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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그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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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6 ㅣ No.865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그 특성

 

 

국문 초록

 

유홍렬은 일생을 역사학자로 살았지만, 동시에 뛰어난 교육 행정가이자, 열심한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활동가였다. 그의 한국사 연구는, 조선의 성리학 사회를 구명하는 노력에서 시작하였으나, 한국 천주교회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로 귀결되었다.

 

달레는 복음전래사와 순교사를 서술하였고, 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을 사용했다. 이에 반해서 유홍렬은 한국 사회에서의 천주교회사를 서술하였고, 연대기를 위시한 국가 편찬 사료들을 보완했다.

 

유홍렬의 천주교회사 연구는 이전보다 폭넓고 철저하게 문헌 고증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단편적인 사료들을 발굴하여, 교회사를 조금이라도 보완하려 노력했다. 다만, 개척적 저술이라서 오류들이 가끔 나타난다.

 

다음으로, ‘근대화론’과 ‘자체발전론’의 시각으로, 새롭게 밝혀낸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했다. 조선 교우들은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하고 전파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서구적 근대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데 직접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조선 교우들은 근대적 휴머니즘이나 실험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변별 없이도,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여서, 곧바로 서구 근대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많은 부분이 오류일 것이다.

 

결국 유홍렬은 성리학이 우리 민족의 올바른 신앙생활-사회생활을 저해한 근원이라고 파악하였다. 반면에 이러한 비과학적이고 불평등한 역사적 상황을, 한국 천주교회가 극복해갔다고 파악하였다. 곧 달레의 호교론도 이어받고 있다. 서구 지향 근대화로 조국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슬로건은 1960~1970년대 국가적 표방인데, 유홍렬은 이를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하여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유홍렬의 사고는 너무 단순하고 자의적이지만, 사목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오늘날까지 폭넓은 이해를 받고 상당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 역사학은 크고 작은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를 구성체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통합하여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홍렬의 역사학은 이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

 

 

1. 생애와 저술 활동

 

유홍렬(柳洪烈)은 1911년 3월 21일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 와둔지라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서, 1995년 6월 14일 서거하였다. 호는 혜암(惠庵)이다. 문화(文化) 유씨로, 아버지는 유인희(柳寅曦), 어머니는 박윤병(朴閏秉)이다.

 

유홍렬은 기본적으로는 학문을 하는 역사학자로서 일관되는 생애를 살았다. 그렇지만, 그의 학자로서의 생애를 시기에 따라 구분해서 본다면,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1)

 

1기는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3월 유서 깊은 성리학 종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서, 6세부터 서당에서 《소학》을 배우다가 8세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고,2) 1935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던 때까지이다.

 

이 시기, 수원농림학교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우면서도 민족의식이 강했던 아버지의 훈도를 받았으며,3) 1919년에서 1925년까지는 장단 고등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했고,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서울의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 중 ·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부터 1935년 3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면서4), 10여만 권의 규장각 도서로 연구할 것을 꿈꾸면서 본격적인 한국사학 전공자로의 수업을 받았고, 지도 교수인 스에마츠[末松保和] 등 3인의 한국사 전공 교수의 지도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5)

 

2기는 사학과 졸업 후인 1935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 조선민속학 연구실 조교로 봉직하면서 진단학회에 가입하여, 이후 역사학자로서 본격적으로 학문 활동을 하였던 1960년 초반경까지이다.

 

조교 시절에는 아키바[秋葉隆], 아카마츠[赤松智城] 교수의 조선 무속 연구를 도와 열두거리 굿의 무당노래(巫歌)를 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6)

 

졸업 후 1년 뒤인 1936년 9월에 결혼을 앞두고 장면(張勉)을 영세 대부로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고,7) 이후부터 한국 천주교회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조교 시절인 1937년 2월에 개종 기념으로 서울 교구장 라리보 주교로부터 불어판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 1, 2권을 받았고, 독학으로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8) 조선사편수회에서 오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1938년 4월부터 1945년까지 천주교회 계열인 동성상업고등학교(교장 장면) 사회생활과 교사를 역임하면서 《한국천주교회사》를 거의 독파하였다.9)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로 임명되고, 진단학회 이사를 맡으면서 대학교수로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7월 서울대학교 교수로 승진하였고 문학부장을 역임하였다. 6 · 25 전쟁 때는 현역 공군 장교(중령, 정훈감)로 1년 4개월을 근무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로 돌아와, 의예과부장, 교양과정부장,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하고, 1960년 3월 학술원 회원에 피선되었다. 1956년 미국무성 초빙교수로 하버드 대학에 유학한 이래 국제동양학자회의, 국제역사학회의 등 구미 각지에서 개최되던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 외국 학자들과 교류하며 한국학의 세계화에 노력한 공로가 있다.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그의 한국사 연구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조 사회에 대한 구명 작업에서 시작하여,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정리로 귀결되었다.

 

유홍렬은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맡고 있던 윤형중 마태오 신부의 요청에 따라10) 현양회의 지원을 받아 1949년 2월 《조선천주교회사》 상권을 집필했다고 밝힌 바 있다.11) 스스로는 1948년 10월 이후 본격적으로 집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계속적으로 교회사 연구 업적들이 이어졌는데, 천주교 유입 과정과 배경에서부터 초기 신앙인들과 이어지는 천주교 박해, 교세 성장 과정, 선교 자유 이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연구논문들은 1962년 《한국천주교회사》로 1차 종합되었고, 1975년에 《증보 한국천주교회사》로 2차 집대성되었다. 이 업적들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3기는 4 · 19 학생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부터 2년간 서울대학교 교무처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상대 학장서리, 총장 직무대리 등을 맡으면서, 학자 생활보다는 본격적인 교육 행정가로서 활약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사회 활동도 아주 많았고, 학술상도 여러 번 받았다. 1963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6년에는 이제까지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9월에서 1967년 12월까지는 대구대 학장으로 청구대학과 통합, 영남대학교를 출범시켰다. 1968년 3월부터 1976년까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재직하면서 대학원장, 총장 직무대리, 총장을 맡기도 했고, 한국사학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정년 퇴임 후, 인하대학교와 세무대학에서 초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한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관련 활동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66년 4월에서 1970년 4월까지는 한국가톨릭지성인단체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67년 10월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제3차 세계가톨릭평신도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음 해 7월에는 한국가톨릭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11월에는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1969년 가톨릭군종후원회 부회장, 1970년 8월에는 한국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황 훈장인 로마교황청 강복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65년에는 일본 북알프스 등정 시 등반 대장을 맡을 정도로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홍렬의 주 연구 분야는 한국 천주교회사이지만, 그 밖에도 고려 · 조선 시대의 학교 제도, 특히 조선 시대 서원(私學) · 향약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규장각 도서에서 한국 역사를 찾으려 한 노력이 담겨 있는 《한국사회사상사논고》(1980)는 한국사상사의 흐름을 보여준 중요한 연구로 평가된다. 이 밖에 조선독립운동사상 연구, 한국정당사 연구 등 근현대사 분야 연구 업적도 있다.

 

 

2. 한국 천주교회사의 체계와 역사의식

 

1) 천주교회사 관련 중요 저술

 

유홍렬이 연구한 천주교 관련 중요 저술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인의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판단되는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의 수록을 기준으로 삼고, 저서와 논문으로 나누었다.

 

<저서>

1949 《조선천주교회사》 상(1949. 2. 1830년까지)

1955 《이누갈다전》

1962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971 《한국천주교소사》

1971 《흐르는 강물 따라》, 휘문출판사(자서전)

1975 《증보 한국천주교회사》(《한국천주교회사》 2판)

1976 《한국의 천주교》, 교양국사 총서 16,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 《한국사회사상사논고》(서학사상 편, 한국문화 편)

1983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논문>

1955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신앙생활>, 《가톨릭청년》 3, 4

1956 <제주도에 있어서의 천주교박해>,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문집》

1958 <한국최초의 양옥, 명동성당의 유래>, 《향토 서울》 4

1959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리델신부의 조선탈출>, 《서울대학교논문집》 9

1960 <천주교 보육원의 유래>, 《향토 서울》 9

1962 <박해기에 있어서의 역대 주교들의 전교활동>, 《가톨릭청년》 8-10

1964 <이승훈과 그 후손들의 순교>, 《사학연구》 19

1967 <한국의 서양문화수용에 대한 역사적 연구>, 《전석재신부은경축기념논문집》

1968 <제3차 세계천주교평신도대회의 의의>, 《사학연구》 20

1970 <이수광의 생애와 그 후손들의 천주교 신봉>, 《역사교육》 13

1970 <한국기독교사(1) - 천주교사>, 《한국문화사대계》 VI

1974 <《한국천주교회사》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1974 <그리스도교와 한국문화>, 《한국학》 4,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76 <한국에서의 천주교와 유교 간의 전례문제>, 《한국사회사상사논고》(제30차 아시아북아프리카 인문과학자 국제회의 발표문)

1976 <천주교의 한국근대화운동>, 《신부전석재박사화갑기념논문집》

1979 <실학의 개척자 지봉 이수광>, 《한국학》 20

1982 <일제치하 천주교의 수난>, 《한국학》 27

1987 <한국 103위 성인 시복 경위와 그 성화(聖畵)의 유래>, 《비교문화연구》 6, 한양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이상에서 1976년 이후 약간의 저술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중심이 되는 저술들은 1975년에 나온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에 종합되어 수록되었다고 판단된다. 이 책은 1874년에 간행된 달레의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이후 9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본격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이다.12)

 

2) 달레와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 체제와 핵심 내용의 비교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 체제와 그 이전에 나온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 체제를, 목차를 중심으로 하여 간략한 수록 내용과 함께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13)

 

볼드체 부분이, 달레 교회사와 다르거나, 유홍렬에 의해서 새로이 추가되었거나, 새로운 연구 성과가 대폭 더해진 부분이다.

 

<달레>(안응열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중, 하, 1987 기준)

서설 : 조선의 지리, 역사, 제도, 사람…

제1편 : 천주교의 수용(왜란 입교자 - 이승훈 - 김범우 - 신해박해 - 지방 박해)

제2편 :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신유박해(주문모 - 정조 말 박해 - 신유박해 - 주문모 순교)

제3편 : 신유박해 후기의 양상(강완숙 - 지방 순교자 - 이 누갈다 - 황사영 백서 - 신유박해 종말)

제4편 : 교회의 부흥운동

  1) 초기의 한국 교회 : (성직자 영입의 청원 - 기해박해 - 조숙 동정부부 순교 - 정해박해 1, 2)

  2) 시련과 발전의 한국교회

    1권 : 교구설정(브뤼기에르 - 모방 - 샤스탕 - 앵베르)

    2권 : 기해박해(순교자들 - 선교사, 유진길 - 정하상, 전주, 당고개)

    3권 :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병오박해 - 최양업 - 메스트르)

    4권 : 철종 대의 한국 교회(베르뇌 - 전교 활동 확대 - 다블뤼 - 경신박해 - 민란과 한국 교회)

    5권 : 병인박해(한국 교회 상황, 순교자들 1, 2)

 

<유홍렬>(《증보 한국천주교회사》 상, 하 기준14), 1975)

서론 : 한국 종교사의 특징(종교의 기원과 종류 - 삼국시대 신앙 - 불교의 전래 - 주자학의 전래 - 천주교의 전래와 교난의 원인)

제1편 : 교리연구 시대(세스페데스 입국, 조선인 포로 구제 - 안토니오 코레아, 소현세자 - 아담 샬 등 - 천주교 교리연구 전사. 이수광, 이익 등을 보다 자세히 서술)

제2편 : 교회창설 시대(새 학문 연구 - 천주당 방문, 신앙운동 개시 - 가성직 - 신해교난 - 주문모 신부)

제3편 : 신유교난과 교회 재건운동(신유교난 - 황사영 백서 - 교회부흥 - 충청도교난 - 을해교난 - 신부 영입운동 - 정해교난 경상 - 전라 - 충청 - 서울)

제4편 : 조선교구의 설정(브뤼기에르 주교 - 유파치피코 신부(프랑스 선교사 입장에서 비판) - 모방 입국 - 앵베르 입국 - 일본 전교계획)

제5편 : 기해년의 대교난(기해교난과 조씨 세도 - 상재상서 - 기해일기 - 복자들)

제6편 :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병오년 교난(페레올 - 김대건 - 프랑스 함대 - 현석문 등 순교)

제7편 : 철종 시대에 있어서의 교회 발전(성모성심회 창설, 최양업 신부 - 다블뤼 - 페레올, 관리들의 보호와 경신년교난 - 임술민란 - 동학) 이상 상권

제8편 : 대원군시대의 거듭된 교난

          (대원군 변덕 - 병인교난 - 오페르트 - 제너럴셔먼호)

          (리델 신부 탈출 - 병인양요 - 오페르트 - 신미양요)

제9편 : 조선의 문호개방과 선교의 자유를 위한 성직자들의 활동

          (일본 수호조약 - 리델 주교 - 성당 터 매수 - 건축 - 동학란 - 남종삼 신원과 《치명일기》 출판 - 함경도 - 간도 전교 활동 - 제주교난 - 안중근)

제10편 : 일제 압정하의 교세와 해방 후의 교회 발전

          (일제 - 해방 후 - 6 · 25 전쟁 - 휴전 후 - 24위 시복과 김 추기경 선임 - 평신도 운동과 교회 일치운동 - 저명인사 입교 - 순교복자 현양사업)

 

목차를 비교해 보면, 달레는 교회 관련 인물을 주체로 하는 복음 전래사와 순교사를 주로 서술하였다면, 유홍렬은 교회 관련 사건을 주체로 하는 한국 교회사를 주로 서술하였다고 하겠다.

 

달레 교회사가 성직자와 순교자 주체의 서술이고, 특히 프랑스 선교사 이후 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면, 유홍렬의 교회사는 한국 역사의 전개 상황을 대폭 보강하고, 교회 건설과 박해의 역사를 이와 대비시켜 가면서 서술하였고, 박해 이전-이후의 연대기 및 조선 관변 측 사료를 대폭 보완했고, 선교의 자유 이후 당대까지의 근 · 현대 한국 천주교회사를 추가하였다. 일제 시대 서술이 지나치게 적은 부분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15) 반면에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본격적인 출범을 강조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변화를 부각시킨 부분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1970년에 교회 창설 시대 - 교회 수난 시대 - 신교 자유 시대로 3시기 구분을 한 <한국기독교사(1) - 천주교사>(《한국문화사대계》 VI)를 기본 대본으로 하여, 1971년, 1975년, 1983년에 각각 일반인들이 읽기 편한 보급용의 ‘소사’(小史)도 썼다.16)

 

3) 폭넓고 치밀한 문헌 고증적 입장과 한계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1차적인 특징은 보다 폭을 넓히려는 문헌 고증, 보다 철저해지려는 문헌 고증이다.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의 일러두기에서 “나는 이 책을 엮음에 있어서 불란서 사람들의 기록과 한국의 기록을 다 같이 견주어 가면서 자료로 쓰게 되었으니, 이러한 점에 이 책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라고 밝힌 대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료와 그 원본에 해당하는 조선의 연대기인 《일성록》, 《승정원일기》, 추 · 국안 등 관변 측 사료 및 제반 국내 문헌 자료들을 대비해 가면서 쓴 점이 중요하다.

 

연구 논저들을 살펴보아도, 사료가 말하게 한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수많은 논증 사료들의 제시와 함께, 반대되는 입장의 사료들도 대비하여 수록하고 있는 반면에, 종합하고 결론 내리는 부분은 대단히 신중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후학의 입장에서 제대로 읽어 보면, 전체적 모습은 대체로 잘 드러나는 반면에, 결정적인 문제점들은 크게 눈에 띄고 있지 않은 좋은 연구 업적들이다.

 

이로써 달성한 눈에 뜨이는 연구 성과들을 요약,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수광의 생애와 그 후손들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이수광을 실학 운동의 개척자이자 개화사상의 선각자라는 입장에서 생애를 저술하였으며, 《지봉유설》의 세계지도, 《천주실의》, 서양 산물 소개 같은 사실들을 고증하였다. 그 후손들 역시 이 가문의 전통을 따라서, 이총억, 이윤하, 이경도 · 경언 - 이 누갈다(시아버지 유항검 - 유종선 요한)에 대한 사실 논증에 치중하고 있다.

 

천주교 보육원의 역사를 다룬 글에서는, 조선왕조에서 실제로 가장 부족했던 고아 대책을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에 옮겼음을 서술하였다. 이는 천주교회의 오랜 관습인 병자 - 노인 - 유아 구제와 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시켜온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서, 왜란 시기 및 박해 시기 교회 모습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각시켰고, 근대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의 고아 구제 사업으로 이어짐을 논증하였다.

 

리델 신부의 조선 탈출 관련 연구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개시 이유와 병인박해에 대한 초기 연구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연구의 실제적인 초점은 리델 주교가 일본에서 최지혁의 도움으로 1880년에 《한불사전》, 1881년에 《한어문법》을 완성 · 출간하여 문화적 금자탑을 세웠다는 데 있다. 이는 병인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외국어 학습 수준을 높이려 한 그 노력이, 곧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업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1901년 제주도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연구에서는, 그 앞부분에서 먼저 리델 주교의 교회 재건 노력이 바탕이 되어, 1886년 한불조약에서 프랑스인의 ‘교회’(敎誨)권을 인정한 것이 바로 선교 사업을 목적으로 한 교육 사업을 인정받은 것이고, 결국 선교의 자유로 이어졌음을 논증하기도 했다.

 

신축교난 자체는 가장 중요한 사료인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 관련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는 외에 다양한 사료들을 소개하면서, 결국 고종 연간의 병인박해가 관제 사건이라면 신축박해는 사제 사건으로서, 제주도민의 배타성과 조선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일본 상인과의 결탁을 바탕으로 제주도 특유의 미신 습속, 수령-외래 종교 등 육지인에게 반발, 천주교인 봉세관의 작폐, 동학도-간리로서 ‘투입 서학자’들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연구는 “신축년에 일어난 제주도 교난을 위시하여 각지의 그것은 천주교인의 비행보다도 완명(頑冥)한 일반 민심과 부패한 이도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17)라고 결론 내렸듯이, 천주교 측 입장에서 쓰여졌다. 그러나 유홍렬이 제시한 수많은 복합적 요인들은, 연구자들의 사관이나 처한 입장에 따라서 강조하는 측면들이 달라졌을 뿐, 대체로 오늘날에도 거의 인정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이와 짝을 이루는 병인박해 연구도 기본적으로 같다.

 

성당 건축을 최초의 양옥 건물 건축으로 판단하면서, 약현 성당, 종현 성당, 용산 신학교의 건축을 독립문, 덕수궁, 석조전의 건축 시기와 비교하기도 했다.

 

마지막 학술 논문으로 판단되는 1987년 연구는 103위 성인 시성시복 경위와 성화 제작 유래를 밝혀놓은 것인데, 결과적으로 달레 → 유홍렬 천주교회사 연구의 최종 기착지가 된 셈이다. 간략한 한국 천주교회 역사, 1847년 시성시복 청원 시작, 1925년 24위, 1968년 79위 시복, 1984년 103위 시성으로 마무리되는 과정, 103위 성인의 성화 제작 경위, 계속해야 하는 시성시복 운동 등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18)

 

반면, 스스로 이전 문헌 고증에 문제가 있음을 밝힌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이승훈 후손들 순교 연구는 아예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의 <증보판 출판에 즈음하여>라는 서문에, 주재용 신부의 《한국가톨릭사의 옹위》의 이승훈 관련 글을 읽고서 이전의 견해를 수정한 후, “앞으로도 잘못된 일들이 알려지게 되면 서슴지 않고 고칠 작정이니 독자들의 가르침이 있기 바란다”고 써놓고 있다.

 

이 밖에도 결정적인 사료상의 오류가 있는 경우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예컨대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의 병인박해 진행 과정에서 오페르트의 침범에 따른 교난 조에 있는 ‘외국과 통상코자 함’이라는 부분은 이른바 ‘교우 박근기(朴根基)’ 사건과 같은 경우이다.

 

유홍렬은 이 사건을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그해에 천주교 교우들이 “남쪽의 일본을 거쳐 서양인과의 사이에 통상의 길을 트는 한편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꾀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19)고 결론 내렸다. 

 

이는 《승정원일기》 또는 《일성록》의 고종 5년 윤4월 23일자 기록을 이용한 것이다.20)

 

하지만, 이는 그다음에 나오는 《승정원일기》 또는 《일성록》의 고종 5년 6월 4일자 기록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탓이라고 판단된다.21)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교하기를, 잠깐 전라감사의 장계를 보니 박근기가 자고 이래 실성함은(*예로부터 미쳤음은) 지속(*혈족)들의 공초에 확실하게 근거가 있고, 또 이미 호란에 몸이 죽은 자라고 공술한 것은 그 말이 미쳐 망녕되고 두서없음이니, 이로써 더욱 믿을 수 없다. 지금 허다한 사람이 그대로(온전하게) 죄인으로 갇혔으니, 매우 불쌍하고 가엾다. 모두 다 특별하게 풀어주라. 죄인 박근기는 동래부옥에 엄히 가두고, 이에 유배 보낼 일을 묘당에서 조치하여 논의하라.22)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정부에서는 박근기 사건 자체를 예로부터 정신이상자의 소행 내지 무격(*호란에 몸이 죽은 자에서 유추 가능)의 소행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곧 사건 자체도 전혀 그 실체가 없어서, 허탄한 수준의 유언비어 정도일 뿐으로 보았던 것이다. 당연하게 천주교 교우의 소행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므로, 아마도 샤먼으로서, 유언비어 유포죄에 해당하는 박근기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를 무죄 방면했던 것이다.23)

 

단편적인 사료들일망정 잘 발굴하여, 한국 천주교회사를 조금이라도 보완하려 한 노력은 높게 평가되지만, 그만큼 큰 위험성이 뒤따른다는 것도, 위 사례는 잘 보여준다.

 

4) 근대화론적 자체발전론에 입각한 해석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또 다른 큰 특징은, 조선 교우들의 자생적-자발적인 천주교 수용과 전파가 곧바로 민족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이른바 ‘자체적 발전론’을 취하되,24) ‘서구적 근대 사회’로의 발전을 특히 중시하는 시각이다. 곧 근대화론적 자체발전론에 입각한 천주교회사 연구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25)

 

그는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의 ‘일러두기’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다만 하나의 종교 역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이 근대화하여온 과정에 있어서 겪은 정치사이며, 외교사이며, 학술사이며, 사상사이며 개화사인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유홍렬은 <천주교의 한국 근대화 운동>26)이라는 논문에서, 새롭게 밝혀낸 자신의 연구를, ‘근대화론적 자체발전론’의 시각을 부여하여,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이승훈은 곧 그의 동지들에게 또한 세례를 베풀어준 다음… 이벽의 지도에 따라 주일행사를 지내니, 이에서 조선 교회가 창설되었다.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오로지 남인파 선비들의 교리연구 결과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은 세계 문화사상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때부터… 올바른 신앙운동을 벌이는 한편, 미신타파운동, 계급타파운동, 국문전용운동, 문호개방운동, 서양문화 도입운동 등을 일으킴으로써 조국 근대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27)

 

구체적으로는 근대화에 이바지한 15개 조항을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참된 종교의 대중화 운동. 이는 중인 - 천인 - 왕족 등 대중의 참여 조직을 들었다. 2) 신교의 자유권 획득. 이는 한불조약에 있는 ‘교회’권을 들었다. 3) 미신 행위의 배격 운동. 이는 신주 - 허례허식의 미신적 행위 금지를 들었다. 4) 계급제도 타파 운동. 이는 모두 ‘교우’ 명칭을 쓰는 사례 등을 신분 평등 운동으로 들었다. 5) 축첩제 폐지 운동. 이는 남녀 평등 운동으로 보았다. 6) 국문 전용 운동. 이는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와 《경향신문》 등의 한글 전용 운동의 사례를 들었다. 최양업 신부와도 관련되는 한글 ‘천주가사’ 부분은 빠져 있다. 7) 조국의 문호 개방 운동. 이는 외국과의 교류들을 들었다. 8) 유학생 해외 파견. 이는 신학생 파견을 말한다. 9) 근대적 교육기관 설치. 배론 신학교와 용산 신학교를 들었다. 10) 한국학 연구 자료의 편찬.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리델 신부의 《한불사전》 - 《한어문법》 - 한글 활자를 들었다. 11) 사회 구제 사업의 개시. 정약용 의술과 서양 의약품, 고아 구제 사업을 들었다. 12) 서구인 생활양식의 도입. 이는 의식주가 아닌 서구적 교회 의식, 허례허식 배척들을 들었다. 13) 서양 예술문화의 도입. 이는 성당 - 성상 - 성화 - 성가를 들었다. 14) 동학운동의 유발. 동학을 천주교를 본 따 세워진 종교라고 보았다. 15) 애국 운동의 전개. 이에는 《한불사전》과 안중근의 이토 저격을 들었다.

 

이 15개 조항의 사례들은, 대체로 유홍렬 자신이 연구한 내용들을 핵심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사례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상당히 수긍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는, 총체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부분적인 사실들을 끌어당겨서, 너무 커다란 평가를 이끌어 낸 경우가 아닌가 싶다. 사례 중심의 개척적 연구들이라서 어쩔 수 없었던 한계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유홍렬은 “근대화 운동이란, 과학 문명과 민주 제도의 발달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믿던 서양의 세계에서 먼저 발생한 운동으로서 국민생활의 합리화, 민주화, 과학화를 뜻한다”28)고 근대화의 정의를 내리고 나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천주의 아들로서 평등한 것이니…말하자면 천주교 교리는 현대적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을 이룬 것으로 이미 근 천 년간을 두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려던 전제주의, 봉건주의, 독재주의와 싸우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오게 되었던 것이다.29)

 

이러한 근대화 정의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라는 슬로건에서 출발해서 탈종교적 경향이라고 할 수도 있는 ‘휴머니즘’적 사상에 입각한 근대적 민주 제도와 ‘사물의 구조 - 성질 - 법칙을 탐구하는 인간의 이론적 인식 활동 및 그 산물’인 과학에 바탕을 두는 합리적 사고의 수용을, 조선의 현실에서는 그대로 천주교 운동의 결과라고 해석한 셈이다. 결국, 신 중심에서 인간다움 중심으로 바뀐 서구의 휴머니즘 -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근대사상 조류에 대한 보다 정밀한 이해를 훌쩍 넘어서서, 이를 중세적 천주교 사상 개념 = 서구 근대적 사상 개념으로 시대적 변별 없이 바로 연결시켜 버린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예컨대 동양의 불교 등 고대적이거나 중세적인 보편 종교들도 모두가 ‘보살’님이라고 부르면서 ‘절대자 앞의 평등성’을 말하고 있는 교리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서구적 근대화론에 필요하면 바로 서구적 근대사상으로 연결시켜 버린 오류 때문에 나온 결론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60~1970년대의 조국 근대화 운동 추진이라는 정치적 표방을 지원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입장에 서서, 천주교회의 조상의 신주 금지와 허례허식의 미신적 행위 금지 문제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천주교와 유교 간의 전례 문제’라는 글에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유홍렬은 선교사들의 전례 논쟁 과정과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조상 제사 금지 교서까지의 전개를 간략하게 약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4대 조상 제사는 양반 계급만이 행할 수 있고…양반 계급의 부녀와 피지배 계급의 남녀들은 원시적 신앙생활을 그대로 지켜서… 샤머니즘을 신앙의 주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30)

 

이 서술은 부분적으로는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유홍렬은 전례 문제를 이 흐름 속에서 이해하면서 이승훈은 이미 1787년에 유교적 제례를 거부했고, 이어서 윤지충은 1791에 조상 제사를 거부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천주교 교우들은 “이때부터 선조의 제사를 봉행하지 않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로 낙인 찍혀서 탄압을 받았다고 하였다.31)

 

참고로 ‘무부무군’에 대해서 말한다면, ‘무부무군’이란 도덕적 - 유교적 풍속을 혼란 - 타락시키는 경우를 범칭하는 용어라기보다, 자기 부모와 자기 임금을 부모나 임금으로 보지 않아서 처벌되어야 한다는 강상(綱常) - 모반모역(謀叛謀逆)의 죄인이라는 법률적 - 범죄적 용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무부무군’을 ‘불충불효’(不忠不孝) 개념과 혼용하지도 혼동하지도 않았다. ‘불충불효’는 도덕적 교화, ‘무부무군’은 범죄적 처벌에 해당한다는 차별적 - 단계적 개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32) 이는 신유박해까지의 천주교로 인한 순교자들의 법정 진술과 관련하여, 신앙의 진정성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황사영 백서> 이전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은, ‘불충불효’야 그렇다고 해도, ‘무부무군’이라는 모역죄 적용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항변하였으므로, 마지막에는 대체로 ‘금지사무사술’(禁止邪巫邪術) 조의 결안을 받아들여 처벌되었다. 다만, 정약종 1인 정도가 그 와중에서 ‘모역’죄로 강제 결안되었던 것이다.33)

 

유홍렬의 천주교회사 연구는, 기본적으로는 문헌 고증적 학풍으로서 수준이 대단히 높은 연구 업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사 완성 전후로 대두한,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다는 입장에도 잘 들어맞는 자세, 곧 근대화론적 자체발전론의 입장 또한 취한 연구인 셈이다.

 

 

3. 연구의 교회 사학사적 의의와 전망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이제까지는 호교론에 입각한 복음 전파사 - 순교사 연구가 중심 흐름이었다. 이는 조선 시대 천주교회사가 지니는 특성, 그리고 교회사 연구가 지니는 특성들 때문에, 어느 측면에서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여기서는 유홍렬 사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이제까지 천주교회사에 대한 본격적이거나 중요한 연구들의 큰 흐름인 식민지 경영론적 연구, 복음선포적 연구, 민중교회적 연구, 문화론적 연구들을, 그 특징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고찰해 보고, 근대화론적 연구에 해당하는 유홍렬 천주교회사 연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특성을 파악해보려 한다.

 

1) 식민지 경영론적 탈교(脫敎)론

 

해방 이전 일본인들의 연구는, 주로 조선왕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를 연구함으로써, 식민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한 관 학자 출신들에 의해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이시이[石井壽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륜을 부정하고, 가부장권적 가족주의를 부정하고, 봉건적 계급주의를 부정하는 천주교는… 현실 이조를 부정한다. …이리하여 조국을 저버린 민중에 의하여 완고하게 신봉되어 온 천주교 신앙은 정치를 사권화(私權化)한 박해자와 집요하게 싸워왔으며… 이러한 상극의 통탄할 결과 - 이것이 이조의 망국이었음은 당연하다.34)

 

조선 멸망의 원인은 외부에서 오는 근대적 생활 체험이기도 한 천주교회조차 받아들이지 못해서 결국 망국에 이른 한국인 수준 탓이라는 것이다.35) 그러니까 조선 국가는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고, 천주교도 실패했으니, 이제는 일본국, 일본 종교[神道]로 가자는 논리가 된다.

 

조선 멸망의 원인을,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조선의 민족성, 곧 당파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민지 경영론적 해석에 입각한 서술도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황사영 백서>에 크게 연유하고 있다.36) 이를 근거로, 일본인 오다[小田省吾]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당파 관계를 알지 못하고서는 조선 근대사의 진상을 알고 또 현재의 조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1801년에 돌발한 천주교 박해는 실로 시 · 벽 양파의 투쟁에 터전하고 있는 것이다.37)

 

<황사영 백서> 내용을 그대로 해석하면, 사류들의 붕당인 노론과 남인의 항쟁뿐 아니라, 남인들 내의 항쟁, 정순왕후 김씨의 정조에 대한 원한 세 가지가 겹쳐진 결과가 1801년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이다. 사료를 세밀하게 분석하면, 결코 시파와 벽파의 상쟁이라는 단순한 당파성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홍렬 역시 1801년 신유교난을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의 당쟁 때문이라는 입장을 이어받으면서,38) “이리하여 전후 4차에 걸치는 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후의 박해 원인도 주로 벽파가 천주교인을 배척한 데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39)

 

천주교 교우들이 아직도 극소수인 일본인들의 식민지 경영론적 탈교론은, 1945년 해방을 맞음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2) 복음 선포적 호교론

 

1874년에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 천주교회사를 출간한 프랑스인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은, ‘복음 선포’를 서술의 기준으로 삼는 호교론적 성격의 연구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조선 정부로 하여금 인도적 법칙을 존중케 하려고 시도한 몇 차례의 원정이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가 오늘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고집스럽게 고립을 지키고 있다.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과 순교의 무대가 되었던 나라를 알리고, 박해를 당한 천주교인들의 괴로움과 사형 집행인들의 잔인성을 상기시키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지옥 사이의 이 처절한 싸움의 변천과 고민을 묘사하는 것, 순교자들의 행적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빛낸 영웅적 덕행의 몇몇 모범을 망각에서 구해내는 것, 이런 것들이 이 책의 목적이다.40)

 

가톨릭 교리 자체가 인도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평등사상에 입각해 있어서, 개화 -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폐쇄적 - 봉건적 정부가 박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호교론적인 관점이다.41)

 

호교론적 서술은 신학(가톨릭 신앙의 기원과 발전)과 역사학(인간이 지도하는 가시적 제도)을 두 개의 기둥으로 하는 교회사의 한 기둥을 받치고 있고,42)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기본적 성격이 ‘순교사’라는 점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달레 교회사 이래 자리 잡은 가장 큰 문제점은, 천주교 = 긍정적, 조선 사회 = 부정적이라는 도식이 부지불식간에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1945년 이후에도 달레의 호교론적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는 연구들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주재용(朱在用)의 다음과 같은 서술들이다.

 

나라를 세운 지 반만년이 되도록 이 땅 이 고장은 황무지 그대로 버려져서 죽음의 그늘 밑에서…가련한 자멸만을 되풀이하였다. …땅은 비록 해 뜨는 동녘에 있건마는 암흑의 짙음은 걷히지 않았다.43)

 

영성적 측면의 접근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이 경우, 우리나라는 천주교회가 들어오기 이전과 이후로 역사가 시대 구분된다는 뜻이다. 또한 천주교인 = 발전성, 외교인 = 정체성이므로, 결국 조선 사회 자체의 (영성적) 발전성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44)

 

호교론적 성격을 가톨릭 사상보다는 조선 유교, 곧 주자 성리학이 지닌 배타적 성격에 두는 입장도 있다. 특히 타 종교는 모두 이단 = 무부무군으로 몰아버린다는 기본 입장이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다. 최석우(崔奭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주교의 보편성은 국교적 대우를 받는 유교에 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유교는 배타성을 지니는 한편 일층 공격적이 되었다. 모든 법규가 왕적 권위에 의해 신조화하였고 그 윤리적 사회적 체계가 국교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를 반대하거나 적대시하는 모든 사람을 박해하게 된 것이다.45)

 

이 입장은 비교적 단단한 사료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반론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 사회, 사상적인 실제 사실과 그 성격 자체가 잘못 알려져 있거나,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부무군’이란 지적은, ‘불충불효’와 별 차이 없는 (조선 후기 순정 주자 성리학의) 윤리 규범적 용어라기보다, (조선 초기부터) 동아시아적 보편법으로 수용한 현행 형법인 《대명률》46)의 강상죄 - 모반죄 조항에 위배된다는 법조문적 용어였다는 것이다.47)

 

그리고 호교론적 입장의 영성적 접근 방식이, 복음선포적 입장이나, 배타적 이단과의 대결이라는 입장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교회의 역사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한 회개 - 일치 - 완성의 역사, ‘진실한 영과 근원적 진리와 올바른 예배’를 통한 화해와 일치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48)

 

3) 민중 종교적 호교론

 

호교론적 성격을 변형시켜, 가톨릭 교리 또는 교회 조직이 민중 종교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봉건 정부가 박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두는 연구의 흐름도 있다. 조광(趙珖)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당시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은 이 변동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새로운 사상의 담지자들은 대부분이 비특권적 민인(民人)들이었다. 그들의 천주교 신앙생활은 기존의 성리학적 사회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행위는 일종의 민중 종교운동의 양상을 띠며 전개되어 나갔던 것이다.49)

 

하지만, 당시 대다수 천주교 교우들은 하늘의 뜻(天命), 군주권(王權), 삼강오륜(전통 사회윤리)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이 그렇게 뒤집어씌웠을 뿐이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유교적 개념의 올바른 학문[正學], 진실한 길, 하늘을 공경함[敬天]들과 충돌된다기보다는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초기 교회 당시 교우들은 판단했다(*조상 제사 금령은 예외).50)

 

교리의 생활화 부분을 깊게 분석해서 ‘교리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사회에 적용된 교리 체계나 사상 체계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51)

 

4) 문화론적(문화 적응주의적) 호교론

 

위의 연구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면서 나타난 문화론적 내지 문화 적응주의적 관점의 새로운 연구 경향이 있다.

 

천주교회는 어느 체제든 들어가서 복음화시켜야 하므로, 교회 운동 자체는 근본적으로 체제 내외 운동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서학은 비록 스콜라 학문과 르네상스 과학을 담은 전근대적 문화 체계였으나, 유교 불교의 전통 사회에 근대로의 변전을 촉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하나의 외래적 계기였다.52) 이기철학에 기반한 인간과 사회의식을 극복하고 봉건적 현실 모순을 타개함에 현재적 기능까지는 담당하지 못하였다 해도 잠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53) 한 국가나 한 시대의 정신문화의 형성 발전은 끊임없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충돌과 진통 끝에 비로소 값지고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가 진주처럼 형성되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54)

 

이는 이 땅의 천주교 교우들이, 한국 전통 사회, 전통 사상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교회를 건설하고 싶어 했던 주체적-자발적 노력 자체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다수의 연구자가, 자신들의 관점에 상관없이, 교우들의 주체적 선택과 결단 부분을 제대로 사료를 써서 밝혀내고자 할 때는 부지불식간에 취하게 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의 연구는 오늘날 현실적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못하다.

 

5) 근대화론적 호교론

 

이상의 연구들과 앞장에 서술한 유홍렬 교회사 연구의 특성을 비교해보면, “물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영혼의 존재와 천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가톨리시즘’ 사관에 입각하고55), 베른하임(Bernheim)의 “문화적 발전 관계를 밝히는 과학”이 역사학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는56) 유홍렬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달레 교회사 이래의 호교론적 연구의 흐름을 잘 잇고 있다. 조광은 이를 ‘종교사적 차원의 연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57)

 

유홍렬 자신이 일러두기에서 밝힌 저술의 특색은 단 하나인데, “나는 이 책을 엮음에 있어서 불란서 사람들의 기록과 한국의 기록을 다 같이 견주어 가면서 자료로 쓰게 되었으니, 이러한 점에 이 책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는 것이다. 곧 본인 자신은 이전보다 폭넓고 이전보다 철저한 문헌 고증적 학풍의 적용을 그 특색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헌 고증이란 역사학의 기초에 해당하므로, 이를 교회사적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높은 학문적 성취를 지향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58)

 

유홍렬 천주교회사의 특성은, 그가 원래 성리학 사상 연구자로서 출발했으면서도, 성리학을 우리 민족의 올바른 신앙생활 - 사회생활을 저해한 근원으로 파악하고, 이를 자각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였다는 관점, 곧 개화론적 내지 근대화론적 입장에서 교회사를 서술한 데 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자학은 원래… 종교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불교를 몹시 탄압하게 되니, 우리 민족은 차차 올바른 종교생활을 갖지 못하고 다만 산천, 일월, 무당 같은 것을 믿는 원시 종교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북경으로부터 새로운 서양학술에 관한 책들이 1603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니, …마침내 민족의 자각 운동과 새 종교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이 땅에서 참되고 올바른 종교로 받아들여지는 한편, 차별이 심하던 계급제도를 무너뜨리고, 서양의 선진 문화를 먼저 받아들여… 외국과 조약 맺는 일을 재촉하며 우리나라를 외국에 알리는 등….59)

 

그러므로 호교론의 흐름 속에서 1960~1970년대 한국 역사학계의 ‘자체적 발전론에 입각한 근대화론’을 거칠게 결합시킨 부분이, 유홍렬 천주교회사 연구의 독자적인 위상을 말해주는 업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자연과학 정신과 평등주의 정신이 곧 천주교 정신이고, 그래서 조선 사회의 비과학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이른바 근대화론적 자체발전론의 입장은, 1960~1970년대 서구적인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다는 입장을60) 천주교회사 연구를 통하여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61)

 

이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유홍렬의 지나치게 간편하다고 해야 할 이런 관점은 사목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폭넓은 이해를 받고 상당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62)

 

비록 오늘날 우리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전문 학자가 문헌 고증을 통해서 사료만이 말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은 문헌 고증이라는 역사 연구자의 기본자세를 너무 큰 비중으로 파악한 경우가 아닐까 한다. 동시에 현대 역사학은 서술의 인과적 성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유기체적 내지 구조적 관점이라는 총체적 인식 측면을 중요하게 본다. 이 부분을 간과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당대의 정치적 슬로건을 거칠게 법칙성의 측면으로 차용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다.63)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앞에는, 문헌 고증적 실증성과 인과적 법칙성의 유기체적 - 총체적 결합이라는 엄정한 역사과학적 자세 이외에, 또 다른 과제가 가로 놓여 있다.

 

다음 시대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보다 보편 교회사답게, 큰 틀에서,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말하는 (과학적 - 시공간적) 객관성 관점의 정착적 사고에 대신하는 (문화적-인간적) 상대성 관점의 유목적 사고라든지, 탈민족주의적 역사학이 말하는 민족국가적 사고에 대신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적 사고라든지에64) 대해서 좀 더 많은 성찰이 담긴 연구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연구논문

김수태,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연구》 21, 2003.

박광용, <황사영 백서의 종교적 본질과 사회적 비판>,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2013.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사>, 《최석우신부화갑기념 한국교회사연구논총》, 1982.

- - -,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신편) 한국사》 35, 국사편찬위원회, 1998.

최석우, <천주교의 유교사회에의 도전>, 《한국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75.

 

2. 단행본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1979.

달레(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1874(안응열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1987).

이원순, 《조선서학사연구》, 1987.

조 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988.

주재용, 《한국가톨릭사의 옹위》, 1970.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1, 1976.

- - - - - - - - -,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2, 1977.

혜암유홍렬박사 화갑기념사업위원회,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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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부분은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1971)의 연보와, 그의 자서전이자, 당시까지 발표된 대부분의 수필과 잡문들을 잘 종합해 엮은 《흐르는 강물 따라》(휘문출판사, 1971)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였다.

 

2) 유홍렬, 《흐르는 강물 따라》, 1971, 24 · 41쪽.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좌의정 유관(柳灌)의 집안으로서, “물을 즐기는 지자(智者)의 성품과 산을 즐기는 인자(仁者)의 덕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3) 《흐르는 강물 따라》, 24 · 60쪽. 일제 말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굳건한 민족의식과 유홍렬 자신이 사립학교에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柳씨 경우는 南씨, 林씨, 桂씨처럼 일본에도 있는 성씨여서, 여타 조선 성씨들과는 처지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4) 사학과 동급생 10여 명 중에서, 유홍렬 1명만이 취업 등 장래 전망이 극히 어두운 한국사 전공을 선택했다 한다. 《흐르는 강물 따라》, 27쪽.

 

5) 《흐르는 강물 따라》, 27 · 48쪽. <조선에 있어서의 서원의 성립>이 학위 논문이다.

6) 《흐르는 강물 따라》, 28 · 58 · 165쪽.

 

7) 14세가 되던 1925년 10월에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체험이, 새로운 인생관, 특히 종교적 삶을 추구하게 된 연원이라고 말하고 있다(《흐르는 강물 따라》, 25쪽). 결정적으로는 대학 친구 서정덕의 감화이고,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누이동생과 결혼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흐르는 강물따라》, 45 · 53쪽.

 

8) 김수태는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연구》 21, 2003에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동기’ 장을 두어 세밀하게 고찰하였다. 이 연대는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1974에 근거하고 있다.

 

9) 《흐르는 강물 따라》, 28~29 · 53 · 60쪽.

 

10)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 설립 운동은 일제 때 시작되었으나 당국의 불허로 실패하였고,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00주년 경축 행사를 기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윤형중 신부였다. 현재는 서울대교구 산하에 있다.

 

11)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증보판 출간에 즈음하여>, 《흐르는 강물 따라》, 63쪽.

 

12)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사>, 《최석우신부화갑기념 한국교회사연구논총》, 1982(《한국천주교회사연구》 재수록, 1986, 389쪽). 이 논문은 유홍렬의 논저들을 소개하고, 그를 해방 후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현대적 선도자라고 평가하였다.

 

13) 달레 교회사 외에도, 1944년 출간된 浦川和三郞의 《조선순교사》는 1846년까지의 달레 교회사 번역본이어서 1948년 집필 초기부터 바탕으로 사용했고, 리델 주교 부분은 桶田斧三郞의 《한국천주교소사》를, 뮈텔 주교 부분은 그의 일기 및 <한국에 있어서의 가톨릭, 그 기원과 발전>을 자료로 사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1974.

 

14) 1962년에 간행된 《한국천주교회사》와 비교하면, 남종삼 신원과 《치명일기》 출판, 일본 침략과 안중근 애국 운동, 24위 시복과 김수환 추기경 선임에 해당하는 세 개의 장을 추가하였고, 이승훈 관련 내용 보완을 위시한 중요한 수정 및 추가 부분들이 열두 군데 정도였다. 이는 유홍렬 자신이 스스로 밝혀 놓았다. <《한국천주교회사》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15) 유홍렬은 <일제치하 천주교의 수난>(《한국학》 27, 1982)을 써서, 1937년 이후 ‘내선일체’, ‘일본신민화’라는 슬로건으로 ‘전쟁에 총동원한다’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조선 민중에 대한 ‘사상전’(思想戰)을 수행했던 과정에서 일어난 일제의 천주교회 탄압, 특히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탄압 부분을 보완하려 했다.

 

16) 김수태는 위의 논문, 91~92쪽에서 ‘小史의 간행’이라는 장을 설정하여 이를 분석하였다. <한국기독교사(1) - 천주교사>, 《한국문화사대계》 VI, 1970의 세부 목차는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상 · 하, 1975보다 간략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

 

17)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962, 478쪽.

18) <韓國 103位聖人諡福經緯와 그 聖畵의 由來>, 《비교문화연구》 6, 1987, 73~89쪽.

19)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하, 1975, 176쪽.

 

20) 《승정원일기》 고종 5년 戊辰(1868년) 윤4월 23일.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구주원(具胄元)의 장계를 보니, 부산 첨사 윤석오(尹錫五)가 조목조목 정장한 것을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한 수상한 사람이 신초량리(新草梁里)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잡아다가 조사해 보니 성명이 박근기(朴根基)라는 자였습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정서한 편지 한 장과 조그만 종이 한 조각이 나왔는데, 몹시 말이 불궤한 내용으로 종적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다시 엄히 조사하자, 서양인들이 왜국과 통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서(邪書)를 함께 배운 서군서(徐君瑞) 서달서(徐達瑞) 서성겸(徐聖兼) 서성달(徐聖達) 노재익(魯在益) 등 다섯 놈과 함께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노재익은 하동(河東) 땅으로 갔고 서군서 등은 김해(金海)로 갔는데 윤달 그믐날 대구부(大邱府)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며, 자신은 관시(館市)하는 날을 기다려 연줄을 타고 들어가서 이 편지를 전해주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격식을 갖추어 엄히 가두어 놓고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머지 무리[餘黨]인 서군서 등 다섯 놈과 사학을 배운(邪學人) 최태진(崔太眞) 고한진(高漢鎭)은 기한을 정해 놓고 체포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죄인들은 범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판례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니, 평범한 죄인들과 몰밀어 똑같이 취급할 수 없습니다. 박근기는 우선 동래부(東萊府)에 단단히 가두어 놓고서 다시 통지를 기다리도록 하고, 나머지 무리 일곱 놈도 영남과 호남 양도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놓고 체포한 뒤에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엄히 신칙하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21) 오늘날 《승정원일기》의 경우는 디지털화되어 공개되었으므로 같은 사료가 ‘찾기’ 한 번으로 다 나오지만, 당시는 자를 대고 보면서 찾아내는 등 원시적 방법을 썼으므로, 실수로 빠뜨릴 여지도 많았다.

 

22) 《승정원일기》 고종 5년 6월 4일.

傳(*敎)曰, ?(*才)見完伯狀本 朴根基之自來失性 支屬之招 的有可據 且其(*已)爲身故者之胡亂納供者 其言之狂妄無倫 卽此而尤不可取信矣 此時許多人之宛轉?? 甚涉矜惻 一竝特爲放送 罪人朴根基 嚴囚東萊府獄 仍以定配施行事 令廟堂措辭行會(*는 《일성록》 65책, 규장각 도서 12816, 1972, 서울대학교 출판부 영인본).

 

23) 유홍렬은 1935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 조선민속학 연구실 조수로서 아키바[秋葉隆], 아카마츠[赤松智城] 교수의 조선 무속 연구를 함께한 우리나라 무격(샤머니즘)에 대한 본격적인 초기 연구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 종교사의 특징을 ‘샤머니즘과 미신의 심성’을 기본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흐르는 강물 따라》, 156~166쪽 등). 이 때문에 신화적 단기를 세계 공통의 서기로 바꾸자는 운동을 하여 결국 성사시키기도 했다(《흐르는 강물 따라》, 49쪽). 우리 전통 중에서 샤머니즘적 경향을 극복한다는 입장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서, 샤먼일 가능성이 큰 사람이 일으킨 사건을 천주교 교우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한 실수가 나온 셈이다.

 

24) 과거에는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으나 오늘날은 사용하지 않고 ‘자체(적) 발전론’ 또는 ‘주체적 발전론’의 개념을 쓴다.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가 일인 학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어 자체가 내부적 발전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이므로, 외부적 요인까지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발전해가는 인간 - 공동체의 주체적 선택 문제와는 잘 맞지 않아서, 역사상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는 한계점들이 지적되기 때문이다.

 

25) 유홍렬의 천주교회사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선행 연구로는, 김수태,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연구>, 《교회사연구》 21, 2003, 81~108쪽이 있다. 김수태는 달레 교회사 이래의 호교론적 서술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론적 입장을 추가한 연구 업적이라고 판단하였는데, 본고의 결론과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26) 서학사상 편, 《한국사회사상사논고》, 1980, 304~324쪽.

27) 《한국사회사상사논고》, 311~312쪽.

28) 《한국사회사상사논고》, 312쪽.

29) 《한국사회사상사논고》, 239쪽. 역사적으로는 전근대적 군주적 전제주의, 양반적 봉건주의, 근대적 반민주적 독재주의를 말할 것이다.

30) 《한국사회사상사논고》, 368쪽.

31) 《한국사회사상사논고》, 368쪽.

 

32) 《승정원일기》, 710책, 영조 6년(1730년) 9월 14일. “대사성 영성군 박문수가 상소하기를, …오호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의 도리는 집에서는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조정에서는 충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것이 ‘불충불효’입니다. 그 죄가 마땅히 죽을 만하거나 그보다 심하다면, 이것이 ‘무부무군’입니다. 이 경우 어찌 단지 죽일뿐이겠습니까. 족을 멸해도 됩니다. 大司成靈城君朴文秀疏曰…嗚呼 萬古爲人之道 在家事父以孝 立朝事君以忠 若毫髮未盡分 則是不忠不孝也 其罪當死 若又有甚於此 則是無父無君也 此奚特死 族之亦可也….” 바로 이런 입장이 1791년 신해교난 이후, 서학에 적용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33) 정약종이 모역죄로 결안되었기 때문에, 다산 정약용 집안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폐족’(廢族)이 되었다. 반면에 이승훈의 경우는 1856년(철종 7년) 일시 신원되기도 했다.

 

34) 石井壽夫, <이학지상주의 이조에의 천주교의 도전>, 《역사학연구》 12-6, 1942(《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2 번역, 1977, 91 · 95쪽).

 

35) 石井壽夫의 규정은, ‘민중적’이란 의미가 곧바로 반국가적이라는 의미로, 반주자학적이라는 의미가 곧바로 조선 사회 부정이라는 의미로 치환되어 버리는 단순 논리로 나타나게 된다.

 

36) <황사영 백서>.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로서 본래 벽파 출신으로,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를 끼고 거리낌 없이 학정을 폈습니다.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어, 조정 안이 절반은 비었습니다. 전부터 성교를 해쳐 오던 못된 무리들이 벽파와 계속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 일어나서, 크게 일을 저지를 형세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잔악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나라 학문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천지간의 큰 괴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37) 小田省吾, <이조의 붕당을 약술하여 천주교 박해에 이름>, 《청구학총》 1, 1930(《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2 번역, 1977, 171 · 177~178쪽).

 

38) 유홍렬은 이외에도, 대학 선배인 야마구치[山口正之]의 천주교 관계 논문도 이용했다고 밝혔다. <《한국천주교회사》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1974.

 

39) 《흐르는 강물 따라》, 184쪽. 신유박해 경우는 시벽 당쟁론으로도 설명이 될 수 있지만, 그 이전 박해들과 그 이후 박해들, 특히 벽파가 정치적으로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순조 5년 이후 박해는, 시벽 당쟁이라는 식의 단순 정치 도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40) 달레,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1874(안응열 · 최석우 역주,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1987, 11~12쪽).

 

41) 위와 같은 호교론적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 중의 하나는, 크게 볼 때,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 서양의 가톨릭교회는 오히려 중세 체제를 지켜주고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귀족 계급들을 옹호했던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는 지적에 있다.

 

42)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사목》 34, 1974(《한국교회사의 탐구》 재수록, 1982, 237쪽).

43) 주재용, <머리말>, 《한국가톨릭사의 옹위》, 1970, 4쪽.

 

44) 천주교 신자들의 아마추어적 연구 중에는, 호교론적 미화가 지나치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맹목적인 순교자 숭배, 지나친 천주교회 선진성 부각(근대적, 민중적)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45) 최석우, <천주교의 유교사회에의 도전>, 《한국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55 · 158쪽.

 

46) 《대명률》은 명나라 초에 당대까지의 중국 형률들을 집대성한 포괄적이고 정리된 율서이다. 유교주의 원칙 아래 이루어져서, 법보다 예(禮)를 중시하고 행형(行刑)에 관용주의를 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47) 각주 32) 참조.

 

48)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당시의 세계인인 로마인들에게 성령께서 머무심을 보고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라고 말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한 회개 - 일치 - 완성의 역사라는 접근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 23)고 이방인(이단)인 사마리아 여인과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은, 교회의 역사는 ‘진실한 영과 근원적 진리와 올바른 예배’를 통한 화해와 일치라는 입장의 접근일 것이다.

 

49) 조광, <머리말>,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988.

 

50) 교회 운동을 사회 변혁적인 민중 운동 - 민중종교 추동운동으로 열렬하게 치환시키려는 아마추어적 연구 같은 경우는, 아마도 호교론과 탈교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례들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51) ‘민중’ 종교의 의미 역시 용어의 모호성으로 인해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조선(동양) 사회에서 당시의 ‘민인’(민중)이란 기본적으로 농민 남녀를 의미하므로, 천주교회 조직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는 농민 아닌 도시 빈민, 유이민, 상공인, 고아(유기아), 일부 부녀자 계층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역으로 박해 이후는 민중 공동체에 제대로 뿌리박은 종교가 되지 못했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혁명적, 평등사상, 인도주의적 성격을 지닌 민중 종교 전통은 가톨릭교회가 들어오기 이전, 이후 시기 모두 면면한 전통으로 이어져 온다는 사실도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

 

52) 이원순, <머리말>, 《조선서학사연구》, 1987, 1쪽.

53) 이원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 《(신편) 한국사》 35, 1998, 105쪽.

54) 김옥희, <머리말>,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1979, 1쪽.

 

55) 유홍렬, <사관의 변천>, 《문리대학보》 7, 1956(《흐르는 강물 따라》 재수록, 219쪽)에서 유홍렬 자신은 현대의 유물사관(유물공산주의사관), 유심사관, 가톨리시즘 셋 중에서 가톨리시즘에 입각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사상의 허다한 실례는 독재주의, 전제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관용주의, 박애주의, 인도주의의 영광된 승리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56) 유홍렬, <사관의 변천>, 《문리대학보》 7, 1956(《흐르는 강물 따라》 재수록, 201쪽).

57)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988, 15쪽.

 

58) 문헌 고증적 입장은 유홍렬이 연구를 시작한 시기가 문헌 고증적 성향이 강한 일제 시기라는 점,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조선학 운동기에 ‘정약용’ 논쟁에 학술적으로 참여한 송세흥(피숑 신부)과 이벽 · 이가환 · 정하상 등 천주교 신자들의 사료 성격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홍이섭 등과 함께, 동시대에 연구를 시작한 몇 안 되는 제대로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59) <서론 - 한국종교사의 특징>,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상, 10~12쪽.

 

60) 유홍렬은 이승만 시대를 ‘독재 정권’이라고 부르는 반면, 4 · 19를 ‘민중운동’, ‘민주해방운동’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 따라》, 144쪽. 한편으로는 공군 중령으로 제대한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5 · 16 역시 ‘혁명’ 또는 ‘군사 혁명’으로 부르고 있고, 《군사혁명사》 집필에 참여하였음도 밝히고 있다. 《흐르는 강물 따라》, 33~34 · 53쪽.

한편, ‘민중’ 개념 자체는 ‘정치가’에 대비되는 일반(피지배) ‘인민’을 지칭해서 전근대 - 근대를 막론하고 쓰고 있다(《흐르는 강물 따라》, 296 · 354쪽). 하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민중’은 사용자에 따라 ‘일반 대중’이라기보다는 ‘집단적으로 조직화되고 의식화된 변혁 주체’라는 부르주아적 민중을 기본으로 하여, 혁명전위 + 변혁 주체를 포괄하는 공산 혁명적 민중, 제3혁명적 민중으로서의 농민, 민족적 민중, 이를 넘어서서 국가 체제를 상정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 민중 개념에까지 이르는 복합적인 용어로 정의되었던 역사적 내력이 있다. 4 · 19 민중 혁명을 직접 겪은 역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근대적 ‘민중’ 개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61) 천주교 = 근대화 입장은, 18세기 한국 천주교회 출발 당시 서양은 시민혁명을 거치기 이전 단계여서 가톨릭교회 조직의 사회 사상도 봉건적 한계성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 당시 자연과학은 근대적 실험과학의 단계가 아니라 르네상스기 수준의 (鍊金術적 영향이 강한) 경험과학 단계였다는 사실, 가톨릭의 신 앞의 평등 교리도 근대 시민사회의 휴머니즘적 평등사상과 차이가 있다는 사실 등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당시 조선 민중들의 종교인 불교나, 도교적 민간신앙에도 이미 종교적 평등 사회 사상이나 (鍊金術적 영향도 받은) 경험 과학적 요소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천주교회의 진리가 한국 사회에 준 영향은, 문화나 사상적 특성이 그 특성대로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성격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에 전통적인 제반 모습들과의 대화(소통과 융합)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되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이 있음을 좀 더 깊이 천착해야 할 것이다.

 

62) 《한국천주교회사》 증보판 추천의 말이기는 하지만, 당시 김수환 추기경 역시, “《한국천주교회사》는 한마디로 말하여 어둠에 잠겨 있던 우리나라를 근대화하려는 일에 크게 이바지한 발자취의 기록입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는 대중종교의 성격을 띠고, 거듭한 박해를 무릅쓰고 끊임없이 발전하여…”라고 말하였다.

 

63) <사관의 변천>에서, 유홍렬은 역사학을 ‘문화과학’이라 파악하였고, 자연과학적 법칙성을 추구하는 실증주의 사관은 자연과학 사관이라 하여, 역사학을 법칙 발견의 과학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문화의 전통’이란 “민족이나 국가에 있어서 진선미의 가치가 성(聖)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발현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흐르는 강물 따라》, 299쪽.

 

64) 필자는 <황사영 백서의 종교적 본질과 사회적 비판>,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2013에서 황사영과 <황사영 백서>는 일국사인 민족 국가적 관점보다 문화권 역사인 동아시아사적 관점에서 분석할 때, 보다 정확하게 그 실제에 다가가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해 본 바 있다.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인문학부 국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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