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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첨단 소통 기술 시대의 메마른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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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6 ㅣ No.945

[경향돋보기 - 스마트폰과 소통의 부재] 첨단 소통 기술 시대의 메마른 소통

 

 

요즘은 스마트폰이 넘쳐나는 시대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문화 기반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집단적인 것에서 개인적으로, 일방적인 것에서 쌍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다.

 

요즈음은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 간의 소통이 스마트폰 하나로 가능하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의 누리소통망(SNS)은 개인의 책상 위에 있는 무겁고 휴대하기 불편한 개인 컴퓨터나 노트북으로만 가능했지만 이제는 어디서든 인터넷만 된다면 장소에 상관없이 SNS로 소통할 수 있다.

 

 

스마트폰의 발전이 하느님의 선물?

 

2014년 홍보주일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점점 더 좁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고,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되기 쉬워 보이며 더욱 가까워지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황님은 이러한 SNS의 특성이 “인류 가족의 새로운 일체감을 조성하도록 도와준다.”고 말씀하셨다.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궁극적으로 일치를 더 잘 이루게 해준다. 또한 자유로운 소통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배우고 서로 벽을 허물며 차이를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황님은 인터넷을 두고 “모든 사람에게 만남과 연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며 이것은 정말 좋은 것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하셨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스마트폰의 발전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해서 마냥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의 발전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좁아진 세상에서 소통의 무한한 가능성은 익숙하고 가까이 있는 것보다 새롭고 멀리 있는 것에 관심을 느끼게 한다.

 

 

소통을 더 멀어지게 한다

 

SNS는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끼리 쉽게 연결되며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기에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빠르고 쉽게 집단을 형성한다. SNS에서도 사용자의 성향에 따라 자주 검색한 사이트나 비슷한 활동을 하는 다른 이용자들을 추천해 준다. 이것은 오히려 사회적 유대감을 약화시키고 성향이 비슷한 집단끼리 통신망(네트워크)만을 강화하여 새로운 사회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교황님은 “자신의 기대와 생각, 또는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만 부합하는 정보 영역에만 갇혀버릴 수 있다.”고 우려하셨다. 그 때문에 교황님은 세상 사람이 “서로 이웃이 되기 쉽다.”고 말씀하시기보다, “서로 이웃이 되기 쉬워 보인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서 동떨어져 있는 것을 곁에 있다고 착각하게 함으로써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과의 소통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교황님은 우리에게 “디지털 세계에 접속하려는 바람이 결국에는 우리의 이웃, 가장 가까운 이웃과 단절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셨다.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은 가족 간의 대화를 단절시킨다.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자녀뿐 아니라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정 밖에서는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도 각자 개인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SNS를 하느라 대화는 하지 않는다. 대화를 한다 해도 함께 모여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SNS나 문자로 대화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소통이라고 착각한다. 과연 이것이 소통의 기술을 올바로 사용하는 모습일까?

 

앞서 말했듯이 교황님은 인터넷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선물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교회의 일치와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가 될 수 있거나 하느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인터넷상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의사소통이 궁극적으로는 기술 발전이기보다 인간 발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고 교황님은 말씀하셨다. 달리 말하면 인간인 우리가 기술의 발전에 끌려가기보다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한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의문이 남는다.

 

 

자비와 나눔의 실천은 경청

 

2016년 홍보주일 담화에서 교황님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비’에 두셨다. 또한 “자비는 본질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며 서로 은총이 되는 것으로 자비는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입는 사람 모두에게 은총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소통과 자비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 그 자체로 나눔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나눔이 서로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면 의사소통으로 은총을 나누면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자비에는 인내와 포용, 배려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무런 차별 없이 소통하도록 요청받는다. 소통하는 상대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편견이나 차별이 없어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으며 비로소 우리는 서로 이웃이 되고 은총을 나눌 수 있다.

 

자비를 통한 나눔은 늘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치이지만 이상주의적으로 들리며 막연하기만 하다. 이에 대해 교황님은 의사소통을 하면서 자비와 나눔을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한 단어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경청’이다.

 

교황님은 “경청은 단순한 청취 이상의 것이며 소통과 친밀함을 요구한다.”고 하셨다. 단순히 사람과의 소통에서뿐 아니라 SNS를 통해 오는 정보를 접할 때도 우리는 경청의 태도가 필요하다.

 

 

경청의 자세

 

교황님은 우리가 경청함으로써 “수동적인 관망자나 소비자의 상황에서 벗어나 정보를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경청이란 말에는 정보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해하기까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인내도 필요하다.

 

SNS로 유통되는 정보는 대부분 글자수를 제한한다. 많은 정보가 사용자에 의해 사용자의 관점으로 짧게 편집되어 유통되기 때문에 우리는 SNS를 통해 특정사건을 접할 때 처음 그 정보를 유통한 사람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런 정보를 우리는 거를 틈도 없이 홍수처럼 접하게 된다. 따라서 단편적인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처음 정보를 퍼뜨린 이용자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짧고 간편한 정보에 익숙해지면 정보를 대하는데 깊이가 없어지며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화에도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단편적인 정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흔히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에서도 성급함을 보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상대방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성급히 상대를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다. 상대를 이해했다고 믿지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통에 있어 이런 성급함을 버리려면 우리가 경청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경청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청은 인내가 필요하다. 대화를 할 때 우리가 흔히 하는 잘못은 상대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할말만 하는 것도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청이라는 말에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반영되며 상대의 말을 끝까지, 곧 이해할 때까지 듣는 것을 의미한다. 남의 말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이해시키려는 것은 독선이며 그것이 일방적일 때는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되기도 하다.

 

경청은 또 다른 이와 함께 의문과 의혹을 제기하고, 나란히 함께 길을 가며, 절대 권력의 독선에서 벗어나고, 공동선을 위하여 능력과 은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경청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진정으로 경청하고 사랑을 나누는

 

현대사회의 소통의 부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불행하게도 가정에서 대화의 단절을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된다. 가정은 인간이 접하는 최초의 공동체이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처음으로 사회를 배운다. 가정에서부터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가정 밖에서의 소통도 원활할 수 없다.

 

부모가 흔히 하는 잘못은 자신의 자녀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자녀와의 대화를 소홀히 한다. 대화가 단절된 가정의 자녀는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믿는 가상현실에서 소통의 갈증을 푼다. 가상현실 집단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쉽게 연결될 수 있으며 마음이 맞지 않으면 쉽게 헤어질 수 있고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활성화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의 정보나 가르침을 빠르게 알려주지만 정작 하느님과는 멀어지는 것 같다. 하느님에게 다가가려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에는 소홀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이 함께 정을 나누고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체계적인 교육과 나눔의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미사 시간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지만 현대의 논쟁거리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지 성당에서는 듣기 힘들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농사나 목축 등에 필요한 지식들을 비유로 들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미사 때에는 다양한 세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런 자리에서 공통된 이야깃거리를 신자들에게 던져준다면 세대 간의 소통도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우리가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의 쟁점들을 교리에 대입해서 풀이해 준다면 정보를 접하는 신자들의 혼란도 줄일 수 있으며 나아가 가톨릭 신자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욥기에서 욥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 하고 말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나쁜 것이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하느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선물을 모두 좋은 것으로 만들려면 하느님의 소리에 경청해야 한다.

 

진정한 소통은 세대 간의 격차를 줄이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은 인간(人間), 곧 사람 사이를 좁혀 안정감을 주고 소속감을 느끼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뜻이 다를지라도 그들의 말을 진정으로 경청하고 대화할 때 서로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최양호 요한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전산정보실 실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7월호, 최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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