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의 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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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1

수도승의 독방

 

 

1. 용어

 

영어의 'cell'을 우리말로 '개인방'이란 말 대신에 '독방'(cell)이란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용어는 전통적인 수도승 용어이다. '개인방'은 보다 세속적 용어로서 수도승의 독방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 갈멜회에서는 '수방 修房'(수도하는 방, 수도자의 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역사

 

1) 사막 전통 안에서

 

사막 전통에서 수도승의 독방은 '세 소년이 하느님의 아들을 발견한 바빌론의 용광로' 또는 '하느님이 모세와 말씀하신 구름기둥'으로 불려졌다. 독방의 고독 속에서 수도승은 하느님을 만난다. 수도승의 독방은 작은 수도원이며, 그 수도원은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들, 예컨대 고독, 침묵, 그리고 성령에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영적 스승이 사막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준 호의적인 권고 즉 '가서 너의 독방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너의 독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한 그 독방 안에서 항구한 인내심을 수행하는 것은 그렇듯 중요하였다.

 

4세기 에집트 수도승들에게 있어 독방은 기도의 장소이며 또한 개인 기도소였다. 그들이 공적인 전례거행을 위해 하나의 공동 기도소를 가졌던 것과 같이 각 수도승은 개인적이고 고독한 기도를 위한 개인 기도소를 갖고 있었다. 거기서 예수의 권고가 실현될 수 있었다. 즉 "여러분은 기도하고자 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은밀한 곳에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마태 6,6). 독방의 은밀함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가 아니라 홀로 하느님의 눈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항상 고독 속에서, 한적한 곳에서, 한밤중에 기도하심으로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 주신다.

 

2) 중세기

 

중세 수도원들을 특징 짖는 침실은 주라(Jura) 산에 있는 꽁다(Condat) 불란서 수도원에서 6세기 초에 소개되었다. 화재로 인해 수도승의 독방들이 불타버리자 대신 공동침실이 만들어졌다. 베네딕도는 규칙서 제66장에서 문지기는 현관 옆에 독방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22장에서 공동침실을 언급하고 있다. 11, 12세기에 카르투시오회원들과 까말돌리회원들은 수도승의 독방에 대한 에집트 전통을 재발견하였다.

 

3) 근대 이후

 

베네딕도회 공동체들은 15세기까지 독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15세기 이태리 빠도바의 산타 주스티나(Santa Giustina) 수도원에서 최초로 독방이 도입됨. 씨토회원들은 처음에는 공동침실을 사용하였지만, 후에 베네딕도회 공동체들에 의해 도입된 독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17세기 드 랑세 아빠스는 작은 개인 침실에 호의적이었지만, 프랑스 혁명 후 '어거스틴 드 레스트랑제'는 두꺼운 커튼으로 칸막이 쳐진 침방에 만족하였다. 우리 시대에는 다시 수도승적 독방에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짙다. 오늘날 대다수 베네딕도회원들은 독방에서 쉬고, 기도하고, 일을 한다. 트라피스트-씨토회에서는 1967년 독방을 승인함.

 

 

3. 독방의 영성

 

'고독'과 '함께 있음', '개방의 시기'와 '봉쇄의 시기' 사이에는 자연적인 인간 리듬이 있다. 개인적 공간은 내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또한 사람들과 여러 상황들과 사건들 속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힘을 얻는 곳이다. 따라서 독방은 하나의 거룩한 장소가 된다. 하느님을 대면하게 되는 이러한 고독은 때때로 감미롭지만, 때론 몹시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을 번갈아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함께 있는 시간'과 '홀로 있는 시간'은 모두 필요하다. 이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예이기도 하다. 주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정중하게 거리감을 둠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다른 형제들과 또한 하느님과 보다 더 밀접하고 진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수도원 안에서 완전한 고독은 수도승의 독방 안에서 가능하다.

 

고독을 유지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들과 쉽게 사귀는 능력은 성숙의 표지들이다. 독방의 고독 속에서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형제들로부터 물러남으로서 가능하다.

 

독방의 영성은 은둔과 고독에 대한 갈망에 바탕을 둘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참으로 수도승의 독방 안에 현존해 계신다는 믿음과 확신에 바탕을 둔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독방이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음을 드러낸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방에 들어앉아 예수의 현존을 청하여 그분께서 너와 함께 독방에 머무시게 하여라. 너는 어떤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평화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적 현존은 수도승의 독방을 일종의 천국으로 변형시킨다. 까말돌리회 수련자들을 위한 규칙서에서 로무알도의 첫 번째 가르침은 '천국에서 앉아 있는 것처럼 독방에 앉아 있어라'하는 것이다. 

 

독방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현존 안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릎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앉아 있다. 앉아 있다는 것은 외적 자세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적 마음자세의 문제이다. 그것은 주님의 현존 안에 확고부동하게 머무르는 것이다. 독방은 인내로이 머무를 수 없는 형무소의 독방과 상당히 비슷한 것처럼 간주되었다. 만일 우리가 독방 안에 거주하고 머무르는 습관을 기른다면 결코 기분전환을 찾아 밖으로 나가려는 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 호기심에 빠지지 않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독방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준주성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방 안에 늘 머무른다면 독방을 사랑하게 될 것이요, 자주 드나들면 그것은 너에게 염증을 느끼게 할 것이다. 너는 입회할 때부터 독방의 훌륭한 거주자, 훌륭한 관리인이 되어라. 그러면 너는 후에 그것이 너의 소중한 친구임을,사랑스런 벗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독방 안에 항구히 머물 것을 강조하였다. 어떤 사람이 아르세니오 압빠에게 말하였다: "제 생각들이 '너는 단식도 일도 할 수 없다. 빨리 가서 병자를 방문하여라. 그것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저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악령의 꾀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원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가서 먹고 마시고 자고 일도 하지 말되 단지 너의 독방만은 떠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는 항구히 독방을 지키는 것이 수도승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서 너의 독방에 머무르라'는 수도승 전통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독방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독방에 머무르면서 인내를 갖고 항구히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압바 암몬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방 안에 사는 법을 배우지 않고도 그의 독방에 백년 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독방 안에서 산다는 것은 거기서 믿음으로 충만하여 항구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정어리는 통조림 속에서 백년 동안 보존될 수 있을지 모르나, 거기서 살지는 못한다. 독방 안에 항구함은 나를 완전한 삶에로 이끌어 주고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도록 독방에 시간을 할애하는 순종과 믿음을 가진 존재를 요구한다. 독방에 머물며 우리 존재를 하느님 안에 심화시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과 구원을 위해서도 유익한 것이다.

 

 

4. 독방의 위험

 

수도승의 독방은 남용될 수 있다. 독방의 남용으로 인해 16세기에 공동침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독방에 침대가 있을 경우, 침대에 누워 성독을 하거나 공부할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종종 오랜 낮잠을 자도록 유혹 받을 수도 있다. 또한 독방은 사교를 위해 모이는 하나의 사교의 장소가 될 위험도 있다. 독방은 간식을 위해 음식을 저장해 두는 개인 식품저장소로서 이용될 수도 있다. 가난은 수도승의 독방 안에서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타협될 수 있다. 독방이 과도하게 장식되고 지나치게 많은 가구들로 채워지고 기념품, 액자, 모빌 그 외 잡다한 물건들로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을 때 내적생활에 필요한 '단순성'은 상실되기 시작한다. 

 

어떤 수도승 전통에서는 독방이 지적이고 사도적 준비를 위한 작업장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작업을 위해 필요한 도구들은 많은 책들과 컴퓨터와 녹음기와 같은 비품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한 물건들이 개인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라면 분별과 이탈의 덕이 더욱 요청된다. 애덕은 또한 이웃 형제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소음이 나는 비품은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독방은 공동생활로부터 물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의무들로부터, 장상과 공동생활에서 부과되는 요구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하나의 도피처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는 독방 안에 꼭꼭 숨어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누구의 방해 없이 독방을 자신의 흥미거리들을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은신처로 바꿀 위험도 있다. 때때로 독방은 외로움과 따분함, 욕정적인 생각들과 한가한 공상으로 거주자를 유혹하는 악마적 세력들과 싸우는 곳이 된다. 

 

외로움은 육체적 고독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 있어 분명 하나의 위험이다. 그러나 사람은 외롭게 있지 않고도 고독하게 될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외로움을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 외로움은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모든 친구들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마음 내지는 감정이다. 외로움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외의 그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도 나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준다.

 

 

5. 결론

 

수도승이라는 우리의 소명 때문에 우리는 가족들을 부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집을 갖고 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안전하고 항구하게 거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곳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신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의 독방을 나설 필요가 없다. 

 

수도승의 독방은 하나의 자궁과도 같아 우리는 그 속에서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보다 더 성숙된 사람으로 변화된다. 아마도 독방은 우리가 몸이 아플 때 병실이 될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죽을 방이며, 부활한 생명으로 나타나게 될 하나의 무덤이 될 것이다. 독방에 항구함은 죽을 때까지 수도원 안에서 머무는 정주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수도승의 독방은 하나의 사막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오랜 시련과 정화의 과정을 거쳐 약속된 땅으로 들어갔듯이 수도승은 독방에서 기도와 내적투쟁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의 일치에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독방은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서의 작은 성막(기도소)이자 내적투쟁의 장소이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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