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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왜관 수도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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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5

왜관 수도원의 역사

 

 

왜관 수도원의 역사는 엄밀히 말하면 1952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기원은 그 훨씬 이전인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져 남한으로 피신한 한국인 수도자들과 또 공산당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재파견되어 나온 독일인 수도자들이 왜관에 모여 다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북한의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던 수도자들이었고, 이 두 수도원은 바로 서울 백동 수도원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왜관 수도원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909년부터 시작되는 전체 역사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서울시기(1909-1927):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백동 낙산(駱山) 아래 10헥타르(약 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 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Prioratus conventualis)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敎)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철공.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기능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설정됨으로써 이 지역의 선교를 위촉받아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2. 덕원시기(1927-1949):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서는 아프리카 선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선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신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신부가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도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원산교구 통계에 의하면, 관할 내에 독인인 신부 14명, 수사 12명(3명은 한국인) 뿐이었고, 전 교구 신자는 7,500명이며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본당은 5개인데 원산(元山)과 내평(內坪) 본당이 북한지역에 있었고, 간도지방에 삼원봉(三元峰), 용정(龍井), 팔도구(八道溝) 본당이 있었다. 192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 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 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 사목활동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海星學校),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년 덕원 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11,004명의 신자와 34명의 신부(베네딕도회원 29명, 한국인 교구신부 5명), 수녀 33명(투칭 소속 유럽인 15명, 한국인 수녀 18명)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이밖에 덕원 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울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日帝)의 탄압 속에서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에 처형되었고, 신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abbas, 수도원장) 주교를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24일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42명의 독일인 신부. 수사들이 2년 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3. 연길시기(1928-1946):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1922년 5월 약 5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던 만주 간도지방이 원산교구의 관할하에 들어감에 따라 3개 본당의 8,000명의 신자들과 약 1,200명의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목이 요청되었다. 이에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파견되어 용정을 비롯한 3곳의 기존 본당과 함께 연길 등지에 새로운 본당을 건립하였다. 1928년 7월 19일 원산교구로부터 분할되어 연길 지목구가 설립되었고, 1922년 12월 5일 설립되어 선교본부의 역할을 해오던 연길수도원은 1934년 8월 1일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9월 5일 백 테오도르 브레어(Theodore Breher, 白)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축복되었고, 1937년 4월 13일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됨에 따라 1937년 9월 5일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 수도원은 수도생활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사목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원산교구와 분할이 시작될 때 연길 지역에는 14명의 신부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 후 수도생활의 정착을 위해 6명의 독일인 수사들이 새로 파견되어 목공.철공 분야의 일을 하였고, 인쇄소를 설립하여 소년잡지를 비롯 교리문답서, 성가집 등 교회서적을 인쇄. 보급하였다. 한편 1931년 11월에 스위스 캄(Cham)의 올리베따노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어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병원에서의 봉사 등으로 선교활동을 도왔다. 만주지방의 선교는 이 지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하였기 때문에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항상 질병과 마적떼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곳에서도 본당사목과 함께 초등 교육기관의 설립은 중요한 선교활동의 하나였다. 1944년까지 각 본당과 공소에 설립된 해성(海星)학교의 학생 수는 총 3,000명에 달하였다. 1946년 4월 11일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공산당 치하에 들어간 연길교구는 즉시 선교활동이 제한되었고, 1946년 5월 선교사들은 체포.투옥되었고 14개의 본당 가운데 몇 개의 본당만 한국인 교구신부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1949년까지 두만강 근처 남평수용소에서 수용되었던 독일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먼저 석방되었던 백 테오도로 브레어 아빠스 주교는 1949년 12월 12일 본국 수도원으로 귀환한 후 1950년 11월 2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속한 2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사는 후에 만주에서 도망하여 간신히 남한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남한으로 피난하여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계속한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 1954년 이 디모테오 비테를리(Timotheus Bitterli, 李) 신부가 연길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1983년까지 이 직무를 맡고 있었다. 현재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는 옛 선교지역에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접촉을 가지고, 가능한 한 그들을 지원하고자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4.왜관시기(1952-현재):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Chrysostomus) 대아빠스(Archiabbas)는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前) 덕원수도원의 이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도회의 장상(Superior maior)으로 임명하였다.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본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1월 9일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徐正吉)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의 군(郡) 외에 또다시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純心)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선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4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그 후 1971년 부산과 1979년 서울에서도 각각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을 하였다. 본당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64년까지 12년 간에 또 10개의 본당이 증설되었다. 본당 증설과 더불어 교회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도회원들은 종래의 프랑스 선교사들처럼 단순한 벽돌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날 뿐더러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은 명실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었고, 오도 하스(Odo Haas) 신부가 초대 아빠스(수도원장)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고, 한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1년 4월 이동호(李東鎬) 신부가 제 2대 아빠스로 선출됨에 따라 베네딕도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85년 5월 또다시 이덕근(李德根) 신부가 제 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987년 3월 19일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에 단순한 노동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며 베네딕도회적 삶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995년 7월 12일 이덕근 아빠스가 수도원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김구인(金求仁) 신부가 1995년 8월 10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 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원장서리'(Prior Administrator)를 맡아 오다가, 2001년 8월 23일 이형우(李瀅禹) 시몬 베드로 신부가 제4대 아빠스로 선출됨으로써 왜관수도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덕원과 함흥교구에서 활약하던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연길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 캄의 올리베따노 수녀회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도회 여자 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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