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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우라카와 와사부로의 조선 순교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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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7 ㅣ No.867

우라카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의 조선 순교사 연구

 

 

국문 초록

 

1944년 우라카와 와사부로 주교가 저술한 《조선순교사》는 서술 범위가 1846년에 그치고 있고 교회사 서술과 자료 인용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과를 종합하고 주요 사료들을 소개한 중요한 저서이다.

 

근대 일본에서 외국의 종교인 천주교는 항상 외세의 앞잡이라는 의심과 불신을 받았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 일본 천주교회는 자신들이 충군애국에 충실한 일본의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임을 늘 증명해야 했고, 일본 국가주의에 순응하는 ‘일본적 천주교’를 지향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천주교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강화되자 일본 천주교회의 지도자이자 교회사가인 우라카와는 천주교를 옹호하기 위한 호교론(護敎論)의 입장에서 일본 천주교가 충실한 일본 국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 천주교와 식민지 조선 천주교의 ‘일치’를 모색했다. 우라카와는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도 국가에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했던 천주교 신자의 순교 신앙이 곧 충성스런 국민정신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순교사》를 통해 조선의 순교자들 역시 국가에 충성했으며 앞으로도 일본의 신자 못지않은 충실한 신민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 천주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천주교적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양쪽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순교신심에 기반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며 일본 국민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조선 선교사들이 저술한 교회사와 순교자 약전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접목했다. 그러나 조선 역사를 다루면서도 조선 측 자료를 충분히 수합하지 못하고 프랑스어 번역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양 우월주의에 기반한 호교론[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 사관이 결합되어 부정적이고 왜곡된 조선 인식을 내포하게 되었다.

 

 

1. 머리말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일본 센다이[仙臺] 교구장 우라카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주교1)는 일본과 조선 교회의 순교사에 대한 책을 두 달 간격으로 연이어 출간했다. 《겐와 5 · 6년도(1619~1620)의 예수회 연보》(元和五 · 六年度の耶蘇會年報, 東京 東洋堂, 1944. 3. 20)와 《조선순교사》(朝鮮殉敎史, 大坂 全國書房, 1944. 5. 30)가 그것이다.

 

나가사키 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일본 교회사에 대한 수많은 저작과 번역물을 출간했던 우라카와 주교가 조선 교회사에 대해 남긴 저서는 《조선순교사》가 유일하다. 본래 조선 교회사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라카와 주교는 스스로도 서문에 밝혔듯이 달레(Dallet)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 2 tomes, Paris, 1874)와 로네(Launay) 신부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Martyrs, Francais et Coreens, 1838-1846, Beatifies en 1925, Paris, 1925)의 내용을 상당 부분 번역 · 수록했다.2) 아울러 1940년대까지 발표된 식민지 조선과 일본 학자들의 조선 교회사 논저를 대거 참조했다. 우라카와 주교의 《조선순교사》는 서술 범위가 1846년 ‘병오교난’에 그치고 있고 교회사 서술과 자료 인용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과를 종합 · 정리하고 주요 사료들을 수합 · 소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교회사와 사학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저서이다.3)

 

그러나 우라카와 주교의 《조선순교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최석우의 연구사 정리 이래 《조선순교사》를 독자적인 역사 서술로 보지 않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로네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을 편역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조선순교사》의 집필 동기에 대해서, 이원순은 순교 정신을 현양하는 호교론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며, 순교사를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기대할만한 일본 국민이 될 수 있음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편술되었다고 평가했다.5) 지속적으로 교회사 논저를 정리하고 비평해온 조광 역시 순교 정신의 앙양과 함께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현실 정치적 의도가 주요 집필 동기라는 점에 주목했다. 즉 조선인의 순교 정신이 일본 군국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식민주의 사관의 일환으로 《조선순교사》가 저술되었다고 이해한 것이다.6) 다만 군국주의적 의도가 본문의 내용에까지 관철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우라카와가 서문에 내선일체적 의도를 표현한 것은 전쟁 말기라는 상황에서 자신의 책을 간행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점도 감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라카와가 순교사 위주의 서술이나 문화전파론(文化傳播論)적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식민주의 사학의 일반적 문제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적어도 그가 일본의 무사도적 문화의 우월성과 대동아 공영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조선의 순교사와 일본의 그것을 비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순교사》도 식민주의 사관의 범위 안에서 저술되었던 점을 인정했다.7)

 

대대로 내려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천주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우라카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교회사 서술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순교사》가 순교사 중심의 호교론적 시각에서 서술되고 식민주의 사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점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천주교회사 전문가였던 일본인 주교 우라카와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왜 ‘조선의 교회사’, 특히 ‘순교사’에 주목했는지에 대해서 본격적인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조선순교사》는 선교사들의 호교론적 순교사 연구와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한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교회)사 연구가 접목되는 특이한 저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 양상과 특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우선 당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가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라카와가 《조선순교사》를 집필했던 동기를 파악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조선순교사》의 서술과 자료 인용에 나타나는 문제점과 함께 호교론과 식민주의 사관적 요소를 살펴보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가 가지는 교회사적 의의와 그 한계점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2. 순교신심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결합 - ‘일본적 천주교회’로 통합 지향

 

《조선순교사》 ‘서언’(緖言)8)에서 우라카와는 조선인들이 유약하다고 하지만, 천주교 순교자만큼은 일본인 순교자들 못지않게 용감하게 신앙을 지켰으며 죽음마저 꺼리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또한 참혹한 형벌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순교자들은 끝까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순교를 행복으로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박해자인 국왕을 위해 기도를 부탁할 정도로 순수하고 고결했다고 평가했다.

 

본시 조선인은 그다지 용감한 민족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순교자의 한 사람인 황사영 같은 사람도 그의 백서(帛書) 가운데 ‘우리 조선인은 품성이 유약’(我東人品柔弱)이라고 말했다. 이 유약한 조선인도 한번 신앙을 고수하고 이념에 죽는다는 단계에서는 그야말로 침착하고 강건하며 용맹 장렬하여 칼을 밟고 물불을 마다하지 않고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는 열렬한 정신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국민에게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무사도의 나라인 일본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어떠한 참혹한 형벌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신도들은 끝까지 무저항주의로 나갔고 감히 하늘을 원망치 않았고 사람을 탓하지 않고…개중에는 순교를 분에 넘치는 행복으로 삼고 형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자들도 있었다. …처참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해자인 순조(純祖) 왕을 위하여 북경 교회에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9)

 

우라카와는 조선의 순교자들이 용감하게 순수한 신앙을 지키면서 참기 힘든 박해에도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임금에 충성을 다하고 국가에 보답하는 마음이 진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순교자를 배출한 조선 천주교의 신자들이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난에도 일본이 믿을 수 있고 기대를 걸 수 있는 국민(國民)임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조선의 순교사를 집필했음을 밝힌 것이다.

 

누가 그들의 심사가 고결하고 그들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생각이 성실함에 감탄의 소리를 토하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특히 순교담(殉敎談)에 무게를 두고 가급적 상세하게 그것을 기술하는 까닭은 조선 (천주교) 신도의 장렬강담(壯烈剛膽), 용왕매진(勇往邁進), 불굴불요(不屈不撓)의 신념에 감탄하고 경모하는 바 있어서 금후에 있어서도 어떠한 난관에 부딪히거나 간고(艱苦)를 맞게 되어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으며 기대를 걸기에 넉넉한 국민임을 널리 세상에 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10)

 

이러한 우라카와의 조선 순교사 이해에는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순교 신앙이 일본 국민의 위대한 정신과 동일시되고, 천주에게 충실한 신자가 곧 천황에게 충성스러운 국민이라는 등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한 등식 아래 순교자를 배출한 일본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충성스런 신민(臣民)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천주교의 순교 신앙이 곧바로 국민정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지, 충실한 천주교 신자가 곧 충성스런 천황의 신민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본래 현인신(現人神)으로 신성시되는 천황의 존재나 신도(神道)에 기반한 각종 의례 행사(대표적인 것이 신사 참배)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용납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11) 그럼에도 일본 천주교회의 지도자였던 우라카와는 천주교와 천황제 국가의 ‘융화’를 당연한 기본 전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조선 순교사를 일본 순교사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면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일본 국민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본 (1619~20년도 예수회) 연보를 읽으면서 특별히 느껴지는 것은 선교사들의 뼈와 몸을 아끼지 않는 열성과 어떠한 곤고(困苦)와 결핍이 덮치고 칼날과 불길을 밟으면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죽는 것을 (마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신자들의 아름다운 신앙, 장렬함이 (그 무엇보다) 비길 데 없는 순교심이다. 그들의 태도 어디에 나라의 빈틈을 (노리고) 살펴보는 것이 있던가? 증오할만한 야망을 품고 있던가? 비(非)국민이라든가 매국노라고 할 만한 악명을 뒤집어쓸 여지가 있었던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같은 이는 오히려 대서특필하여 “당시 일본인이 흘린 피는 바다와 같고 냇물과 같고 늪과 같고 못과 같을 만치 있었다고 하나 그 가운데서 비교적 순수한 피는 이 순교자의 피였다. 예수교도의 박해는 결코 일본 역사의 자랑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흘린 순교자의 피는 일본 역사의 빛이고 일본 국민의 명예이다”라는 찬사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12)

 

도쿠토미 소호 같은 사람은 그의 저서 ‘일본국민사’13) 가운데에서 기리시탄(일본 그리스도교인)의 비할 데 없이 장렬한 순교담에 관해 “당시 일본인이 흘린 피는…(위의 인용문과 동일)…일본 역사의 빛이다. 일본 국민의 명예이며 야마토[大和] 민족의 자랑이다”라고 찬사를 다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찬사를 그대로 조선 순교자에 드리고 싶다.14)

 

우라카와는 《조선순교사》보다 2개월 전에 편찬한 《겐와 5 · 6년도의 예수회 연보》15) 서문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선교사들의 열성과 고난을 참으면서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신자들의 장렬한 순교 신앙에는 비(非)국민이든가 매국노라 할 만한 부분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일본 천주교의 신앙을 ‘일본 국민의 정신적 향상’이라고 평가16)한 도쿠토미의 《일본근세국민사》를 두 저술에서 모두 인용하여 일본 순교사는 일본 역사의 빛이요, 일본 국민의 명예요, 일본 민족의 자랑이라고 했으며, 조선 순교자도 이에 못지않다고 보았다.

 

우라카와가 1944년에 연이어 두 저서를 간행한 이유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순교사를 찬양하면서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막론하고 충실한 일본 ‘국민’17)임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 순교자의 신앙과 순교사를 당시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자랑스러운 일본 국민임을 보증하는 확고한 역사적 증거로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과거의 순교사가 ‘비(非)국민’이든가 ‘매국노’라는 당시의 비난에 대한 방어 기제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천주교에 대한 비난이나 압박이 거셀수록 과거의 순교 신앙에 대한 강조도 커지게 된다. 이는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의 천주교회가 수세적 입장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외래의 종교를 받아들였던 조선과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외세와 결탁해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라카와는 외부의 반대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호교’(護敎) 입장에서 과거의 순교사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는 우라카와가 《조선순교사》 서술에서 상당 부분 의존했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호교적 입장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달레는 서양 선교사의 시각에서 전교-문명 전파가 조선의 완강한 저항이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와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적 태도[정복론적 선교관]를 보였다.18)

 

우라카와가 일본과 조선 순교사를 통해 천주교회를 보호해야 했던 맞은편 상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 국가 체제와 배타적인 국가주의 사상(여론)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근대 국가로 변모하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대거 수용했으며, 일본 천주교도 박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신도적 성격이 농후한 천황제를 국체(國體)로 삼았고, ‘신민’들에게 절대적인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강요하면서 대외적 팽창(군국주의)으로 기울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 종교로서 천주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는 일본을 위협하는 외세의 앞잡이(스파이)로 의심을 받았고, 법적으로 보장받은 신교의 자유 역시 ‘신민의 의무’를 다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조건부의 자유였다.19)

 

일본이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해외 침략 전쟁을 벌여 서양 제국을 비롯한 외국과 갈등을 빚을수록 그리스도교는 국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배척되거나 끊임없이 감시와 통제를 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반(反)그리스도교적 여론과 일본 정부의 간섭을 불식시키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 천주교회는 국가주의적 정책에 영합하면서 ‘일본적인 천주교’를 지향했다.20)

 

일본 천주교회와 함께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도 외국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식민 당국의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회가 일본의 국가주의적 정책에 부응하느냐 여부가 일본 천주교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가 천황제 국가에 충성한다면 천주교회 자체가 일본 국체에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될 것이고, 만약 그 반대라면 조선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일본 천주교회도 반국가적 종교로 매도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거국적으로 일어난 3 · 1 운동은 조선 천주교회가 일본의 식민 당국과 일본 국가에 순응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3 · 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개신교나 천도교와 달리,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만세 운동을 무모하고 무지한 폭동으로 폄하했고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엄금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식민 당국은 조선 천주교회를 충실한 신민으로 높이 평가했고, 조선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와 교화에 천주교회의 ‘공헌’을 기대했다. 이러한 조선 천주교회의 대응은 일본 천주교회에 호재로 작용했다. 이후 일본 천주교회는 3 · 1운동을 ‘천주교는 통치자에 순종하고 국체를 옹호하는 종교임’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물로 활용했다.21)

 

독립적인 선교 지역(교구)인 조선 천주교회와 일본 천주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서 개항기 이래 협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가 내선일체론에 기반한 황국신민화, 즉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동화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종교 통제의 일환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일본 천주교회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천주교회는 조선 교회와의 일치, 동화를 지향하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이 일본 정부의 종교 정책에 협조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가장 첨예한 문제였던 신사 참배에 대해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는 절대 불가 방침을 고수했지만,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반그리스도교적 여론이 비등해지자 로마 교황청은 일본 정부와의 협상 아래 신사 참배를 국가의례로 인정하고 일본과 조선 천주교회에 신사 참배를 지시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반발이 거셌지만,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 참배 거부를 일본 국체에 어긋나는 행위로 규정하고 ‘호교’를 위해 신사 참배를 관철시켰다.22)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조선의 식민 당국은 아예 조선 천주교회의 장상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서울 대목구와 평양 대목구에는 조선인 대목구장이 임명되었지만 대구 대목구와 광주 지목구는 결국 일본인 주교가 장상으로 임명되었다.23) 조선의 선교 지역에 일본인 주교가 장상으로 부임하게 된 데에는 주일 교황사절의 역할이 컸으며 로마 교황청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24) 이러한 일본 당국의 종교 통제 정책과 로마 교황청의 현지 토착화 정책이 맞물리면서 조선 천주교회도 일본 천주교회로 동화 · 일치되는 방향으로 몰리게 되었다.

 

1940년대 전반,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아우르는 총력전 체제가 구축되면서 일본 천주교회도 다른 종교 단체와 함께 일본 정부의 통제 아래 편제되었다.25) 그러나 서양 제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과 반감은 계속 강화되었다.2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 천주교회의 지도자인 우라카와는 천주교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누그러뜨리면서, 이전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일본 천주교회와 식민지 조선교회의 ‘일치’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선일체의 실천은 날이 갈수록 철저해지고 징병제도는 이미 실시되어 2,400만의 반도 동포가 훌륭한 대동아 공영권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고 있는 오늘날에 굳센 담력, 장렬한 용기, 죽는 것을 (마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신자들의 순교 모습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마음이 무척 든든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27)

 

우라카와는 내선일체의 실천과 징병제 실시로 조선인=‘반도 동포’가 충실한 일본 국민이 되고 또 되어야 하는 시대적 상황28)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도 과거 그들의 선조들처럼 순교신심을 바탕으로 충군애국의 신민이 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순교의 역사를 공유하고 조선 천주교회와 일치를 이루게 된 일본 천주교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내선일체’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적 내선일체’는 천황의 자손으로 조선과 일본이 같은 핏줄이고 고대부터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는 일선동조론29)에 근거한 내선일체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천주교야말로 일본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천주교의 순교신심을 국민정신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30) 국가주의적 전시 체제에 편입되어야 했던 일본 천주교회의 입장에서는 천황의 통치와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현실로서 인정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일치를 이루는 바탕은 어디까지나 천주교에 두어야 했고, 그중에서 우라카와는 조선과 일본에 공통되는 순교의 역사와 순교신심에 주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라카와는 일본 천주교회의 장상으로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국가 체제나 국가주의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고, 그가 저술한 《조선순교사》도 적극적으로 황민화 동화정책을 지지하고 군국주의적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 계열의 조선사 연구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호교’라는 자기 보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 국가주의에 순응하면서 일본과 조선의 순교사를 활용했다는 점은 교회사가로서 우라카와가 가지는 기본적 한계였다.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이 앞섰기 때문에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과 식민지 조선의 총동원 체제를 수긍하게 되었고, 일본 식민 당국의 조선 천주교회 간섭과 통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또한 천주교 순교자들의 순교신심을 진충보국의 국민정신으로 견강부회함으로써 순교사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못하고 ‘순교자 현양’의 호교론적 서술에 그치게 되었다. 이는 학문적 태도로서 부적합한 것이며 합리적인 교회사 이해에도 장애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3. 호교론과 식민주의 사관의 결합 - ‘천주교적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한계

 

우라카와가 《조선순교사》를 집필한 것은 1944년이었지만, 그가 조선 천주교회와 관계를 갖고 조선 순교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훨씬 이른 시기부터였다. 《뮈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노일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 2월 28일 서울 명동 성당에서 천주교 신자인 일본 군인들을 위한 미사가 집전되었다. 당시 29세였던 우라카와가 차부제 신분으로 하룻밤을 조선 선교사들과 함께 보낸 적이 있다.31)

 

이러한 인연은 24년 후에도 이어져 1928년 9월 3일 우라카와 신부가 다시 서울 명동 성당에 와서 뮈텔 주교와 만났다. 당시 나가사키 신학교 교수였던 우라카와는 나가사키 총대리도 겸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신자들의 피정을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32) 우라카와는 서울과 제물포의 일본인 신자들을 방문했으며 9월 13일에는 일본어 신문인 《게이조니포》[京城日報] 사옥 회의실에서 일본 천주교의 박해와 순교에 대해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33)

 

1928년에 이어 우라카와 신부는 1929년 7~9월에 걸쳐 일본인 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조선은 물론 만주 일대까지 순회했다.34) 1930년 8월에도 조선을 방문하여 일본인 신자의 피정을 도왔다.35) 이처럼 나가사키 교구 출신으로 오랫동안 나가사키에서 사목 활동과 신학생 양성에 힘쓴 우라카와는 나가사키 교구와 서울 대목구와의 협조 관계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조선 교회사에 대한 기초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고 조선 교회사 연구자인 피숑(Pichon, 宋世興) 신부,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 등의 연구 성과도 참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36)

 

그런데 우라카와의 조선 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가사키 오우라[大浦] 성당 주임 시절인 1912년에 우라카와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로 해서 《코에》[聲]의 제434호(1912년 1월호)부터 제445호(1912년 12월호)까지 <조선공교소사>(朝鮮公敎小史)라는 제목을 붙여 총 10회 연재했던 것이다.37) 우라카와가 일본 교회사와 순교사에 대해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하던 시기에 이미 조

선 교회사(순교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1904년 처음 조선을 방문했던 우라카와는 1910년대부터 조선 교회사에 관심을 가졌고 1920~1930년대에 걸쳐 조선 거주 일본 신자를 관할하면서 지속적으로 조선 교회와 교류를 가졌다. 그러다가 1941년 1월 우라카와는 센다이 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일본 천주교회의 장상이 되었고, 자신을 보좌하는 총대리였던 하야사카 규베이 신부가 1942년 8월 30일 조선의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일본 천주교회와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커졌을 것이다.

 

일제가 ‘대동아 공영권’을 제창하고 침략 전쟁을 아시아, 태평양 일대까지 확산시켜 나가자 일본 천주교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력하는 차원에서 대동아 공영권 내의 신자들과 친선 · 제휴 관계를 맺어 ‘대동아 건설의 대업’에 공헌하자고 역설했다.38)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 천주교회는 일제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천주교 신자를 지도하여 충성스런 신민으로 이끌어야 할 ‘책무’를 지게 되었고, ‘내선일체’의 기치 아래 일제에 동화되어야 하는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가 일본 천주교회의 우선적 관심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우라카와는 식민지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제와 부정적인 여론이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일본 천주교회와 조선 천주교회를 옹호하고 양자 간의 일치[천주교적 내선일치]를 추구하기 위해 1944년에 연이어 《겐와 5 · 6년도의 예수회 연보》와 《조선순교사》를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긴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간행된 《조선순교사》는 우라카와 자신이 인정했듯이 독자적인 연구 저술이나 통사는 아니었다. 우라카와는 조선 교회의 순교 역사를 세 분기로 나누어 초창기부터 신유교난(1801)까지를 제1차 교난으로, 기해(1839) · 병오교난(1846)까지를 제2차 교난으로, 병인교난(1866~1873)을 제3차 교난으로 구분하고 지면상 1~2차 교난을 우선 정리하여 《조선순교사》로 간행했던 것이다.

 

우라카와가 참고했던 자료들을 크게 나눠보면 프랑스 선교사들이 저술한 조선 교회사(순교자 약전) 부류39)와 조선인 및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 교회사 연구 논저40)로 구분된다. 전자는 프랑스어로 작성된 것으로 우라카와가 1차적으로 참조한 사료에 해당되고, 후자는 한문과 일본어로 작성된 교회사와 관련된 사료 및 통사, 논문 등이다.

 

교난 시기에 작성된 선교사들의 서한 및 자료를 기반으로 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로네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이 《조선순교사》의 주요 저본이 되었다.41) 한편 피숑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새로 수집한 자료들은 조선 천주교 전사를 서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42)

 

이 중 로네의 순교자 약전은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조선왕조의 관변 측 자료도 참조했다. 즉 뮈텔 주교가 1922년 4월부터 5월까지 조선총독부 도서관을 방문하여 《일성록》, 《승정원일기》, 《헌종실록》의 기사 중 순교자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고43)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내용44)을 활용한 것이다. 우라카와가 《79위 한국순교복자전》을 대거 수록함으로써 관변 측 사료를 참조하기 어려웠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단점45)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라카와는 조선의 관변 측 자료 원문을 입수하지 못한 채 불어 번역본만 참조했다. 뮈텔 주교는 기해 · 병오 순교자와 관련된 관변 측 자료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원문과 한글 번역을 《경향잡지》 지면을 통해 소개했다.46) 조선의 순교사를 저술하면서도 조선 본국에서 나온 원문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은 《조선순교사》가 가지는 기본적 한계라 할 수 있다.

 

구한말 관료 출신으로 총독부 《조선사》(朝鮮史) 편수위원회의 편수위원을 역임한 바 있던 이능화는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서 천주교의 신앙 자유를 외교적 관계 속에서 조망하고, 그리스도교가 조선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과 역할을 정치, 외교, 사회, 문화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했다.47) 이러한 이능화의 선구적인 업적은 곧 일본인 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고48) 1930~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가 전개되었다.49)

 

우라카와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조선순교사》에 반영했는데 《조선순교사》가 기해 · 병오교난까지만 다루고 있고 책의 내용 중 순교자 약전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의 논저는 주로 전사 부분에 집중적으로 인용되었다. 이는 《조선순교사》의 한계이자 당시 조선 천주교회사 연구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조선 천주교회와 순교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간행되었지만, 후속 저서가 나오지 않아 시기적으로는 1846년에 국한되었고, 1차 사료와 논저의 인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나 《조선순교사》의 심각한 한계는 조선과 조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두드러진다.

 

우라카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사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선교사들이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던 유럽 우월주의적이고 정복론적인 선교관, 서양=문명=그리스도교=선교=선 대(對) 동양=미개=우상 숭배=박해=악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50)이 《조선순교사》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동시에 일본인 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식민주의 사관과 문화사학(文化史學)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순교사》에서 드러나는 우라카와의 ‘천주교적 내선일체’ 입장, 즉 충군애국의 신민임을 증명함으로써 천주교회를 보호하고 일본 천주교회의 우위 아래 조선 천주교회와의 일치를 지향한 점도 조선의 열등함을 전제로 일제의 식민 통치를 긍정하는 식민주의 사관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순교사》의 호교론적 인식과 식민주의 사관적 시각은 천주교가 조선으로 전파되는 과정(조선 천주교 전사)과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설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크게 구분해 보면,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인하는 반도적(半島的) 성격 내지 사대주의(事大主義), 한국의 폐쇄성과 낙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쇄국주의(鎖國主義), 천주교 박해의 원인으로 규정된 당파성(黨派性)이 그것이다.51)

 

우라카와는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 일본 천주교회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일본의 천주교 전파 시도를 조일 양국 간의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 언급했다.

 

대체 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두 나라에 복음이 널리 퍼져있었던 이상 조선에도 파급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먼저 이 영광스런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이 일본이었다. 일찍이 일본은 조선에서 한문학, 예술, 사상을 수입하여 큰 덕을 본 바 있으니 이번에는 그리스도교를 조선에 수출하여 그 청신 명량(淸新明朗)한 공기를 맛보게 하여 구은(舊恩)에 보답코저 힘쓰게 된다.52)

 

우라카와는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에 근거하여 일본과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전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제53)하면서 일본의 천주교 전교 시도를 과거 조선이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옛 은혜’에 대한 보답 차원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본을 통한 천주교 전파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54) 대신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전파 시도가 이어지게 되었다. 직접적인 선교사 파견은 중국에서도 여의치 않았고 대신 조선의 연행사가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구의 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고 서술했다. 이처럼 천주교 수용의 역사를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의 문화 교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은 일본인 학자들의 문화사학적 성과를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55)

 

동시에 우라카와는 천주교 전파가 어려웠던 원인을 국제 관계, 특히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에 돌리고 있다. 쿠보 텐즈이의 《조선사》(1905)를 전거로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으며,56) 중국과의 공식적 사신 왕래 외에는 철저하게 다른 외국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금지의 대상이 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전파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사대 관계를 종속적이고 폐쇄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조선이 대외적으로 쇄국주의를 취하여 고립되었다고 이해하였다. 더 나아가 천주교의 전교를 막는 쇄국주의가 곧 조선 사회의 정체와 후진성을 가져오는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17세기 전반에) 선교사가 조선왕국에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은 명말의 내우외환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다른 이유의 하나는 조선이 완고한 쇄국주의를 고수하여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치 않은 데 있다. …외국인과의 교통은 일체 엄금되었고 조선인으로서 국경을 넘어 타국에 나감을 금지하였고 중국인 일본인이 조선 국내에 거주함도 불허했다.57)

 

조선에 흉작이 많다. 굳게 쇄국주의를 지켜 다른 나라와 무역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한번 흉작이 휩쓸게 되면 다른 데서 원조를 얻을 수 없고 굶어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특히 비신자 사이에는 그것이 많다. 신자들은 천주의 특별한 보호에 의해서인지 상호 간의 박애자선(博愛慈善)에 의해서인지 항상 이러한 불행에 빠지는 경우는 비교적 적었다.58)

 

‘완고한 쇄국주의’가 외국과의 교류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조선이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약한 나라라는 인식이 달레의 저술과 이를 옮긴 우라카와의 글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강대국에 시달리는 미약한 국가로 예부터 외국, 특히 중국의 속국이라는 인식은 동양 파견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다.59) 서양 우월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천주교 수용)에 나서지 않는 것이 바로 조선의 후진과 낙후를 결정지은 요인이라고 보는 왜곡된 인식이 일본 천주교회의 장상인 우라카와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주의=폐쇄성=정체성이라는 도식이 조선의 타율성을 증명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합리하는 식민주의 사관의 중요한 핵심이라는 점에서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 역시 식민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유년의 대교난의 원인에 대해 우라카와는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 의거하여 선조(宣祖) 때부터 비롯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당쟁을 주목했다. 그는 영 · 정조 시기 때 분화된 시파와 벽파의 당쟁을 천주교 박해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으며, <황사영 백서>를 유력한 근거 자료로 제시했다.60) 이는 이능화의 교회사 연구와 그 뒤를 이은 일본 학자들의 ‘당파성’론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61) 조선 망국의 원인을 당쟁으로 돌리고 근본적으로 한민족의 민족성을 분열과 갈등으로 규정해버림으로써 한민족의 정치적 능력(독립)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62)

 

천주교와 적대하는 세력이 정쟁 차원에서 공식적 교난을 일으켰다는 인식은 달레나 로네 같은 서양 교회사가에게 공통적이었고 기해교난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로네 신부는 유력한 당파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해교난이 일어났다고 보았고, 우라카와가 이를 번역할 때 ‘유력한 당파’를 ‘벽파’라고 명기했다.63) 1805년 정순왕후 사후 신유교난을 주도했던 벽파 세력이 몰락하고 시파와 벽파의 구분도 사실상 사라졌다. 1839년 교난을 주도했던 풍양 조씨는 바로 벽파 세력을 몰아낼 때 앞장섰던 가문으로, 우라카와가 이들을 벽파로 규정한 것은 조선 역사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이러한 우라카와의 오류는 그가 교난의 원인을 당쟁으로 보았으며, 1801년과 1839년 교난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천주교의 적’인 벽파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정치를 당쟁으로 왜곡시키고, 조선의 민족성을 당파성으로 규정하는 식민주의 사관이 우라카와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조선 교회와 조선 순교자에 대해 호교론적 입장에서 그 신앙에 대한 열정과 순수성을 찬양64)하고 있는 반면에 서양 우월주의(오리엔탈리즘)와 일본의 식민주의 사관이 결합하면서 왜곡되고 부정적인 조선 인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조선은 중국의 종속국으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거부하는 폐쇄적이고 낙후된 국가이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천주교회를 박해하는 잔인한 당파가 좌지우지하는 국가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 인식은 천주교의 신앙과 전파를 옹호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일본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동화 · 일치시키려는 ‘천주교적 내선일체’로 연결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천주교의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해 외세에 무력시위를 포함한 원조와 간섭을 요청했던 황사영에 대한 평가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제 강점기에도 분분했는데,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역적으로 보는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입장, 그 방법은 잘못됐지만 신앙 자유를 얻으려는 목적은 정당했다는 선교사들의 입장65), 당파성 측면에서 노론 벽파에 대항하는 남인 시파 천주교 신자인 동시에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선각적 지식인으로 보는 일본인 학자의 입장66) 등이 존재했다. 그런데 천주교회의 지도자(주교)이자 일본인인 우라카와의 입장은 선교사나 일본인 학자들과는 달랐다.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것은) 도저히 우리 일본인의 꿈에서라도 생각할 수 없는 공상이다. …물론 이것은 황사영 등 두세 신자가 몽상하는 것으로 천주교의 전통 주의(主義)뿐만 아니라 교리상으로도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비상식을 극(極)한 공상인 것은 말할 것까지도 없는 바이다. 설령 그 서한이 북경 주교의 손에 들어갔다 해도 주교는 그들의 우직함을 민망히 여겨 일소에 부쳐 버렸을 것이다. 본래 당시의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청(淸)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사대에 힘써 해마다 조공 사절의 파견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정도이기 때문에 국민 사이에는 국가적 관념이 충분히 발전해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면키 어려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격렬한 박해를 받아오면서도 아직 한 번도 이러한 비(非)국가적인 망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조선의 신자들은 당국으로부터 항상 ‘비(非)국민이다’ ‘매국노다’라고 매도된 이유를 오랫동안 알 수 없었고, 오로지 관리들의 의심과 음모에 기반했다고 믿어왔다. 선교사들도 백서의 필사본을 손에 넣을 때까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황사영은 (백서) 때문에 매국노의 이름을 짊어지고…목이 잘리고 특히 몸체가 여섯 조각으로 쪼개어져 각지로 효시(梟示)되었다.67)

 

우라카와는 무엇보다 우선 외세에 원조를 청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망상이라고 치부했다. 천주교 교리나 현실적 상황에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을 비롯한 두세 명의 신자가 이를 추진한 것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종속적인 조공국으로서 ‘국가적 관념’, ‘국민 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일본 천주교회는 결코 그러한 ‘비국가적 망상’을 한 적이 없음을 강조했다. 결국 <황사영 백서>로 말미암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당국으로부터 ‘비국민’ 내지 ‘매국노’로 매도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우라카와의 서술에서 황사영에 대한 어떠한 옹호도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우라카와는 황사영같이 ‘비국가적 망상’을 한 조선의 극히 일부 천주교 신자와 일반적인 조선의 천주교 신자, 충실한 국민이었던 일본 천주교 신자를 구분하고 있다. 황사영 같은 일부 신자의 비국가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코 비국민적 행위를 한 적이 없는 일반 조선인 신자들도 매국노로 매도되었음을 강조하고, 일본에 비해 국가적 관념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조선의 열등함을 비국가적 망상의 발생 원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은 비국민적 행동을 한 조선의 망상적인 신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과거에도 충실한 ‘국민’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우라카와의 입장은 자신과 일본 · 조선 천주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라카와는 당시 외세의 앞잡이로 의심받고 있던 천주교회를 옹호하기 위해 ‘일본 · 조선의 천주교 신자=충군애국의 신민’이라는 등식을 강조하면서 일본 · 조선의 순교사를 통해 ‘일본적 천주교’와 ‘천주교적 내선일체’를 지향했다.

 

외세를 끌어들여 정부를 위협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황사영의 의도는 ‘천주교 신자=충군애국의 신민’이라는 등식을 깨고 오히려 천주교 신자들이 비국민적인 매국노로 매도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라카와는 황사영의 경우를 예외적인 돌발 상황으로 치부했고, 이러한 황사영을 배출한 조선의 국가 관념과 국민 의식이 일본보다 저열함을 강조함으로써 일본 천주교에까지 미칠지 모르는 ‘비국민’, ‘매국노’라는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라카와에게는 일본 천주교회 보호가 최우선이었고 조선 순교사에 대한 강조도 일본 순교사의 의의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라카와의 ‘천주교적 내선일체’는 일본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종속적으로 동화되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조선 천주교회 측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일본 식민 당국은 일본 국가주의에 종속된 일본적 천주교회를 모델로 조선 천주교회를 재편하고 일본 천주교회의 장상을 통해 조선 천주교회를 통제 · 관리하려고 했다. 우라카와와 같은 일본 천주교회 장상은 이러한 정책에 부응하여 ‘천주교적 내선일체’를 지향함으로써 일본 천주교회와 조선 천주교회 신자가 모두 충실한 일본 국민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이러한 배경 아래 간행되었지만 기존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천주교 중심의 호교론과 식민주의 사관이 결합됨으로써 학문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4. 맺음말

 

근대 일본에서 외국의 종교인 천주교는 항상 외세의 앞잡이라는 의심과 불신을 받았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 일본 천주교회는 충군애국에 충실한 일본의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임을 늘 증명해야 했다. 교회사가였던 우라카와는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도 국가에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했던 천주교 신자의 순교신심이, 곧 충성스런 국민정신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일본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가 곧 충군애국의 신민이라는 ‘일본적 천주교’를 지향했고, 우라카와는 이러한 등식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순교사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순교사》를 통해 조선의 순교자들 역시 국가에 충성했으며, 내선일체라 요구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앞으로도 일본의 신자 못지않은 충실한 신민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 천주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천주교적 내선일체’는 양쪽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순교신심에 기반하여 실천될 수 있는 것이며 일본 국민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는 조선 선교사들이 저술한 교회사와 순교자 약전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접목했다. 그러나 조선 역사를 다루면서도 조선 측 자료를 충분히 수합하지 못하고 프랑스어 번역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양 우월주의에 기반한 호교론과 식민주의 사관이 결합되어 사대주의, 쇄국주의, 당파성이라는 부정적이고 왜곡된 조선 인식을 내포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조선 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충성스러운 일본 신민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일본 천주교회를 옥죄던 ‘일본적’이라는 전제도 사라지게 되었다. 동화와 일치를 강요하던 ‘내선일체’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일본적 천주교회’와 ‘천주교적 내선일체’를 지향한 조선 순교사 연구도 폐기되었고, 병인대교난 시기를 다룰 《조선순교사》 속편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 식민주의 사관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학계의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일본 학자들이 주도했던 천주교회사 분야에서도 새로 한국인 연구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천주교 중심의 호교론과 일본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해방 이후 천주교회사 학계에서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 등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이 어떻게 비판 · 극복되고 활용되었는가가 또 하나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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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라카와 와사부로는 1876년 4월 6일에 나가사키에서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7월 1일에 나가사키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나가사키 오우라[大浦] 성당 주임을 거쳐 1918년에 나가사키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8년에 신학교 교장에 임명되었고, 1941년 1월에 센다이 교구장에 임명되어 1942년에 주교품에 올랐다. 1953년 11월 26일에 센다이 교구장직에서 은퇴하고 1955년 11월 25일에 79세로 숨을 거뒀다.

 

2) 浦川和三郞, <머리말>, 《朝鮮殉敎史》, 大坂 全國書房, 1944, 3~4쪽.

 

3) 해방 이후 한국 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편찬된 교회사 통사인 유홍렬의 《조선천주교회사》 상권(조선천주교회 순교자현양회, 1949. 2)은 달레의 저서와 일본인 학자의 논문 등을 참조했으나 주로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를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의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사목》 3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1974, 51쪽 참조. 일제 말기 우라카와의 ‘조선 교회사’와 유홍렬의 ‘한국 교회사’[1949년 초판과 1975년 증보판]를 비교 · 검토하는 것도 한국 교회사학사에서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4)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사목》 3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1974, 12쪽 ;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한국 종교문화연구 100년》, 청년사, 1999, 257쪽 ; 윤선자, <(서평)1차 사료와 사진 자료를 충분히 활용한 《한국천주교회사》>, 《종교문화연구》 18, 2012, 207쪽.

 

5) 이원순, <일본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13쪽.

 

6)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최석우신부수품50주년기념논총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87~90쪽.

 

7)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90쪽.

8) 《조선순교사》, 제1장 조선천주교 선사 제1절 서언.

9)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2~3쪽.

10)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4쪽.

11) 고노이 다카시 지음, 이원순 옮김, 《일본 그리스도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35~436쪽.

12) 浦川和三郞, <序>, 《元和五 · 六年度の耶蘇會年報》, 東京 東洋堂, 1944, 8쪽.

13) 德富蘇峰, 《日本近世國民史》 14(德川幕府 上期上卷 鎖國篇), 民友社, 1922, 142쪽.

14)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1~2쪽.

 

15) 겐와 5년(1619)에는 일본 교토[京都] 시내에서 일본 천주교 신자 53명이 화형에 처해졌으며, 겐와 6년(1620)에는 센다이 영내에 금교령이 반포되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고노이 다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327~328쪽. 1619년의 처형은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교토로 상경하는 동안에 집행된 것으로 에도막부 정권의 정치적 시위로 해석된다. 또한 센다이 교구장인 우라카와의 입장에서 1620년도가 중요한 역사적 시점이라 할 것이다.

 

16) 德富蘇峰, 《日本近世國民史》 14, 142~143쪽.

 

17) 도쿠토미 소호가 제기한 ‘국민’은 국가의 대내외적 정책 수행에 있어서 국민적 책임을 다하는 존재일 뿐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각을 수반하는 국민은 아니었다. 도쿠토미의 저술이나 이를 인용한 우라카와가 언급하고 있는 국민은 천황의 신민(臣民)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즉 국가를 위해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녔고 언제라도 국가에 의해 동원될 수 있는 수동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송석원,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와 ‘전쟁’>, 《일본문화학보》 50, 2011, 205~206쪽.

 

18)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김수태,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교회와 역사》 300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74~76쪽.

 

19) 1889년 2월 11일 반포된 대일본제국헌법에는 제28조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또한 신민이기 위한 의무에 배반하지 않는 한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0년 10월 30일에 발표된 ‘교육칙어’는 교육의 기본 방침이자 신민의 의무를 명시한 것이었다. 이 칙어는 천황과 천황 조상에 대한 충효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천황은 점차로 ‘현인신’으로 신성시되었다. 제국헌법과 교육칙어의 시행을 계기로 일본 정부의 그리스도교 간섭은 점점 강화되었다. 고노이 다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433~436쪽.

 

20) 고노이 다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467~468쪽 ; 미야자키 요시노부[宮崎善信], <1910~20년대 일본천주교회의 조선 인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석사 학위 논문, 2011, 3~4쪽.

 

21) 미야자키 요시노부, <1910~20년대 일본천주교회의 조선 인식>, 19~20 및 26~29쪽.

 

22) 신사 참배 거부에 대해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의 장상들은 종교적 문제로 인식했지만 일본 정부와 식민 당국은 반애국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와 포교성성 장관 비온디는 천주교회의 보호를 위해 교황청 차원의 신사 참배 허가 결정을 주도했다.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2, 268~280쪽.

 

23) 1942년 1월 8일 노기남 신부가 서울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었고, 1943년 2월 18일 홍용호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반면 1942년 8월 30일 센다이 교구의 하야사카 규베이[早坂久兵衛] 신부가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42년 11월 21일 와키다 이사고로[脇田?五郞] 신부가 광주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24)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308~310쪽.

 

25) 일본 정부는 천주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해외 침략 전쟁에 천주교를 활용하고자 했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에 ‘종교선무반’(宗敎宣撫班) 파견을 천주교회에 요청했고 이 지시에 따라 사제와 신학생, 신자로 구성된 ‘종교선무공작부’를 편성하여 1941년 12월 8일 필리핀으로 출발했다. 이후 ‘가톨릭 여자 종교부대’가 조직되어 필리핀에서 친선 활동과 일본어 교육 등을 실시했다. 종교선무반은 네델란드 식민지의 인도네시아에도 파견되어 일본군을 돕는 일을 했다. 일본 가톨릭 중앙협의회 복음선교 연구실 엮음, 이종승 · 윤영순 옮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전시, 일본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신사 참배》, 가톨릭출판사, 2000, 93~94쪽.

 

26) 1943년 2월 16일 일본 오사카[大坂] 교구 키타노[北野] 성당 주임 신부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스케 신부는 신자 두 사람과 함께 불경죄와 패전 사상 선전 활동의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헌병대 영창에서 고문을 받은 브스케 신부는 2월 28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병으로 3월 10일 사망했다. 헌병대는 신부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금지했고 장례식은 헌병과 경찰관의 감시 아래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이처럼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한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들은 항상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았고 불시에 체포되어 형벌을 받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 일본 가톨릭 중앙협의회 복음선교 연구실 엮음,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전시, 일본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신사 참배》, 102쪽.

 

27)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2쪽.

 

28) 1943년 2월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제가 실시되자 조선 천주교회는 징병의 취지를 설명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일제에 협조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규정하면서 일제의 지도에 따라 모든 신자가 몸과 마음을 다해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323~324쪽.

 

29) 이철성, <식민지시기 역사인식과 역사서술>, 《한국사 23 -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 1》, 한길사, 1994, 125~126쪽 ; 최혜주, <근대 일본의 한국사관과 역사왜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2010, 307~308쪽.

 

30) 1910~1920년대에 일본 천주교회는 기간지인 《코에》[聲]를 통해 기존의 수세적인 호교론 외에 적극적인 호교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일본의 조선 식민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는데, 군국주의에 기반한 무단통치가 3 · 1 운동을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대신 세계 인류에 공통적인 천주교를 활용하여 식민 통치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일본 천주교회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 전쟁이나 황국 신도를 통한 조선 동화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인과 조선인이 천주교로 동화하여 일본이 천주교 국가가 되면 조선과 일본 두 민족이 통치자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제국 신민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미야자키 요시노부, <1910~20년대 일본천주교회의 조선 인식>, 29~37쪽.

 

3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334쪽.

3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91쪽.

33) 《뮈텔 주교 일기》 8, 192쪽.

34) 《뮈텔 주교 일기》 8, 244, 246, 248~249쪽.

35) 《뮈텔 주교 일기》 8, 303쪽.

 

36) 《뮈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1929년 우라카와가 조선을 방문했을 무렵 당시 평양고등여학교 교사인 야마구치 마사유키가 뮈텔 주교를 방문하여 <황사영 백서> 모사본 8부와 로네 신부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을 얻어 갔다고 한다. 1920년대에 뮈텔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사 연구자 사이에 자료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뮈텔 주교 일기》 8, 245쪽.

 

37) 미야자키 요시노부, <1910~20년대 일본천주교회의 조선 인식>, 23쪽 각주 57) 참조.

 

38) 일본 가톨릭 중앙협의회 복음선교 연구실 엮음, <일본 천주교 전시 활동 지침(1943년 9월 28일)>,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전시, 일본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신사 참배》, 105~106쪽 참조.

 

39)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와 로네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1925) 외에 뮈텔 주교의 Lettre d’Alexandre Hoang(<황사영 백서>의 프랑스어 번역), 뮈텔 주교의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기해 · 병오교난 순교자 자료의 프랑스어 번역, 1924), 피숑 신부의 Por Corea documenta collecta(《조선성교사료》, 1938), 드브레 주교의 Le Catholicisme en Coree(《한국의 천주교》, 1924)이다. 로네 신부와 뮈텔 주교, 드브레 주교의 저서는 1925년 79위 시복과 관련하여 저술된 것이고, 피숑 신부의 저서는 1920~1930년대 수집한 자료와 자신의 연구논문을 모은 것이다.

 

40)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1928), 구스다 오노사부로[楠田斧三郞]의 《조선천주교소사》(朝鮮天主敎小史, 1933), 1930년에 창간된 《청구학총》(靑丘學叢)에서 실린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와 야마구치 마사유키 등의 조선 천주교 관계 논문들, 쿠보 텐즈이[久保天隨]의 《조선사》(朝鮮史, 1905), 일본 헤이본샤[平凡社]에서 간행한 《동양역사대사전》(東洋歷史大辭典, 1937) 등이다. 이능화의 저서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한문에 한글 조사만 붙인 것으로 한국어를 모르는 우라카와도 참조할 수 있었다.

 

41) 제1차 교난 시기는 주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조했고, 제2차 교난 시기는 로네의 《79위 한국순교복자전》 내용 대부분을 일본어로 옮겼다.

 

42) 浦川和三郞, <머리말>, 《朝鮮殉敎史》, 4~5쪽.

43)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34~138, 140~141, 144~146쪽.

44) 뮈텔 주교가 1924년에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한 Documents relatifs aux Martyrs de Coree de 1839 et 1846이 그것이다.

45)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11쪽.

 

46) 기해 · 병오 순교자(시복 대상자) 79위에 대해 《경향잡지》 17권 512호(1923. 2. 28)부터 18권 538호(1924. 3. 31)까지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연재되었다.

 

47)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연구 100년>, 271~273쪽.

48) 조광, <천주교 초기 박해의 원인에 대한 재검토>, 《사목》 3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1974, 39~40쪽.

 

49) 조광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검토했는데, 조선 후기 천주교 역사에 관해 모두 3종의 단행본과 31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정리했다. 단행본으로는 앞서 언급한 구스다의 《조선천주교소사》(1933)와 우라카와의 《조선순교사》(1944), 에노모토 타케아키[?本武揚]의 《조선사정》(朝鮮事情, 1876, 원명은 高麗史略)이 있다. 31편의 논문 중 6편은 사료 발굴 및 문헌 해제에 대한 논문들이고, 7편의 논문은 임진왜란 시 천주교의 조선 전파 가능성에 대한 연구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사에 대해서는 16편의 논문이 있다. 일본과 관련된 시기와 주제에 연구 성과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84쪽.

 

50)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74~76쪽 ;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8~50쪽.

5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84~85쪽.

52)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6쪽.

 

53) 조선이 중국과 일본에 부속되어 그 영향을 받는다는 ‘반도적 성격론’과 연결되는 인식이다. 이기백, <반도적 성격론 비판>, 《한국사시민강좌》 1, 일조각, 1987, 3~6쪽.

 

54) 임진왜란 당시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의 군종으로 조선 땅에 잠시 체류한 이후 조선 내에 천주교 신자(공동체)가 남아 있었느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달레 신부는 군종 신부나 일본군의 전교가 불가능했으며, 설사 전교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일본군의 철수 이후 반일 감정의 격앙으로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었다고 보았다(《한국천주교회사》 상, 284~285쪽). 그에 비해 피숑 신부는 주로 일본 선교사들의 자료를 들어 일본군에 의한 전교와 임란 이후 신앙 공동체의 존속이 가능했다고 했다(<朝鮮가톨닉史의 片影(1)>, 《가톨릭청년》 4호, 1933. 9, 14~15쪽). 우라카와는 양쪽 의견을 다 소개한 다음 달레의 설명에 더 비중을 두었으나 최종 결론은 내리지 않고 추후에 조선 내에 자료가 발굴될 때까지 유보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라카와가 ‘조선 천주교 선사’에서 피숑 신부의 견해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고 다른 자료와 비교하여 나름대로 판단하여 서술했음을 알 수 있다.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10쪽.

 

55) 우라카와는 조선에 서양 문화를 수입하는 데 공헌을 한 부경사(赴京使, 연행사)에 대해 야마구치 마사유키의 논문(<淸朝に於ける在支歐人と朝鮮使臣>)을 전거로 인용하고 있다.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28~29쪽. 야마구치는 조선이 처한 반도적 특성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을 통한 천주교 신앙 전파가 필연적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구 문화의 동점(東漸)을 주목했고 동시에 조선 후기 연행사에 의한 천주교의 수용은 사대주의 정책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파악했다.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91~92쪽.

 

56) 도쿄 제국대학 한학과 출신인 쿠보는 일선동조론에 동조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미화했던 동시기 일본인 학자와 마찬가지로 조선은 사대주의에 매몰된 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조선사》에서 그는 조선이 예부터 사대의 예를 다하는 중국의 속국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조선의 3천 년 역사를 일관하는 것은 도의의 퇴폐와 외교의 굴욕뿐이라고 했다. 최혜주, <근대 일본의 한국사관과 역사왜곡>, 295~298쪽.

 

57)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26쪽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268~269쪽.  

58)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225쪽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51쪽.

 

59)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조선인들이 중국인의 후손인데다 중국의 속국이라고 파악했다. 또한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은 멀고 숨겨진 나라로 무역을 할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나라라고 했다. 제2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조선에서 활동한 앵베르 주교 역시 조선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속국으로 외국과의 교역은 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외국인에 대해 의심이 많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볼 때 ‘폐쇄적이고 가난한 나라’라는 조선의 이미지가 선교사들에게 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석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 《교회사학》 9, 수원교회사연구소, 2012, 226 및 233~234쪽.

 

60)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93~99쪽. 달레도 신유교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남인 시파와 천주교 신자의 적인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일으킨 정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429~430쪽.

 

61) 오다 쇼오고[小田省吾]는 1930년 <이조(李朝)의 붕당을 약술하여 천주교박해에 이름>(李朝の朋黨を略述して天主敎迫害に及ぶ)과 같은 논문을 발표하여 신유교난이 종교상의 박해만이 아니라 시 · 벽파의 당쟁에서 발생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오다의 학설은 이시이 도시오[石井壽夫]의 <황사영 백서에 대하여 - 조선 천주교도의 양박청래의 사상>(黃嗣永帛書に就いて―朝鮮に於ける洋舶請來の思想, 1940)과 <이학(理學)지상주의 이조(李朝)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理學至上主義李朝への天主敎挑戰, 1942)에서 확대 ? 보완되었다. 이시이는 천주교적 국가관이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원리로 작용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박해의 이면에는 본능적 붕당심[朋黨], 즉 당파성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아 이를 조선 망국의 주원인으로 꼽았다. 허동현, <황사영백서에 대한 근현대 학계의 평가>,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 사건》(신유박해연구논문집 3),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161~162쪽.

 

62) 이태진, <당파성론 비판>, 《한국사시민강좌》 1, 일조각, 1987, 53~54쪽.

 

63)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508쪽 ; 아드리앵 로네 · 폴 데통베 지음, 안응렬 옮김, 《한국 순교자 103위전》, 가톨릭출판사, 1995, 48쪽.

 

64) 우라카와는 조선 천주교 신자의 순교신심과 더불어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에 대해서도 찬양했다. “오로지 조선만은 외국 선교사의 입국에 의지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러 외국으로 나가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를 배워 와서 그것을 동포 사이에 널리 전했으니 이것은 반도 천주교도가 영구히 자랑할 만한 것이고 또 당연히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36쪽.

 

65) 달레는 황사영의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계획이 특히 그 시대에 있어서 비현실적이었고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라는 그의 목표는 정당했다고 보았다. <황사영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뮈텔 주교도 황사영의 계획이 공상적이고 위험하며 경솔했지만 그 의도는 올바르다고 평가했다. 허동현, <황사영백서에 대한 근현대 학계의 평가>, 159~161쪽.

 

66) 이시이 도시오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위의 각주 61) 참조.

67) 浦川和三郞, 《朝鮮殉敎史》, 175~178쪽.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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