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Monk)이란 단어의 의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2

'수도승'(Monk)이란 단어의 의미

 

 

'수도승'이란 단어는 풍부하고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유일한 혹은 고독한 어떤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미 플라톤에 의해서 사용된 희랍어 모나코스(Monakos)에서 유래한다. 플로티누스에게 있어서 모나코스(monakos)는 존재의 사다리 정점에 있는 일자(一者)이다. 즉 하느님이 바로 '수도승'이다. 이 단어는 성서 안에 그 동의어를 갖고 있다.

 

특히 희랍적 환경에서 생겨난 수도승생활은 곧 세상과 떨어져 혼자 살았던 금욕가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나코스(monakos) 즉 '수도승'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은수자들은 때때로 작은 공동체들 안에서 함께 무리 지어 생활했다. 다른 한편 최초 세 개의 회수도승 규칙서들 즉 빠코미오와 바실리오, 그리고 아우구스띠노 규칙서들은 '수도승'이란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즉 회수도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은수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수도승이 아니었다. 매우 반(反) 은수적이었던 바실리오는 자신의 규칙서에서 "인간은 수도승적 동물이 아니다"라고 까지 말하였다. 그의 규칙서 어디에서도 '수도승'이란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바실리오 규칙서는 '형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수도승'이란 단어가 회수도승을 가리키게 된 것은 나중에 와서이다. 이것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사용 빈도는 우리로 하여금 수도승 규칙서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성 베네딕도 시대에 이 단어 사용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된다."(RB 48,8)

 

이 단어가 비록 성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수도승'이란 용어가 흔히 사용되었고 또 도나뚜스파 수도승들이 있던 시기에 살았다. 그는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기쁜가"라는 시편 132편 주해에서 그 단어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여기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사도행전의 구절을 언급하였다. 이 "한" 마음과 뜻은 공동생활의 특징이다.

 

이러한 연결은 12세기에 씨토회원 옥세르(Auxerre)의 죠프리(Geoffrey)에 의해서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으로 설명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동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수도승들이 먼저 자신의 내적 일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일치된다." 공동체 일치의 조건은 수도승들이 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승은 외적으로 홀로 있는 자가 아니라 내적으로 하나인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일치에서 내적 일치로 나아갔다.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또 다른 차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희랍어 모나코스(monachos)의 히브리어 동의어인 자히드(jahid)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히브리 말은 희랍 번역가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야기했다. 시편 68,1에서 한 예를 들어보자. "엘로힘은 그 야하딤(jahadim)을 당신 집에 머물게 하신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그 외로운 사람에게 거처할 집을 주신다"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나코스(Monakos)란 말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번역은 합리적인 어떤 번역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번식하여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 외로운 사람에게 거처할 집을 주신 이유인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띠 하나만을 소유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모노쪼누스(monozonous)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포기와 가난의 개념을 보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이 나아갔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유대인이었던 아퀼라(Aquila)는 그 외로운 사람을 하느님의 외아드님과 동일시하여 유일하게 얻은 자식을 뜻하는 모노제네시스(monogenesis)로 번역하였다(다른 곳에서 그는 그 단어를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아가페토스 agapetos로 표현하였다).

 

마침내 칠십인역은 교부들 안에서 결실을 맺게 될 "오로지 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모노트로푸스(monotropous)라는 새로운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한 길을 가고, 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 집에 머물게 하신다. 우리는 이 번역 배후에서 옥세르(Auxerre)의 죠프리(Geoffrey)의 그 구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실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서 보존된 의미이다.

 

오리게네스는 '수도승'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무엘서의 "한 사람이 있었다"라는 구절을 주석할 때 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말했다. "이 '한' 사람은 자신을 혼란시키는 격정들을 지배한 사람이며, 나누임이 없고 더 이상 이 길 저 길로 끌려 다니지 않으며, 평정을 얻고 불변하는 하느님의 모방자가 된 사람이다. 인간은 그가 자신 안에서 일치를 실현한 그러한 방식으로 하느님과 일치될 때 '하나'이다.

 

오리게네스는 수도승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서 글을 썼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바는 그가 하느님께 축성된 남녀들을 다룰 때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전 수도승 전통 안에서, 그리고 위(僞)마카리오와 대(大)그레고리오 안에서 같은 생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수도승들이라 불려집니다. 그 희랍어는 '하나'를 뜻하는 라틴어 우누스(unus)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가 여러분 자신을 나타내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마도 테오도로 스투디따(Theodore Studita)의 유명한 다음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갈망하며, 하느님만을 위해서 일하고, 하느님만을 섬기기를 원하며 타인을 위해 평화의 원천이 되는 사람 그가 바로 수도승이다." 수도승이란 단일한 시선, 단일한 갈망, 타인에게 흘러 넘치는 놀라운 사랑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수도승'이란 이 단어는 그 안에 우리의 완전한 미래 즉 여기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우리의 신화(神化)를 감추고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 유일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된 "참된 수도승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삼위의 일치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우리 머리이신 예수님과 일치될 것이다.

 

[글 허 로무알도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2,1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