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승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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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8 ㅣ No.250

수도승과 세상

 

 

질문

 

세상 안에서의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의 이탈(물러남)'이 과연 열심한 수도승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 질문이 반드시 이 기준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어떻게 세상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의 상황과 화해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는 세상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인격의 발달은 근본적으로 그의 역사적 문맥을 통하여 조건 지워진다는 인식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우리 인격의 체험은 하나의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는 철학적 견해에 대한 점증하는 공통 인식이 있다.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세상'이며,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개인적, 인격적 발달을 통해 형성된 세상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세상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른 말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싶다.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즉 '당신의 중심이 어디인가? 당신의 중심이 세상 안에 있는가 아니면 세상을 넘어 있는가?' 우리는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세상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의 새로운 중심으로부터 세상 안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세상을 넘어 있는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전체적으로 세상과 관계하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역설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본인이 시도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즉 수도생활에 대한 보다 관상적인 또는 보다 활동적인 해석의 문제에는 세상에 대한 수도승의 기본적인 관계성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내 주장이 그 자체로 이 논쟁을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논쟁을 해결하는데 어떤 공헌을 하기를 바란다.

 

 

새로운 중심 - 세상 안에서의 영혼

 

순 철학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인간에 대한 플라톤주의자와 데카르트의 개념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의 인도를 따르면서 우리는 영.육 이원론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육 이원론에 대한 이러한 거부가 언제나 인격과 세상 이원론에 대한 거부와 동행해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 존재라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그의 사회적,역사적,우주적 문맥으로부터 이탈된 하나의 고립되고 독립적인 인격이라고 단언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두 종류의 이원론 모두 거부된다. 인간 인격은 영혼과 육체이고, 그는 세상 안에 있는 영혼이다. 그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하여 영혼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세상 안에 있는 영혼'으로서의 인간은 세상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그의 발달은 두 가지 방향에서 실패할 수 있다. 그는 순수 영적인 존재로 물러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은 천사주의의(Angelism) 오류이다. 반대로 그는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존재는 우리 인격적 생명의 근원이자 목표이다. '영혼'으로서의 인간 인격은 인식(knowledge)과 사랑을 통하여 무한한 존재와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결합은 우리 인간 생명의 궁극적인 중심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영적인 중심으로부터 세상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세상의 미래

 

그리스도교 계시는 이 인간의 상황에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 보다 나아간 전망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의 근본적인 변형에로 위탁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 생명의 중심은 이제 순전히 인간 존재의 무한한 근거로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형시키시는 성부로서 계시된다. 철학적인 전망에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영적인 중심으로부터 영혼과 세상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순전히 현상 세계에 대한 종속으로 영적인 것의 우선권을 거부하는가? 신학적인 전망에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변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변형에 저항하는가? 그 선택은 세상 안에 포함되거나 혹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릇된 딜레마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변형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문맥 안에서 세상에 대한 부정은 단지 그것의 결핍과 한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할 수 있다. 결핍과 한계에 대한 이러한 부정은 세상에 대한 하나의 거부가 아니라 하나의 긍정이다. 바울로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육'에서 '영'에로의 인간 조건의 변형, 결핍되고 한계지워진 조건으로부터 부활한 몸의 통합되고 제한 없는 생명에로의 변형이라 불려 질 수 있다.

 

 

수도승적 전망 - 종말론적 표징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방식은 종말론적이며 또한 육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동시에 이 세상의 변형에 참여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가 미래의 새 세상은 변형된 이 세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즉시 분명해 진다.

 

두 가지 삶의 방식간의 구별은 이 세상과 새 세상간에 그릇된 이원론의 기초 위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그 구별은 다음과 같이 제한된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즉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이 하나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조건을 뛰어 넘음으로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삶의 방식을 통하여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방식이다. 반대로 우리는 인간 조건 안에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삶의 방식을 통하여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이 '육화적' 방식이다.

 

이 대조는 수도승의 삶과 결혼한 사람의 삶 안에서 잘 보여질 수 있다. 수도승과 결혼한 사람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미래의 새로운 세상에로 이 세상을 변형시키는데 참여한다. 그러나 수도승의 삶은 가시적으로 인간 조건을 '뛰어 넘음'으로서 이 세상의 변형을 나타낸다. 결혼한 사람의 삶은 인간 조건 '안에서' 이 세상의 변형을 나타낸다. 수도승은 결혼한 사람보다는 세상에 덜 참여하지만, 또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참여하게 된다. 결혼한 사람과 수도승 모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중심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생활한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은 육화적인 전망 안에서 그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에 참여하게 되며, 수도승은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그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에 참여하게 된다.

 

수도승의 삶 안에서 이 종말론적인 전망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현재 인간 조건을 뛰어 넘음으로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이 수도승적 표징이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 즉 우리는 미래의 새 세상이 새로운 형태의 실존 안에서 인격들간의 통교일 것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 신비의 직접적인 현존 안에서 함께 생활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일치될 것이다. 수도승 공동체는 하느님 신비의 현존 안에서 함께 생활함으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된 인격들간의 이 통교에 참여한다. 결혼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와는 대조적으로 수도승 공동체의 주된 실존 이유는 기도의 삶 안에 주어진 신적 신비의 현존을 통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종말론적 공동체와는 달리 신적 신비의 현존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표징의 중개를 통하여 주어진다. 따라서 수도승 공동체는 새로운 세상을 나타내는 표징인 미래의 공동체에 일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 안에서의 수도승

 

미래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대한 일시적인 참여로서 본 수도승 공동체는 단지 하나의 과거의 유산으로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하나의 지침으로서 드러나야 한다. 미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금 여기라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부터 출현할 것이다. 우리는 현대문명과 이 운동을 동일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현대문명에 대한 하나의 저항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현대세계'의' 한 추세라기 보다도 오히려 현대세계 '안의' 한 추세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저항은 현대세계와 수도 공동체들 간의 교차점이 될 수 있다.

 

그 저항은 물질주의적이고 낙천주의적이며 외향적인 기술 문명의 위험들과 한계들에 대한 저항이다. 인류를 조종, 지배, 노예화, 파괴하는 힘을 지닌 이 기술 세계의 명백한 위험들에 반대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비폭력, 호의, 개방, 협력을 향한 반동이 있다. 위대한 서양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전체의식'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보다 직관적, 상징적, 관상적인 의식과의 접촉에 실패하였고, 그러한 종류의 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전(全) 우주와의 통교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립시켜 왔다. 기술 문명은 물질적인 우주에 대한 지배를 점차 강화시켰다. 그러나 지배는 통교와 동일화되지 않는다.

 

인류는 보다 합리적인 과학,기술 문명 이전의 원시적인 상태로 후퇴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보다 전체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 인격은 자신의 신원의식을 상실함이 없이 전체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인류는 그것의 합리적, 과학적, 기술적 업적에 굴복함이 없이 보다 상징적, 직관적인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보다 진전된 숙고들

 

나는 이 기본적인 수도승과 세상의 관계성이 수도생활에 대한 보다 '활동적인' 그리고 보다 '관상적인'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논쟁에 관계하는 모든 수도승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나의 폭넓은 다원주의는 이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일치를 통하여 조화될 수 있다. 우리가 보다 관상적인 형태의 수도생활을 택하건 아니면 보다 활동적인 형태의 수도생활을 택하건 간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관계성 안에서 수도승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관상가는 이러한 관계성이 활동으로부터 물러남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주어진다는 것과, 그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세상의 변형에 기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활동가는 이러한 변형이 수도원밖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들과 좀더 직접적으로 접촉함으로서 보다 가시적이고 유형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즉 우리의 삶은 내적 기도의 삶을 통하여 충분히 다져지지 못한 외적인 활동주의 안에서 낭비되며, 또한 내적 기도의 삶은 우리 주변에 가시적인 증거를 하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깊은 체험에 중심을 둔 수도생활이 우리의 제도적인 구조 안에서 그리고 주변 세계와의 접촉 안에서 반드시 보다 큰 개방과 자유와 양립할 수 없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단정짓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넘겨짚어 말해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발전을 향한 하나의 경향을 예견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열정적이며 동시에 적절한 것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수도생활을 제공하리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 체험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보다 회의적이다.

 

오늘날 그러한 수도생활의 문제는 현대의 적응과 쇄신(aggiornamento) 이상의 것을 그리고 그 기원에로의 복귀를 통한 쇄신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전 역사적인 문맥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현대 세계 안에서 수도승 생활의 역할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응과 쇄신은 하나의 새로운 빛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연결되지 않은 분리된 '실재들'로서가 아니라, 세상과 그리고 새 창조를 향한 역사의 전 운동과 관계하는 실재들로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Odo Brooke, O.S.B., Studies in monastic theology, CS 37:Kalamazoo, Michigan, 1980, 250-256 쪽 부분번역)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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