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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32-34: 콘스탄츠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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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14 ㅣ No.460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2)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 (상)


두 교황과 두 교황청으로 교회의 대분열

 

 

아비뇽 시대를 마감하고 로마로 귀환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교회사에서 16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른바 서구 대이교((西毆 大離敎)라고 부르는 서방 교회의 대분열, 이 대분열의 해법으로 부각된 공의회 우의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려 한 피사 공의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서구 대이교

 

비엔 공의회(1311~1312)를 개최한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가 1309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후임 교황들은 한동안 아비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황들이 당시 실세였던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내부 정세의 불안정 특히 교황 영토에서의 소요 사태 등이 교황들을 아비뇽에 눌러앉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1378)가 로마 귀환을 결행합니다. 그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1377년 1월 7일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는 당시 교황청이 있던 라테라노 대성전이 아니라 바티칸에 거처를 정합니다. 이미 선대 교황 니콜라스 3세(재위 1277~1280)가 교황궁을 확장하고 정원까지 마련해 놓은 바 있습니다. 이로써 '바티칸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 이듬해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선종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아비뇽 시대를 장식한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인 교황이 또 탄생하면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습니다. 당시 로마에 있던 추기경 16명 가운데 11명이 프랑스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탈리아인으로 후임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추기경들은 겁이 나서 로마 출신인 연로한 테발데스키 추기경에게 억지로 교황 옷을 입혀 교황좌에 앉히고는 로마인 교황이 선출됐다고 속여 군중들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런 다음에 애초 교황 후보로 내정한 이탈리아 바리 대교구장 프리냐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그가 교황 우르바노 6세(재위 1378~1389)입니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우르바노 6세는 행정력과 교회 쇄신 의지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독선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추기경들의 부도덕성과 사치스러운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기득권을 잃을까 우려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6세에게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는 인격 파탄자라는 혐의를 씌우더니 마침내는 교황 선출 자체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1378년 8월 우르바노 6세를 해임해 버렸습니다. 이에 맞서 우르바노 6세는 자신이 적법하게 선출된 교황임을 내세우고, 추기경 29명을 따로 임명해 교황청을 다시 구성합니다.

 

그러자 우르바노 6세 해임에 앞장섰던 추기경들은 나폴리 왕국에서 회의를 열어 새 교황을 선출합니다. 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378~1394)입니다.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을 데리고 1379년 5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청을 구성합니다.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교황청이 생기는 교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도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는 쪽과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쪽으로 양분됐습니다. 이런 혼란상이 40년이나 지속됩니다. 이 사태를 서구 대이교라고 부릅니다.

 

1389년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종합니다.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마 추기경들이 우르바노 6세의 후임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자연히 적법한 교황이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합니다만,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재위 1389~1404)입니다.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서 별도 교황청을 차린 지 15년 후인 1394년 선종합니다. 마찬가지로 후임 교황이 나오지 않는다면 대분열은 자연적으로 종식될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뇽 추기경들도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바로 두 번째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재위 1394~1423)입니다.

 

◇ 공의회 우위설

 

공의회 우위설은 한 마디로 교황보다 세계 공의회(보편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설입니다. 공의회 우위설은 갑자기 생겨난 이론이 아니지만 서구 대이교 사태와 때를 같이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의회 우위설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교회의 머리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와 같은 조직이 아니라 머리와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는 유기체입니다. 머리인 교황은 각 지체들에 대해 우위에 있지만 유기체 전체를 대표하는 세계 공의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신앙의 오류를 범하거나 교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경우 공의회는 이를 판단하고 교황에게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입니다.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이 서로 타협해서 한쪽이 양보한다면 공의회 우위설은 말 그대로 설로만, 따라서 이론으로만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서로 상대편에게 양보를 요구하다 보니 재일치가 이뤄질 수가 없었습니다.

 

◇ 피사 공의회

 

교황들의 타협을 통한 교회 재일치가 기대난망이라고 여긴 양측 추기경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키로 하고 전체 공의회를 개최키로 합니다. 이에 따라 1409년 3월 25일 피사에서 공의회(엄밀하게는 교회회의)가 소집됩니다. 참석자는 추기경들과 대주교, 주교들 외에 주교 대리인, 주교좌성당 참사회 대표, 수도원장과 수도원장 대리인 제후 사절들을 포함해 600명이 넘었습니다.

 

추기경들은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도 초청했지만, 두 교황 모두 초청을 거부하고 저마다 각기 별도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하지만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피사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교회 분열을 초래한 이단으로 몰아 해임, 단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 출신인 밀라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그가 교황 알렉산데르 5세(재위 1409~1410)입니다. 이듬해에 알렉산데르 5세가 선종하자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요한 23세(재위 1410~1415)를 선출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 모두 피사 공의회 결정에 불복하고 여전히 교황직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피사 공의회로 인해 이제는 교황이 세 명으로 더 늘어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2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3)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 (중)


대분열 종식, 후임 새 교황 선출로 일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선출한 마르티노 5세의 행렬.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공의회 소집과 과정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분열된 교회를 다시 일치시키려고 추기경들이 추축이 돼 소집한 피사 공의회(엄밀히는 교회회의)는 둘인 교황을 셋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혹을 때려다 하나를 더 갖다 붙인 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 총대를 잡은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독일 왕 지기스문트였습니다. 그는 피사 교황 요한 23세를 압박해 공의회를 소집토록 했습니다. 요한 23세는 마지못해 1414년 11월 5일 독일 남서부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16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콘스탄츠 공의회입니다.

 

공의회 참석자는 추기경 29명과 총대주교 3명, 대주교 33명이었고, 주교는 300명이 넘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대수도원장과 수백 명의 신학자와 교회법학자도 참석했습니다. 규모로 보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큰 교회회의였습니다. 공의회 목표는 세 가지, 교회 분열 상황을 종식시키는 것, 교회 개혁과 쇄신을 이루는 것, 그리고 이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대분열 종식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다른 교황들이 물러나거나 단죄되고 나면 자신이 홀로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내심 기대했습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주교들이 절반 이상인 것도 고무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무너지고 맙니다. 공의회 표결 방식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면서 주교들이 각자 한 표씩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별로 한 표씩을 행사하기로 결정난 것입니다. 초기에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각각 한 표씩 행사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추기경단도 표를 얻었지요.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려 세 교황에게 모두 자진 사임토록 한 뒤에 후임 교황을 선출한다는 안을 마련합니다. 제2차 전체회의에서 요한 23세는 이 결정에 따라 자신도 교황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말뿐이었습니다. 그는 밤 몰래 콘스탄츠를 빠져 나와 오스트리아 군주 프리드리히 대공이 있는 샤펜하우젠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교황이 없으면 공의회가 성사되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 왕 지기스쿤트의 강력한 지원과 압박으로 교부들은 공의회를 계속 진행합니다. 제5차 전체회의에서 교부들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으로 천명하는 교령 ‘헥 상타’를 발표합니다. 헥 상타는 ‘이 거룩한’이란 뜻의 라틴어로 “이 거룩한 콘스탄츠 교회회의는…”으로 시작하는 교령의 첫 두 글자를 딴 제목입니다. 교령은 교황이라 할지라도 적법하게 소집된 공의회에서 결정하는 교회 개혁에 관한 사안에는 순종해야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상응하는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공의회 우위설이 공의회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요한 23세는 얼마 후 체포돼 죄수의 몸으로 콘스탄츠로 끌려옵니다. 그리고는 위증, 성직매매, 부도덕한 처신 등의 죄목으로 교황직에서 폐위됩니다.

 

이제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남았습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황직 사임의 전제 조건을 제시합니다. 형식상으로나마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공의회를 열어 자신이 합법적 교황 계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교황은 공식 사임합니다.

 

그런데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적법한 교황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공의회에서 중심 역할을 해온 황제 지기스문트가 나서서 직접 담판을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스페인이 등을 돌려 공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한 것입니다. 이에 힘입어 공의회는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고 그를 폐위시킵니다.

 

세 교황이 모두 폐위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공의회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공의회에 참가한 나라(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별로 각각 6명씩 대표를 뽑고, 여기에 추기경들을 더해 56명으로 교황선거인단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콘클라베에 들어가 3일 만에 이탈리아 출신 오도 콜론나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교황 마르티노 5세(재위 1417-1431)입니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가 종식되고 교회는 1378년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두 교황이 생긴 지 39년만에 마르티노 5세 교황을 중심으로 일치를 회복합니다.

 

 

교회 개혁

 

그런데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기 전에 공의회는 한 차례 진통을 겪습니다. 교부들은 교황 선출을 먼저할 것인가 교회 개혁 의제를 우선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격론을 벌였고 이로 인해 하마터면 공의회가 와해될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다행히 영국이 중재에 나서 타협안을 제시했고, 교부들은 교황 선출을 먼저 하기로 결정합니다.

 

공의회는 그러나 교황 선출에 앞서 두 가지 교령을 통과시킵니다. 하나는 교황의 공의회 개최 의무를 규정한 ‘프레쿠엔스’(Frequens)라는 교령으로, 콘스탄츠 공의회가 끝나고 5년 뒤에 바로 공의회를 개최하고, 그 다음에는 7년 뒤에 공의회를 개최하며, 그 이후에는 10년마다 공의회를 개최토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교황이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공의회 자체가 장소를 정한다는 조목도 들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에 선출된 이가 공식 발표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 혹은 서약 내용을 담은 ‘콴토 로마누스 폰티펙스’(Quanto romanus pontifex, 로마 교황은)라는 교령입니다.

 

공의회 교부들이 다른 기타 교회 개혁안들은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노 5세가 1418년 3월 제43차 전체회의에서 통과시킨 일곱 가지 교회 법령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 교회 대분열 시기에 주교좌성당이나 수도원, 개인에게 부여된 면속권은 무효이고 △ 이 시기에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뤄진 성직록 합병도 무효이며 △ 성직매매로 성직에 오른 이는 성무집행이 정지되고 성직매매를 목적으로 돈을 받은 성직자는 파문되며 △ 성직자 복장은 평신도 복장과 구별돼야 하지만 검소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성직록과 관련된 사항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나고 이해관계도 달라서 일률적으로 자세하게 규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개별 국가들과 5년간 한시적으로 발효되는 정교 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9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4)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 (하)


종교개혁가들 단죄하지만 불씨는 남아

 

 

화형 당하는 얀 후스. 후스의 추종자들은 이에 격분해 후스파를 결성했고 마침내는 후스 전쟁을 일으켰다.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이단 문제

 

콘스탄츠 공의회가 이단 문제를 다룬 것은 피사 교황 요한 23세의 탈출과 체포, 폐위 등으로 좀 어수선하던 1415년 4월~6월이었습니다. 핵심 대상은 영국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1330?~1384)와 그의 사상의 핵심 추종자로 지목된 보헤미아의 얀 후스(1369?~1415)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20년이 넘었고 또 영국에서 이미 여러 번 단죄받은 바 있는 위클리프 문제를 공의회가 다시 다룬 것은 그의 사상이 얀 후스를 비롯한 보헤미아(유럽 중부 현 체코 공화국 일대) 교회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부이자 옥스포드 대학 교수를 지낸 위클리프는 성경을 모든 교리와 제도의 원천으로 제시하면서 성경에 직접 토대를 두지 않은 것을 전부 거부했습니다. 교황 권위와 수도회를 부정하고, 대사와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의 재산 소유를 비판하며 극단적 청빈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히 성체성사의 실체변화를 부정하고 축성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미 그의 생전인 1382년 런던 교회회의에서 24개 주장이 단죄받으면서 그의 저작들은 금서로 공포됐습니다. 또 그가 죽은 후인 1388년과 1397년에도 그의 주장은 단죄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교회 개혁과 민족 운동으로 꿈틀거리던 보헤미아 지역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라하 대학 교수이자 나중에는 총장까지 지낸 얀 후스 신부가 있었습니다.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을 때 공공연히 위클리프 편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관할 대주교에게서 설교 금지와 성무 정지를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후스는 성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최고 규범으로 삼으면서 제도 교회의 폐해를 비난하고 영적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5월 제8차 전체회의에서 위클리프가 내세운 45개 명제를 이단으로 단죄한 데 이어 제15차 전체회의에서 위클리프를 이단자로 선언하면서 그의 주장이 담긴 저서들을 소각토록 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이단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보헤미아 얀 후스는 이미 콘스탄츠에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공의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시지스문트가 안전을 보장한 데다가 후스 또한 자신의 주장이 이단이 아님을 공의회에서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의회 개회에 맞춰 콘스탄츠에 내려온 후스는 그러나 한 달이 조금 지나 도미니코 수도원에 감금되고 맙니다.

 

공의회는 얀 후스에 대한 재판을 통해 후스의 주장 중 30개 항을 뽑아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몇 가지를 보면 △ 베드로는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머리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 교황의 품위는 황제에게서 기원하며 교황의 임명과 제정은 황제의 권위에서 나왔다 △ 품행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나 베드로의 대리자가 아니다 △ 교회적 순종은 사제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성경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 위클리프의 45개 명제에 대한 단죄는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가톨릭적이 아니다 △ 대죄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세속의 군주, 고위 성직자, 주교가 아니다.

 

후스는 자신의 주장이 결코 이단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또 이단적 주장을 철회하라는 권유에 대해서는 철회할 것이 없다고 거부합니다. 공의회는 결국 제15차 전체회의에서 후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화형선고를 내립니다. 후스는 그날로 국가 법집행기구에 넘겨져 화형당합니다. 공의회는 또 당시 보헤미아 지방에서 유행하던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금지하면서 평신도에게 양형 영성체를 해주는 사제를 단죄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공의회는 후스를 변호하러 콘스탄츠에 와 있던 동료 히에로니무스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화형에 처합니다.

 

또 공의회를 앞두고 '포악한 군주가 있다면 그 폭군을 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공의회는 이 문제를 다룬 끝에 '폭군에 대해 아무나 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신앙과 윤리에 어긋나는 오류이며, 국가와 국왕에 대한 불충이라며 단죄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8년 4월 22일 교황 마르티노 5세 주재 하에 45차 전체회의를 끝으로 폐회합니다. 이로써 공의회는 3년 6개월의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교황 마르티노 5세

 

 

공의회 결과와 그 이후

 

교회사에서 16번째 세계 공의회인 콘스탄츠 공의회는 40년 가까이 계속된 교회 대 분열을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비뇽 교황이었다가 공의회에서 폐위된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국왕 영토인 발렌시아 페니스콜라 성에 머물면서 1423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합법적 교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사망한 후 아비뇽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클레멘스 8세(재위 1423~1429)를 선출합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8세는 교황직을 사임하면서 추기경들에게 마르티노 5세를 합법적 교황으로 다시 선출토록 합니다. 이로써 이중 교황으로 인한 서구 대이교가 최종적으로 끝난 것입니다.

 

폐위된 요한 23세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는 2년 이상 감옥이 갇혀 있다가 1417년 12월 공의회 결정으로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후 마르티노 5세 교황과 화해한 그는 투스쿨룸 - 프라스카티의 주교급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선종합니다.

 

그렇다면 서구 대이교 당시의 교황들 가운데 적법한 교황 계보에 있는 교황들은 누구일까요? 교회는 로마 교황들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를 적법한 교황 계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채택한 교령 '헥 상타'와 '프레쿠엔스'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이어서 이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 교령들은 교황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비상시기의 임시 방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어쨌거나 이 공의회 우위설은 그 다음 공의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편 콘스탄츠 공의회가 얀 후스와 히에로무스를 이단으로 단죄해 화형에 처하자, 후스를 교회 개혁가로서뿐 아니라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 따랐던 보헤미아 사람들은 격분합니다. 이들은 후스를 순교자로 떠받들며 후스파를 결성한 후 무장봉기를 일으키는데, 10년이나 중부 유럽을 공포로 몰어 넣었던 이 전쟁을 후스 전쟁(1420~1431)이라고 합니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1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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