑스 나르본느 지방에서 설교한 바 있는데, 거기서 그와 도미니꼬회원들은 씨토의 아빠스와 씨토회원들이 프랑스에서 수행하였던 역할을 지원하였다. 롬바르디아 선교에서 그들에게 예정된 주요 임무는 카타리파를 거스른 싸움, 고리대금업과 가정불화의 제거, 교회의 자유에 폐해를 끼친 억압들의 제거,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들 간에 끊임없이 발생하였던 전쟁들을 멈추게 하기 위한 열성적인 활동 등이었다. 게다가 도미니꼬는 자기 수도회의 공동체들을 강화하고 확장시키면서, 그리고 수도회 소속의 수녀들(monache)을 위한 하나의 공동체 설립을 결정하면서 선교의 첫 단계에 들어섰다. 1220년 말, 그는 롬바르디아에서의 체험에 대해서 보고하고 또한 로마 교황청의 도움으로 유럽에서 수도회의 여러 일들을 조정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 시스또(San Sisto) 공동체의 몇몇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인 1221년 봄에 도미니꼬는 로마의 성 시스또에 있는 수녀들의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한편 수사들은 교황 호노리오 3세가 기증한 로마의 아벤띠노(Aventino) 언덕에 있는 성녀 사비나(Santa Sabina) 성당을 인수하였다. 도미니꼬는 수녀들에게 하나의 규칙서를 부여하였는데, 그것은 셈프링함(Sempringham) 규칙서와 프루유(Prouille) 규칙서, 그리고 도미니꼬회의 규율들로부터 영감 받은 것이었다. 그 후, 그는 1221년 5월 30일에 있었던 제2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볼로냐(Bologna)로 갔으며, 이 총회에서 수도회의 초기 5개 관구들(스페인, 프로방스, 프랑스, 롬바르디아, 로마관구)이 결성되었다. 그는 영국과 폴란드에도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파견하였다. 총회가 끝난 후, 도미니꼬는 베네치아와 트레비소의 마르까(Marca di Treviso)에서 우골리노(Ugolino) 추기경을 따르면서 롬바르디아 선교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이 수 개월간의 선교활동 기간 중에 도미니꼬는 탁발을 하며 가난한 농부들이 그에게 제공한 장소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하느님 말씀을 널리 전파하거나 낮에는 무더위 속에서 여행하고 밤에는 부단히 철야기도를 계속하면서 이미 엄격한 금욕과 과로로 인해 매우 약화되어 있던 기력마저 소진하였다. 7월 말 경에 병약한 몸으로 볼로냐로 되돌아간 도미니꼬는 1221년 8월 6일에 사망하였다. 여기까지가 외적인 사건들의 추이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 안에 담겨져 있는 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수도회의 설립 과정을 구분할 수 있는 다음 세 가지 단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즉, 형성단계(1205-1214), 실행단계(1215-1219), 입법적인 정착단계(1220-1221)이다. 이 단계들의 진행과정에서 도미니꼬는 새로운 설교가들의 회의 목적과 본성을 분명히 해나갔다.

 

 

4. 설교가들의 회는 수도생활 역사 안에서 처음으로 ‘설교와 영혼들의 구원’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수도승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각자의 완덕을 추구하였고, 정규 참사회원들 쪽에서는 수도승이 되려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그 자신이 정규 참사회원이었던 도미니꼬는 사도직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을 창설하였다. 이 목적은 자연히 수도회의 활동 형태들을 결정지었고, 수도회의 사회적인 삶을 조직화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설교가들은 사도들이자 성직자들이었고, 동시에 참사회원들이자 수도승들이었다. 그들의 신분과 삶을 구성하는 이 요소들 가운데 앞의 두 가지가 이 수도회에 보다 더 본질적이며, 완전히 새로운 요소들이었다. 기존의 요소들인 뒤의 두 가지는 여기서는 주요 활동들을 돕고 장려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차적이고 축소된 형태로 도입되었다. 사실상 설교가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이자 성직자들이었다.

 

여기서 이 새로운 수도회의 본성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의 사도적인 수도회라는 점이다. 도미니꼬와 그의 동료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06년 11월 17일에 이 사도적 생활을 공식적으로 인가한 바 있다. 이 삶은 당시까지 주교들의 고유 직무였던 설교에 전적으로 위임(1221년 2월 4일에 교황 호노리오 3세에 의해서 위임됨)되어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한 모방과 동시에 말과 모범으로 백성들에게 하는 활동을 포함하였다. 두 번째 본성은 이 수도회가 하나의 정규참사회(1216년)라는 것이다. 이 수도회는 1220년 참사회적 삶의 다양한 요소들을 포기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공동으로 할 수 있었던 동산과 부동산 소유권에 대한 포기였다. 그렇다 하다라도 규칙생활, 공동생활, 단순화된 가대직무(歌臺職務), 그리고 정주 서원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은 간직되었다. 만도넽(P. Mandonnet)에 의하면, 설교가들은 한 수도원에 속해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었으며, 그들 활동의 중심지였던 대도시 한 가운데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참사회적 삶으로부터 서원, 모든 수도생활의 공통된 토대, 침묵, 지속적인 금욕, 오랜 단식, 모직 의복의 사용, 규율, 매일의 참회 모임, 그리고 정해진 고행들을 받아들였다.

 

수도회의 목적이 그 활동 형태들을 결정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그것은 수도회의 사회적인 삶의 모습 역시 규정하였다. 수도회는 관구별로 묶여진 공동체들로 세분되었다. 밀접하게 연결된 이 관구들은 수도회 전체를 구성하였다. 입법권은 매년마다 개최되는 총회에 귀속되었고, 행정권은 수도회 총장과 관구장들, 그리고 각 개별 공동체의 원장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 모두는 형제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설교가들 단체의 특성은 이전의 수도승 수도회와 참사회 안에서는 수도원장들이 어떤 제한 없이 항구하게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고, 아랫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권한 행사에 간섭하지 않았던 반면, 설교가들 가운데서는 내부로부터 잠정적으로 선택하여 결론을 내리는 주체가 구성원들을 통하여 통치되는 전체 공동체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교회와 프랑스 군주제 안에서와 같은 ‘중앙집권화의 원칙’, 도시들과 대학들의 요직 임명을 위해서 행해졌던 바와 같은 ‘선출의 원칙’, 그리고 12세기 말경 유럽의 어떤 나라들에서 효력을 발휘했던 ‘표현의 원칙’이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설교가들은 당시의 사회적 특성들을 받아들여 수도생활에 적용하였다.

 

설교가들의 수도회 설립은 프레몽트레회원들(premonstratensi: 영성생활 제23호, 116쪽 참조)을 통해서 진행된 12세기 참사회적 설립의 마지막 발전 과정이었다. 개혁 참사회 운동 전체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더 완화된 방식(옛 수도회)으로나 혹은 더 엄격한 방식(새 수도회)으로 해석된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을 결정적인 토대로 삼고 있었다. 이 마지막 해석은 성 노르베르또(San Norberto)의 프레몽트레회원들이 받아들인 해석이었다. 이 해석으로부터 가장 깊은 영향을 받아 생겨난 운동은 성 베드로 다미아노에 의해서 시작되고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서 확산된 사도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공동체적 가난과 적극적인 설교로 초기 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설교가들의 회를 움직였다. 인노첸시오 3세는 그레고리오 개혁 교황들의 개혁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그의 교황재위기간 중에 도미니꼬는 새로운 지역에 사도적 운동의 실제적인 가능성들을 개발하는데 전념하였다. 설교 운동에서처럼 실제로 성직자적인 줄기에서 나온 사도적 생활이 11세기 개혁가들의 이상을 쇄신하고 성 아우구스띠노의 이상을 역사적으로 지속시키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재위기간 중에 힘차게 부활하였다. 당시 어떤 설교가는 그러한 발전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흘러나온 이 강, 혹은 그 규칙적인 삶은 성 아우그스띠노에게 까지 흘러들어갔다. 사실 사도들이 제정한 규칙에 따라 살기 시작한 것은 그였다. 이 강으로부터 7개의 지류, 곧 7개의 참사회적 연합회들이 생겨났다. 이 연합회들이 비록 함께 설립되었고, 또 동일한 규칙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헌장들은 서로 다르다. 프레몽트레 참사회원들이 이 지류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렁몽(Grandmont) 공동체이다. 세 번째는 쌩 빅또르(San Vittore) 연합회, 네 번째는 아루에즈(Arouaise) 연합회, 다섯 번째는 발 데 에콜리에르(Val des Ecoliers) 연합회, 여섯 번째는 발 데 쇼(Val des Choux) 연합회, 그리고 일곱 번째는 설교가 형제들의 연합회이다.” 전술한 저자는 이 마지막 연합회가 설교가들의 회(ordo praedicatorum)를 성당참사회(ordo canonicorum)에 연결시킨다고 부언하였다. 도미니꼬는 참사회라는 반죽 안에 설교라는 효소를 집어넣어 그것을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쇄신은 초기 도미니꼬회원들의 입법 활동 안에 그 정신을 형성하였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216년의 첫 번째 초고는 설교가들의 규율에 대한 법규들을 담고 있다. 이것은 법규들 제1부로 전해졌다. 1220년에 볼로냐에서 개최된 첫 번째 총회에서 설교가들의 법규들 제2부가 편집되었는데, 이 부분이 실제로 독창적인 입법부분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이 관례서(Consuetudines) 안에서 특히 다음의 네 가지 점이 주의를 끈다. 첫째는 관면권이다. 성 도미니꼬의 지배적인 이상은 설교였다. 모든 것은 여기에 종속되어야했다. 만일 어떤 규율들이 설교를 방해한다면, 그것들은 주요 목적을 방해하지 않도록 관면되어야했다. 그래서 각 공동체의 원장에게 관면권이 부여되게 되었다. 둘째는 학문에 부여된 중요성이다. 만일 설교가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초기부터 성 도미니꼬는 자기 동료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파견하였고, 후에 수도회 자체 안에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셋째는 이따금씩 단편적인 형태로가 아니라, 항구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그러한 임무를 받아들이는 설교이다. 이것은 수도회의 목적이었다. 끝으로 각 구성원들의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동체들을 위한 동산이나 부동산도 승낙하지 않는 절대적인 복음적 가난이다.

 

아마도 이 네 가지 특성들은 성 도미니꼬가 설립한 설교가들의 회의 정신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한 수도회는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충동을 받은 사람의 불후의 표현”임을 기억하면서 비록 종합적으로라고 하더라도 설교가들의 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충동을 받은 성 도미니꼬에 대한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묘사를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5. 많은 증언들이 성 도미니꼬에 대한 인물 묘사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도미니꼬는 변함없이 공정했던 사람, 즉 내적인 균형을 갖춘 사람이었고, 또한 일단 결정되고 부여된 명령을 철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일들에 있어서는 확고한 사람이었다. 형제들이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도미니꼬 보다 더 붙임성 있고 친절한 사람이 없었으며, 철야와 기도에 있어서 역시 그보다 더 열심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증언하는 바이다. 도미니꼬는 자주 기도로 밤을 지새웠고, 기도나 미사 거행 중에 눈물의 은사를 받았다. 실제로 그는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끝기도 후에 형제들이 성당을 빠져나가면, 교회에 남아 은밀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당에서 자주 밤을 지새웠고, 많은 기도를 하였으며, 기도 중에 자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도미니꼬는 언제나 하느님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가난의 참된 친구인 그는 언제나 값싼 옷들을 입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데 있어서 매우 절제하였고, 맛있는 음식들을 거절하였으며, 기꺼이 빵과 야채로 만족하였다. 어떤 문헌은 도미니꼬가 결코 침대에서 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언제나 순수성을 유지하였다는 것은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의 진술은 가난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볼로냐에 있는 성 니콜로(San Nicolo) 수도원의 형제들은 작고 볼품없는 독방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가였던 로돌포(Rodolfo) 수사가 도미니꼬가 부재중일 때 몇 개의 독방들을 갖춘 별도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럭저럭 하는 동안 도미니꼬 수사가 돌아왔다. 그는 추가로 건축된 독방들을 보자마자, 탄식하였고, ‘여러분은 가난을 그렇듯 빨리 포기하고 거대한 궁전을 세우기를 원합니까?’라고 말하며 로돌포 수사와 다른 수사들을 질책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 일을 중단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였다.” 의욕적인 성격인 도미니꼬는 쾌활함과, 왕성한 의지, 그리고 낙천주의를 자신에게 결합시켰다. 그는 두 세 번이나 주교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어떤 증인은 그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위해서 죽기를 열망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은사와 선물을 주기를 아끼지 않으셨다. 도미니꼬는 특히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남달랐다. 또한 그는 자기 형제들이 세상일들에 몰두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반대로 그들이 언제나 학업과 기도와 설교에 전념하기를 바랐다. 이것이 설교가들의 회 창설자에 대한 간략한 묘사이다.

 

그 확산 무렵인 1217년 8월 15일에 총16명으로 구성되었던 이 수도회는 1221년에 도미니꼬가 사망할 당시에는 이미 60개의 수도원과 4개의 수녀원을 가지고 있었고, 1277년에는 404개의 수도원과 58개의 수녀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13세기 말엽에는 그 회원이 약 만 명에 육박하였다. 13세기 중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수도회 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예컨대, 성 도미니꼬의 직접적인 후계자인 복자 사쏘니아의 죠르다노(Giordano di Sassonia, 1222-1237), 참사회원인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몬드(san Raimondo di Penyafort, 1238-1240), 게르만 사람 죠반니(Giovanni il Teutonico), 수도회를 절정기로 이끌었던 실제적 영역의 천재 움베르또 드 로망(Umberto de Romains, 1254-1263) 등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확장과 더불어, 그리고 이들의 통치 하에 설교가들의 활동은 활발했으며, 설교, 학업, 교수(敎授), 학문적인 업적들, 그리스도교 밖의 선교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들 가운데 설교가들의 학문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 가장 큰 발전은 즉시 그들로 하여금 교수직을 설교보다 월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교육을 위한 기본 장(場)은 수도원 학교였는데, 그것은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동시에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수도회는 빠리 대학교에의 교육에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최초의 수도회였다. 한편 여러 주교들이 리옹(Lione), 똘로사(Tolosa), 보르도(Bordeaux), 또르또사(Tortosa), 발렌치아(Valencia), 밀라노(Milano) 등지에 있는 주교좌 학교들 혹은 대도시 학교들을 그들에게 위임하였다. 알벨뚜스 망뉴스(Albertus Magnus, 1206-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Tommaso d'Aquino, 1225-1274)는 13세기에 도미니꼬회의 탁월한 스승들이었다.

 

도미니꼬회의 학문적 성과와 관련하여, 14세기 중엽까지 설교가들이 저술한 작품의 분량이 교부시대부터 13세기 초까지 라틴 교회 안에서 저술된 전체 분량과 거의 맞먹을 정도이다. 그들의 설교는 그리스도교 내부에 하나의 항구한 선교였다. 그레고리오 9세(1230) 때부터 설교가들은 점차 1276년에 그들의 첫 번째 교황인 인노첸시오 3세(타란타시아의 삐에뜨로, Pietro di Tarantasia)에 이르기까지 주교들과 추기경들의 단체에 진입하였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도미니꼬회원들로 채워졌다. 동시에 이교와 이단 국가들과 비그리스도교 국가들에 대한 복음화는 설교가들의 수도회 설립 당초의 목적이었다. 이 모든 영역에서 많은 이들이 교회로부터 공인된 성성(聖性)에 도달하였고, 모든 도미니꼬회원은 그들 창설자의 다음 권고에 따라 처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하고 종교적으로 살면서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처럼 처신하십시오.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걸어가십시오. 이웃과 대화할 때,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십시오.” 결국 모든 도미니꼬회원은 ‘교회 심장부에 있는 복음적인 사람’(vir evangelicus - in medio Ecclesiae) 성 도미니꼬처럼 되어야 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도미니꼬회의 소명을 실현하였다. 후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꼬회의 소명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정의하였다. 즉, “관상하는 것, 그리고 관상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 이것은 하나의 탁월한 소명에 대한 멋진 표현이다.

 

[영성생활, 제25-26호, 허 로무알도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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