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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비추어라: 교황 프란치스코 삶과 영성1 -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사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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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7 ㅣ No.251

[일어나 비추어라] 교황 프란치스코 삶과 영성 (1)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사제까지


17살에 하느님 음성 듣고 ‘목자의 길’로



어린 시절

1922년 10월 27일 ‘국가 파시스트당’을 이끌었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로 진군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총리직에 오른다. 이즈음 프란치스코 교황의 부모는 이탈리아 북서쪽 지역인 피에몬테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다. 그의 아버지 마리오는 파시스트 정권 출현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날 결심을 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철도 노동자였던 마리오는 레지나 시보리와 결혼해 1936년 12월 17일 첫 아들 호르헤를 낳았다. 이 무렵부터 호르헤 마리오의 가족은 산 호세 데 플로레스에서 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이탈리아 법에 따라 이탈리아인이 어느 곳에 있던 맏아들은 이탈리아 사람으로 규정하기에 3남 2녀 중 맏이인 호르헤는 이탈리아 시민이었다.

그렇게 성장하던 어느 날이었다. 1953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축일, 그의 삶에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고해성사를 본 후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됐고, 이는 사제 성소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는 이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17살이었던 9월 21일 고해성사를 보러 산 호세 데 플로레스 성당에 들렀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처음으로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2013년 7월 28일, 제26회 세계청년대회 자원봉사자들에게 한 연설 중).

호르헤는 17세 때 받은 이 성소를 계속 식별하며 마침내 22세가 되는 1958년, 빌라 데보토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에 입회해 수련을 받고 2년 후인 1960년 첫서원을 했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을 3년간 더 공부했다. 3년 동안의 실습기간을 거쳐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1969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가족과 함께한 젊은 시절의 프란치스코 교황.(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CNS]


사제 시절

수품 후 그는 인문학, 철학, 문학, 심리학, 신학 등을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1972년 아르헨티나 관구 수련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73년 4월 22일 종신서원을 한 그는 같은 해 7월 31일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는 이미 여러 방면으로 호르헤 신부의 인품과 역량을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된다. 독재자들과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의 착취를 당하는 남아메리카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과 이들과 함께하는 사제, 수도자들에게 널리 환영을 받았다.

호르헤 신부 역시 관구장으로서 이러한 영향에 직면하게 됐다. 많은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해방신학의 신봉자들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현장에 직접 연관돼 있었고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특히 1976년에서 1983년까지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호르헤 신부 역시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더러운 전쟁’ 동안 1만 3000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정치인, 교수, 교사, 학생, 좌파작가, 노동조합원 그리고 마르크시스트 게릴라들이 살해당했고, 게릴라 역시 6000명에 달하는 군인들과 정권 옹호자들을 살해했다.

1976년 예수회 신부 올란도 요리오와 프란치스코 할릭스가 납치됐고, 이에 대해 호르헤 신부는 관구장으로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심지어 정부에 협조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관구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그들이 석방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일부 신부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투쟁에 나서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사제들입니다. 게릴라나 혁명가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1979년 호르헤 신부는 관구장 임기를 마치고 강단으로 복귀했다. 산 미겔 대학의 신학ㆍ철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호르헤 신부는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멕시코 방문 중에 개최한 남미 주교회의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그분은 세리를 배제하지 않으셨고, 회심을 위한 메시지도 모든 이에게 열어두셨습니다. 그 미션의 관점은 매우 심오했습니다. 이것은 변화와 평화 만들기, 그리고 사면과 화해를 통한 완전한 구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음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 때문에 주님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후 그는 1986년 독일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강단에 다시 섰고 고해사제로서, 이냐시오 영신수련 전문가로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8일,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 제공]

 

 

[일어나 비추어라] 교황명 ‘프란치스코’ 성인


평화와 가난의 정신의 상징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곧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개표가 끝날 때까지 숱한 전쟁을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성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내 마음으로 들어온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직후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교황은 또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분이자 평화로운 분이었으며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랑하고 보호하셨다”면서 “평화와 가난한 이를 위하는 정신을 가르쳐주셨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교황의 발언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콘클라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브라질의 우메스 추기경이 새 교황에게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라고 부탁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을 가진 첫 교황은 이렇게 탄생했다.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성인의 복음적 영성과 철저한 청빈을 닮고자 한 것이다.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그림)는 너그러움,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심,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으로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명이다. 1926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를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까지 불렀다.

부유한 직물업자의 아들로 자유분방하고 야심 많은 청년기를 보낸 프란치스코는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23세에 회심했다. 2년 뒤 아시시 근처 산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자각했고, 1209년에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창설했다. 회원들은 복음 정신을 따라 세상에서 이방인과 함께 순례자로 살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편지와 훈시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선교를 위해 시리아(1212년)와 스페인(1213∼1214년), 근동지역(1219년)까지 여행했다. 틈날 때마다 외딴곳에서 혼자 기도하며 명상했다. 그의 기도 생활과 선교 활동은 풍성한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고, 특히 모든 자연과의 교감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성인의 놀라운 보편적 형제애를 보여줬다.

말년은 아시시 근방에서 보냈는데 눈이 먼 데다가 중병을 앓았다. 1226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그는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축일은 10월 4일이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8일, 남정률 기자]

 

 

[일어나 비추어라] 프란치스코 교황 트위터


복음 선포는 기쁘고 소박하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권고나 깨달음에 대한 짧은 글을 교황 트위터(Pope Francis@Pontifex)를 통해 거의 매일 전하고 있다. 교황의 신앙과 영성을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트위터를 연재한다.

△ 우리는 가정에서 어르신을 비롯한 모든 이의 존엄성을 깨닫고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5월 7일)
 
△ 어린이와 연로하신 분을 포기하는 것은 그 사회의 뿌리를 뽑는 행위로 미래를 암울하게 만듭니다.(5월 6일)

△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또 무엇을 믿는지를 기쁘고 소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5월 5일)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5월 3일)

△ 하느님 아버지보다 더 참을성 있는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만큼 기다리는 법을 잘 이해하고 잘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5월 2일)

△ 나는 정치적 책임이 있는 모든 이에게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 이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요청합니다. (5월 1일)

△ 우리 가운데 누가 감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시다.(4월 29일) [평화신문, 2014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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