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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새로운 사태와 노동자들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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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573

[경향 돋보기 - “새로운 사태” 반포 120주년과 우리 사회의 노동자] “새로운 사태”와 노동자들의 존엄성

 

 

올해 5월 15일은 레오 13세 교황이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년)를 반포한 지 120년이 되는 날이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사회교리의 효시로, ‘사회적 가르침의 대헌장’ 또는 “불후의 회칙”(“백주년”, 1항)이라고 불린다.

 

이 회칙은 특별히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리는데, 회칙의 제목 아래 ‘노동자의 상황에 대하여(De conditione opificum)’라고 쓰여있을 뿐 아니라 특별히 노동자들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헌을 이해하는 핵심어인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중심으로 노동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과 노동자들의 상황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는 유럽사회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산업혁명은 인간과 동물의 힘을 기반으로 하던 농업과 가내수공업 사회에서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를 이용하여 대량생산을 하는 산업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아담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모든 사람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였고, 국가는 치안만 유지하는 야경국가로서 역할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이들은 노동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였고 “인간을 마치 이윤 추구를 위한 물건처럼 마구 다루었으며, 오직 노동기술이나 노동력으로만 평가”(“새로운 사태”, 14항; 이하 항 번호만 표기)하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생산체제는 경제적 윤택함을 가져왔으나 자유시장경제의 모순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았다.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에 14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요받았으면서도 기본적인 생계 유지가 불가능한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가정에서는 가장뿐 아니라 여성들과 어린이들도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지방에서는 공장에서 일을 시키려고 다섯 살 어린이가 매매되고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지각, 조퇴, 결근 등을 하는 경우 무거운 벌금이 부여되었다. 소액을 훔친 자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고,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하는 채무자는 감옥에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음식을 주지 않아 굶어 죽기도 했다.

 

자유자본주의와 야경국가의 병폐 때문에 발생한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지켜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을 억압하는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함께 일하고 필요한 만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모든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계급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2항 참조).

 

이러한 주장은 가난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공산주의 사상이 유럽사회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면서 유럽사회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노동에 관한 가르침

 

레오 13세 교황은 “새로운 사태”를 통해, 노동자들의 참혹한 상황을 시정하지 못하는 자유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야경국가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오도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존엄성 보호를 위한 가르침을 펼쳤다.

 

교황은 이 문헌에서, 자유자본주의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를 인정하고 국가의 역할을 치안과 국방에만 한정함으로써 비참한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방치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철폐와 계급투쟁의 주장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더불어 교황은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국가가 노동과 경제영역에 개입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노동의 의미와 가치 ·· 왜 인간은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계약을 맺고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던 19세기 말 노동자들에게 노동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괴로운 일이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 노동은 그저 헐값에 구입할 수 있는 싸구려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13세 교황은 노동의 목적과 가치를 밝힌다.

 

인간이 노동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획득하여 삶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32항 참조). 곧, 노동은 근원적으로 생계수단이며, 동시에 자신의 인격적 흔적을 자연에 새기는 고귀한 인간행동으로 인격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격적 특성을 지닌 노동의 결실은 노동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노동은 개인적 소유(사유재산)의 기원이며, 노동의 근본 동기는 사유재산의 획득이다(3항 참조).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피조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인간 본성에 알맞고 하느님의 명령에 일치하는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결국 노동의 의무는 자연적인 것이지 원죄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범죄를 저지른 이후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죄를 속죄하려고 마땅히 힘겹고 지겨운 처지에서 노동을 해야만 했다”(13항). 결국 노동의 소명은 원죄에 앞서는 것이며, 노동에 따르는 고통은 속죄의 수단인 것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노동이 부과하는 희생과 고통을 참회의 정신으로 인내하라고 가르쳤고, 노동의 고통이 인간 성화의 기회임을 인정하였다. “이성과 신앙에 비추어볼 때, 노동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수고로써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품위를 드높여준다”(14항). 비록 노동이 고통스러울 지라도 결코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노동은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지만 원죄 때문에 고통이 수반되며, 이 고통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삶에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13항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셨고”(2코린 8,9),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생애의 대부분을 노동을 하면서 보내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범적 삶으로써 노동이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쌓아가는 기회임을 보여주셨고, 노동의 가치를 고양하셨다(17항 참조). 다른 한편, 노동자들, 기업가들과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해결하고자 공동선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노동자의 임금 ·· “새로운 사태”가 반포될 당시, 노동자들은 고용주와 노동계약을 통하여 임금을 결정하였고, 고용주가 합의된 임금을 지불하면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이는 노동계약이 실은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일자리보다 노동자가 많은 상황에서 노동자는 약자의 위치에서 생계비에 못 미치는 임금으로 노동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오 13세는 임금을 결정할 때에 기본 정의가 지켜져야 함을 강조하였다(32항 참조). 노동계약에서 쌍방의 자유의사에 앞서 기본 정의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유지”(33항),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유지”(32항)가 가능하고, “임금의 일부를 남겨 어느 정도의 재산을 장만”(33항)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정의가 반영된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임금은 노동자들에게 궁핍을 강요하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이러한 임금을 받아들이는 것은 “폭력을 당하는 것”(32항)이 된다. 그러므로 자본가들과 고용주들은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정당한 임금은 노동자들에게 검약한 생활을 통해 재산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줄 뿐 아니라,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미래를 보장해 주며, 빈부격차로 말미암은 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33항 참조).

 

노동과 휴식 ·· 산업혁명이 한창 무르익고 있던 당시에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레오 13세는 “자본가와 고용주가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고용인들을 노예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14항), 노동자들의 인격적 존엄성을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노동자들이 품위를 지닌 인격자로서 삶을 유지하려면 먼저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 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정의의 측면에서 과중한 노동은 정신을 무디게 하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하기에 노동 후에 휴식은 당연한 것이다(31항 참조). 둘째, 인간성의 측면에서 인간 활동에 한계가 존재하기에 인간 활동의 촉진을 위해 적절한 휴식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과중한 노동은 정의와 인간성을 침해하는 것이다(31항 참조). 셋째, 종교적 · 영적 측면에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주일과 축일에 휴식을 해야 한다(30항 참조).

 

노동조합 ·· 자본가에 비하여 열악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까? 레오 13세는 그 해답을 노동조합에서 찾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노동조합을 형성할 수 있는 단체결성권은 자연권으로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고 국가도 이를 보호하여야 한다(35항과 39항 참조).

 

노동조합은 “조합원 각자가 가능한 한 최상의 신체적 · 경제적 · 도덕적 조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39항)으로 적절한 조직을 갖추어야 하며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준수하여야 한다.

 

또 조합의 운영은 종교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구원을 향해야 한다는 신앙과, 당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이상주의자, 혁명가, 노동조합주의자 등의 선동에 의한 반그리스도교적 단체들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신앙을 버리는 현상을 막고자 한 교황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공정하고 유익한 일자리”(38항)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기금을 조성하여 노동자, 과부, 고아 등이 실직이나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을 도와주는 상부상조의 사회단체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40항). 교황은 노동자와 고용주가 함께하는 연합체를 노동조합의 이상으로 보고 있다(34항 참조).

 

그러나 교황은 파업을 폭동과 같이 사회질서를 극도로 교란하고 공익을 해치는 행위로 보았다. 각종 불의한 사태와 파업을 막으려고 적절한 법을 통하여 노사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교황은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회주의와 혁명가들에 의해 주도되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파업에 대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의무 ·· 국가의 목적은 공동선을 보호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국가는 노동을 통해서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도록 돌보아야 하며, 이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국가가 노동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의무는 정의와 관련된 의무이다(24항 참조). 이런 의무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몫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는 빈곤한 대중에 속하는 노동자를 보살펴야 하는데, 이는 빈곤한 대중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재산이 없기에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국가가 가난한 노동자를 위해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레오 13세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당시의 상황에서 현실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노동에 관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를 살펴보았다. 교황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빚어진 노동자들의 참혹한 상황과 사회적 무질서를 해결하는 데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제시하면서 교회가 가져야 할 사회교리의 길을 열었다.

 

시장과 사회가 급격히 개방되는 글로벌 시대에 레오 13세 교황의 가르침이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노동자의 존엄성, 노동의 의미, 임금의 결정, 노동조합 활동 등에서는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사태”를 새롭게 읽으면서 레오 13세 교황의 가르침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그 실천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 김명현 디모테오 -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다문화연구소장.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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