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고대 수도승생활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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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8

고대 수도승생활 중심지

 

 

1. 이집트

 

1) 이집트 북부(나일강 하류)

 

이집트 북부는 이집트 사막 끝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져 있다. 우리는 깊은 계곡과 언덕들 위를 비행하고 있는데, 언덕들 양쪽으로 동굴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이것이 수도원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 동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수도승을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이 니트리아(NITRIA)이다. 그러나 이 곳은 비교적 알렉산드리아에서 가까웠고 방문객들이 많았다. 니트리아의 창설자 암몬(Amoun)이 이러한 성가심에 대해 안또니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오후 3시에 식사를 마치고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해질 무렵 그들이 당도한 곳에 두 번째 수도승생활 중심지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반나절 약 18㎞를 여행한 후, 우리는 첼레(CELLE)라 불렸던 두 번째 수도승생활 중심지를 발견하게 된다. 각 수도승은 거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종종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하나의 암자를 세울 수 있었다. 그것들은 진흙과 갈대로 지어졌지만, 볼트로 죄어진 문을 가지고 있었다. 니트리아에서와 같이 이따금 그들은 바위에 있는 구멍을 이용하였다. 그 집들은 두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발굴된 동굴 유적들은 한 독수도승의 암자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뜰 안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울타리 안에서 산책할 수 있었다. 뜰 안에 있는 우물은 식수와 정원수를 제공하였다. 암자들간의 공간은 충분히 넓어서 서로 보거나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막은 광활하였다. 빨라디우스가 거기에 갔을때, 그는 600명의 수도승들을 발견하였다. 그 곳은 직경이 6㎞나 되는 하나의 도시였다. 그 중심부에 성당이 있었다.

 

남쪽으로 약 40㎞ 더 내려가면 우리는 스케테(SCETE)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곳은 보다 더 엄격한 고독을 갈망했던 사람들을 위한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수도승생활 중심지이다. 스케테는 나일강으로부터 30㎞ 떨어져 있으며,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즉시 이 지역에 몇 개의 보다 영구적인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곧 수도승들이 주일을 지내기 위해 함께 모였던 성당과 객사(客舍)들이었다. 그러나 수도승들은 계속해서 떨어져서 은수자로 살았다.

 

이렇게 이집트 북부에 세 개의 수도승생활의 중심지들이 생겨났다.

 

2). 이집트 남부(나일강 상류)

 

이집트 남부는 이집트 북부와는 상황이 영 다른데, 여기에는 은수자들이 거의 없다. 대신 울타리로 둘러싸인 완전한 마을들이 있었다. 우리는 8내지 10미터 높이의 울타리 밑에 있다. 우리는 문을 찾기 위해 오른쪽으로 걸어가지만 운이 없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문을 찾기 위해 그 울타리 둘레를 거의 한바퀴 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울타리 전체에 문이 단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출입문에는 자기 소임에 매우 충실한 문지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즉 "당신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그리스도교입니까 불신자입니까? 사제입니까 수도승입니까 평신도입니까?" 등등. 이렇게 묻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되 그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숙녀들은 여기에, 여행자들은 저기에, 가난한 이들은 또 다른 곳에, 가톨릭 신자들은 이곳에, 수도승들은 또 다른 곳에서 환대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도승들이기 때문에 한 수도승의 동행 하에 어디든지 방문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거주했던 집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로써 우리의 방문은 시작된다. 각 집에는 20∼40명의 수도승들이 살았다. 우리는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만나는 첫 번째 수도승에게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저는 빵을 굽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 두 번째 사람 역시 "저는 빵을 굽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한다. 이곳에는 모든 사람이 빵을 굽는가? 그런 다음 우리는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저는 필사가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집에 들어가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구두장이 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 집들에 있는 수도승들은 각각의 기술에 따라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조직이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떤 수도승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벨이 울린다. 그는 "저는 가봐야 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실례합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역시 하나의 규칙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방문한 그 형제가 또 다른 형제가 지나가자 가벼운 절을 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다. 그가 대답한다. "그분은 이 집의 장상입니다." 이곳에는 작은 직책이 있다. 잠시 후 그는 깊은 절을 한다. 우리는 그 수도원의 장상을 만나고 있다. 조금 있다가 그는 어떤 사람 앞에 무릎을 끊고 엎드린다. 그가 전 공동체의 사부인 빠코미오였다.

 

우리는 빠코미오 수도승들 가운데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수도 공동체와 서열이 있다. 여기에는 이와 같은 수도원이 아홉 개가 있다. 모든 일은 각 수도원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것은 우리가 이집트 북부에서 본 것과는 아주 다르다. 이 수도승들은 은수자들이 아니라 회수도승들이다.

 

이제 우리는 두 종류의 삶, 즉 한편으론 독수도적이고 다른 한편으론 회수도적인 삶을 볼 수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기록된 규칙이나 어떤 조직도 없다. 후자는 상세하게 조직화되어 전해진다.

 

 

2. 팔레스틴

 

예로니모는 로마에서 왔는데 그곳은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는 바와 같이 그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곳이었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로마에서 바울라라고 하는 한 귀부인과 함께 베틀레헴에 온 그는 거기에 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하나는 바울라와 그녀의 동료들을 위한 수녀들의 공동체였고, 다른 하나는 예로니모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수도승들의 공동체였다. 근처 예루살렘에는 루피누스(Rupinus)라고 하는 예로니모의 친구(그는 친구였으나 후에 적이 되었다) 역시 멜라니아(Melania)와 함께 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젊은 멜라니아로 불렸던 또 다른 멜라니아와 구분하기 위하여 늙은 멜라니아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요르단 사막과 사해 주변에서 얼마간 지속되었던 라우라(Laura) 제도를 발견한다. 이 제도는 이집트 북부와 남부에서 발견된 두 종류의 수도승생활의 혼합이다. 수련자는 수도원에 들어가 7∼8년 간 견습기간을 보낸다. 그는 이렇게 이집트 남부에서와 같이 먼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라우라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그는 독수도승으로 생활하게 된다. 이것은 이집트 북부에서와 같은 제도이지만 조직화된 제도이다. 비록 그들이 수도원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홀로 생활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제 멋대로 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한 영적 사부가 있었고,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매주 토요일마다 그를 보러 그리고 같은 영적 사부를 모시고 있는 6∼7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러 갔다. 그들은 한 주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에게 설명하였고,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함께 식사를 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밤기도를 거행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 다음 토요일까지 완전한 고독에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생활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독수도승생활은 회수도승생활을 통하여 준비되어야 하는 정점이었다. 성 베네딕도는 규칙서 제1장에서 틀림없이 이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이집트 북부와 남부의 제도들과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는 있지만 다르다. 이집트 북부의 독수도승들에게는 공동체 생활과 같은 견습기간은 없었다. 그리고 빠코미오는 독수도승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3. 시리아

 

팔레스틴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리아가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실제로 사막에로의 매혹이 있었다. 그러나 사막에 대한 생각은 달랐고, 시리아 수도승들은 이집트나 팔레스틴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도 않았다. 시리아에는 다음 세 가지 형태의 수도승들이 있었다.

 

1) 히파이트래(hypaitrae)

 

'야외에서'를 뜻하는 희랍어 히파이트로스(hypaithros)에서 유래한 히파이트래(hypaitrae)가 있었다. 이들은 야외에서 돌들로 구획을 정하거나 혹은 쇠사슬로 발을 묶어 일정한 구역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비가 오나 날씨가 맑거나 춥건 간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목초지의 소처럼 거기서 생활했다. 그것은 상당한 인내였음이 분명하다.

 

2) 덴드리태(dendritae)

 

또한 '나무'를 뜻하는 희랍어 덴드론(dendron)에서 유래한 덴드리태(dendritae)가 있었다. 그들은 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서 살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새장 안에서 살았는데, 그것이 너무 작아 그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바위에 묶었다. 시리아에서는 태양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내리 쬐는가!

 

3) 스틸리테스(stylites)

 

그 다음 기둥 위에서 평생을 살았던 스틸리테스(stylites)가 있었다.

 

이러한 기인(奇人)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스틸리테스(STYLITES, 원주 수도승들)는 시리아 수도승생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명사(名士)들과 성인들이었다.

 

그 창설자는 대(大) 시메온이었다. 그는 처음에 움막에서 3년 동안 생활하였고, 그런 다음 하이파이트래가 되었다. 그는 큰 바위에 묶어 고정시킨 길이 10미터 쇠사슬로 자신의 발을 묶고 하나의 석판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앉거나 눕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리가 그를 보러 왔다. 가능한 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갔던 스케테의 수도승들처럼 수평적으로 도망가는 대신, 그는 수직적으로 도망갔다. 그는 한 기둥 위에 그의 석판을 올려놓는 생각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3미터 높이의 기둥에 올라갔고, 그 다음 6미터, 11미터, 18미터 기둥 위에서 생활하였다.

 

* 이들은 기둥 위에서 어떻게 생활하였는가?

 

먼저 직경 2-2.5미터의 기초가 있었다. 이 위에 쇠줄 하나로 기둥의 몸체를 고정시켰다. 직경이 약 1미터인 그 기둥은 쇠줄로 한데 묶인 몇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흔히 삼위일체를 기념하여 3개가 있었다). 전체 높이는 20미터를 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거기 올라갈 사다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둘째, 원주 수도승이 군중들에게 이야기 할 때 너무 높으면 군중들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둥 꼭대기에는 가로 세로 1.3내지 1.8미터의 단이 있었는데, 그 단은 수도승이 잠잘 때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오물을 버리기 위해 관 하나가 기둥 밑으로 내려져 있었다. 전 구조물은 하나의 작은 봉쇄구역 즉 돌담으로 봉쇄된 안마당인 만드라(mandra)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쪽에는 그 원주 수도승의 하인을 위한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 그들은 기둥 위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는 여러 번 부복하거나 무릎을 끊고 기도하며 하루 종일 서 있었다. 그는 단지 하루에 한 번만 식사했다. 밤에는 보통 앉아서 잠을 잤다. 낮에는 군중들에게 설교하며 사도직을 수행했다. 원주 수도승들의 이 높아진 위치는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을 표현하였다. 그것이 사실상 그들의 의도였다. 그들의 직접적인 사도직은 상당한 것이었고, 그들은 각 사람들의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들을 서로 화해시켰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도처에서 그 기둥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 삶은 몹시 엄격하였다. 그들은 결코 누울 수 없었고, 날씨가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노출된 상태로 대부분의 시간을 똑바로 서 있었다. 이같이 과도한 고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원주수도승들은 많은 병에 걸렸다. 하지만 그들은 병을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가하면서 치료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 때문에 일찍 죽는 수도승들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이 수도승들의 삶의 양식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극단적이고 우리 눈에는 그들이 하느님을 위한 참된 바보들처럼 보인다.이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미쳤던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을 모방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 자신의 시대에서 그들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는 사람들의 기질과 욕정과 유혹들이 우리 시대보다 상당히 더 강렬했던 때였다. 사람들은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수도승들은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죄로부터 피하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혈기 왕성하였는데, 이것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육체를 길들이려 한 그들의 집념을 설명해 준다.

 

더욱이 그들의 금욕이 완전히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측면은, 히파이트래(hypaitrae)와 덴드리태(dendritae)가 되는 것이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사람은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함으로써 그 자체가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과의 유대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4. 소아시아

 

소아시아에서 우리는 삶의 양식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상에 있어서 또 다른 기인(奇人)들을 만난다. 이들은 오히려 이상한 금욕가들이며 불안정하며, 권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엔크라티즘(encratism)으로 알려진 이 과장된 금욕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바실리오는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점차 빠코미오의 회수도승생활과는 다른, 또 다른 종류의 회수도승생활을 창시하였다.

 

바실리오 공동체들은 빠코미오의 코이노니아보다 작았다. 바실리오에게 있어 '수도승'이란 단어는 독수도승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들은 형제들이라고 불렸다. 회수도승들만이 진정한 종류의 수도승이라고 생각했던 바실리오는 '수도승'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한 장상의 권위 하에서 형제들이 함께 생활하는 회수도승생활을 원하였다. 더욱이 빠코미오 공동체들이 천상의 왕국을 예시하였던 반면, 바실리오의 공동체들은 군중들로부터 물러나면서도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예수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바실리오 공동체들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사막에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도시의 변두리에 있었고 거기서 애덕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바실리오는 큰 병원을 세웠고 거기서 그의 형제들이 봉사하였다. 여기 그 형제 공동체들은 사막과 도시 사이에 있었다.

 

약간 더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콘스탄티노플이 있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그곳의 수도승생활의 형태는 또 다르다. 수도원들은 더 이상 교외에 있지 않고 바로 도시 안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요한은 수도승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수도승들은 애덕을 위한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즉 바실리오 수도승들처럼 자선을 베풀던가 아니면 주교의 일을 도와주는 사목적 직무들을 맡던가 하는 역할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깨어있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복음에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5. 북아프리카

 

4세기 후반기에 아우구스띠노는 이태리 밀라노에서 회개한 후 예수를 사랑하고자 하는 큰 갈망을 갖고 그의 고향으로 가서 자기 친구들과 함께 하나의 작은 수도승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매우 총명하고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행복에 대한 엄청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우정은 지상에서 이미 행복의 원천이었다. 여기서 아우구스띠노처럼 재능이 풍부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한 작은 공동체가 생겼다. 이 공동체는 친구들이 서로 도우며 함께 공동생활을 한 공동체였다. 그들은 기도했고, 철학을 토론했으며, 성서와 신학을 연구했다. 그것은 지성적인 수도승생활이자 동시에 평신도 수도승생활이었다.

 

그러나 3년 후, 아우구스띠노는 힙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설교로써 주교를 도왔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 중 하나인 알리피우스(Alypius)에게 수도원을 맡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수도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 교회에 속한 토지인 어떤 정원의 후미진 곳에 집 하나를 얻었고, 거기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4년 후, 그가 주교의 보조자가 되자 그는 이 정원 수도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도원의 열심한 수도승들 가운데 여러 형제들이 아프리카의 다른 교구들에서 주교들로 선발되었다. 아우구스띠노 자신은 힙포의 사제들에게 주교관에 와서 자신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한 생각이 원인이 되어 아우구스띠노는 성직자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다. 그것은 이후 세기에 영향을 끼쳤는데, 즉 수도승들과 사제들 간의 혼란, 독신의 의무와 모든 개인 재산의 포기, 수도자와 사제들의 동일화 문제를 일으켰다. 후에 로마에서 대 그레고리오는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와 함께 생활하는 사제들의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6. 로마

 

우리는 로마에서 몇 가지 종류의 수도승생활을 발견한다. 로마는 고대 전통과 고등 문화와 연결된 이교 정신이 병존하는 제국 도시이다. 그리스도교인들 특별히 수도승들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종종 거칠고 미개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몇몇 열심한 남녀 금욕가들의 공동체들이 있었는데, 그 공동체들 안에서 사랑은 그들 생활 규칙의 전체 영감이었다. 그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우구스띠노는 밀라노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우구스띠노에게 그리스도교 삶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로마에는 또한 여성들의 또 다른 수도승생활 형태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약간 놀라운 것으로 로마 사회의 환경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동정녀들이건 과부들이건 간에 상류사회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기도와 금욕 그리고 자선을 하며 축성된 삶을 살았다. 이 위대한 여성들 중 몇몇은 마르첼라(Marcella)의 집에 모여 일종의 수도원을 형성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사는 데는 강한 확신과 신앙이 요구되었다. 부유한 과부들은 그들의 막대한 재산 때문에 종종 재혼을 요구받았다. 젊은 미혼 여성들은 법적으로 많은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그들의 가정도 사회도 그들의 독신 상태를 승인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 여성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두 야만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던 성서를 공부하였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견디어야 했다.

 

381년에 예로니모가 로마에 왔는데, 그것은 그들의 열성을 배가시킨 하나의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예로니모는 성서를 열심히 번역하여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그는 사막에서 수도승으로 몇 년간 생활하였다. 예로니모는 많은 귀족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경건한 여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었다. 예로니모는 그들에게 성서주석을 가르쳤고 그들의 영적 안내자가 되었다. 우리는 예로니모의 서간들 안에서 이 여성들이 금욕생활을 강화하였다는 뒷 이야기를 읽어 볼 수 있다. 또 다른 로마 귀부인 바울라의 딸인 젊은 블레실라(Blesilla)는 그때까지 세속적인 방식으로 생활해 왔었는데 회개하여 엄격한 생활로 나아갔고, 4개월 후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분개하여, 너무 지나친 금욕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거친 생활로 안내하여 죽게 한 예로니모란 작자를 비난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로마 시에 하나의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동시에 헬비디우스(Helvidius)란 사람이 소책자 하나를 썼는데, 그는 거기서 마리아가 동정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말하기를 "만일 동정성이 하느님 눈에 어떤 가치를 지녔다면, 마리아는 그것을 간직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로니모는 그를 거슬러 강하게 논박하는 어떤 책에서 특유의 발랄함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지나치게 나아갔다. 그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을 비난하면서 고행을 열렬히 찬양하였다. 이것은 매우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블레실라의 죽음과 헬비디우스에 대한 논박,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로니모와 바울라는 로마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갔다.

 

결국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죠비니언(Jovinian)이란 수도승의 작품을 통해서 싸움이 다시 불붙었다. 죠비니언은 결혼한 수도승이었고,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고행의 정상적인 결실은 결혼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작품은 많이 읽혀졌고, 많은 수도승들이 수도원을 떠났다. 예로니모는 벌컥 성을 내었고, 다시 그 싸움에 가담했다. 그는 「죠비니언을 거슬러」란 소책자를 썼는데, 그것이 너무 과격하고 욕설적이어서 그는 그것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에서 수도승생활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94년 놀라의 바울리노(Paulinus of Nola)라고 불리는 한 수도승이 로마에 왔을 때, 시리치우스(Siricius) 교황이 "cum superba discretione" 즉 "까다롭고 신중하게" 그를 받아들였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사람들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수도승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또 다른 교황 아나스타시오(Anastasius)는 400년에 존경과 애정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4세기 초에 수도승생활은 로마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한 수도승생활이었다. 수도승들은 순례자들을 돌보았고, 그들 스스로 로마의 대성당에서 영적이고 사목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7. 갈리아

 

헝가리에서 태어난 마르띠노는 군에서 제대한 후 뿌아티에르(Poitiers)로 가 어떤 섬에서 얼마간 혼자 지냈다. 그는 주교 힐라리오가 가난과 기도의 삶을 살고자 했던 어떤 사람들을 함께 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힐라리오 옆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힐라리오는 리귀제(Liguge)에 있는 작은 땅을 그에게 주었고, 거기서 마르띠노는 상당히 많은 제자들을 끌어 모았다. 갈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안또니오의 생애'를 읽고 탄복하였다. 마르띠노는 뚜르의 주교가 되었고 마르무티에르(Marmoutiers)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독수자들이 함께 살고자 거기로 왔다. 397년 성 마르띠노가 죽었을 때, 술삐치오 세베로(Sulpicius Severus)는 상당히 많은 수도승들이 사랑하는 그들 사부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그 장례식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야만족의 침입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북부 갈리아에서의 이러한 형태의 수도승생활은 제도와 규칙에 그리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내적인 어려움들이나 혹은 외적인 문제들 앞에서 타격을 받기 쉬웠다.

 

남부 갈리아에 있는 마르세유(Marseille)에서는 주교 쁘로끌로(Proclus)의 보호 아래 수도승생활은 그 교회 안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영적 스승 호로라도는 레랭(Lerins)에 열정적인 공동체를 하나 설립하였는데, 그의 수도승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교가 되도록 요청 받았고, 이제는 그들에 의해 더 많은 공동체들이 설립되었다. 이집트와 팔레스틴 교부들의 모범과 가르침을 배우면서 여러 해를 보냈던 요한 까시아노가 막 마르세유에 당도하였다. 그곳의 주교들과 아빠스들은 건전한 가르침이 없으면 흔적 없이 사라질 갈리아 수도승들의 바람직한 갈망들을 충족시켜주도록 까시아노에게 이 위대한 스승들의 '제도들'을 글로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까시아노는 그가 종종 겸손한 방법으로 서방인들에게 이야기했던 그 위대한 이집트인들을 찬양하였다. 그는 마치 아우구스띠노가 결코 수도원을 설립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성공적이었고 영향력을 끼쳤다. 그것은 토양이 잘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8. 영국 섬들

 

영국 섬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수도승생활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에 의해 오늘날의 영국 서쪽으로 몰려난 켈트족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서 발생하였다.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은 빠뜨리시오와 골롬바노이다. 이 수도승생활의 특성 중 하나는 '고향을 떠남'과 '의지적인 유배'를 위한 방랑 생활을 수반한 금욕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고 한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선교사적인 특성이 있었다. 빠뜨리시오는 아일랜드로 복음을 선포하러 갔고, 골롬바노는 갈리아와 이태리에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다.

 

'의지적 유배'에 대한 갈망은 아일랜드 수도승들로 하여금 접근 불가능한 가장 오지에 작은 수도원들을 세우기 위해 바다 밖으로 멀리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겼다. '성 브랜단(St. Brendan)의 항해'에 대한 전설적인 모험들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이러한 배경 위에서였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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