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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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우빈(于斌) 주교와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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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9 ㅣ No.874

우빈(于斌) 주교와 한국독립운동

 

 

1. 머리말

2. 우빈 주교와 중국 천주교회

3. 우빈 주교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4. 맺는 말



국문 초록

 

우빈 주교(1901~1978)는 중일전쟁 시기 중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수도인 남경의 주교였다. 1901년 흑룡강성에서 태어난 그는 14세에 영세를 받고, 1920년 길림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로마에 유학하여 1933년 귀국할 때까지 철학 ‧ 신학 ‧ 정치학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6년 남경 대목구장에 임명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유럽과 미주 등을 방문하여 항일전쟁을 선전하고 국제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일에 진력하였다. 장개석 주도의 국민정부와 밀접하게 관련된 그의 활동은 ‘정교합작’으로 이해되고 그는 ‘정치주교’로 불렸다. 그만큼 그는 애국심을 강조하였으며, 반공적이었다. 동시에 우빈은 서양 문화에 익숙하면서도, 중국 문화에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들과 우빈이 연결된 것은 1940년 전후 전시 수도인 중경에서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한 이후, 그는 깊은 애정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대표적인 중국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광복군 총사령부의 서안 이전에 앞서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도부를 초청한 연회를 통하여 이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었고, 이후 한인 사회에서는 우빈을 ‘정의사자’로 부르며 한인의 대표적인 친우로 대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그가 방미할 때, 미주 한인들에게 국빈 대접을 부탁하였으며, 미주 한인들은 실제 그러한 대접을 하였다.

 

우빈은 한국인과 임시정부를 항일전쟁의 동지로 인식하고,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이나 행사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였다. 350만 중국 천주교인들에게 한국 독립의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임시정부가 중국 정부의 협조를 필요로 할 때 민간에서 그가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 같다. 특히 임시정부 승인 문제나 샌프란시스코 회의 참가 문제 등에서 그러한 우빈의 협조와 지원이 확인된다.

 

1969년 중국인으로는 두 번째 추기경에 서임된 우빈은 1950년대부터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기린 바 있다.

 

※ 전체 본문은 첨부 파일을 참조하세요.

 

[교회사 연구 제44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기영(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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